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2]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3화]
제 3화. 거대한 메시지
결국 미국 대통령의 권한과 최상위의 기밀은, 그의 손에서 그만을 위한 금융 무기로 변했다.
프롬펠은 매일같이 트윗으로 시장을 흔들었다. 정책의 방향을 흘리고, 내부 정보를 은밀히 건네며, 글로벌 자본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그 한 줄의 트윗이 수천만 가정의 밥상을 뒤엎었다. 그의 입꼬리 하나에 월가의 대형 전광판 앞에서는 환호가 터졌다가, 곧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곤 했다.
이제 지구촌의 하루는 그의 입에서 시작되어, 그의 손끝에서 마감되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깨달아 갔다. 자신들의 삶이,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손끝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그러나 초강국 미국 대통령 프롬펠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의 끝없는 욕망이 무게를 더해 갈수록, 아득히 먼 곳에서 또 다른 어둠의 그림자가 조금씩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 그의 인생에서 실패란 단 한 번도 없었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서울의 고층 빌딩 숲 사이. 한 아파트에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오래된 담배 연기와 식은 음식 냄새로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고성능 망원경이 놓여 있었다. 망원경의 렌즈는 맞은편 아파트의 거실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빈 자장면 그릇과 단무지 접시,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소주병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지독한 고독과 권태가 뒤섞인 밤이었다.
그때 문이 왈칵 열렸다.
잠바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마스크를 한 채 들어왔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탁자 위에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자넨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가 묻자, 창가에 있던 남자가 망원경을 가리켰다.
“궁금하지? 저거 한 번 봐.”
고개를 갸웃하던 남자가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우! 김 대리, 누구야? 세상에 저렇게 멋진 여자가 있었네. 영화배우야?”
그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김 대리는 소파 위에 놓인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남자는 얼른 서류를 집어 들고 중얼거리듯 읽기 시작했다.
“안혜경. 유토피아 신문사 기자. 미국 유학. 태권도 4단. 아마추어 권투 선수. 미국 코네티컷주 대표?”
그의 눈이 커졌다.
“현대판 팔색조 요정이네. 그런데 왜 이런 여자를 밀착 감시하는 거야?”
김 대리는 대답 대신 망원경을 향해 손짓했다.
“초점 맞춰서 거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잘 살펴봐.”
남자는 다시 접안렌즈에 눈을 맞댔다. 그리고 포커스 링을 천천히 돌렸다. 흐릿하던 실루엣이 또렷한 격자무늬 커튼으로 변했고, 한 번 더 조정하자 거실 시계의 초침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아파트 벽에는 여러 장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었다.
별이 가득한 우주의 장관. 밤하늘에 반딧불이가 반짝이는 산골.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계곡.
그리고 각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귀들이 붙어 있었다.
‘창백한 푸른 점 위의 인류.’
‘지리산의 밤하늘과 반딧불이의 소원.’
‘아카시아의 달콤한 향을 온 세상에.’
그 문구들은 시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단순한 장식용 문장은 아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인류를 향해 내걸린 거대한 선언처럼 보였다.
특히 한라산과 백두산 사진 사이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마치 악수하듯 교차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범상치 않은 문장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한반도 통일의 그날!’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당황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
“앗, 이 사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바로 그 대통령 비서실장 전동혁이잖아?”
김 대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계속 망원경 속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옆에는 영화배우 강정연. 그리고 태극기와 인공기라니. 이건 그냥 사진이 아니야. 뭔가 거대한 메시지야.”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이지?”
김 대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자리 배치를 보면 답이 나와. 전 실장과 강정연, 그 옆엔 오성그룹의 외아들 박창근 부사장, 그리고 안혜경.”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서로 연인이겠지.”
그때 남자가 다시 망원경을 붙잡았다.
“쉿, 잠깐. 그녀가 움직였어.”
한편, 맞은편 아파트.
은은한 레몬빛 조명 아래, 안혜경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딘토’라는 이름표를 단 작고 하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놀아 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거실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가 번쩍이고 있었다. 뉴욕, 런던, 도쿄, 서울의 지수가 폭발하듯 출렁일 때마다 모니터 속 차트는 불규칙한 심장의 박동처럼 요동쳤다.
그때마다 그녀의 두 눈은 날카롭게 화면을 꿰뚫었다.
손끝은 피아니스트처럼 키보드와 마우스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번개같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또다시 차트를 확인했다.
사진출처:픽사베이.com
불안과 탐욕이 뒤엉킨 세계 금융 전쟁 한복판에서, 그녀는 오직 차트와 씨름하며 냉정하게 승부를 이끌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녀는 미국 대통령 프롬펠과 관련된 영상들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화면을 스치는 숫자와 문장들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트윗. 정책 발표.
군사적 긴장.
급등하는 유가.
폭락하는 지수.
그리고 다시 치솟는 방산 주식.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백악관에서 시작된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가, 이제 이곳까지 번져 오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혜경은 강아지 딘토를 가슴에 안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 TV에서 새어 나온 푸른빛이 벽을 따라 흘러내리며 불안한 숨결처럼 번져 갔다.
그 순간에도 망원경 너머의 두 남자는 숨조차 삼킨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참 신기한 여자야.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뭘 하는 거지?”
남자가 중얼대자, 김 대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러게. 궁금하면 네가 가서 직접 물어보든가. 하하하.”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 대리는 곧 목소리를 낮췄다.
