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하이 청산터우에 있는 진시황像. 서불(오른쪽)이 진시황과 이사(왼쪽)에게 삼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사 李斯의 목표는 오직 권력이었다.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시대에 황제의 측근으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도 죽이고, 수백 년의 역사를 불태웠고, 수백 명의 유학자를 생매장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기회’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기회는 달콤한 당의정으로 포장된 몰락과 죽음의 독약이었다. 시황제에게는 충신이었지만 역사에는 간신과 역신으로 기록된 이사를 통해 ‘기회와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배운다.
550년간 혼란의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주인공은 진 秦나라 왕 영정이었다. 그는 전국시대 6개 경쟁 국가를 멸하고 패자가 되었다. 그는 하늘 아래 처음 있는 칭호를 원했다. ‘왕 王’은 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심지어 제후국들이 봉사한 주 周나라의 호칭인 ‘하늘의 아들, 천자 天子’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영정은 ‘세상에 처음 등장한 삼황오제 三皇五帝의 후계로 만세 萬歲를 여는 첫(始) 주인’이란 뜻의 ‘시황제 始皇帝’가 되었다. 시황제는 불로불사의 신이 되어 자신의 제국을 천년만년 통치하고 싶었다. 해서 만리장성을 쌓고 수많은 방사와 점복술사를 동원해 불로초와 영약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천하를 얻었어도 그의 바람대로 진나라는 만세를 누리지 못하고 2세에서 그 명맥이 끊어졌다. 영정이 진왕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해 황제가 되고 그의 아들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해 멸망의 길을 걷기까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있다.
‘이사’, 그는 진왕 시절부터 영정을 보필해 천하쟁패를 가능케 한 최고의 책사였고, 시황제 치하에서는 승상으로서 나라의 경영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사는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해 호해를 황제로 추대하는 역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 최후는 비참했다. 함께 역모를 꾸민 환관 조고의 음모로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을 당했다. 그의 가족과 식솔 모두 죽어 이사의 후손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사는 사상이나 행적으로 볼 때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의 생은 한마디로 ‘권력을 향한 집념의 행군’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책략과 폭정을 일삼는 등 간신을 넘어 역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에게 배울 게 있는 것이다. 이사가 살면서 만난 수 많은 기회와 위기들, 그 순간에 그는 무엇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우리는 ‘이사의 실패 처세학’을 배워야 한다.
▶순자에게 배우고, 여불위의 후원으로 진 왕실에 들어가다
이사는 기원전 200년대 초나라 상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는 아니었다. 그는 관청의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 이사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쥐였다. 분명 같은 쥐인데 변소와 곳간 즉, 사는 곳에 따라 행동도 모습도 다른 것이다. 변소에 있는 쥐는 더러운 것을 먹고, 모습이 더러우며 더구나 사람은커녕 개가 지나가도 두려워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곳간에 사는 쥐들은 모습도 깨끗하고 개는커녕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사는 깨달았다.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남은 변소와 곳간에 사는 쥐처럼 환경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야심이 있고 지금의 처지를 바꾸고 싶으면 사람 스스로 그 환경을 바꾸고 공부를 해야 한다.”
이사는 위대한 사상가 순자를 찾아가 그에게 유가를 배웠다. 후대에 이사의 정치 형태와 이론적 배경을 법가로 구분했지만 이사 자신은 ‘나는 유학자’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순자에게 배운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이때 같이 공부한 이가 <한비자>의 저자 한비이다. 유학의 대가인 순자 밑에서 ‘법가의 근본을 마련한 한비’와 ‘법가의 실무 활용법을 완성한 이사’가 배출된 것은 공교로운 일이다. 실력은 한비가 앞섰지만 이사 역시 한비를 뛰어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권력자를 찾고 있었다. 그의 눈에 강한 세력의 진나라가 들어왔다. 이사는 스승 순자에게 물었다.
“스승님에게 인의를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세는 강한 군대의 진나라가 승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진나라의 승리는 인의의 승리가 아닌 무력과 책략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너는 어찌 근본에서 이치를 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지엽적인 것에서 배움을 얻으려 하느냐?”
“제 재능을 발휘해 보려고 합니다. 진나라로 가 천하쟁패의 주연이 되겠습니다.”
