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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제28권 > 공민왕 2 > 최종정보 1352년
○ 요양성 총관(遼陽省摠管) 고가노(高家奴)가 보낸 사신이 와서 옥잔과 개를 바쳤다. ○ 여름 4월에 요양행성동지(遼陽行省同知) 고가노(高家奴)가, 패하여 도망가는 홍두적을 공격하여 4천여 명을 베고, 사신을 보내어 적의 괴수 파두반(破頭潘)을 사로잡았음을 사신을 보내 보고해 왔다.
고려사절요 제28권 > 공민왕 3 > 최종정보 1353년
○ 요양 평장(遼陽平章) 고가노(高家奴)가 요(鷂)를 바치니, 왕이 이를 놓아 보냈다. 왕은 성품이 자애로워 동물을 차마 해치지 못해서 왕위에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사냥을 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제29권 / 공민왕 4(恭愍王四) 1354년
임자 21년(1372), 대명 홍무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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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에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 오산불화(於山不花)ㆍ나하추(納哈出)ㆍ고가노(高家奴) 등이 와서 이성(泥城)ㆍ강계(江界) 등지를 침범하였다.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 > 최종정보
병인신우 12년(1386), 대명 홍무 19년
황제가 지휘첨사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와서, "기해년에 도적을 피하여 동쪽으로 온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를 조사하여 찾아간다." 하였으니, 이것은 전원의 심양로 다루하치(達魯花赤) 교주(咬住)의 무고 때문이다. 또 말 3천 필을 살 것을 요청하고, 말 한 필에 무명 8필과 비단 2필을 주는데, 말을 요양(遼陽)까지 보내와서 값을 받아가게 하였다.
주-D002] 기해년 :
고려 공민왕 8년,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9년인데, 이때에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우리나라에까지 그들이 침입하였다.
동사강목 제14하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적의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달아나서 압록강을 건너 쫓겨갔다. 파두반은 달아나다가 요양 행성(遼陽行省)의 동지(同知) 고가노(高家奴)에게 사로잡혀 죽고, 드디어 적이 평정되었다.
동사강목 제15하
경술년 공민왕 19년(명 태조 홍무 3, 1370)
동11월 우리 태조가 지용수 등과 함께 동녕부를 함락시켰다.
……….
.당시 만호(萬戶) 배 언(裵彦) 등이 고가노(高家奴)를 치러 석성(石城)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머물러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일관이 그렇게 말하므로 드디어 군대를 돌이켰다. 처음 성이 함락될 때 아군이 성안의 창고들을 거의 다 불태워 버렸기 때문에 군중(軍中)에 식량이 모자랐던 것이다
동사강목 제15하
임자년 공민왕 21년(명 태조 홍무 5,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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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월 태후(太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사유(赦宥)하였다.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라 호하고, 문예부(文睿府)를 고쳐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다.
○ 지연(池淵)을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
당시 명(明)이 원(元)의 잔당(殘黨)을 거의 다 거두어 복속시켰으나 유독 납합출(納哈出)만이 금산(金山)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산불화(於山不花)ㆍ고가노(高家奴) 및 동녕부(東寧府)에 남은 무리인 호발도(胡拔都)ㆍ장해마(張海馬) 등과 함께 여진 잡종(女眞雜種)을 이끌고 자주 이성(泥城)ㆍ강계(江界) 등지를 침구하므로 지연을 보내어 방비하게 하였다.
동사강목 제16상 을묘 고려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부터, 무진 14년 6월까지 14년간
무오년 전폐왕 우 4년(명 태조 홍무 11, 1378)
11월 좌소조성도감(左蘇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
○ 고가노(高家奴)가 와서 투항(投降)하였다.
고가노는 원(元)의 평장(平章)으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사이에 있으면서 명(明)에 붙기도 하고, 원에 귀부(歸附)하기도 하다가 이때에 와서 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와서 투항하였다.
동사강목 제16하
병인년 전폐왕 우 12년(명 태조 홍무 19, 1386)
동12월 번개가 치고 지진이 있었으며, 어두운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
○ 명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을 사고, 요동과 심양(瀋陽)의 유민(流民)을 찾아 돌아갔다.
