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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9
12월29일[성탄 팔일 축제 제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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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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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_qAYBjhTO8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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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뵐수 있을까요?>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던 노인 시메온 예언자에게 드러내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신 시메온에게 그가 죽기 전에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의 정결례를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시메온 예언자와 딱 마주치게 됩니다.
시메온은 직감적으로 그 아기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황송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 29-32)
우리도 성체를 배령할 때마다 우리 각자의 두 손바닥 위에 놓인 그분을 보며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너무나 은혜롭고 영광스럽게도 당신께서 오늘도 제 두 손 위에 탄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군요. 이제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으니, 더는 여한이 없습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노인 신앙인들의 모델입니다. 수시로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노화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반드시 죽기 전에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설레는 가슴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도록 개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로 받아 안는 과분한 축복을 만끽했습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얼굴을 뚜렷이 바라볼 수 있는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지복직관의 은총은 시메온 예언자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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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5ufSmqB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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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원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내용의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에 의해 봉헌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예수님은 굳이 봉헌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어차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됩니다.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신데도 또 하느님께 봉헌되셔야 할까요? 그것도 인간의 손에 의해서.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집은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냥 하면 되지 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혼자서 사랑할 능력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책 『기브앤테이크』에서 내어줄 줄 아는 사람, 남의 행복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그는 ‘기버(Giver)’라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만 알고 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테이커’(Taker)라고 하는데, 이들은 세상에서 대부분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중간에 있는 사람이 받는 만큼 주겠다는 사람인데 ‘매처(Macher)’입니다. 이들은 월급으로 받는 만큼 일해주기 때문에 중산층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가장 성공하는 사람도 기버이지만 가장 망하는 사람도 기버라는 것입니다. 기버는 마음이 착해서 남이 보증을 서달라면 이유 불문 서주고, 남이 승진하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남에게 이용당하고 돈도 못 법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기버는 성공하고 어떤 기버는 실패하느냐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애덤 그랜트 자신이 대학 초년생 때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아르바이트는 ‘레츠고’라는 여행 책자를 만드는 회사에 광고 판촉이었습니다. 관리자는 근무 첫날 고객 명단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츠고 관광 가이드 광고비로 작년에만 30만 달러를 낸 사람들이야. 전화를 걸어서 다시 광고를 싣도록 설득해봐.”
겨우 열여덟 먹은 대학생이 회사 중역들에게 내년에도 광고를 실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행사 경영자 스티븐이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작년에 그 여행사 광고에 나갔던 여행사 주소와 이메일이 이미 쓰지 않는 오래되고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메일과 주소를 유지하기 위해 지급된 수백 달러를 빼주지 않으면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광고는 그 위치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던 그랜트는 10% 광고비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다 보니 세 번 더 깎아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다시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작년 재광고율은 95%였는데, 그랜트는 거의 회사에서 잘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광고부 부팀장을 만납니다. 그녀는 작년 그랜트의 자리에서 일하며 30만 달러라는 수익을 올린 사람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 새로 생긴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하며 학비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랜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역량에 따라 자리가 더 만들어지고 줄어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광고주들에게 밀리면 자신만 잘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입지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깎아달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이야기하고, 또 그 광고로 많은 학생이 등록금을 내게 된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4달 뒤, 그랜트는 6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23만 달러의 새로운 광고도 따냈습니다. 그 회사가 생긴 이래 최고의 실적입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광고부서의 영업 총책임자가 되었고 100만 달러 수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처음 그랜트가 일이 안 될 때는 사실 상대의 이익을 생각해 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를 상대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면서도 상대에게 잘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생각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도 합니다.