이사는 진나라로 떠났다. 당시 진나라는 장양왕 치세였지만 실권자는 여불위였다. 여불위는 장양왕을 왕위에 올린 절대 공신이자 천하제일의 거부였다. 그는 3000명의 식객을 두고 있었다. 영리하고, 정세판단이 빠르고, 꾀가 있는 이사는 여불위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247년, 장양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13세의 영정이 왕위에 올랐다. 여불위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세간에는 ‘여불위가 영정의 모후인 선태후와 통정해 영정을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불위는 어린 왕의 옆에 감시병이자 시종을 두었다. 눈치 빠른 이사가 적임이었다. 여불위는 이사를 왕의 시종인 낭관으로 천거했다. 이사는 드디어 실세 여불위를 등에 업고 최고 권력자인 왕의 측근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이사가 역사의 흐름에서 한시도 권력을 향한 욕망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이다.
▶반간계와 이간질, 정보전으로 상대국을 무력화 시키다
기원전 237년, 여불위의 막강한 권력도 조금씩 그 세를 잃어갔다. 여불위의 대체제가 생긴 것이다. 바로 노애였다. 노애는 본래 저잣거리 건달이었다. 선태후의 정부 노릇에 지친 여불위가 노애의 정력이 남다름을 알고 선태후에게 노애를 추천한 것이다. 선태후는 노애에게 푹 빠졌고 노애는 신선놀음에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 급기야 선태후가 노애의 아들을 출산하자 노애는 자신의 아이로 진의 왕통을 잇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진왕 영정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23세의 혈기방장한 권력자이자 타고난 영웅이었다. 겨우 건달에 황후의 정부 노릇이나 하던 노애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노애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진왕 영정은 노애와 그의 소생, 식객과 관리 등 수천 명을 모조리 죽었다. 여불위는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진왕의 측근에 있던 이사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 천하의 기운은 진나라에게 쏠렸고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시간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진나라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도모하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웠다. 내란을 잠재우고 군사력을 극대화한 진왕 영정은 출정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사가 나섰다.
“지금 왕께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것은 요리사가 솥뚜껑에 있는 먼지를 털어내듯 손쉬운 일입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제후국들은 서로 합종하여 힘을 비축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결단을 내리고 천하를 통일하셔야 합니다.”
진왕 영정은 이사를 자신의 비서실장 및 경호실장 역할, 즉 궁중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장사 직에 임명했다. 그리고 내치를 다지며 천하통일의 전략을 수립케 했다. 이사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했다. 그것은 반간계와 이간질이었다. 이사는 6개국에 첩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상대국 관리를 분류했다. 포섭이 가능한 자는 뇌물을 주었고, 포섭이 불가능한 자는 반간계와 모함으로 힘을 잃게 하고 또 강경한 인물은 암살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나라 재상은 후승이었다. 그는 이사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승은 진나라 정세를 살피기 위해 간첩을 보냈다. 이사는 이 간첩들의 명단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들을 제나라에서 받는 금액보다 더 많은 금품을 주고 포섭했다. 이들은 후승에게 가 “제나라는 합종에서 탈퇴하고 전쟁 준비를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제후국에 대한 원조도 중단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우리 제나라를 노리고 있습니다”라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사의 전략은 탁월했고 그 효과는 컸다. 제나라를 제외한 5개국은 차례로 진나라에게 정복당했다. 마지막 남은 제나라 역시 저항할 힘을 상실했다. 후에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 수도 임치를 공격할 때 제나라 백성들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처럼 이사의 교란 전술은 10만 대군의 공격력과 버금가는 무서운 전략이었다. 진나라는 9년 만에 천하를 통일했다. 정보전으로 내부를 붕괴시킨 후 막강한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이사의 계책이 빚어낸 완벽한 승리였다.
