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핵심은 바로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고 설교자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세상의 온갖 뉴스들과 저속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만
보인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설교라고 해서 성경을 말씀을 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라는것은 아니지만,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세상 이야기도 있고
예화도 있고 설교자 자신과 주변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보조 매개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억에 남는
예화는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의 한국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설교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이 보이지 아니함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설교자의 용모와 제스츄어만 감상되고 그의 개인적인 체험담과 세상지식을
들으면서 설교자와 관계된 연상만을 계속하게 만든다.
그리고 회중은 거기에 도취되어 웃고 울다가 "기도합시다"의 구령에 따라
기도를 한 후 폐회 찬송을 부른다. 그들을 붙들고 오늘의 설교에서 하나님을
들었으며 만났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서적인 설교는 바우만의 충고대로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전달하여야 한다."
바우만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설교의 강조점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설교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지식과 업적을 한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는 작태를 종종히 볼수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 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업적 자랑등
그가 즐겨 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이 되며,,,설교뿐 아니라 교회 전반의 문제까지
독선적으로 변하여 점차 전횡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억지 '아-멘'만 유발시키면 자기의 어떤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식간에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설교자의 말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
오는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으며 계시지 않는 설교는 생명 없는
자기 선전이나 세상의 무엇을 광고하는 연설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 성도들은 속사람의 성숙과 변화가 없으므로
수십년을 출석해도 갈급해 하거나 미지근한 모습이며 더 심한 경우엔
세상적인 관점으로 교회를 평가하게 되여 교회의 문제나 분쟁을 유발하고
그때는 틀림없이 옛사람의 본색을 드러내서 파당을 짓고 목사를 공격한다,,,,
너무나 성도가 변한 모습에 땅을 치는 목사들이 많지만
다 자기의 설교로 인한 자업 자득임을 알지 못한다~
50-60년대 우리 나라가 전쟁과 기근과 혼란으로 한참 어려울 때에
목사들은 종말론적 설교를 많이 하면서 당장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자기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신 것처럼 소리 높여 설교했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모두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으며 세상을 비관하게 하고
공포와 공갈로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되고 말았다.
종말 즉 주님의 재림은 그 시간이나 정황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면
정황과 시간이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는 복음의 진수를 외면하고 혼란과 가난이 주님의 재림을
촉발하는 원인인 것처럼 설교를 하며 밤새워 재림을 기다리는 찬송을 부르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 공갈 협박 식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오직 살아 역사하시는 참된 복음만이 죽은 심령을 살리며
그런 역동적인 새 삶을 주는 말씀의 은혜를 성도들은 사모한다.
그런 설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구하는 설교자의 인격과 생활과
입술을 통해 선포될 뿐이다.
두번째, 거룩함이 없는 설교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데서 생긴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 수필 또는
교양 강좌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본문으로 봉독한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다. 그러므로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신경 쓸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전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은혜 받으려고 노력하는 성도에게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했다고 핑계치 말라,
그러나 오늘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확실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봉독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재원(財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다른것은 둘러리에 불과하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성경의 해설자가 아닌 삶속에서
실천하고 보여주는 봉사자가 될 것을 철저히 요구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진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희석(稀釋)시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세번째, 왜곡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의의가 있을 수 없는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 맞추어 해석되는 일이 많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사역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억지 춘향이 격으로 ,,혹은 아전인수격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자기들만의 종교적인 척도(尺度)로,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현상이 정말 두드러지게 만연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단에 속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 이용하여
자기들을 합리화 하기에 급급하다.
적당한 성구를 골라서 얄팍한 해석을 제시하여 성도를 미혹시킨다.
이런자들의 유형은 대체로 집단화하고 숫자를 늘려 자기들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며,,,조금이라도 의문시하거나 반대하는자를 가차없이
인신공격하고 무시하기를 가책없이 저지른다 .
왜곡시키는 설교중 대표적인것은 설교시간을 통해서 배꼽이 빠지라고
웃고 즐기는 것도 있다,,,
많이 웃긴 목사일수록 은혜를 끼친다고 하면서 능력자 인체 하는데,,,
정말 자기들이 하는짓이 하나님을 우습고 가볍게 만드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재미있고 많이 웃기는 사람이 은사자요 능력자라면 코메디언 성도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해보라,,,처음부터 끝까지 요절복통을 할것이다,
끝나고 나면 무엇인가 허전하며,,,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허한 마음만 남게 되는
경우가 뻔한데 당장에 목적을 가지고 그런사람을 강사로 부르는 교회가 너무 많다,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시편 42편 7절~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 하도소이다~ 라는 말씀의 뜻을 알고
혼적인 웃음과 개그같은 재미, 찔끔 눈물을 빼는 ,,,그때만 반짝거리는 만담가 같은 부흥사들의 행태가 수심 얕은 물속을 보는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하나님을 반드시 우선시 소개해야 하고
거룩성을 띤 말씀 선포자가 되야하고
말씀을 왜곡시켜 사람의 말을 만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