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문학 옛 기록을 되찾아
<십자가 고난 참여 여행기>는 본 카페를 개설하기 전에, 국제문협에서 운영해온 열린문학에 개제된 글이다.
이 글도 다행이 남아 있는 것은 김 석인본부장께서 다시 올려놓은 덕분이다.
예전의 기록들을 되찾아 보다가, 일찌기 나의 글이 우연히 발견되어 본란에 올려놓기 위해 가져오게 되었다.
다른 카페에도 여러 글들이 올려져 있기에, 가능한 틈나는 데로 옮겨 올 생각이다.
내가 쓴 글이나 사진들이 많이 있었지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게 아쉽다는 생각이들어 다시 가능한 모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쓴 글이 다소 어설프게 느껴져, 약간 수정 보완하여 올리고자 한다.
십자가 고난 참여 여행기
세월 호 침몰사고로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안산에서 진도까지 왕복 800km를 행군한다는 뉴스보도를 접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하는 분이라서,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 행군을 택하였다고 하며, 행군 마지막엔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을 알현하려는 계획까지 세운 것 같다.
그 아버지는 둘이나 되는 자식을 미쳐 꽃 피어보지도 못한체, 한꺼번에 억울하게 저 세상으로 보낸 일을 두고, 마치 자신이 죄인이라는 심정으로 그런 고난의 행군을 결심하였으리라.
세상 어느 부모치고 자식을 먼저 앞세워 보낸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생때같은 두 자식을 세월 호에 잃은 그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였으랴 상상해 보았다.
예로부터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고향 진도에서 세월 호 침몰사건이 터지던 그날로부터, 수백 명이 희생당한 그 일이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연일 통곡의 눈물이 온 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다른 추모와 애도의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 심정을 시와 노래로써 여러편 남겨 놓았지만, 그 남긴 작품 중 <눈물바다>라는 시를 여기에 옮겨본다.
눈물바다
내 고향 진도 땅에서
연일 통곡의 소리가 메아리친다.
여객선 세월호가
맹골 수로에 침몰되어
무수한 생명이 수장된 그날로부터
생때같은 자식 잃은 부모들
내 자식 살려 달라 아우성치고
수많은 날들 밤새워 울부짖으며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오라
한 가닥 희망의 끈 붙들고
간절히 간절히 염원하는데.....
누가 4월을 잔인하다 하였던가!
온통 산야에 봄기운 가득하고
화사한 꽃들 만발한 이 좋은 계절에
미쳐 피워보지도 못한
불쌍하고 가여운 어린 새싹들
차마 눈을 감을 수도 없겠구나
뛰어내리라!
한마디 하선명령 내렸다면
모두가 살았을 생명이련만
요동 말고 가만있으라는 그 말에
속절없이 목숨 잃은
아~ 한스러운 넋들이여!
진도바다엔
삼별초 한의 눈물이 흐르고
억울한 누명의 유배객 눈물에다
임진왜란과 6,25전란의
피맺힌 통한의 눈물이 흐르더니
또 세월호의 울음까지 더하다니
진도는 하염없는 눈물바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을 내려가고픈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내 개인적 사정이 이를 허락치를 아니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진도교회에서 열린 예배에 말씀을 부탁한다며 나를 초청하여 주었다.
초청을 받아놓고 제주도에 내려가 2주간 일정을 보내고, 서둘러 천안에 돌아와 고향에 내려가려던 길에, 앞서 말한 십자가 고난 행진
뉴스를 접하였고, 그 순간 나도 그 행군에 동참하리라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함께 동행 하는 길은 아닐 찌라도, 심정적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기위해 대중교통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평소에도 자주 오토바이로 다녀오긴 했지만, 금번 경우는 십자가를 짊어진 그런 마음으로 고난에 참여하리라 다짐한 것이다.
반면 그런 뜻을 세웠기에, 가능하면 오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성지들을 두루 살펴보리라 마음에 각오를 갖기도 했다.
