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미자님 처럼 뛰어난 가수로 사랑을 받는 한국계 가수 입니다.
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1937.05.29~1989.06.24
일본의 가수로, 본명은 카토 카즈에(加藤和枝)로 1938년에 생선가게를 하는 아버지 가토 마스키츠(加藤增吉)와 어머니 기미에(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났다.
9살의 나이에 데뷔하여 근 40년간 일본 가요계의 신(神)으로 군림하였다.
생전에 공식적으로 한국계임을 밝힌 적은 없으나, 재일 2세라고 알려져있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작곡가 손목인이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술회했던 적이 있으며, 우에다 타케히코(植田剛彦)가 쓴 책, <재일(在日)한국인의 실력>에서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고 쓰였져있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正文)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 꿈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했다고 한다.[1]
토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서는,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 시절 일본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正男)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 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는데, 이 곡에서도 '부산항'이란 단어는 일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이라고 불렀고, 후렴부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外한국어로 불렀다.(단, 이것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설과 직접적인 연관사항이 없다. 다른 일본 가수들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도 대부분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분은 한국어 그대로 부른다.)
향년 52세의 이른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장례식은 일본 전 방송사에 생중계가 되었고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만 무려 3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규모면에서도 웬만한 국장, 국민장에 준하는 수준으로 치뤄졌다. 일본 국민들은 5달 전 히로히토 덴노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큰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진정한 쇼와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슬퍼하였다.
일본 가요계에 있어서는 레전드로, 일본 만화계에 비유하면 데즈카 오사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인물을 찾자면 이미자, 패티 김을 들 수 있겠다. 실제로 이미자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미소라 히바리'로 알려져 있다.
사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川の流れのように(냇물이 흐르는 것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2]
교토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미소라 히바리관'이 설립되었다.
그녀의 일생을 그린 미소라 히바리 탄생이야기(美空ひばり 誕生物語)《TBS테레비》라는 드라마에서 그녀의 역을 일본의 유명 가수, 여배우 우에토 아야가 맡았다.
마츠우라 아야의 '草原の人'는 생전에 그녀가 작사한 가사에 음을 덧붙여 만들어진 곡이다.
일본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여가수로써 현재 그 계보는 여러가지를 뻗어나가며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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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동포설을 한국측 언론이나 재일동포들이 만든 도시전설로 취급하는 일본인들도 있다. 본인이 한국계임을 외부에 밝힌적이 없기 때문에... 진짜로 한국계와 무관하거나, 아니면 역도산처럼 일부러 밝히지 않았을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솔직히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가 한국계라는 사실이 일본인 입장에서는 좀 껄끄러울 것이다 따라서 미소라 히바리가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재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것으로 보인다.
[2]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가수 이화숙 씨가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이건우 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