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된 패잔병
박경임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순간 6월의 하늘은 눈부셨다. 병실은 하늘이 바라보이는 밝은 곳에 자리해서 나는 망연히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깊은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틀어놓았던 태블릿 PC의 독경 소리도 전원이 다 되었는지 꺼져버리고 별님 방이라 이름 지어진 호스피스 병동의 독방은 내 숨소리도 숨을 수 없을 만큼 적막했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의식이 가물거리며 금방 숨을 거둘 것 같았다. 그래서 앰블런스를 대절해 요양병원에 있던 엄마를 모셔와서 아버지 앞에 앉혔는데 엄마는 너무 마르고 볼품없어진 아버지를 몰라보고 자꾸만 모르는 사람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거의 우상이어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였다. 그런데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가늘게 숨을 쉬는 모습이 영 다른 사람 같았나 보다. 치매가 심해진 엄마는 아버지의 예전 모습을 가슴에 안고 사는 것 같다. 그렇게라도 엄마를 만나고 손자들까지 다 다녀간 후 아버지는 독경 소리가 끝나자 아무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다.
혼자 임종을 하고 황망하고 몸에 기운이 빠져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죽음을 바라보기는 처음이라 무서울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아주 평온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다시 되돌아온 남동생과 함께 의사의 감정 없이 읽어 내려가는 사망 선고를 듣고,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틀 전부터는 진통제도 잘 듣지 않아서 죽여달라고 통증을 호소하던 아버지는 이제 아무런 고통이 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커피믹스에 설탕을 두 개쯤 더 넣을 정도로 단 것을 많이 좋아해서 당뇨라면 몰라도 담배도 끊은 지 오래인데 폐암이라니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프다 해서 병원에 입원해 검사하니 폐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니 무심한 내가 못내 죄스러웠다. 병원은 수시로 모시고 다녔는데 위 검사만 한 것이 잘못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옮겨가는 앰블런스를 따라가며 내게 남은 아버지를 기억해보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법대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서 화랑무공훈장도 받았으나 월북한 매형 탓에 번번이 고시에서 낙방하고, 결국은 고시를 포기해야 했다. 기업 입사도 어려웠던 연좌제가 있던 시절의 불운아였다. 생계를 위해 조그만 구멍가게를 열고 흑석동 비탈길을 연탄 지게를 지며 오르내리던 모습이 아프게 남는다. 가끔 먼 곳을 응시하며 내뿜던 담배 연기에 묻어나던 울분을 나는 기억한다. 여섯식구가 한 방에 살아야 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나에게 시를 들려주던 아버지. 동생 셋은 엄마를 닮아 음악을 좋아했고, 나는 아버지의 성향을 닮아 책 읽기와 시를 좋아해서 아버지는 내게 가끔 일본어 시나 한국 근대 시인들의 시를 외워서 들려주곤 했다.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구절이 좋았던 ⸳⸳⸳「사랑했으므로 행복 하였네라」 라든가, 서정주. 윤동주의 시들은 아버지에게서 처음 듣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시를 외우던 아버지의 표정이 특히 기억에 남은 시가 있다. 한하운의 시 중에 하나 「소록도 가는 길」 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 까지
가도 가도 천리 길 전라도 길
그 시를 읊을 때 아버지는 특별히 더 슬퍼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인은 높은 학식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이라 일컫는 한센병으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운명이었다. 아버지는 연좌제로 자신을 펼칠 수 없었던 심정을 빗대어 애틋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서 어사 박문수부터 이조 왕실의 비사를 재미있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는 그런 얘기보다 넓은 방과 좋은 옷을 더 원했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패잔병의 모습으로 살았다. 유일하게 한번, 남동생과 나를 데리고 남산공원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과 기계로 살짝 눌러서 가늘게 찢어져 부드럽던 오징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오징어를 구울 때면 그때 먹었던 오징어 맛이 혀 밑에서 솟아 나오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가 없다. 그 후로 동생이 둘이나 태어나고 생활이 더 어려워져서 가족 나들이는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하던 아버지. 하지만 60대 중반에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하여 더욱 어두운 세상을 살다 간 아버지. 내가 운전하는 차로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나는 길을 내비게이션처럼 설명해 주기를 원하셨다, 나는 귀찮은 마음에 띄엄띄엄 중간만 설명하며 지나버리고 나면 지금 지나는 풍경은 어떠냐 어디쯤이냐 물으며, 당신이 기억하는 예전 모습을 되짚어 떠올리며 상상의 표정에 빠지던 모습이 생각나 송구스럽다. 부모보다는 자식에 더 신경 쓰며 사는 탓에 자식 앞가림에 애쓰다 보니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지만 이제 와 아쉬워한들 어찌하리. 다시 돌아간 대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이 급급해 부모님과 함께 추억 만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나름 힘껏 모셨다고 스스로 위안 해 본다.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된 아버지는 동작동 국립묘지로 가셨다. 생전에 패잔병처럼 살았는데, 대통령 이름이 새겨진 근조기가 오고 관 위에 태극기를 덮으니 영웅이 된 듯 마지막 가는 길이 장엄해서 마음이 편했다. 군인들이 조포를 쏘고 영정과 유골함을 안고 봉안당까지 이동하는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봉안식 모습에 지나간 시절의 억울함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영웅도 때를 잘 만나야 하듯이 아버지는 때를 못 만난 탓에 자신의 실력도 펼쳐보지 못하고 억울한 시절을 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충혼 당에 아버지를 두고 돌아오며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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