▶이사, 동문수학 천재 사상가 한비를 모함으로 죽이다
진왕 영정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지자 여불위는 늙은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결국 그는 자살했다. 진왕 영정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소문의 진원지를 영원히 묻어버린 것이다. 진앙은 이사를 신임했다. 그를 다른 나라에서 온 대신 즉 ‘객경 客卿’으로 임명하며 정위 직책을 맡겼다. 정위는 비록 승상이나 어사대부보다 직급은 낮지만 법의 운용과 적용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실세만이 임명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행운은 위기라는 그림자를 갖고 있다. 승승장구하던 이사에게 위기가 닥친다. 바로 한비의 등장이다. 한비는 이사와 순자 문하의 동문이다. 그가 법가의 사상을 정리한 책 <한비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특히 진왕 영정은 이 책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비자>의 법가는 ‘군주의, 군주에 의한, 군주를 위한’ 이론서였다. 진왕 영정은 “내가 한비를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할 정도로 한비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가 진왕에게 온 것이다. 이사는 전전긍긍했다. 실력에서 한비를 당할 수 없는 이사의 유일한 무기는 바로 모략과 이간질이었다. 이사는 왕의 측근인 요가와 담합했다. 그리고 진왕 영정에게 한비를 모함했다.
“한비는 한나라 사람입니다. 그가 진나라에 와 위로는 왕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한나라를 위한 정책일 것입니다. 진에 온 것은 한나라를 보존하고 그 공으로 한나라에서 대우를 받기 위함입니다. 즉 진나라와 한나라가 친해질수록 양쪽에서 모두 이득을 보고 이를 통해 출세를 하려는 것이 한비의 목적입니다. 신은 한비가 그럴듯한 웅변과 얕은 재주로 감히 군주를 속일까 걱정이 됩니다. 한비는 장차 진나라의 화근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진왕 영정은 이사의 말을 들었다. 한비는 영문도 모르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 한비는 진왕에게 면담 신청을 했으나 이사가 진왕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를 막았다. 그리고 이사는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한비는 몇 번에 걸친 진왕 면담 신청이 좌절되자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그리고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 무렵 진왕은 한비를 사면하려 옥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한비는 이미 죽은 후였다. 이때가 기원전 233년이다. 이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즉 권력욕으로 동문수학한 명망가 한비마저 죽일 정도로 잔인하고 치밀한 성품이었다.
진나라 공채 관리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다
이사에게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한나라에서 온 정국이란 책사가 있었다. 그의 실체는 한나라의 간첩이었다. 정국은 진왕에게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려면 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개간사업을 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진왕은 그의 말대로 대규모 운하사업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돈만 쓰고 국력만 낭비했다. 진왕은 분노했다. 이때를 노려 진나라 토박이들이 일제히 외국에서 온 관리, 유세객, 책사들의 추방령을 주장했다. 즉 본국 출신과 타국 출신 빈객들의 세력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주 타깃은 이사였다. 진왕은 ‘텃새’의 손을 들어주고 ‘철새’들은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 즉 ‘축객령 逐客令’을 내렸다. 이사 역시 철새였다. 당장은 아니지만 얼마 후 짐을 꾸려 진나라를 떠날 처지가 된 것이다. 이사는 억울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공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정면 돌파를 선언하고 ‘간축객서 諫逐客書’를 진왕에게 올렸다.
“진나라 효공은 상앙을 초빙해 변법을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혜왕은 장의의 합종 계책으로 천하제일의 땅을 차지했고, 소왕이 외척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도 타지에서 온 범저의 공입니다. 목공은 유의 유여, 완의 백리해, 송의 건숙, 진의 비표와 공손지를 맞아 패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을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배척했다면 지금의 진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군주께서 곁에 두고 있는 천하의 진기한 보물들, 제례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연주하는 남쪽에서 온 악사들, 군주께서 아끼시는 도자기들 이 모든 것이 전부 외지에서 온 것들입니다. 일국의 군주를 넘어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넓은 아량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태산은 흙 한 줌도 양보하지 않아서 그리 높고, 장강은 작은 물줄기 하나도 버리지 않아 그렇게 넓은 것입니다. 천하의 인재를 모두 거느리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부릴 수 있어야 진정한 제왕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는 이 간언서에서 ‘산불양토 山不讓土 해불양수 海不讓水’를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축객령을 단숨에 뒤엎는 논리정연한 놀라운 명문이었다. 진왕은 이사의 명문에 감동했다. 그리고 바로 축객령을 취소했다. 이사의 결단력과 승부사적 기질, 진왕의 천하통일에 대한 야망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처세학 1 | 친화력과 실력만이 공채 출신 텃새를 이길 수 있다
직장에 입사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정년퇴직을 맞을 수 있다면 직장인에게는 그야말로 ‘천복’일 것이다. 하지만 직장은 능동적이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조직이다. 더 좋은 조건 때문에, 직장 동료와의 불화로 인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직장인은 회사를 옮긴다. 레드카펫을 밟고 회사를 옮겨도 ‘철새’라는 딱지가 붙는다. 낯선 환경, 처음 접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공채 출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와 차별은 감수해야 한다. 물론 혜택도 있다. 밀월기간처럼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도 하고, 약간의 실수도 눈 감아 준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생각보다 짧다.
