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를 좀 기르면서 식구를 늘려가다 보니 이름을 까먹을 때가 많다.
기른 지 오래 된 것일수록 관심에서 멀어져 이름을 잊는다.
화분에 네임펜으로 이름표 앞뒤로 이름을 적어 꽂아 두지만
물에 씻기고 햇볕과 세월에 바래 이름을 추정할 흔적도 남지 않는다.
하물며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도 존재감이 없는 식물을 보면 짠한 생각이 든다.
그런 와중에도 신기한 것은 어쩌다 선물 받거나 공짜로 얻은 것은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이름은 물론 내 집에 들어오기까지의 경로와
사연들까지 정확히 기억된다는 점이다.
덴트롱, 사랑초, 장미허브, 병솔, 시계초, 연화바위솔....
<노루귀>
정확히 말하면 그에 상응한 값을 치르고 들여온 것은 쉽게 잊히지만,
값을 치르지 않고 얻어온 것은 그만큼의 빚을 덜어내지 못해 오래 기억되는 게다.
선물 받은 것은 준 사람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기억되고,
거저 얻은 것은 그 빚이 짐으로 남은 게다.
내 집에 있는 화초들은 다들 오밀조밀한 사연 하나씩은 담고 있다.
흔히 불리는 꽃말에 관계없이 내가 정한 꽃말을 둔다.
그래서 여느 화원의 것과 다를 바 없지만 내 집에 있는 것은 특별해 보인다.
비좁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좋은 자리에 놓이는 것도 그런 것들이다.
<수선화. 모날>
내가 가진 물건이나 기억 속에 사연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거기에 흐뭇하거나 애틋한 추억이 있고, 사랑이 있다면 더더욱 행복하다.
나는 그런 꽃을 보면서 그런 사연들을 엮어 줄거리를 만들고,
그 줄거리 속에 그만큼의 빚과 감사의 정을 둔다.
내게 넘치면 나눠주는 것이 받은 정에 보답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게 많더라도 그런 사연이 담긴 것은 내 집에서 덜어내지 못한다.
손님용으로 일부러 주기 위해 기르는 것도 있지만
몇 년 동안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줄 일도 없어졌다.
일일이 가져다주는 그릇도 되지 못해 공간만 차지한 채 몇 해를 지내는 것들도 있다.
내가 그러기에 나는 내게 뭔가를 준 사람은 나이와 성별, 얼굴을 따지지 않고 고맙다.
간절히 구하던 것을 얻었을 때는 표정관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활짝 펴지며
고맙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그 순간엔 그 사람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이쁘고 아름다워 보인다.
<심기는 4백개 정도 심었는데.................ㅠㅠ>
가끔 나눔을 하면서 감사의 답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서운한 감정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씁쓸하다.
심지어 조건을 다는 사람들도 본다.
조건부 나눔의 최고봉은 내가 올린 사진에 댓글을 단 사람에게만 주겠다는 것이다.
환장하겠다.
조건을 다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하는 것이다.
물품 대 물품이건, 물품 대 마음이건 주면서도 어떤 대가를 기대했던 게다.
주는 건 주는 것이고, 교환은 교환이다.
내가 교환하기로 한 것이 아닌 한, 주는 마음으로 행복해야 한다.
<작년 담양 군청에 자신이 누군지 알려 하지 말라며 2억원을 몰래 두고 갔다.
군에서는 짤막한 메모지에 담긴 기부자의 뜻에 따라 등불장학회를 설립해 관리한다>
우리 동네 촌놈들은 줄 때도 화끈하다.
“줄 때는 빤스 벗고 주라”
주는 이상 미적거리지 말고 깨끗이 주란 말이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실전에선 은근히, 그러나 꼬박꼬박 대가를 기대한다.
받고도 응답이 없으면 슬슬 표정을 살피고,
그래도 아무 말 없으면 기어이 대답을 요구한다.
괜찮았어?
빤스 안에 무엇이 있나 자세히 살펴봤다.