출발은 2014년 7월 12일 아침 8시 10분전,
맨 먼저 찾은 곳은 김대건 신부가 최초에 발을 디딘 나 바위 성지ㅡ
나바위 성지는 논산 강경과 익산 경계지점에 위치한곳으로 천안에서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성지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전체를 한 바퀴 돌며 예수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담긴 조각상들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나 바위 성지는 내가 자주 찾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많은 깨달음을 주는 좋은 명상의 기도처가 되기도 했다.
이 성지에는 공교롭게도 정상 너럭바위 뒤편엔 불교와 민간신앙의 표상인 삼존여래상도 있어 매우 흥미로운 곳....
한참 휴식을 취하고 이곳에서 20분을 더 가니, 원불교 성지인 원불교 중앙총부가 눈에 들어온다.
중앙총부 주변엔 원광대학과 원광 보건대학, 원불교 원음 방송국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불교는 일찍이 고 김 일현 순교감과 각별한 인연이 있기도 하고, 원불교신앙으로 뿌리 깊은 이 중희씨 가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이 중희선생은 원광대 미술학장을 지내신 분이며, 그분의 모친은 지금도 100세가 넘으셨지만 고운 얼굴을 간직하시고 살아계시는 각별한 정성의 가정....
이 학장은 동갑내기 친구 사이이기도 하지만, 위로 두 분 누님들은 나와 더욱 가까운 인연을 맺고 있기도 하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朴重彬)선사께서 세운 일원상을 종지로 하는 신흥불교이다.
교조 박 중빈은 전남영광에서 출생, 어릴 때는 진섭(珍燮), 청년시절에는 처화(處化)라 불렀는데 호적명이 중빈이며, 소태산은 호이고 원불교에선 그를 대종사라 호칭한다.
원불교중앙총부와 원광대를 잠시 돌아보고, 다시 발길을 동학혁명의 선봉에 섰던 전봉준장군의 황토현 전적지를 찾기로 했다.
김제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을 막 벗어나 정읍에 이르니, 독립운동가 백정기 의사기념관이 나온다.
그냥 지나칠까 생각도 했는데, 문화관광해설사가 여기도 한번 돌아보고 가라는 권유에 발길을 멈추어보았다.
백정기의사는 윤봉길, 이봉창의사와 더불어 3의사로 불리는 독립운동가란다.
삼의사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다고 .....
생소한 사실에 놀라며 이후식해설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식 해설가는 정읍시청에 근무하신 분이라기에 내가 군대 시절 정읍내장사 용굴에 근무한적이 있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 하신다.
용굴은 임진왜란때 조선왕조 실록을 감추었던 곳이었다고, 내가 잘 몰랐던 이야기도 들려주기도 하여 무척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한 동안 함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 다음, 그곳에서 약 4km쯤 안쪽 길로 들어가노라니 황토현 전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엔 전봉준장군 생가 터가 있지만, 일전에 돌아본 곳이라서 생략하고, 이곳 전적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때마침 보성에서 왔다는 여중학생 일행과 동행하며 곳곳을 돌아보게 되었다.
김 남주 시인의 <황토 현에 부치는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도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우리는 그의 이름을
키가 작다 해서
녹두꽃이라 부르기도 하고
농민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수령이라 해서
동도대장,녹두장군
전봉준이라 부르기도 하니
보아다오,이 사람을
...........중략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백성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뜨게 하고
손과 손을 맞잡게 하여
싸움의 주먹이 되게 하고
싸움의 팔이 되게 하고
소리와 소리를 합하게 하여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이하 생략
황토현 전적지에서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도계서원이 눈에 띠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안 가볼 수야 없지 않는가!
한적한 시골마을 뒤편에 수백 년 된 고목과, 고색창연한 케케묵은 기와건물만이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여기까지 돌고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듯싶다.
그래도 점심은 나의 오랜 단골집인 내장사 초입에 있는 <가와 정>에서 하기로 하고 줄곧 그곳을 향해 달렸다.