“나 너 많이 사랑해!”라는 말과,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거야!”라는 말과 어느 말이 듣기 좋습니까? 자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듣기 좋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라니까 억지로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뭔가 기분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고,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봉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파견받지 않고 자신 힘으로 하려고 하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그랜트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채우려는 사람이 됩니다. 호구 기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파견되어야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 봉헌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시키셔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뜻에 봉헌되어 사랑하셨다면 우리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봉헌되었을 때 참으로 이 세상에서도 성공한 기버, 사랑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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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에 보면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를 죽게 한 것, 그의 아내 바세바를 취한 것은 왕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도록 한 것은 왕이었을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왕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왕이기에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왕이기에 앞장서서 싸워야 합니다. 백성들이 이방의 신을 섬기면 왕이기에 이방의 신을 쫓아내고 참되신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신하들이 있다면 왕이기에 공정과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왕은 왕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 왕입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왕은 설령 잘못을 했을지라도 곧 뉘우치고 참회하는 왕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왕은 왕으로서의 본분과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왕입니다. 이런 왕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고, 백성들은 따르기 마련입니다.
국민들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친분과 인맥을 통해 요직에 앉도록 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야당의 대표를 무리하게 수사하도록 하고, 이미 지나간 사건을 다시 소환하여 재판에 넘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찾아내기 위해서 무리하게 압수수색을 남발하고, 자신의 허물은 모두가 아는 것임에도 애써 감추는 것입니다. 이념의 잣대로 편을 갈라서 외교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국제무대에서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 분단된 나라에서 조국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정책을 펴기보다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성 발언으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50%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자신을 지지했던 50%만 챙기고 반대했던 49%의 국민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서민의 안정과 민생의 안정을 위하지 않고, 재벌과 기득권의 권리만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대통령이 있다면 그 대통령은 국민에게 외면을 받을 것입니다. 국민은 바다와 같아서 대통령이라는 배가 순항할 수 있도록 하지만 때로 험한 파도가 되어서 대통령이라는 배일지라도 침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는 행복한 나라입니다.
사제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런 일들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들이 말하는 것은 따르고 지키되 저들의 행동은 본받지 마라.” 저들의 행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위선과 허영 그리고 교만과 욕망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썩어들어가지만, 겉만 화려한 삶입니다. 단식한다고 표는 내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삶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삶입니다. 자기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삶입니다.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사랑이 없고,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의가 없는 삶입니다. 사제이기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사제 생활 32년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사제일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았는지! 나는 사제이기에 꼭 해야 할 일은 외면하지 않았는지!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꼭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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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35: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은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가난하여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물은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이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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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메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약속을 믿으며, 그때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게 된 시메온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그 귀중한 존재를 자신의 두 팔에 받아 안고, 눈을 마주치며, 성령께서 약속하신 위로와 구원의 때가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시메온은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오신 분의 모습을 자기 눈에 직접 담을 수 있었던,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직접 뵐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약한 믿음이 더욱 굳건하여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 모두가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음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 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반드시 신앙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비록 육의 눈이 그분을 보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분을 알게 되고 또 믿게 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중요한 것은 결국 ‘신앙의 눈’이 아닐까요?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성경 말씀으로 남아, 우리가 영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이 말씀은 당대의 목격 증인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았음을 세상에 전하는 신앙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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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와 루카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베들레헴 마을 밖 어떤 외양간에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신 뒤에 어떤 집으로 옮겨 가셨는데(마태 2,11), 그 집에서 동방박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길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러서 예수님을 봉헌하는 예식과 성모님의 정결례를 거행했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지내시다가 헤로데가 죽은 뒤에 나자렛으로 가서 사셨습니다.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율법은 탈출기 13장에 있고, 산모의 정결례에 관한 율법은 레위기 12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니까 봉헌하지 않아도 되고, 또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니까 정결례를 거행하지 않아도 되는데, 두 가지를 다 거행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ㄴ-35)
복음서 저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고,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고”,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라고 성령께서 알려 주셨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기록했습니다.(루카 2,25-27)
이 말들은 모두, 시메온은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예언자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증언하고 선포하기 위해서 선택된 예언자입니다.
