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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4일
말씀: 고후 3:2-3
제목; 삶 속에서 일터는 사명입니다
저번 주에 예일 대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일과 성령’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일의 개념을 소명 개념의 대안으로 세 가지로 제시하는데, 이 부분이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삶의 일터가 은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삶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여야 되기 때문이요, 소망은 하나님나라에 있으며, 그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삶의 일터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거나 보상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서 보상이 결정되는데, 이 땅에서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 드리느냐,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세상에서 지위를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얼마나 정직하며, 성실하며, 본이 되며, 그리스도를 존귀히 드러내는 삶이었느냐를 보기 때문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직업의 위치나 신분이나 수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영적인 ‘일’을 교회에만 국한 시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고,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번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말씀은 생명의 구원, 즉 종말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문화명령은 이 세상에서의 유한한 삶에만 관련되기 때문에 전도명령이 청조적 문화명령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전도명령에 집중을 합니다. 전도명령에 집중하는 것은 좋으나 너무 전도에만 목표를 맞추다 보니까 전도를 프로그램화해서 종교행사에 집중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전도명령에 따라 부흥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돈을 벌면 이 돈으로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할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벌 자, 좀 더 벌면 무엇이라도 하자, 그러니까 돈에 대해서 사람들은 만족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고 부흥에 대해 만족이 없습니다. 100명되면 목표가 1000명으로 바뀝니다. 1000명이 되면 10000명으로 또 바뀝니다. 부흥의 목적은 선교사적사명을 감당하는 최종목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흥은 가정과 이웃과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이어져야합니다. 그래서 창조적 문화운동이 일어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들에 동참해야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성령으로 삶의 일터에서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잡고 가야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어보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일터에서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우리는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기본적인 자세부터 좀 알아봅시다.
먼저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본자세입니다.
엡4:1 ‘그러므로 주의 죄수 된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되’여기서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는 같다는 것입니다. 동격이라는 말이지요.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통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 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 만물들도 모든 일에 선을 목표로 하여 협력관계에 있다고, 연관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지속적으로 계속강조 해 온 한 몸의 원리입니다.
고전12: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일의소명은 ‘나’만을 위한 직업이 아닙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청소부는 청소부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주위를 깨끗하게 쾌적하게 만들어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 나가는 중요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직업은 높고 낮은 것에 지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기독교 일의 소명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 한 몸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창조문화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세 번째로 섬기는 것은 교회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항상 해야 합니다.
벧전 3:15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모든 것이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부분이지만, 예배가 그대로 삶으로 가야합니다. 은사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사가 교회에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은사가 ‘직업’에서 나타나면 이것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 말씀을 나누고 싶으면 교회에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대상으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토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일터는 결국 사역과 함께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사역지는 가정입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동심원에 대해 말씀드릴 때도 나로부터 시작해서 첫 출발점이 가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주신 사역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잘 볼보지 못하면서 교회를 잘 돌본다, 이웃을 잘 돌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독의 자격에서도 자기 집을 돌보지 못하면서 어찌 교회를 돌볼 수 있느냐는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의 순서를 교회와 가정에 둡니다. 교회와 가정의 문제를 가장 일찍 반응을 하고 그 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이게 일의 순서로 생각하고 지키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믿음의 가정을 잘 돌봐야합니다. 믿음의 가정을 총체적으로 교회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갈 6:10 ‘그러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지니라.’이것도 한 몸의 원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우리가 이 부분을 ‘상대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나를 위한 ‘배러’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할 때 한 몸의 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이 훈련에 적극 참여하셔서 성령의 임재가운데 오순절 성령의 임재가운데 나타났던 교회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며 함께 했던 그 신앙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하며 기도제목을 나누며 성도가 ‘나’라는 인식을 날마다 가지며 실천할 때 실질적으로 상대방이 ‘나’라는 체험을 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할 일이요, 사역입니다.
그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선교사적 사명을 가지고 창조문화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예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에 미국의 한 지방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왔습니다. 예약을 하지 않아 방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밖은 비가 너무 많이 오고 있고, 시간은 이미 새벽한 시가 넘었습니다. 사정이 딱해 보였던 노부부에게 직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객실은 없습니다만, 폭우가 내리치는데 차마 나가시라고 할 수 없네요,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겠어요?’
그러면서 직원은 기꺼이 자신의 방을 그 노부부에게 제공했습니다. 직원의 방에서 하루 밤을 묵고 아침을 맞이한 노부부가 말했습니다. ‘어젠 너무 피곤했는데 덕분에 잘 묵고 갑니다. 당신이야 말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되어야할 분이네요.
