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관찰사유상공휘척기위국혜민비재임기간 영조 2년(1726) 5월 ~ 3년 5월
경삼감영공원에 있는 29基의 비석 중에 특이한 분이 두 분 계시는데 한 분은 앞에서 말한 민응수 관찰사로 도민(道民)들이 세운 영세불망비와 잡역을 면해준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승려들이 세운 무휼승도비(撫恤僧徒碑)가 있으며, 또 한분은 유척기 경상도 관찰사와 대구 판관을 지낸 유명악공인데 이들은 부자지간으로 종2품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척기공이 아들이고 종5품으로 대구 판관을 지낸 유명악공이 아버지이다.
우리 고장에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바 있는 유척기 선생은 매우 소신있는 정치가였다.
1714년(숙종 4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및 정언(正言) 등을 지낸 그는 1721년(경종 1년) 연잉군(나중에 영조)이 세제(世弟)로 책립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바른 말을 잘 하였으므로 이듬해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켜 집권한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 1년) 노론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과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파직 당했다. 그 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또 등용되어 평양도관찰사와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739년 우의정에 올라 신임사화로 사사된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 이이명의 복관을 건의하여 관철하기도 하였으나, 소론의 유봉휘(柳鳳輝) 등을 탄핵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는 평소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창곡(倉穀), 조세(租稅) 등 경제정책이 중요하다고 여겨 <경국대전>의 도량형에 의거하여 표준을 재현케 할 것을 상소하여 1740년(영조 16년) 이를 실현하게 하였으며, 온건파 이천보(李天輔)와 힘을 합쳐 영조의 탕평정치에 적극 협력하였는데 이러한 정치적 이력은 오직 그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거시적 안목으로 국사를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정적(政敵)이라 하더라도 지혜를 빌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묘책 제안으로 유명했던 이종성(李宗城)은 유척기 집안과는 서로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이종성이 어느 날 “오늘은 유척기 대감이 찾아올 것이니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라.”고 일렀다. 자제들이 “그는 우리 집안과는 원한이 있는 사이인데 어떻게 오겠습니까?”라며 의아해 하자, “아니다. 그는 나랏일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답하였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유척기가 당도했다.
“대감께서는 청(淸)으로 가는 길에 들리셨지요?”
“그렇습니다. 청의 탄압이 심해 ‘변무사(辨誣使)’로 가게 되었습니다. 청이 아직도 명(明)나라를 섬기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고 힐문할 터인즉 무어라고 변명해야 할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전남편이 죽어 하는 수 없이 개가한 여인이 있었어요. 이 여인이 전남편을 위해 제사상을 차렸는데 지금의 남편이 이 여인을 구박하고 못살게 하였어요.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잖소? 만약 지금의 남편이 죽었을 때 이 여인이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모름지기 사람이란 한번 맺은 인연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명(明)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이 여인의 처지와 같을 뿐입니다.’라고 하면 다소 누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하오.”
“으음, 과연 그러 하구려. 고맙소.”
유척기 선생이 연경에 도착하여, 건륭제(乾隆帝)를 만나니 대뜸 노기를 드러내었다.
“너희들이 대보단(大報壇)을 지어 이미 망해버린 명의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직도 공용복장을 명의 복장으로 한다니, 이런 도리가 있는가?”
이에 유척기 선생은 과부의 개가 일에 비유하며 대답하였다.
“명의 공복(公服) 제도는 이같이 옛날 근본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청의 은혜가 큰 만큼 점점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건륭제는 노기를 풀고 천리마 한 필을 선물로 내어놓으며 말했다.
“으음, 과연 그대의 나라가 일찍이 ‘예의지국’이라 일컫더니 그만큼 옛 임금을 잊지 않음이로다.”
이처럼 유척기 선생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난국을 타개한 현신(賢臣)으로서 그 흔적이 우리 고장에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첫댓글 유척기 관찰사와 그의 부친 유명악 부판관에 대한 내력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