루카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성전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진 공적인 증언이고 선포입니다.(루카 2,38) <성가정이 헤로데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면, 시메온의 예언과 축복은, 하느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믿음과 함께, 성가정에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적인 증언이고 선포라고 해도, 그 증언과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즉 사람들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시메온의 예언을 흘려들었거나 의례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안 믿고, 안 듣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말은, “저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즉 “저는 구세주를 만났습니다.”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를 보다.’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인데(루카 2,27), 아마도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요한 1,33)
시메온과 세례자 요한은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합니다.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라는 말은,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메시아는 그 뜻에 따라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라는 말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시메온이 한 말 가운데에서 앞의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고, 뒤의 말은 예언인데, 이 예언을 예수님과 성모님이 겪게 될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면 고난을 예언하는 말이고, 그 고난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예언이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라는 말은, 성모님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예언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라는 말은,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는 뜻인데, 구원받을 이들과 받지 못할 자들이 가려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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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과 약혼한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그가 낳을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하시며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31-33 참조)
즈카르야도 자신의 찬미가에서 세 번씩이나 하느님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실 일을 노래합니다.루카 1,69.71.77 참조)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선포한 기쁜 소식의 핵심도 구원자’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루카 2,11 참조)
루카는 이어서 시메온을 등장시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로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나아가 그는 이 구원자께서 온 인류에게 베푸실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민족들에게도 마련되었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시메온에게 아기가 구원자로서 장차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이로써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도 통찰하게 하십니다. 분명 시메온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선포합니다. 구원받을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그곳에서 주어질 고통에도 동참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구원자 그리스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으신 분은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맏아들을 봉헌하시기에 앞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응답을 다시 떠올립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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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요한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이 하느님의 계명, 특히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행실이 하나가 됩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살고 있고, 모든 민족들을 밝혀 주는 빛,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빛 속을 걷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며, 주님께 새로운 노래, 곧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든 맏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탈출기 13,2 참조)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습니다. 산모의 정결례 때에는 율법(레위기 12,8 참조)에 따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제물은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맏아들을 직접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아니지만 거룩하게 불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소유가 됨을 뜻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복된 시메온은 부모와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셨음을 알려 주는 더욱 예리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요한은 곧바로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고 합니다. 시메온은 한편으로 아기 예수님을 구원자로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영광스러운 수난을 예언합니다.
바오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확인해 줍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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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 2장은 예수님의 탄생(1-20절)에 이어서 새로 태어난 아기의 할례와 작명(21절), 등장(22-40절)을 보도합니다. 이러한 이야기 순서는 1장에서 소개된 세례자 요한의 탄생, 할례와 작명, 등장(57-80절)과 평행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의 등장을 전하며, 성전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부모를 맞이하는 시메온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시메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 찬미가는 2장 8-20절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해석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아기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목적을 수행할 것이라는 예고(11-12절 참조)를 분명히 합니다.