가와 정에서 점심을 때우고, 내장산 단풍 길을 타고 장성 백양 산을 넘어 함평 쪽을 향해 달리던 중, 예상치 못한 큰 고생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기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계기를 통해 확인하면서, 주유소가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결국은 허사!
한참을 달리다 드디어 앵꼬가 났다.
아뿔사! 이런 낭패가....
짐까지 실린 오토바이를 그 뜨거운 삼복더위에 끌고 가려니 진땀이 솟았다.
그러나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희망을 걸고 가보았지만 가도 가도 주유소는 없었다.
시간을 보니 30여분이 흘렀다.
대책 없이 가던 중, 아무래도 119라도 불러보고 싶었다.
지금 이대로 가다간 일사병에 쓰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마침 그 지점은 함평과 해보의 갈림길이었다.
119에 전화하여 어느 쪽이든 가까운 곳 주유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답변은 희망적인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어느 쪽으로든 주유소가 가까운 곳에 없다하지 않는가!
제일 가까운 곳이 나산인데, 그곳까진 아직 30분쯤은 더 가야만 한다는 것....
아찔한 생각에 큰일 났구나 느끼면서도, 어절수 없이 그곳까지 가겠다고 하였더니 담당직원이 깜짝 놀란다.
통화를 끝내고 도리 없이 그곳까지 가려고 마음먹고 한참 가다가, 그늘이 있기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식 중, 나산 농협직원이 팻트병에 휘발유를 넣어 나를 찾아 달려오고 있지 않는가.
아~드디어 구세주를 만났구나!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119직원이 나의 안타까운 소식을 농협주유소로 고맙게도 연락을 취해준 것이었다.
즉시 119에 전화를 걸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척이도 힘이 들긴 했지만, 어떤 원망이나 짜증은 가져보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이 십자가 고난을 자처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나의 작정은 진도에 도착하여 세월 호 침몰사고로 한 서린 팽목항까지 가고자 했는데, 뜻밖의 고생으로 시간낭비를
치루었으니 계획이 영글렀다 생각되었다.
진도에 도착하니 오후 5시경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난후, 마침 조 은태라는 청년이 오늘 도보행진의 일행이 팽목에 들어왔다며 그곳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그 덕택으로 팽목까지 가보자하고 달려 가긴했으나, 어둔 밤이라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고 누구도 만나보지도 못했다.
하는수 없이 밝은 날 다시 찾아오기로 기약하고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비록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고, 그 아무것도 볼수는 없긴 하였지만, 말없이 희생된 영령들을 위한 기도라도 할 수 있어 좋았고,,
조건적이나마 세월호 현장인 팽목까지 갈수 있었던 게 무척이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고난의 여행은 이틀후, 또 다시 전개되었다.
예배를 마치고 식구들과 담소중에, 정 선두라는 후배가 낚시를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왔다.
후배는 One of hope 라는 배를 가지고 있다며,농어낚시를 가보자고 했던것이다.
낚시는 알라스카나 남미 판타날, 그리고 미국 허드슨 강에서 즐겨본 경험이 있기에 구미가 당겨 선듯 그러기로 약속을 하였고...
사촌 동생집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새벽 일찍 해남 땅끝쪽을 향해 달렸다.
어슴프레한 안개 길을 뚫고 진도대교를 지나,해남 어란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해남은 20여년전에 2년 남짓 살았던 곳이기에, 대충 지리가 익숙하긴 하였지만,그래도 시골 길은 낯설기만 했다.
어란을 가자면 문내면과 황산면,그리고 화산면과 현산면을 지나,송지면에서 곧장 달리면 송지해수욕장과 땅끝에 이르게 되지만,중간 지점에서 우측으로 갈림 길이 나온다.
어란에 도착하여 후배를 찾았더니, 이미 뱃전에 나와 있었다.
나는 빈손으로 가야만 했는데,점심 도시락과 미끼등 모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서....
