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어 상식] 개념(Concept)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의 이 유명한 문구는 원래 당시 인식론 철학의 주요한 두가지 조류였던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륙을 무대로 전개된 합리론은 인식주체를 강조했고, 영국에서 발달한 경험론은 인식 대상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합리론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주로 정신 활동의 결과라고 본 반면에 경험론은 사물에서 전해진 감각 자료에 대한 경험이 곧 인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칸트는 합리론적 전통을 내용 없는 사유라고 일축하고, 경험론적 전통을 개념 없는 직관이라고 비판했다.
흔히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속된 말로 ‘개념이 없는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실제로 칸트가 말하는 철학적 의미의 개념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 경험론자들은 인간이 사물을인식하는 과정에서 인식주체(이성)가 관여하는 측면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주체는 인식 대상에만 주목하며 '경험 = 인식'을 등치시킨다. 칸트가 보기에 그것은 개념 없는 사유에 불과하다. 인간 이성은 수동적으로 감각 자료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인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주어진 경험적 감각 자료를 정신의 한 기능인 오성이 개념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감각).
이처럼 철학에서 말하는 개념은 인식 과정에 개입하는 관념의의미와 연관된다. 하지만 다른 학문들에서는 개념이 이론을 전개하는 주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이론은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엮은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물리학은 힘, 운동, 미립자 등의 개념들을 사용하는 이론 체계이고, 경제학은 생산, 이윤, 금리 등의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론 체계다.
일반적으로 말해 개념들을 올바로 구사하면 정확한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론에 따라 같은 개념이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사회학에서는 중간계급(middle-class)이라는 개념을 사회 안정에 필수적인 계급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에서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어느 한 측에 귀속되어 사라질 계급으로 본다. 국가라는 개념도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기구로 보는 긍정적인 입장이 있는가 하면, 지배 집단의 의도를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는 부정적인 입장도 있다.
이렇게 같은 개념을 두고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학자들이 함께 세미나를 한다면 생산적인 토론은커녕 기본적인 의사소통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토론에 임하거나 논문을 쓸 때 먼저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들을 명확히 규정하기도 한다. 어떤 개념을 기존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할 경우에는 미리 그 개념정의를 새로 내릴 수도 있다.
사용하는 개념들의 의미가 다른 탓에 쓸데없는 오해와 분란이 빚어지는 경우는 학술회의만이 아니라 TV로 방영되는 정책 토론회 같은 데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정치에 관한 논쟁을 할 때 한 측이 상대방의 개념에 관해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일부러 그 의미를 왜곡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한 정당이 부패의 소지가 있는 특정한 공공 기관에 대해 감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반대 정당은 ‘감독하고 관리한다’는 감리라는 개념의 본래 의미를 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간섭과 규제’로 곡해하면서 맞서는 경우다.
이쯤 되면 ‘개념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규정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사실 많은 개념을 올바로 정의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완전히 객관적인 개념이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개념을 객관적으로 사용하려 하고, 또 자신은 그렇게 한다고 확신한다 해도 개념의 정의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선입견이 개재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개념의 의미를 알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개념이 사용된 맥락 혹은, 이론 체계를 고려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