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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뒤에 있는 울타리를 따라 무궁화가 피어있습니다. 아마 지난 7월부터인가 3개월 이상을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이 가을까지 왔습니다. 며칠 전 비바람이 지나고 나서는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몇 송이는 시들어가며 남아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여태 꽃봉오리가 꽃송이보다 많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피지 못하고 그냥 져버리겠지요. 아침 날씨도 지난주와 다릅니다. 산행에도 이제 가을 옷으로 바꾸었습니다. 빠르게 올라가도 땀이 흐르지 않습니다. 서늘함이 오래 갑니다. 그러니 꽃봉오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거참!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꽃봉오리가 이리도 많은가 싶습니다. 하기야 인생도 그런 경우 참 많습니다. 어린 생명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나라에도 총기를 그렇게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니 무슨 필요로 사람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전쟁이 일상인 나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반세기 이상을 대치하고 있어도 일반 국민이 총기를 가지지 않고 있음에도 이렇게 안전하게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칼을 가지면 휘둘러보고 싶고 총을 가지면 방아쇠를 당겨보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렵다고 말입니다. 아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안전제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악한 자들이 적지 않기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개인소장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서부개척시대에는 그랬겠지요. 그런데 태국에서 왜 그랬을까 의아합니다. 하필 왜 어린아이들을, 거참!! 하기야 음식이나 장난감 가지고 장난질하는 놈이나 별다른 것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또 연휴인가 봅니다. 그런데 비 예보가 있네요. 실내 구경도 많이 있으니까, 아무튼 건강하고 즐거운 휴일을 빕니다. ^)^
2022년 10월 8일 김종우 목사 드림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무엘상 24 : 13)
<늑대사냥>
사람이 죽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지만 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다양한 살해 방법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 바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이유는 다른 동물들처럼 생존을 위함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들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한 살인은 오히려 비율이 낮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살인을 하는 걸까요? 물론 보복인 경우도 많습니다. 흔히 이야기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가계를 이어가는 복수의 연속, 대립되는 그 두 가문 속에서 뜻하지 않게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는 흥미를 자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유명합니다. 가문의 불행이고 결국 젊은이들의 불행으로 나타납니다.
아무튼 살인의 이유 목적이 무엇일까요? 복수가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욕심 채우기 아닐까 싶습니다. 죽이고 빼앗는 것입니다. 재물을 빼앗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을 빼앗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도짓은 주로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인을 빼앗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때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해서 개인적 살인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으로까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트로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인 ‘헬레나’를 둘러싸고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납니다. 신화이든 역사적 사건이든 아무튼 사건의 중심에 한 여성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기 좋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살인은 선한 사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늘 발생합니다. 더구나 국가적 단위로 발생하면 악이라는 개념조차 희석됩니다. 전쟁으로 발생하는 대단위 살인행위는 누가 단죄하기도 어렵습니다. 나중에 전쟁범죄를 따지는 국제재판이 열리기도 하지만 지극히 소수만 해당됩니다. 사실 성경 속에도 많은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것을 빌려 타종교에서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으로든 나라로든 살인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악하게 취급하는 것은 개인의 욕심이나 사적 감정으로 살해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한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에서 살인의 방법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죄인을 사형시키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최근까지 가장 오래 많이 사용한 것이 아마도 교수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 되었건 스스로 죽는 것 외에 타의에 의해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아서 목숨을 잃는다면 죽은 사람보다도 남아있는 그 사람의 주변 사람에게도 크나큰 상처가 남습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복수라는 것이 생기지만 요즘은 나서서 복수를 할 수는 없습니다. 법의 심판에 맡겨야지요. 그렇다 해도 한번 새겨진 상처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 지니고 아파해야 합니다.
극악무도한 죄인들, 속된 말로 ‘인간쓰레기’요 세상에 존재가치가 없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필리핀에서 국내로 이송해야 합니다. 4만 톤급 화물선에 임시 감옥을 설치하여 죄수들을 태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 형사 한 사람씩이 따라붙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감시하며 화물선에 탑승을 합니다. 한 방에 두 명씩 모두 수갑이 채워지고 쇠사슬로 벽에 매여 있습니다. 꼼짝 못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옥 밖에서 지킵니다. 시간이 되어 배는 출항을 합니다. 망망대해, 빠져나가봤자 바다입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쩌면 조금은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폭풍전야입니다. 이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몸 안에 숨겨온 쇠붙이를 피를 토하며 꺼내서 수갑을 풀어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실력파 형사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폭력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글쎄, 형사들은 일말의 인권을 생각하며 대처하지만 죄수들은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종횡무진 전개됩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해집니다. 그야말로 피의 향연입니다. 그런데 먹기 위해 동물을 도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마구잡이로 찌르고 치고 때리고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영화 촬영하는 데 사용한 피가 자그마치 2톤이랍니다. 상상이 됩니까? 보고 나서 떠오르는 것은 그 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경고하였지만 비위 약한 사람들은 결코 관람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2차 대전 때 생체실험 대상이었던 괴물 같은 사람까지 등장하여 한 몫을 더합니다. 선내 죄수들, 형사들, 선원들, 인부들 동승한 의사와 간호사 등등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까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보고 나서도 기억나는 것은 피밖에 없다니까요. 뭐 이런 영화가 있나 싶은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저의 경우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반응을 하는군요. 세상 참! 뭐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영화 ‘늑대사냥’(Project Wolf Hunting)을 보았습니다.