어란에는 수많은 작은 어선들이 낚시를 하려고 정박중에 있었고, 이미 배를 띄워 저만치 나아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많은 배들이 있지만, 우리 배가 최고라고 우쭐하며 자랑한다.
그럴 법도 하리라....
우선 배가 날렵하고 멋지게 생긴데다,배가 만일 전복된다 해도 큰 걱정이 없는 배이기 때문이다.
신바람에 젖어 배를 몰고 바다 깊숙이 들어갔다.
주변에 작은 섬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더없이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해남과 완도,진도 사이에는 수많은 섬들이 널부러져 있다.
진도와 완도의 섬들은 대체적으로 많이 가보긴 하였지만,해남에 있는 작은 섬까지는 미쳐 다 돌아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낚시도 좋지만, 미쳐 돌아보지 못한 도서들이 눈에 들어오면, 사진에 담아두려 사진찍기에 바빴다.
그때 찍어둔 사진들을 어딘가에 저장해 두었는데,여기 가져 오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그건 그렇고,기왕 낚시를 나왔으니 고기를 잡아 올려야 장땡인데,영 고기가 물리지를 않는다.
나보다는 선수인 후배도 안 물리긴 마찬가지.....
한참을 헛탕치며 이곳 저곳 장소를 옮겨 다녀봐도 잔챙이 몇마리 건졌을뿐 우리가 생각한 농어는 도대체 감감 무소식....
그러다 후배의 낚시에 농어가 걸렸다.
아주 큰 대어 급의 농어가 한마리 첫 마수를 하게해준다.
내 낚시에 걸리진 않았지만,내가 잡은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시작된 농어낚시가 나도 한 마리 보태고, 후배는 서너마리 낚아 올려 그런대로 체면은 유지해준 셈이다.
낚시를 마치고 후배는 나에게 내가 잡은 것 이상으로 고기를 챙겨준다.
사양하였지만,동생가족과 함께 좋은 시간 가져보라면서......
낚시는 이렇게 행복한 시간들로 이어졌지만, 집에 돌아오는 귀로에 십자가 로정이 펼쳐지고 말았다.
사고 지점은 황산면을 막 지나면서이다.
오토바이 계기를 보니, 황산 면사무소쪽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주유할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와 10여분 달리는데 그만 앵꼬다.
그 사이 주유소가 있을성 싶은데 반대편에만 있고, 나의 행선지 방향에는 전혀 없질 않는가!
반대편은 중앙선을 넘어갈수 없도록 길이 완전 막혀있었고.....
답답한 마음이지만, 그래도 잠시 가면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오토바이를 끙끙거리며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라고 생각했던 그게 착각이었다.
문내면을 지나 진도대교까지 나의 행선지에는 주유소가 도대체 없었다.
반대편에는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지만,그쪽으론 아예 넘어갈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었고......
나는 애당초 십자가고난에 동참하겠다는 그 각오를 좀더 뼈저리게 체험토록 하려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해서 마음만은 편안했지만,그 오랜 시간 어둠속을 헤쳐가면서 무거운 오토바이를 끌고 갔던 그때 일은 참으로 끔찍하기만 했다.
진도 대교를 넘어서면 주유소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묵묵히 참고 그곳까지 끌고 갔는데,주유소가 이미 문을 닫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 주유소까지는 끌고가는 시간이라면 한 시간은 더 걸려야만 하다.
생각한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주유소 안집에 들어가 문을 두들겼다.
누가 이시간에 문을 두들기냐는 듯 심히 못 마땅한 눈치인듯 싶었지만,나는 하소연을 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왜 벌써 문을 닫았느냐고 했더니,이시간에 차량 통행이 많지않아 샷다를 내렸단다.
귀찮긴 하였겠지만 천만 다행으로 주유를 해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내려갈때 그토록 험한 고생을 치뤘는데도, 다시 이토록 예상치 못한 고난의 여행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숱한 여행 길에서 수많은 역경들을 체험하기도 하였지만,오토바이 앵꼬로 두번씩이나 큰 고생을 치룬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