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고난”
그런데 우리는 그게 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욥기의 끝에 가보면, 하나님이 욥을 데리고 다니면서 "너 우박창고를 보았느냐?" 물으시고, 또 "너 악어를 봐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박이 되시겠습니까. 욥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악어가 되시겠습니까. 욥이 되시겠습니까? 그 결론과 여러분을 비교해보시면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 창조 세계를 보라고 하실 때, 우리 인간은 분명히 창조물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창조물과 구별되는 존재. 곧 하나님 통치의 대리자로 명명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대동한 어떤 동반자로 부르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통치와 결정, 선택의 자유까지 허락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십니다. 우리를 어떤 목적물로 지으셨는지를 아시겠습니까? 나중에 더 깊이 들어가면 살펴보겠습니다만 이는 굉장히 놀라운 지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지위를 모두 버리고 그냥 편안하게, 우리가 아는 이해의 범주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대하는 결과 우리가 소원하는 결과를 신에게 받기 위하여 우리가 그 울타리 안에 있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로 제시한 답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걸어서 욥의 인생 속에서 사탄이 옳은가 하나님이 옳은가를 증명하는 내기가 된 셈입니다. 우리는 약간 억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사탄이 이기고 우리가 잘하면 하나님이 이기는 싸움에 걸려서 고생하게 된 셈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자신의 잘못과 짐을 덜리고, 핑계로 삼으려고 우리를 끌어들인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욥이라는 한 인간에게 걸더라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의 한계와 변덕과 연약하지만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말하자면 이유 없이는 안 된다는 사단의 도전에 대해 용의 재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가지신 이해가 우리의 이해의 범주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깨기 싫어하는 그 이해의 범주를 깸으로써 당사자인 욥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이해 범주를 깨고 하나님의 이해 범주로 들어올 수 있는 곧 그 고난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그 길을 하나님이 열기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실 그렇게 하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무엇 때문에 때리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제일 노여운 게 뭐냐면 자식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와서 그 앞에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싫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애 버려놓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참고 계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어디 한번 보자고 심판하시기 위하여 관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범주를 드러내고 항복시키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시는 바로 그 아픔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이 씩 웃고 계셨겠습니까? 이건 말이 맞지 않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아버지의 아프심으로 온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았습니까? 하늘이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우는 것입니다. 똑같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그 마음으로 욥에게 고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고난이 아니고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그리하여 이 "까닭 없이"를 깨는 것입니다.
~ 박영선, 《욥기 설교》, 영음사, 2014, p.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