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눈 (외 2편)
오탁번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오는 밤눈을 내다보네
눈송이 송이 사이로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 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하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빛바랜 자서전인 양
노끈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이야기를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밤눈 오는 섣달그믐
점점 밝아지는
할머니의 눈과 귀
—『동리⸳목월』(2022, 가을)
눈물로 간을 한 마음
시집 『비백』을 내면서
맨 앞에 ‘시인의 말’을 쓰는데
‘눈물로 간을 한 미음’이라고 치면
자꾸 ‘미음’이 ‘마음’이 된다
동냥젖으로 눈물로 간을 한 미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살리셨다는 사연인데
다시 쳐도 또 ‘마음’이 된다
‘눈물로 간을 한 마음’?
그렇다마다!
그 미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걸
노트북은 어찌 알았을까
글자판에 바짝 붙어있는
ㅏ와 ㅣ가
나를 비아냥하는 것도
다 그윽한 뜻 아닐까 몰라
곰곰 생각에 겨워
눈을 감으면
은하수 건너 캄캄한 하늘
희끗희끗 흩날리는
어머니의 백발
—『2022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연간작품집』
(대한민국예술원, 2022,11)
속삭임 1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05
—시집 『속삭임』 2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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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1943~2023) /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대학원 영문과 졸업. 1966년 동아일보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시), 1969년 대한일보 (소설)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오탁번시전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알요강』 『비백』 『속삭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첫댓글 2023. 2.14일, 오탁번 시인이 돌아가셨네요. 1년이 넘었는데 소식마저 못 들었습니다. 43년 생이면 아직 더 많이 활동해도 될 것인데! ㅈㅈㅈ
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
백세 시대 라고 하는데 귀한 분이 너무 일찍 가셨네요.
속삭임 이라는 시가 작구 읽혀 지내요~
학부는 영문과이고 대학원은 국문과일 것입니다. 영문과 선배로 알고있습니다. 종종 학부생들 가운데 회자되던 분으로 기억하고있습니다. 돌아가신 줄 모르고있었습니다. 안타깝네요.
직접 강의는 듣지 않으셨나 봐요,?
오탁번시인이 돌아가시고 마냥 안타까웠습니다.
시인이 계실 때에 문향회에서 다달이 방문하는 팀에 못끼고
다음달 다음달 벼르다 말았더니 가셨다는 소식에 아이고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더군요,
늘 계실 것으로만 생각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