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김 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이 드리는 이야기-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쇠고기 국에 흰 쌀밥 한 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절박하면서도 가슴 아픈 소원인가! 그들이라고 왜 고대 광실에 천 석 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런 꿈을 갖기에는 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고 처참해서 그런 사치스런 꿈이나 희망은 다 저버린 것이 아닐까?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사십 여년 전만 해도 쌀밥을 온 가족이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 양이 부족해 심지어 밤나무 같은 유실 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70 년대 초 아카시아 꽃이 산과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 해 5월 하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 영수 여사 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 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80 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 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을 받았었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 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 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지 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육 영수 여사 지시로 물어 물어 찾아간 성남 달 동네 판자 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찾아 왔노라고 말하고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쓰러지다 만 조그만 초막 같은 집에는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산 자락에서 따 온 흰 아카시아 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아무 말도 더 못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박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천정을 쳐다 보시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수를 써서도 이 나라에서 가난 만은 반드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히 가슴을 친다.
60년대 초 서독에 가 있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현지에서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기 위해 이국 만 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야멸차리 만큼 무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 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이런 결심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 증서에는 이런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 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돕고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가난뱅이 나라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 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 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함께, 70년대 초 성남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 때까지 내 눈 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
계절의 여왕 5월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수 놓고 있습니다.
나는 지나가다 저 꽃을 볼 때마다,
그 오래 전에 받았던 위 메일이 생각나면서
육 영수 영부인을 추모합니다.
학이라 불리시던 육 영수 여사 님!
님을 저격하여 님을 우리 곁에서 떼어 놓은 악마 집단은
문 세광 문(文)가 였습니다.
그런데 그 악령들이 지금도 조국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을 마음대로 만나고 다닌 문 익환이 그렇고
그 아들 문 성근이 그렇고,
북한 먹여 살리기 일등 공신인 통일 교 교주 문 선명이 그렇고,
공산당 거물들을 독립 운동가로,
간첩 우두머리와 핵심들을 민족 열사로 둔갑 시키고
북한 공산당 인민 회의 흥남 지부장 아들이며 현 대통령인 문 재인이 그렇고,
이적 단체에 기부하여 기부 천사란 애칭을 받던
남노 당 빨치산 류 락진의 외손녀인 문 근영이 그렇고,
호국 천주교를 종북 좌파 천지 정의 구현 사제 단으로 만든 문 규현이 그렇고,
광우병 사건 때 촛불 집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KBS PD 문 형렬이 그렇고,
지금 문 재인의 핵심 브레인 인 문 정현이 그렇고,
이들이 어찌 하필 우리 어머니 남편 문 씨 족속인지
그들이 싫다고 우리 어머니 성을 바꿀 수도 없고..
대통령이면 민족을 화합 해서 하나로 만들어야 하거늘
완전히 두 쪽으로 나누어 24 시간, 12 달, 365 일
하루도 쉼 없이 죽을 때까지 싸움을 독려하는 자가,
로마 경기장에 나와 죽음을 부르는 싸움에 날을 새는 통치자 가
21세기에 대한민국에 나타나 있으니
이것이 통일 운동인가?!
안타깝고 슬프구나.
옮기는 자의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