언젠가 제가 집으로 초대하면 꼭 응해주세요‘라고 말을 하며 떠났습니다. 2년 후 그 호텔직원에게 편지와 함께 뉴욕행 비행기 표가 배달되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방을 묵게 했던 노부부가 보내온 초청장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으로 갔습니다. 노인은 그를 반기더니 뉴욕 중심가에 우뚝 서 있는 한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호텔이 마음에 드나요?’‘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저런 고급호텔은 너무 비싼 것 같군요, 조금 더 저렴한 곳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저 호텔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것입니다’
그 노인은 백만장자인 월도프 에스터였고 조지 볼트의 배려에 감동해 맨하튼 5가에 있던 선친 소유의 맨션을 허물고 호 텔을 세운 것입니다.
변두리 작은 마음의 평범한 직원이었던 조지 볼트는 그렇게 노부부에게 했던 마음 따뜻한 마음 친절과 배려를 통해 미국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조지 볼트는 노부부의 딸과 결혼을 했고 배려를 바탕으로 호텔을 성공적으로 경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1893년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배려에 대한 은혜입니다. 배려를 하면 꼭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면 하나님나라에서는 어떻겠느냐 를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이치도 이럴 진데 창조문화운동은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한 몸의 원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창조문화명령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성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창조문화사역은 이론적이고 희망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통해 삶의 일터를 이해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하나님이 동참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통해 각자 삶의 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유지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세계의 조화와 균형잡힌 삶을 살아가야하는데, 삶의 영역에서 균형과 조화는 교회에서 한 몸의 원리를 세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급식을 담당하시는 분이 예산 안에서 직접 발품팔이를 해서 아이들 식단을 꾸려나가는데, 랍스터, 게, 불고기 등의 다양하고 풍성한 질 좋은 음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발 품팔이를 해서 맛은 같지만 상품이 안 되는 것들, 또는 싱싱한 물건들을 구비해서 식탁에 내 놓으니까 교사도, 아이들도 즐거운 것입니다. 식사시간이 기다려지는 것 아닙니까? 한 사람의 수고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이 삶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세운 균형과 조화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대기업에 발탁되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일터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곳이며 내게는 하나님의 능력, 즉 은사를 통해 이 일을 잘 감당하도록 이끄시고 계획하셨다는 믿음의 눈으로 자기 일터를 돌아본다면 삶의 일터에서 많은 감동과 기쁨과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사역을 위한 기회로 여겨야지 단지 직업 그 자체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요, (마 5:14-16)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으로 창조문화명령에 따라 하나님말씀을 일터에서 반영해야합니다.
고후 3:2 ‘너희는 우리 마음에 기록된 우리의 편지라.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며 읽혀졌고.’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야 하며, 동시에 이런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루 하루를 창조적 문화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가능한 일입니다.
삼위일체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성령의 시대를 맞이하여 성령께서는 인간 영혼의 변화에 집중적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죄를 깨닫게 되면 이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또한 이 죄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죄인이 돌이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도 성령님이신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믿음의 사각을 갖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거듭난 영혼을 성화시켜 장성한 신앙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이 성령께서 창조문화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실천하도록 우리는 붙들고 계십니다. 물론 영혼에 관계된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성령께서 창조적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간섭하시고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중세교회 초기의 대신학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은 삼위의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일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 속에 성령께서 시작하신 새 창조의 일이 더욱 풍성하게 열매 맺도록 끊임없이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창조문화명령을 이루기 위해 거듭난 심령들을 통해 잃어버린 에덴의 영광을 회복시키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온 인류의 죄악상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이 땅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다시 창조문화운동이 시작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의 영혼 속에는 성령이 거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심령들을 통해 그 속에서 성령이 하시는 사역은 바로 무너지고 깨어진 창조세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믿는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우리는 이제부터 이 일을 감당하는 창조문화사역의 주역들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께서는 에덴의 회복을 우리들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룸을 통해서 하십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해 져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삶의 일터에서 사역을 감당하게 되면 반드시 창조문화명령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그 나라를 소망한 자들의 삶을 일터에서 나타내면 창조문화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는 먼저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회 속에도 있습니다. 이 삶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천국을 소유한 자들을 통해 우리의 삶의 일터가 에덴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생명으로 하나님의 창조문화를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