“이 건은 팀장 말로는 1차장 이종철의 지시래. 전 실장 건이라 VIP도 알고 있을 거라고 했고.”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자락이 묘하게 떨렸다.
“뭐?”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에 내가 보고 올린 건도 1차장 지시였어. 한미연합사령관 로버트 케인을 감시해서 약점을 찾으라더군. 말도 안 되는 지시였지.”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김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래. 그 이종철 차장은 좀 이상해. 늘 웃는 얼굴로 꼭 사람들 뒤통수를 치잖아.”
“맞아. 그 사람 웃는 얼굴은 칼날처럼 번쩍여. 그래서 난 정말 싫어.”
“그런데 그는 실세야.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네가 와서 난 다행이다. 덜 심심하니까. 하하.”
김 대리는 창밖을 훑으며 휘파람을 삼켰다.
남자는 다시 망원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저 그림이 너무 좋다. 어쩜 저렇게 예쁘냐.”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그들의 관음증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시선이 방 한쪽에서 멈췄다.
검은 천으로 덮인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 끝을 살짝 젖혔다.
순간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굳었다.
저격용 소총과 거치대가 놓여 있었다. 검은 총열은 차가운 광택을 토하고 있었고, 조준경의 렌즈는 맞은편 건물의 유리창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총신 끝에는 길게 뻗은 소음기가 끼워져 있었다.
차가운 금속에는 아직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김 대리를 쳐다보았다.
“이건 뭐야? 저격 명령이 떨어졌어?”
김 대리는 가만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깊게 연기를 들이마신 뒤, 천천히 내뿜었다.
“글쎄… 준비하라고 하는 건, 결국 시간이 문제라는 뜻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린 어쩔 수가 없잖아.”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남자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내저었다. 말보다 강한 거부였다.
“난 못 해. 감시는 해도, 이건 아니야. 내일 팀장 만나서 얘기할 거야.”
김 대리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이 대리, 진정해. 우린 아니야.”
“우린 아니라고?”
“킬러는 따로 있어. 조금 전에 와서 셋업하고 나갔어. 또 오겠지.”
이 대리의 얼굴이 굳었다.
“누군데? 얼굴은 봤어?”
김 대리는 한숨을 쉬었다.
“아, 이 사람 참. 보여 주겠어? 모자 쓰고, 마스크하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왔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런데 냄새는 일본 쪽 같아. 눈빛이 아주 더러워.”
그때였다. 문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김 대리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빨리 모자 써. 마스크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얼굴을 가렸다.
그들은 국가정보원 요원이면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동창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서는 그 어떤 관계도 안전하지 않았다.
문은 숨을 삼킨 듯 소리 없이 열렸다.
한 사내가 서늘한 기운을 몰고 들어섰다.
단단한 근육질로 다져진 큰 키의 사내였다. 등산복 차림에 마스크를 쓴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한 발. 두 발.
그는 저격용 소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압축되듯 뭉개졌다.
순간 그가 이 대리와 김 대리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본 두 사람의 등줄기에 차가운 소름이 올라왔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천을 걷어 냈다.
시커먼 총열이 드러났다. 기름 냄새와 금속 냄새가 방 안으로 번져 나왔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총을 확인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탄창을 꺼내 장착했다.
철컥.
짧고 건조한 금속음이 울렸다.
이 대리의 목젖이 요동쳤다. 그는 침을 삼켰지만, 목 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사내는 태연했다. 마치 이미 수없이 반복해 온 일상처럼, 조용히 총의 각도를 맞추고 숨을 고르며 조준기를 잡았다. 총구에서는 희뿌연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 대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오늘인가 봐.”
김 대리의 얼굴에도 불안과 공포가 뒤섞였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가 있는데, 설마…”
그러나 사내는 이미 조준기를 눈에 댄 상태였다. 그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어깨와 등은 사냥감을 노린 짐승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이 대리의 입술이 떨렸다.
“저 눈빛… 저 살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렸다.
‘앗, 지금… 방아쇠에 손가락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숨결조차 차가운 총열에 걸려 멈춘 듯했다. 조준경 렌즈의 초점이 또렷이 맞아떨어졌다.
십자선 한가운데, 혜경의 얼굴이 걸렸다.
시커먼 총열은 그녀의 숨결을 잡아챘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한 채,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그녀의 숨결이 서서히 방아쇠에 걸린 사내의 손가락 끝에 포개졌다.
총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살아 있는 목표인 그녀의 표정은 따뜻했다.
살기와 온기의 잔인한 교합이었다.
그 순간 사내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조준경의 십자선이 그녀의 숨결에 맞춰 아주 조금 떨렸다. 그 찰나의 망설임이 총구의 떨림으로 다가왔다.
한편, 그 시각. 맞은편 거실.
창밖에서 드리운 냉혹한 저격총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숨어든 순간에도, 혜경의 시선은 테이블 위, 작은 유리병에 꽂힌 꽃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잎들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미 죽음의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꽃잎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향은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혜경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 향기의 끝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잊힌 적 없는 한 남자.
첫사랑.
아직도 어둠 속 어딘가에서 홀로 버티고 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움이 가슴 깊숙이 번져 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어느새 그녀의 의식은 아카시아 향을 따라 아득한 기억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끝에는 지리산의 깊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딘가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흘러 나왔다. 누군가의 손끝이 방아쇠를 울린 것이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