누가 얼결에 쳐다보기라도 할세라 감추고 지내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사춘기 때 솜털 같은 것이 하나씩 돋아나 거뭇해질 때 이후 처음이다.
시무룩 달랑~.
비록 볼품없지만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건 뭣이란 말인가.
도대체 나는 고무줄이 늘어나 너덜해지도록 벗기만 했지
도로 담아뒀단 말인가.
그게 아니다.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그랬다.
잎과 가지를 주고 사과를 주고 행복했고,
마지막 남은 줄기까지 주고도 행복했지만
소년이 또 떠나자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다 주고 허전해질까봐 차마 주지 못했던 게다.
나누고 베푸는 것도 그릇에 따라 다르다.
그릇이 큰 사람은 베푼 것으로 자신이 기뻐하고,
그릇이 작은 사람은 준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성경엔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했건만(오른 손 모르게 하라 했던가?)
동네방네 소문나기를 은근 기대하고 몰라주면 다음엔 안 한다.
자기 그릇에 맞지 않게 허세를 부린 셈이다.
그릇이 작다 못해 쪼잔한 놈이다.
나는 받는 사람이 성의를 보이든 말든 내가 감수할 수 있을 만큼만,
꼭 그만큼만 한다.
내 주제에 맞게, 아주 약소하게, 그러나 아주 널널한 기분으로
딱 그만큼만 하기 때문에 나눠 주고 나서 후회하는 일은 거의 없다.
포장하고 부치는 내내 행복하다.
“괜히 했어, 괜히 했어~~”
자기가 한 짓을 두고 후회하는 사람처럼 바보는 없다.
우리 집 개들도 맨 날 먹던 것을 주면 잘 먹지 않아
가끔 별미로 조리를 해 사료에 말아주는데
어쩌다 저희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밥그릇만 슬쩍 쳐다보고 돌아선다.
그럴 땐 서운한 감정이 저절로 표출된다.
개새끼들.
나는 큰 그릇은 못 된다.
<수선화. 나를 잊지 마세요.>
어제는 20일 주기로 타는 약을 받으러 아버지가 병원 가는 날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자식 깰 새라 몰래 혼자 나가신다 했지만
잠귀 밝은 개들이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잠자리를 차고 일어나 짖어댄다.
깜짝 놀라 깨보니 아버지는 이미 장대비 속 저만치
1시간 마다 다니는 버스를 타러 우산도 안 받고 걸어가신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곱도 안 뗀 얼굴로 급한 대로 추리닝 바람에
자동차 키만 들고 나섰다가 진료에 수액 맞기를 기다렸다 돌아왔는데
오는 길 1시간 내내 아침 점심까지 굶고 수발한 것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간밤에 곰곰 다짐했다.
다음엔 그냥 자는 척 해야지.
첫댓글 ㅎㅎㅎ 여러 사연 잘 보고 갑니다..다음에 자는척할려 해도 잘 안되실걸요?
제가 원래 아침 잠이 많아서 잘 될겁니다
주는 마음이 더 행복 하지요 그 행복은 아는 사람만이 알수 있죠 나눔을 주어서 다 행복 하지는 않을 거여요 나눔 하고 마음에 행복이 주는것에 감사 하면 더욱 행복 한거라 생각 해요 님에 글 사람속을 훤히 보시는것 같아요 아무 말씀이 없으셔도 님에 마음을 다 아실거여요
아무래도 주는 게 맘이 편하지요. 울 엄니도 받으면 빈 접시 어찌 돌려 줘야 할 지 고민하셨거든요.
처음 나눔 받을때 진짜 밭떼기는 커다란 밭이 있어야 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넓은 화분에 주욱 펼쳐놓으면 밭떼기가 되는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그 이쁜 연봉잎 밭떼기를
그래도 몇개 안되는 잎에서 꼬물꼬물 올라오는 녀석들이 넘 기특합니다
첫 나눔받은 그 느낌과 감사함을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것 같습니다.
저도 밭뙤기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도시 사람들 밭과 시골 밭은 개념이 다른 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ㅎㅎㅎ 다유기 밭떼기~ 저 혼자 왜 웃고 있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