시메온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보았고, 그 구원은 그의 예고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 유효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시메온의 시선은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께 향합니다. 그는 마리아께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시메온은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반대자의 표적이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메온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이 이스라엘 안에서 갈등을 불러오고 반대자들은 그분을 거부하며 위기로 몰아가리라고 미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은 앞선 찬송과 함께 앞으로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독자를 기다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시메온의 눈으로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가 예고한 예수님의 여정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길 위에서 예수님의 뒤를 따를지, 아니면 예수님의 반대편에서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질지, 그 선택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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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2,32)
오늘 복음에서 루카는 마리아의 정결례(레12,1~8 참조)와 예수의 봉헌예식(탈13,1-16; 민수 18,15-16참조)을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22-24절 참조) 율법 규정에 따라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奉獻합니다. 봉헌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모든 것(= 몸, 능력. 소유물에 이르기까지)이 다 기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봉헌이란 그러기에 내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인물들, 곧 아브라함(=이사악의 봉헌/창세기 22장)을 필두로 늘 하느님께 온전히 자녀들을 봉헌한 예언자들(=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이 많았고, 오늘 우리는 예수의 부모이신 마리아와 요셉의 참된 봉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봉헌은,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성전 봉헌은 훗날 당신 자신이 스스로 십자가에 봉헌을 통해서 온전히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예수의 부모는 이를 앞당겨 실행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참된 봉헌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부모이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께서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러 오셨기에,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위로의 때를 기다리던 시메온은 그 희망의 빛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메온은 감격에 넘쳐,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29~30)라고 그 기다림의 결실을 보고, 이제 자기 삶의 끝이 다가왔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평안히 눈을 감을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날이 오기를 시메온은 얼마나 기다렸고, 그 긴 기다림 시간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힘듦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의 마음에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이날을 기다리면서, 마음으로 다짐하고 속삭였을 말 한마디가 어쩌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는 이 문장은 잘 아시는 것처럼 다윗 임금이 세공사를 시켜 자기의 반지에 새기고 다닌 글귀라고 합니다. 큰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기쁨에 도취하여 자만하지 않도록, 반대로 큰 절망에 빠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낙담하여 좌절하지 않도록 다윗 임금은 이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물론 다윗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온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에게 성령께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기에” (2,26) 그는 질곡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기다리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그날은 꼭 올 것이다.’라는 기다림으로 살아왔기에 오늘 이처럼 축복받은 날, 거룩한 순간을 맞게 되었다고 봅니다. 시메온이 살아 온 세월과 날 수만큼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겠습니까? 시메온은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간 시간과 세월을 신앙으로 기다리며 살아왔기에 후회와 한탄의 신음이 아닌 오히려 사랑이며 생명이신 분, 구원의 주님을 품에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2,29)라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라고 굳게 믿고 주님의 섭리에 내맡겼던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도 시메온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 동안, 기쁘다고 기쁨에 매이지도 말고 슬프다고 슬픔에 잠겨 있지 않고, 다만 마음속으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라고 말하며 꿋꿋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리라 봅니다. 저는 혼자 중얼거리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김범수’의 「지나간다.」는 노래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틈나면 한번 들어 보길 바라면서, 그 가사를 적어 봅니다. 『감기가 언젠간 낫듯이 열이 나면 언젠간 식듯이 감기처럼 춥고 열이 나는 내가 언젠간 날거라 믿는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듯 장맛비도 항상 끝이 있듯 내 가슴에 부는 추운 비바람도 언젠간 끝날 걸 믿는다. 얼마나 아프고 아파야 끝이 날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울어야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이렇게 갑자기 끝났듯이 영원할 것 같은 이 짙은 어둠도 언젠간 그렇게 끝난다. 얼마나 아프고 아파야 끝이 날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울어야 내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그 믿음이 없인 버틸수 없어 그 희망이 없었으면 난 벌써 쓰러졌을 거야 무너졌을꺼야 그 희망 하나로 난 버틴거야 지나간다 이 고통은 분명히 끝이 난다 내 자신을 달래며 하루하루 버티며 꿈꾼다 이 이별의 끝을 이 이별의 끝을.』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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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신부들과 산책을 함께하다가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산책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신부가 “뱀”이라며 급박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함께 걷던 신부 모두는 움찔했고, 그중에 동작 빠른 신부는 다급하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뱀’이라고 말했을 때, 실제로 땅에서 뱀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신부의 장난이었습니다. 도망친 신부는 뱀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노끈을 보고서 놀라서 도망친 것이었지요. 노끈이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신부의 말에 ‘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깜짝 놀라고 공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과 행동으로 자기 생각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즉, 직접 보고 판단하면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말로 바꿀 수가 있을까요? 바꿀 수 없습니다. 스스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바꿔야지만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직접 활동하셔서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나 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 역시 주님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생명 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도 아닙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위대한 사람인 우리는 우리의 생각 변화로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십니다. 이 자리에 시메온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복음은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쎄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라고 전해줍니다.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하는 다른 유다인과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평생을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기다렸던 그는 드디어 주님의 그리스도를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그 뜻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라는 안일한 마음을 버려야 하며, 또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다리는 삶. 성령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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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리는 사람>
루카 2,22-35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다.”(루카 2,25)
빛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고
늘 빛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은
미움을 떨쳐내고
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쁨을
기다리는 사람은
슬픔을 가로질러
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재물과 권력 너머
늘 사람 품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우상들에 속지 않고
늘 하느님 모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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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앙인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3,1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빛을 기다리고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 그리고 그 빛을 누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시메온에겐 구원이 전부였고,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삶의 여러 가치 중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제일 먼저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삶은 게으를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위해 제 삶을 다듬고 고치고 정리하는 데 열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함께유)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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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축복>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수십 년간 휴가 없이 지낸 수도생활이지만 어제는 용단을 내려 하루 휴가를 내어 영화 두 편을 보고 왔습니다. 얼마 전 원장수사로부터 식사시간의 조언이 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순례하는 마음으로 왕복 2시간 거리 우직하게 걸어서 다녀왔습니다.
