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미국에 온 후 노래방을 가본 적이 없지만 한국에 살 때 내 노래방 애창곡은 조영남 씨가 부른 <모란동백>이었다.
흥겨운 분위기를 깨는 흠은 있지만, 노래를 못 부른다는 소리는 다행히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공식적인 음치였었다.
혼자 부를 때는 스스로 생각해도 아주 잘 부르는 노래 솜씨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만 가면 배에서 울려 나와야 할 노랫소리는 잔뜩 주눅이 든 채 목에서만 가늘게 새어 나오고, 게다가 넣지도 않은 바이브레이션까지 섞여 나오니, 속된 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노래 부르는 자리야 애써 피할 수도 있고, 설혹 그 자리에 끼인다 한들 사양할 수도 있지만, 노래로 시험 점수를 받는 음악 실기 시험을 칠 때에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스스로 생각할 때도 노래를 못 부른다면야 억울할 것이 없겠지만, 시험을 앞두고 혼자나 형 앞에서 연습할 때는 잘 되다가도 막상 음악 선생님 곁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를라치면 어느 틈에 배에서 울려 나와야 할 소리가 절수하느라 거의 꼭지를 잠가버린 수돗물처럼 쨀쨀 목에서만 새어 나오니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랴.
心因性 音癡, 내가 속한 음치의 부류였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나, 긴장되는 자리에 가면 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기본이고,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음치가 아니 될 수 없는 불행한 마음 병.
어려서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나를 따라다니던 그 심인성 음치를 치료할 계기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한참 우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짤짤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받은 개인 저축금으로 삼 학년 거의 모든 반에서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동전 흔들어대는 소리로 온통 짤짤거렸는데, 내가 미국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이십 년간 동업을 했던 47년 지기가 있던 반에서 옆에 있던 우리 반으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섭이가 짤짤이에서 연전연승. 한 번도 잃지 않고 다 따고 있다~"
홀짝 게임이니 확률적으로 한번 따고 한번 잃고가 정상인데, 그날 섭이는 뭐에 씌었는지, 비기거나 따기만 하고 한 번도 잃지를 않았다.
호주머니 가득 동전을 채우고 우리 친구들 몇은 그날, 고등학생에게도 술을 팔던 향촌동 어느 골목 끝집에 들어가 동동주를 양껏 마셨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았다.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궁리를 하던 섭이는 기타를 샀다.
졸업을 한 이듬해 3월 섭이 생일날, 섭이 자취집에 모인 우리들은 그간 갈고닦은 섭이의 기타 솜씨를 감상할 수 있었다. 기타 반주가 있으니 노래가 어찌 빠질 소냐.
모인 친구들이 돌아가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한 곡씩 불렀는데 내 차례가 돌아왔다.
생일 축하하느라 한잔 마신 맥주 힘이었을까?
늘 보는 친구들이라 마음이 편해서였을까?
섭이가 치는 트로트 기타 반주에 맞추어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꺾어질 때 꺾고, 구성지게 넘어갈 때 구성지게 잘 넘어갔다.
"한 곡 더 불러 봐라~"
노래를 부르고 나니 섭이가 앙코르를 신청했고 나는 <애수의 소야곡>을 구성지게 불렀다.
"참 잘 부르네. 니가 제일 잘 부른다."
그날 신이 난 나는 몇 곡을 더 불렀던 것 같다.
가장 가까운 벗으로부터의 칭찬을 받은 그날이 바로 내가 오랜 심인성 음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었다.
그 후 섭이 자취 집을 찾아가면 제일 먼저 가요 책 한 권을 펼쳐두고 친구는 기타를 치고 나는 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은 친구가 코드를 잡는 손가락이 아파서 기타를 더 못 칠 때까지, 혹은 가요 책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되곤 했었다.
섭이에게 기타를 배우고, 내 기타 반주에 맞추어 혼자 노래를 부를 때에 이르러서는 내가 음치였다는 기억조차도 잊어버렸다.
훗날 섭이와 같이 노래방을 갈라치면 섭이는 나보고 옛날 그 솜씨가 아니라며 아쉬워하며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꼭 덧붙였지만 옛날 그 솜씨가 아니면 또 어떠랴.