방법은 ‘무조건’이다. 무조건 텃새들과 접촉하고, 무조건 실력을 발휘해야 하고, 무조건 ‘적응 완료’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녀야 한다. 미국에 진출한 야구선수들을 살펴보자. 박찬호, 류현진, 강정호, 추신수, 박병호처럼 연착륙에 성공한 선수들의 특징은 친화력과 실력이다. 이들은 붙임성 좋게 기존 선수들과 어울렸고 그들과 벤치에서 장난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일 정도로 살갑게 다가갔다. 그들과 다르다는 이질감을 없애야 하고, 그들의 문화와 행동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먹는 음식조차 잘 먹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실력을 항상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딱 2배 이상 힘들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관리처럼, 평범한 책사처럼 행동했다면 천하 영웅 시황제의 눈에 들었을 리 만무하다. 이사는 시황제를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그것이 비록 아첨, 간교함, 반간계 등 부정적인 것들이었지만 그것조차 사용 못하고, 혹은 사용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많은 미생들이 존재하는 것도 직장의 현실이다.
▶이사, 백가의 사상을 말살하는 역행을 저지르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했다. 무려 550년간 계속되던 분열과 혼란이 끝난 것이다. 진왕은 시황제가 되었다. 이사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그는 천하 경영 계획을 수립했다. 우선 군현제였다. 반대도 거셌다.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겁 등의 중신들이 주나라 봉건제를 본받자고 시황제에게 권했다. 이사는 “망한 나라의 제도를 본받을 필요가 없다”고 시황제를 설득해 군현제를 완성했다. 군현제는 행정단위를 군과 현으로 나누는 제도이다. 진나라는 36개 군을 두고 그 아래 현을 두었다. 군에는 군수, 군위, 군감을, 현에는 현령, 현위, 현승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기 행정, 군사, 감찰을 담당해 권력을 분리했다. 즉 한 사람의 지방관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이들 관리는 모두 황제가 임명했다. 시안의 궁정에서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까지, 시황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통치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친족들에게 ‘친왕 親王’이라는 이름뿐인 작위를 주고 실제 권력을 주지 않았다. 이것 역시 이사의 계책이었다.
“폐하, 주나라는 왕의 형제나 친족을 제후국으로 임명해 통치했습니다. 이들은 대를 내려가면서 혈족 의식이 없어지고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주황실의 권위는 추락하고 결국 주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황족은 금전적인 보상만 해주면 됩니다. 그들에게 실제적인 권력을 주면 안 됩니다.”
이후 시황제는 도량형을 실시하고, 화폐도 만들고, 도로와 수레바퀴의 폭도 규격화하고 북쪽의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도 쌓았다. 하나씩 통일 왕국의 토대를 마련해 나간 것이다. 기원전 213년, 시황제는 신하들을 모아 주연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제나라 출신 순우월이 갑자기 봉건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폐하, 주나라가 천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봉건제를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아들, 형제들이 제후가 되어 황실을 보호하고 경영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의 아들, 형제들은 모두 벼슬 없는 필부입니다.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느 누가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폐하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시황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번에도 이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시황제의 정면에서 순우월의 주장을 반박했다. 군현제를 봉건제로 바꾸는 것은 단순한 지방 조직의 개편이 아닌 권력 다툼이기 때문이다. 즉 법가의 통치시스템을 유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폐하, 오제, 하, 은, 주 시대를 돌아보면 제도가 같거나 옛것을 무조건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민심을 따라 독자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천하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폐하의 공적이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이는 모두 법가에 뿌리를 둔 폐하의 통치 철학을 시대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아직도 옛것을 답습해 봉건제 제후국을 만들자고 하는데 그러면 각 제후국은 또다시 유세객들을 불러 서로 경쟁하는 옛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이는 통일왕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사는 한 발 더 나갔다. 경쟁 그룹인 유학자의 뿌리를 뽑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그는 순우월과 같은 유학자들을 방치하면 위정자를 비난하는 무리들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이사는 그들의 사상적 뿌리인 백가의 저서들을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황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사는 진나라에 관한 기록물을 제외한 나머지 6국의 모든 기록물과 법가를 제외한 모든 사상서를 한데 모아 불태웠다. 이것이 바로 ‘분서 焚書’다. 역사적으로 분서는 반문명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를 기안하고 집행한 이사는 역사를 역행한 자로 후대에 기록되었다.
