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이병초
공장에서 일 끝낸 형들, 누님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학산 뽕나무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창수 형이 느닷없이 앞에다 대고 “야 이년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라!” 하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깔깔대던 누님들이 웃음소리가 딱 그칩니다. 옥근이 형 민석이 형도 “내 껏도 쪄도라, 내 껏도 좀 쪄도라” 킬킬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들은 다시 깔깔대기 시작합니다
“야 이 호박씨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랑게!” 금방 쫓아갈 듯이 창수 형이 다시 목가래톳을 세우며 우두두두두 발걸음 빨라지는 소리를 냅니다 또동또동한 누님 하나가 홱 돌아서서 “니미 솥으다 쩌라, 니미 솥으다 쩌랴” 이러고는 까르르 저만치 달아납니다. 초저녁 별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반짝반짝 반짝이고만 있었습니다
<시 읽기> 봄밤/이병초
싱겁고 개구지던 고향 형님들 옛 얼굴 다시 보는 듯하고, 손 맵짜고 입 야물던 동네 누님들도 영락없다. 뽕나무밭 위로 “그러거나 말거나” 반짝이는 초저녁 별들은 또 얼마만인가. 오가는 수작과 정경들의 맛스러움도 재미롭지만, 이 시의 숨음 묘미는 두 차례 쓰인 “그러거나 말거나”의 말맛에 있어 보인다. 모든 민망하고 샛된 것들을 도탑고 정겹게 다스리는 ‘시골’다운 마음이 회로와 자장이 이 말로 하여 작동된다. ―이 으뭉함과 슬기로움의 맛!
좌우간 육담이라 할작시면 이쯤은 되어야 우리 유전자 깜냥으로는 구수하고 편한 듯하다. 양풍洋風의 번역투 육담들이라고 맛이 없을 바는 아니겠으나, 고려가요나 사설시조들이 질펀함이며, 『고금소총』류 야담집의 해학적 전통이 이미 우리 구어口語 생활 속에는 배어 있는 터이다. “하늘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텐 다라 모어” 같은 미당의 능청이나 김지하 담시譚詩들의 입에 감기는 풍자와 해학들이 그러한 미학의 유전자적 전승 없이 가능했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선은 “내 고구마 좀 쪄도라”같은 익살맞은 농담을 어디다 한번 써먹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b,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