내 노래를 칭찬해주던 그 벗이 여전히 연락이 닿고 있고, 그 친구의 말처럼 담배도 끊었고, 나는 이제 노래 부르는 자리도 피하지 않으니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으랴.
혹시 곁에 누가 마음이 약해 제대로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덕을 쌓는 방법이랍니다.
첫댓글 참 잘하셨네요!!~~
👏박수 ㅎㅎㅎㅎ
오늘도 열심히
수고가 많으 십니다!~~
노래 다 좋아 합니다...ㅎㅎ
저도 고교때
선생님께서
불러~일으키셔서
잘 부른 기억이 나요.
ㅡㅡ
한송이 들국화같은
제니? 이런곡인것도
같아요 ㅎㅎ
가 맞네요.(수정)
https://youtu.be/ysgN2RtYhPw
PLAY
듣기엔 좋지만 부르기엔 어려운 노래인데 수샨님이 노래를 아주 잘 부르시나 봅니다.
언제 다같이 모여 한번 들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나도 고등학교 학창시절 까지는 노래를 좋아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마 수줍음이 많은 내성격도 일조를 했을겁니다
그런데 내나이 20 세가 넘어서부터는 점점 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게 됩디다
그리고 노래방 문화가 정착이 되면서 부터는 노래는 취미의 하나가 됩디다
노래방에서 나 혼자 1시간 동안 노래를 부른적도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취미는 좋은 취미 입니다
마음자리님도 처음에는 아마 수줍음이 많아서 노래를 잘 못 부르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좌우간 노력하고 좋아하면 발전 합니다
훌륭합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잘 웃으시는 태평성대님도 수줍음을 많이 타실 때가 있었군요. ㅎㅎ
맞습니다.
노력하면 발전합니다~
일단 저 길고 긴 트럭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마음자리님께서 미국 대륙을 함께 누비는 동반자인가 봅니다.
가끔 미국영화를 보면 저런 비스므리한 대형트럭을 보지요. 조금은 위압감도 느끼면서요. 멋지네요.
음.저도
고교 땐 합창단도 했었고 교회에선 성가대도 했었지요.
그래도 내성적이라 마음자리님처럼 독창하는 건 제 실력대로 못했지요.
이젠 노래방 가본지도 십년은 넘엇을 듯.
이젠 나이가 드니 음도 안올라가니.
사실 트롯트는 좋아하지 않으니 아는것도 없고 영미 팝을 주로 들으니 따라하긴 무리고. 이젠 그냥 듣기만 합니다.
팔십팔세 울엄니는 아직도 낭낭하게 음도 잘올라가시며 찬송가도 잘부르시는데 저는 이젠 .ㅠ
운전할 때는 모르는데, 내려서 쉴때 보면 저도 가끔 깜짝 놀랍니다. 내가 이렇게 큰 말을?? ㅎㅎ
저는 트롯트보단 통기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올드 영미팝은 듣기를 좋아하지요.
세상이 좋아져서 길 달리면서도 좋아하는 노래들 아주 즐겁게 잘 듣고 있습니다.
@마음자리 ㅎㅎ 그런가요?
여튼 대단해요.
가끔 운전할때 대형트럭이 옆에 나란히 갈때면 좀 무섭답니다.
긴 시간 운행 중 음악과 노래는 정말 좋은 친구 일 거에요. 늘 안전 운전 하십시요.
@리진 네 ㅎㅎ. 감사합니다.
늘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차를 보니 위압감이 느껴지네요.
하긴 엘에이에서 라스베가스 넘어 가면서 끝도 없는 장대열차도 봤지만요.
우리나라 소리꾼들이 득음한다고
폭포수 앞에서 소리 지른다고 하던데
그 친구가 폭포였네요.
언젠가 모란동백 육성으로 한번 올려보세요.
박수 많이 받을겁니다.
저요?
저도 화답해야겠지요.