왜 산으로 가야 하나요?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면 우리가 흔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핀잔을 줍니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 외국어를 해서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나라 말을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답답합니다. 대화가 어렵고 자연히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됩니다. 자 이런 일이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생겼습니다. 한번 보지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시기에 먹을 것 걱정 없이 산다는 것만도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모셔다 자기네 임금을 삼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지요. 예수님은 한 나라나 한 민족의 왕이 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며칠 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당신의 뜻을 확실하게 전하셨습니다. 요 6 : 38 - 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택하신 자들의 영생입니다.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간단히 답하면 40절 말씀대로 그 아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먹어야 하듯 믿으면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먹는가? 55 - 57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지금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니 쉽게 아멘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말이 그리 쉽게 이해되겠습니까? 예수의 살이 양식이고 그 피가 음료랍니다. 그러니 예수를 먹어야 산다는 것이지요. 이해됩니까? 모였던 제자들이 수군댑니다.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렇지요?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왜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님이 설명해주셨습니다.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육을 빙자하여 영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영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당신의 피와 살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요 1 : 14) 예수의 피와 살 곧 예수님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살을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의 중요한 부분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천국의 비밀은 비유로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비유로 이야기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질문하지요. 마 13 :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그 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의 비밀, 달리 표현하면 영생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을 알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아서는 안 될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한번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천국의 비밀을 알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천국의 비밀은 비유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생각만큼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 문은 좁은 문입니다.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도 적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쉽지 않으니까요.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하는 전도를 듣고 일단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마 22 :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그렇게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불러옵니다. 혼인잔치 자리가 가득차지요. 그렇게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그들이 다 천국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혀도 잡힌 고기를 전부 그릇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마 13 :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온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들어와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또는 불신자들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릅니다.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을 통해서 어디로 가는데요? 우선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통상 하는 말로 죽어봐야 알지요, 그럴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비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피와 살’로 생각해서는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비유를 깨달아야 하지요. 자 이제 흙과 산에 관련한 말씀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흙’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창 3 : 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흙’ 하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흙은 무엇이라? 바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음, 흙과 관련한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밭이 나옵니다. 마 13장에서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4 가지 밭을 말씀하십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이 모두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이 밭은 곧 사람이고 나아가 사람의 마음 밭입니다.
그러면 흙이 많이 쌓인 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흙이 엄청나게 높이 쌓였다, 뭐라 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산입니다. 산에도 큰 산이 있고 작은 산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도 있고 적게 모인 곳도 있다는 말입니다. 보겠습니다. 계 6 :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다른 것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산만 봅니다. 여기 말씀에 보면 산이 자리를 옮긴다고 합니다. 산 밑에 바퀴가 달렸답니까? 있던 자리에서 옮겨진다니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8 :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여기서는 바다에 던져진답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육적으로,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이 해석을 해줍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숨겨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계 17 : 9 - 10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 여기 일곱 머리, 일곱 산 그리고 일곱 왕을 말씀하는데 같은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머리, 산, 왕을 같이 이야기합니다. 즉 권세를 가진 어떤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며 하신 말씀을 들어봅니다. 마 24 : 15 -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앞의 내용을 보면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어디로 도망하라 하십니까? 산으로 가라 하십니다. 이 산이 도대체 무슨 산입니까? 어디에 있는 산입니까? 감람산입니까? 시내산입니까? 히말라야 산입니까? 아니면 우리나라 백두산입니까? 그런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렘 51 : 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무슨 산이 나옵니까? 멸망의 산입니다. 하나님이 그 산을 바위에서 굴리고 ‘불탄 산’으로 만들겠다 하십니다. 산이 어떻게 바위에서 구룹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산과 원수가 되고 산에게 대적이 되십니까? 저기 우뚝 서있는 산과 대적이 된다는 것이 가당한 일입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므로 산이, 산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 78 : 68 - 69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하나님이 시온 산을 사랑하신답니다. 아니 왜 그 많은 산들 가운데 시온 산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나라 백두산이 얼마나 멋진데요? 이의 없습니까? 산이, 산이 아니라니까요. 이 문구를 잘 보면 시온 산을 ‘성소’(거룩한 곳)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당신의 백성 유대에 있는 자들이 도망가야 할 산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시온 산이 아니겠습니까?
