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구 지하철 참사를 일으킨 방화살인 범죄자이다.
2. 생애
1947년에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태어났다. 범행 이전에는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거주했다. 운송업과 같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였으나[3] 1999년부터 우울증이 발병하여 정신과 진료를 받은 이후로 2001년 4월에는 뇌졸중까지 얻는 바람에 몸 오른쪽의 대부분이 마비되고[4] 실어증 또한 얻어 같은 해 11월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은 뒤 별다른 직업 없이 백수로 지내왔다. 이 때 김대한의 가족에 따르면 병원에서 받은 중풍 치료가 잘못되어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다고 알고 있던 것이었는지 “병원에 불을 지르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2002년 중순부터는 정신질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고, 방화 사건을 일으키기 열흘 전에도 자신이 치료받던 정신병원에 찾아와 "죽여달라" 며 난동을 부려 병원 관계자들이 제지하는 일도 있었다. 병원에서는 김대한이 자신을 의료사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김대한이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적극적인 고발 조치나 손해배상 청구등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2003년 2월 18일, 김대한은 자신의 집 인근 주유소에서 구입한 휘발유를 플라스틱 샴푸통에 담은 뒤 샴푸통과 라이터를 들고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송현역에서 안심 방면으로 운행하는 1079호 전동차에 탑승한다. 1호차 경로석에 앉아있던 김대한은 열차가 중앙로역에 정차하는 순간 플라스틱 통에 담긴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렀다. 불은 김대한의 왼쪽 다리에 옮겨붙었고, 자신의 몸에 불이 붙자 당황한 김대한은 그대로 열차 밖으로 탈출했다.[5] 이는 대구 지하철 참사의 시작이 되었다.
김 씨가 불을 지른 1079호 전동차는 문이 열려있어서 많은 승객들이 탈출했지만, 마침 반대편에 정차한 1080호는 화재 사실을 모른 채 이미 전기까지 나가버린 중앙로역에 그대로 정차했고, 대피 명령이 지연되는 바람에 많은 승객들이 탈출하지 못해 인명피해가 커졌다. 결국 화재는 1079호, 1080호 2개의 전동차와 역사를 완전히 전소시킨 뒤 진화됐으며 198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당했다. 김대한은 사건 직후 역사 밖으로 탈출해 일반 승객들처럼 행동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승객의 신고로 체포됐다. 범행 동기는 뇌졸중 치료를 받았음에도 전혀 회복되지 않아 자살을 생각했는데, 혼자 죽는 게 너무나도 억울해서 사람 많은 대중교통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한 것이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화상을 입게 되자 겁을 먹고 도망가면서 자살에 실패했고,[6] 무고한 다른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후 기소된 김대한은 1심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나, 무기징역이 선고된다.[7][8] 진주교도소에 무기수로 수감되었다.[9] 이듬 해인 2004년 8월 31일 오전 8시 45분 뇌졸중으로 인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진주의료원[10]으로 이송되던 도중 사망했다.
3. 고인드립 및 루머
몇몇[11] 이들은 김대한의 방화로 사망한 수많은 이들을 '요리'했다며 그를 '방화살인범'이 아닌 요리사인 '셰프'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을 비하하는 드립으로, 주로 대구광역시 지역이나 경상북도 지역을 공격할 때, 좀 더 넓은 의미로 확장하면 경상도 자체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매우 악의적인 지역드립이자 고인드립이다.[12]
래퍼 창모도 대구 지하철 참사를 자신의 랩에 사용해 비하 물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당시 대구 중앙로역 근처에 통구이집을 운영하던 '김대한' 씨가 동명이인이 저지른 방화 사건 때문에 식당을 접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당시 중앙로역 근처에는 통구이 집이 없었으며, 주변 식당 주인 중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또한 방화범 김대한이 실제로 요리사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퍼진 적도 있지만 과거 인터넷 기사를 뒤져 봐도 그가 요리사로 일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나 사실 또는 근거 역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