시황제의 야심은 점점 그 도를 넘어섰다. 그는 ‘불로불사 不老不死’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수많은 방사들과 점을 치는 자들이 궁정을 점령했다. 이들은 온갖 감언이설로 시황제를 속였다. 많은 돈과 노비를 얻어 불로초를 구해온다고 떠났지만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서복에게 3000명의 남녀와 보물을 주고 불로초를 구해오라 명령했지만 서복은 이들을 이끌고 도망가 버렸다. 그 무렵 후생과 노생이란 방사들이 또 도망을 갔다. 이들은 금품을 챙겨 시황제 곁을 떠나면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진시황의 성정이 본래 폭력적이고 괴팍해 아무도 신임하지 않는다. 더구나 국가 정사도 자기 마음대로 펼치고 법을 집행하는 옥리만 늘어났으며 충직한 관리와 박사들은 냉대를 받고 있다. 대신들은 보복과 죄가 무서워 시황제에게 감히 간언을 못하고 있다. 어찌 이런 폭군 황제에게 불로장생 영약을 구해다 줄 수 있겠는가? 설사 그 영약이 있다 해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황제는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후생과 노생, 두 방사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잡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사가 이 명령을 집행했다. 방사, 점복술사를 비롯해 많은 유학자들이 잡혀왔다. 모두 460여 명이었다. 이사는 이들을 생매장해 죽였다. 이 사건이 바로 ‘갱유 坑儒’이다. 앞서 분서와 더불어 진 시황제의 잔혹함과 이사의 간교함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다. 이사는 방사들을 조사하면서 이에 동조한 유학자들을 대거 죽임으로써 문화와 학문에 탄압을 가한 것이다. 이사의 명분은 ‘통일’이었다. 제국, 문화, 학문, 통치이념은 물론이고 측근의 권력자도 오직 자신만이라는 즉 ‘단 한 가지로 해야 한다’는 그릇된 신념의 결과인 것이다.
▶시황제에게는 충신, 역사에는 간신
기원전 210년 7월, 시황제는 순행 도중 사망했다. 시황제의 곁에는 승상 이사,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가 있었다. 시황제는 유서를 남겼다. ‘북방에 가 있는 장남 부소는 3만 대군을 몽염에게 맡기고 급히 와 내 유해를 맞으라. 그리고 장례를 주관하고 차기 황제에 등극하라’였다. 간특한 조고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호해를 설득하고 이사에게 달려와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이사도 조고의 끈질긴 설득에 뜻을 접었다. 유서는 ‘부소는 불효하고 몽염은 불충하니 즉시 자결하고 내 후사는 호해가 잇는다’로 조작되었다. 부소는 효성스럽게도 자살하고 호해가 진나라의 2세 황제로 등극했다.
이사가 조고의 제안을 처음에는 반대했던 것은 학자적 양심일 것이다. 하지만 조고의 설득과 협박에 자신의 뜻을 거두었지만 실상은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면 차기 승상은 몽염이 되고 평소 유가에 뜻이 있던 부소에 의해 자신은 내쳐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사는 “내가 조고의 제안을 반대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판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 죽을 수도 없으니 어디에 내 목숨을 맡겨야할 것인가”라며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사와 조고는 협력했다. 하지만 조고는 이사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가 여기서도 적용된 것이다. 인품과 능력 그 어느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2세 황제는 그야말로 흥청망청했고 정사는 모두 조고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조고의 권력은 그야말로 황제 이상이었다. 유일한 견제 세력은 이사였다. 기원전 208년 이사는 우승상 곽거질, 장군 풍겁 등과 함께 황제에게 아방궁 축성 중지를 건의했다. 하지만 이들의 상소는 황제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조고는 이미 황제의 옆에 인의 장막을 친 것이다. 이에 곽거질, 풍겁은 자결하고 이사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조고는 이사를 모함했다. 이사는 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사는 결국 ‘초나라와 내통해 반란을 꾀했다’는 죄를 시인했다. 황제는 이사에게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형을 명령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이사가 한비에게 저질렀던 모함과 악행이 그대로 이사에게 닥친 것이다.
