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c. 1661–1669, 262×205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아버지가 있다. 등은 굽었고 눈은 희미해진 늙은 아버지다. 집 나간 아들이 허랑방탕의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에도 아버지의 시선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아들의 허리를 팽팽하게 당겼을 것이다. 탕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면 받아 주시리라는 굵은 확신이 있어서였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8-20).
탕자가 집에 닿으려면 아직도 거리가 멀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멀리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자리는 대문 앞에 고정되었으나, 아버지의 시선이 아들이 헤매고 있을 지평선 너머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 얼굴에 표정이 없다. 아들이 돌아온 것에 안도하지도 않고, 기쁜 색도 보이지 않는다. 집 나간 아들을 걱정하며 보냈던 시간은 아버지의 얼굴에 풍화작용을 일으켜 모든 표정을 깎아 버린 것 같다. 그렇게 왼쪽 눈은 일그러져 눈꺼풀에 거의 덮였고 오른쪽 눈은 사시가 되어 안겨 있는 아들을 보는 눈에 초점이 없다. 저 초점 없는 눈으로도 멀리 있는 아들을 알아본 것이다.
그림 오른쪽에 선 남자는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이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깍지 낀 손을 풀 마음이 없지 싶다. 돌아온 동생과 입 맞추거나 악수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것이다. 탕자를 환대하는 아버지가 야속했겠고 동생이 다시 돌아왔으니 남은 재산이 다시 분할되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저런 허랑방탕한 동생을 안아 주는 이런 아버지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큰아들은 자신의 손을 맞잡을 뿐,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을 작정이다. 기다리던 둘째 아들의 몸이 돌아오니, 함께 있던 첫째 아들의 마음이 떠나버린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안으면서도 마냥 기쁘지 않았던 것은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만은 아니었겠다. 탕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거다. 둘째 아들의 몸을 기다려야 했던 아버지는 큰아들의 마음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들의 등을 아버지의 두 손이 덮고 있다. 왼쪽 손목은 굵고 손등이 산맥같이 두꺼운 반면에, 오른쪽 손목은 가늘고 손등이 명주처럼 부드럽다. 왼손은 아버지의 손이요,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이다. 지금 탕자는 아버지의 힘과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이다. 두 손이 있어 둘째 아들도 안아 주시고 첫째 아들도 품어 주실 것이다. 집 나갔던 탕자도 안아 주시고, 집에 머문 탕자도 품어 주신다.
첫댓글 집 나갔던 탕자도, 집에 머문 탕자도 품어 주시는 아버지..♥️
무표정한 아버지의 얼굴은,,,,
둘째 아들의 몸에 이어 첫째 아들의 마음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임을 알았던 것일까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울컥해집니다.
아버지의 힘과 어머니의 품~두손이 있어 오늘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