“한 번 영화 보고 오시죠. 햄버거도 잡수시면서 ‘노량’과 ‘서울의 봄’을 보세요.”
“고마운 조언대로 공부하는 마음, 애국하는 마음으로 하루 휴가 내어 먼젓번 얘기 나눈 영화 두 편 보고 옵니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입니다.”
제가 감동한 것은 영화에서 감지되는 감독이나 영화배우들의 치열한 삶입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이뤄진 작품임을 깨닫습니다. 무거운 감동을 안고 1시간 거리를 걸어서 귀원할 때는 평생 숙제를 가슴에 가득 담고 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에는 주목되지 않던 관심이 요즘은 온통 사람에 집중됨을 느낍니다. 그래서 즐겨 읽는 책도 평전이나 자서전입니다. 정말 있어야 할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그 책임의 본분에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얼마나 고귀하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운지요.
이런 성서나 고전 같은 분들을 만나면 살아있는 책 한권을 대하는 듯 마음 상쾌합니다. 한마디로 “답게”의 삶입니다. 사람답게, 신자답게, 아버지답게, 어머니답게, 선생님답게, 제자답게, 군인답게, 검사답게, 정치인답게, 수도자답게, 사제답게 등 끝이없습니다. 예전 교대학장은 '답게'의 삶을 표방해 호도 '다운'이라 정했다 했습니다. 참으로 각자 제자리에서 제 역할의 ‘–답게’의 삶을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노량’ 영화에서의 성웅(聖雄)이라 일컫는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군인다운 삶의 모범이요, 성군(聖君)이라 일컫는 남달리 백성을 사랑하며 훈민정음등 무수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은 왕다운 삶이 모범이겠습니다. 그래서 두분의 동상은 늘 광화문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신학교 시절 교수신부님의 수차례 인용했던 강의중 한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람답게’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자녀답게’, 즉 ‘하느님의 자녀답게’하면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평범한 듯 하지만 비범한 삶이요 우리가 평생 지향해야할 삶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정주의 삶 역시 수도자다운 삶을 목표로 합니다. 수도자다운 삶 역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25년 전 1998년도 생활성서 10월호에 소개됐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반봉쇄, 반관상의 정주서원 생활은 자칫하면 안주하고 녹슬기 쉬운 삶이에요. 안으로는 강처럼, 내적쇄신을 거듭하고, 밖으로는 산처럼 한결같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수철 원장수사는 안으로는 강이 되고 밖으로는 산이 되어야 한다는 말마디에 유난히 힘을 준다. 그는 언젠가 ‘정주’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지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참 좋다. 하느님 안에 항구하게 머물러 살면 그렇게 좋은 것을, 왜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리저리 헤매는 걸까.”
