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자기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 자기들에게 저항할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란 세속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조건, 삶의 상태(condition)이다. 세속주의는 크게 두 가지 운동의 결과이다.
첫째가 근대성(mordernity)이다. 이 근대성은 계몽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계몽주의는기적, 구원, 계시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법칙, 도덕적 개선, 진보, 이성과 같은 자연주의만을 인정했다.
둘째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ty 혹은 후기 현대성)이다. 이 사조는 경험을 이성보다 앞세우며, 영혼의 내적인 실질을 객관적인 외적 세계의 실재들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근대성(모더니티)과 합리주의의 무미건조한 개선주의에 대해 여러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조다.
둘 다 세속적 운동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승복하고 있다. 종종 그런 일들은 ‘연관성(혹은 적실성, 적합성, 연결성)’ 의 이름으로, 그리고 오늘날 말하고 있는 소위 ‘상황화’의 이름으로 답습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이 시대의 정신에 천천히 영합해 가서 그런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적 저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저변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전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구제책은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 에 담겨 있는 그런 회복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대한 초월적이며 영원한 관점 사이의 균형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크리스천이 너무 자주 장난처럼 들먹이고 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