다른곳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시 132 : 13 - 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여기서도 시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시고 영원히 쉴 곳이라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 134 : 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어디서 복을 주신다고요? 시온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온은 특별합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계시니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백성이 있는 곳을 가리켜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을 달리 뭐라고 하는지 보겠습니다. 사10 : 32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시온을 예루살렘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봅니다. 렘 3 :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하나님이 특별히 뽑아서 시온으로 데려오신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온(산)이 산이 아니고 성소이며 또한 스스로 성전이라 말씀하신 초림 때의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 2 :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배역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한두 사람을 택하여 당신의 성전(시온)으로 즉 예수님께로 데려오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입성하는 백성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장정만 60만이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즉 자기 백성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으니” 그렇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심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구원의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까지 가야 합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까지 들어가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 왔듯이 우리가 도망가야 할 산이 있는가 하면 옮겨질 산도 있고 또 멸망의 산도 있습니다. 산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이지요. 마치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산이라고 해서 함부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멸망의 산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산으로 가느냐,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관련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잘 분별해서 찾아가야 합니다. 목자라고 다 목자가 아닙니다. 요 10 : 11 - 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즉 선한 목자가 있는가 하면 삯군 목자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라고 해서 다 목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며 제일 먼저 주의하신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마 24 : 3 - 4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이어 11절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경계하며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겔 36 : 1 -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대적이 네게 대하여 말하기를 하하 옛적 높은 곳이 우리의 기업이 되었도다 하였느니라” 선지자가 하나님께로 명을 받아 예언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산들이 대적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 산이 아니지요. 옛적에는 높은 곳이었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히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가운데서도 또 따로 택함을 받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가르치며 인도하는 목자들이었지요.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고 또 그 가운데서도 아론과 그 자손을 택하여 제사장으로 세우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따르던 자들도 다 넘어가게 됩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계 8 : 8 - 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불붙는 산이 바다에 던져집니다. 이로 인하여 바다에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니 이 산은 분명 하나님께 버림받은 산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등을 돌리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배반할 때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께로 택함 받은 목자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다른 말을 따라간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라간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런 목자를 따라가거나 그런 교회에서 신앙을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께로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산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본 렘 51 : 25절을 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하나님은 이미 멸망의 산이라 칭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밖에 있는 산입니다. 슥 4 :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앞에서 큰 산이 평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말이지요. 내노라 하는 큰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참 목자 앞에서 거꾸러지고 말 것입니다. 유대 민족을 휘어잡고 있던 종교지도자들 - 서기관 바리새인들 - 그들의 세계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질타하셨습니다. 마 23 :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자들 아니면 하나님 눈밖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산들에 가면 우리 또한 그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런 지도자 그런 목자들 밑으로 가면 우리 또한 마귀의 손아귀에 넘어갑니다. 천국과 영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빠지고 맙니다.
마지막 때 다시 오신다는 우리 주님 예수는 어디에 계실까요? 잘 아는 대로 성경 마지막 책 계시록은 마지막 때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14 :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예수님이 시온 산에 서계십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우리는 그곳 시온 산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시온 산으로 가야 합니까? 지금도 ‘시온 산’이라고 이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 산에 몇 명이나 갈 수 있을까요? 더구나 아직도 그곳은 전쟁 위험지역 아닙니까? 쉽게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지 않을 줄 압니다.
말씀하시는 ‘시온 산’은 저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육적인 시온 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있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물론 많은 천사들 곧 영들도 함께 있겠지요. 공간으로 제한된 산이 아니라 하나님백성으로 구성된 조직이고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교회이지요. 온갖 세상 말로 가득한 교회도 아니고 진리와 거짓이 공존하는 교회도 아니고 오직 진리만이 선포되는 교회입니다. 포도주로 비유한다면 들포도로 된 포도주도 아니고 물이 섞인 포도주도 아니고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으로만 이루어진 참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참 포도주만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시온이고 오를 산은 시온 산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 말씀을 가진 자들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부흥해서 큰 산이 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참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없다면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날에 평지로 만들겠다 하십니다. 그 말씀은 천국의 비밀로 판별될 것입니다. 영으로 주신 말씀을 육으로 푼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과연 그 비밀을 하나님 뜻대로 전해준다면 참이겠지만 사람의 계명으로 전한다면 거짓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한 자가 있고 허락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집 열쇠를 아무나에게 주지는 않습니다. 자기 집 자녀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도 마귀 자식들에게 천국 열쇠를 주지는 않으십니다. 말도 안 되지요. 우리 모두 천국 비밀의 열쇠를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 신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복을 함께 누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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