황제가 지휘첨사(指揮僉事)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어 말 5천 필을 사고, 또 기해년 이후의 요동과 심양의 유민 4만여 호를 추쇄(推刷)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전 원(元)의 심양로(瀋陽路) 달로화적(達魯花赤)인 교주(咬住) 등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해동역사 제15권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19년에 신우 12년 지휘첨사(指揮詹事) 고가노(高家奴) 등을 보내어 기단(綺段)과 포필(布疋)을 가지고 고려로 가서 말을 사게 하였는데, 말 1필당 문기(文綺) 2필, 포 8필을 주게 하였다. 《속문헌통고》
○ 전에 원나라에서 고려의 포마(鋪馬 역마(驛馬)를 말함)에게 준 몽고 문자(蒙古文字)를 받아들이고, 쌍마(雙馬)에게는 4통의 현자호(玄字號)를, 단마(單馬)에게는 2통의 홍자호(洪字號)를, 기선(起船)에게는 2통의 안자호(安字號)를 내려 주었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20년에 신우 13년 고가노(高家奴) 등이 고려에서 말을 사고는 돌아와서 고려 왕이 말값을 받지 않겠다고 표문을 올려 청하였다고 아뢰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예부에 유시하기를,
“짐이 여러 번국(藩國)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성실과 믿음으로 하기에 힘써 왔다. 고려에서 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고는 값을 주고 말을 사는 것을 허락하였기에 사람을 파견해서 말을 사들였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말 값을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그들의 본심이겠는가. 대개 위세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다. 위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짐이 할 바가 아니다. 너는 짐의 이 뜻을 자문에 써 보내어 고려의 국왕에게 알리라.”
하고, 이어 연안후(延安侯) 당승종(唐勝宗)에게 유시해서 고려의 말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쓸만한 말을 가려 값을 갚아 주고 노둔하고 허약한 말은 값을 적당하게 감한 다음 이어 고려의 국왕에게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다. 이 칙서가 요동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려에서 보낸 말 3천 40필이 요동에 도착하였다. 당승종이 칙서의 내용대로 값을 쳐주었다.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가노(高家奴)ㆍ서질(徐質) 등이 고려로 말을 사러 갈 때에 미쳐서 예전에 원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교주(咬住) 등이 이 사실을 말하자, 황제가 고가노 등에게 명하여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가 판 말을 보내는 편에 이들을 보내어 드디어 요양과 심양에서 옮겨간 유민 나타리(奈朶里)ㆍ불반(不反) 등 45호(戶) 3백 58명이 돌아왔다. 《이상 모두 엄주별집(弇州別集)》
해동역사 제38권 / 교빙지(交聘志) 6
상국사(上國使) 2
○ 19년(1386, 우왕12) 겨울에 지휘첨사(指揮詹事)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 등을 파견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말을 사오게 하였다. 《엄주별집》
총서
도조가 죽자 어린 교주 대신 임시로 환조 이자춘이 관직을 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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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正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卒]니, 아들 교주(咬住)가 어리[幼]었다. 나해(那海)가, 그 어머니 조씨(趙氏)가 고려의 왕족(王族)임으로써 그의 형 완자불화(完者不花)와 함께 모두 원윤(元尹)과 정윤(正尹)이 되고, 또 조총관(趙摠管)의 세력을 믿고 드디어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내어, 그 애고(哀苦) 중을 틈타 선명(宣命)과 인신(印信)을 훔쳐 가니, 관내(管內)의 군민(軍民)들이 모두 노하기를,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닌데, 나해(那海)가 어찌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환조(桓祖)가 탑사불화(塔思不花)의 아내 박씨(朴氏)에게 이르기를,
“형수께서 스스로 개원로(開元路)에 가서 변명하십시오.”
하였다. 박씨는 안변(安邊) 사람 득현(得賢)의 딸이다. 환조는 교주(咬住)와 함께 박씨를 따라 개원로(開元路)에 나아가서 진소(陳訴)하니, 본로(本路)에서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었다. 지정(至正) 3년(1343) 정월에 원(元)나라에서,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니고, 교주(咬住)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丁年)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이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해(那海)를 목 베게 하였다. 나해가 이 소식을 듣고 선명(宣命)과 인(印)을 가지고 차인사(遮仁寺)에 숨으니, 잡아서 이를 죽였다. 완자불화(完者不花)는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한 이지(李枝)의 아버지다.
【원전】 1 집 2 면
【분류】 인물(人物) / 가족(家族) / 왕실(王室) / 역사(歷史)
[주-D001] 원윤(元尹) :
고려 때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의 작호(爵號).
[주-D002] 정윤(正尹) :
고려 때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의 작호(爵號).
총서환조가 교주에게 관직을 돌려주고자 했으나 받지 않다. 교주가 우달치에 속하다
[DCI]ITKC_JT_A0_000_000_000_00220_2005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 군기 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원전】 1 집 2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인사(人事)
총서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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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외교(外交) / 신분(身分) / 역사(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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