말 그대로 정주의 축복입니다. 제가 썼던 무수한 시들도 정주의 산물이자 정주의 축복입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는 시도 생각납니다. 지금도 읽다 보면 저절로 잔잔히 미소짓게 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하늘 흰구름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이런 정주의 축복을 사는 이가 바로 오늘 복음의 시메온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요한1서 다음 말씀은 그대로 루카복음의 시메온에 대한 주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옛 계명이면서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이전에 이처럼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처럼 살다가 마침내 때가 되자 어둠은 사라지고 참 빛이신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주님의 참 빛 속에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시메온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입니다. 정주 축복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날마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 들기 전 끝기도 때 마지막으로 시메온과 함께 바치는 찬미가요 언젠가 맞이할 선종을 위해서도 이보다 좋은 찬미가는 없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이어지는 “전능하신 하느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름다운 강복이 언젠가 있을 우리의 선종의 죽음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정주 축복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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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둠이 있다면>
요한의 서간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둠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둠과 어둠의 종류에 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어둠 할 때 퍼뜩 떠오르는 것은 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과 암울함을 말함입니다.
두 번째 어둠은 죄의 어둠입니다. 이 어둠이 어제와 오늘 요한의 서간이 얘기하는 어둠인데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제일 처음 한 짓이 숨고 감추는 거였듯 죄짓게 되면 스스로 어둠 속에 숨기에 어두워지는 어둠입니다.
세 번째 어둠은 미움의 어둠입니다. 미움의 어둠은 일명 지옥의 어둠입니다. 미워하면 우리의 마음은 지옥이 되지요.
오늘 요한의 서간은 이 어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둠의 종류가 이렇게 다르지만, 셋 다 빛이신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빛이신 하느님께서 안 계시기에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고, 죄가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고 빛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숨다가 어두워지는 것이며, 우리 마음 안에 미움만 있고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에 어두워지는 겁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불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하느님의 사랑에서도 우리를 따듯하게 하는 열정과 우리 앞을 비추는 빛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어서 열정이 식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힘이 없고, 비전(Vision)이 사라져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영어의 Vision이라는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Vision은 라틴말 본다는 말 Video 동사에서 나온 것이며, 이 말에는 본다는 뜻이 있고 특히 앞을 내다본다는 뜻이 들어 있지요.
사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 뭔가 할 열망과 의욕도 있고 미래비전도 있는데 온돌이 냉골이 되듯 하느님의 사랑이 없어서 우리의 사랑이 식어버리면 우리는 미워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구들을 데우는 불과 같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을 데우지 않으면 우리 사랑은 온돌에서 냉골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이 없어서 우리 사랑이 온돌에서 냉골로 바뀌지 않았는지 그래서 미워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할 수도 없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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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2,29)
<성탄과 시메온의 노래!>
오늘 복음(루카2,22-35)은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시는 말씀'과 '이 모습을 보고 기뻐 찬미하는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마감하고 '거룩한 죽음(잠자기)을 앞두고 바치는 기도'인 '성무일도 끝기도' 때 이 노래를 바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 위에 성령께서 머물러 계셨고, 그 성령께서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성전 안으로 들어간 시메온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성전에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뵙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시고 일어나게도 하시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고... 그리하여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주님의 성탄 앞에서 '이제는 죽어도 좋다.'라고 노래하는 시메온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죽기 전에 바친 기도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세요."(성 프란치스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어느 재속회 회원)
나에게도 죽음은 다가옵니다.
이 죽음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원유성 베드로 형제(수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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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pxzW-En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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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루카 2, 23)
봉헌의 시간은 바로
지금 이순간입니다.
내려놓아야
서로를 살릴 수
있습니다.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
봉헌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내려놓음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삶또한
봉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봉헌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을
향한 진실된
찬미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봉헌으로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봉헌은 예수님을
낳았지만 예수님을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어둠과 약함에
빠지지 않게하는
봉헌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돕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봉헌입니다.
봉헌이라는
성탄을 함께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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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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