함양 시장 바닥에서 이사는 온 가족과 함께 요참형을 당했다. 이사는 둘째 아들에게 “너와 함께 누런 개를 끌고 고향인 초나라 상채 동문에서 토끼를 사냥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겠구나”하고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사와 그의 삼족은 모조리 죽으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사가 죽자 조고의 세상이 되었다. 조고가 사슴을 바치면서 황제에게 “폐하, 이것이 바로 말입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아무리 보아도 사슴이었다. 주위에 물었다. “이것이 말인가, 사슴인가?” 주위에 있던 대신과 시종들은 모두 한 대답을 했다. “폐하, 이것은 말입니다.” 그들에게 황제는 조고였던 것이다. 역사는 이 일화를 ‘지록위마 指鹿爲馬’라 하여 무능한 군주와 간악한 간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진나라는 급격히 멸망의 길을 걸었다.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장군들과 대신들은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시황제가 만년을 설계했던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이사에게도 공은 있다. 시황제를 보필해 6개국을 정복하고 천하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점, 그리고 통일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각종 법령과 제도를 만든 점 등은 이사의 공로다. 하지만 이사는 그 공로를 넘어 간신의 길을 걸었다. 신념이라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은 야만적인 ‘분서갱유’는 이사의 개인적인 야망이 빚어낸 비극이다. 또한 황제의 유서를 위조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은 아무리 조고의 협박이 거셌다 하더라도 또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사의 추한 욕망의 결과인 것이다.
이사는 분명 범인(凡人)은 아니다. 하지만 한비를 죽이고,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해 인간의 사상은 물론 생각까지 통제하려 한 것, 백성보다 시황제의 뜻을 거슬리지 않으려 아첨을 일삼은 것,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오점이다. 즉 이사는 시황제에게는 분명 충신이었겠지만 역사의 충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 #처세학 2 | 기회와 위기, 직관으로 판단하지 말라
기회는 온다. 그 기회 앞에서 누구는 주저하며 득실을 따지고, 또 누구는 과감하게 손을 뻗친다. 직장인에게 기회는 무엇일까? 회사나 직장 상사가 관심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부터, 회사를 옮기는 것, 또 실세 상사와 사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것도 모두 기회일 것이다. 또한 A라는 상사의 손을 잡고 B상사를 공격하는 데 선봉에 서는 것도 나중에 공을 다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회는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고 그 끝이 모두 해피엔딩은 아니다. 기회가 곧 위기일 수 있다는 양면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누구나 로또를 사지만 당첨 확률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적다. 즉 기회로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큰 것일수록 그만큼 위험 부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모험과 도전이라 단어들이다. 힘을 솟게 하고, 피를 뜨겁게 하는 이 단어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몇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최고 실세와 호형호제 할 수 있는 기회 등 달콤한 유혹의 향이 짙을수록 당신은 의심해야 한다.
‘이런 기회가 왜 나에게 온 것일까?’를 다각도로 체크해봐야 한다.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기회라는 이름의 눈덩이를 부풀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기회는 오면 잡아야 한다. 하지만 ‘진짜 기회’는 시간이 지난 후 결과가 나온 뒤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것이 기회였어’가 정답이다. 결과는커녕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기회라는 이름표를 달고 당신에게 온 것은 100%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진짜 대박 기회였고 그 열매를 동료가 차지했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말자. 그 순간에 지킨 원칙은 당신이 또 다른 기회를 만날 수 있는 예약표가 될 것이다. 물론 직장은,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생산되는 곳이 아니다. 직장은 금광이 아니다. 자신의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일에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들의 집합소이다. 그곳에 여왕개미는 애석하게도 단 한 마리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