공개적으로 공개할 정도의 노래 솜씨가 절대 아닙니다. ㅎㅎ
후일 고국 방문 때, 수필방님들 만나뵈면 불러 보지요. 석촌님 노래도 들어보구요. ㅎ
심인성 음치도 내림인가. 나도 위에 언급했던 증세들이 있어서 극복하느라 애를 많이 쓴 적이 있었거든... (이제부턴 편한 말로 댓글을 달께.)
그 증세가 좀 사라질 즈음되니, 예전에 아버지께서 그러했듯이 손이 조금씩 떨리고 목소리도 떨려서 힘들더구나.
예전에 중동집 방에서 아랫목에 가요책을 펼쳐놓고 네가 기타를 치면서 함께 애창곡들을 부르던 기억도 난다.
그당시 자주 불렀던 곡들은 어니온스, 김정호, 송창식, 김세환, 사월과 오월, 이용복, 문정선 등의 노래들이 아니었나 싶다.
휴스턴에서 변이사랑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도, 어김없이 <모란동백>과 <향수>를 부르더구나. 음치라는 말과는 아주 거리가 먼 실력이었다.^^
이제 트럭커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줄 안다. 계속 안전운전 바라고, 가끔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연락하렴.^^
형과 같이 노래 부르던 기억납니다. 형이 아끼던 클래식 기타 목 부러트린 일도 기억나고...ㅎㅎ.
한번씩 연락 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모란동백'을 즐겨 불렀습니다.
코로나로 3년 여를 지나고 보니
나이도 먹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슬픕니다.
노랫말 속에 담긴 뜻이 좋아서
노래하기를 좋아도 했지요.
저도 학교시절에 선생님 한 분을 바라보고
발표는 잘 해서 칭찬을 받았는 것 같은데,
여러 대중을 향해 인사말을 해야 할때는
머리속이 그냥 하얗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익숙지 못한 대중과의 심인성인 것 같네요.
수줍음을 많이 탄 것 같습니다.ㅎ
저렇게 긴 트럭을 그 먼 거리를 향해 달리자면
한 곳을 집중하여 달리는 기분이 담대해 질 것 같네요.
마음자리님을 응원합니다.
콩꽃님은 발표도 조리있게 잘 하셨을 걸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대중 상대로는 누구나 부담이 큰가 봅니다. 저도 딱 한번 군중 앞에 설 기회가 있었는데, 떨리는 심장과 목소리 달래느라고 애먹은 기억이 나네요. ㅎㅎ.
응원 감사합니다. 늘 안전 운전 하겠습니다.
그렇지요.주눅이 들면 사방이 오그라듭니다.
목소리,손짓 다 그래요.
칭찬이 약이란 말씀이 딱 맞습니다.
저도 남 앞에 서면 떨었습니다.
늙으니 저절로 낫던데요.
제 18 번은 한명숙의 노란샤스입니다.
이제는 가사도 다 잊었네요.
노래는 디게 못 부르고요.ㅎㅎ
밝은 리듬 경쾌한 노래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수필방분들 모여 다같이 좋아하는 노래 부르는 날을 고대해 봅니다.
모란동백 함 올려보세요^^
목포에 눈물 구성지게 부르면 멋있죠.
잼난 야그 하나 할께요.
예전에 전지현이 남행열차를 춤 추면서
CF찍은게 있어요.
저도 그거 보고 넘 멋있어보여서 노래방가면
남행열차 노래하면서 춤 추었던 적이 있었어요.
근데말예요.노래방 갔던 기억이 십 년도 더 된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마음자리님네 동네도 겨울인가봐요.
이제는 나목이 눈에 선해요.
엄청 큰 트럭 몰고 다니시네요.
늘 안전운행 기원합니다.
나무랑님 분위기가 밝으셔서 남행열차 부르시면 어울린 분위기가 더욱 밝아졌을 겁니다.
여기도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주말에 비오더니 오늘 아침엔 0도까지 내려갔네요.
심인성 음치~
그럴수도 있겠군요^^^
코로나땜시로 노래방 주인들 다 문닫게
생기긴했지만, 하여튼 노래부르기 좋아하는분
을 만난거 같아 기분이 좋읍니다. ㅎㅎ
의외로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네요.
우리 민족이 원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니 여럿이 모이면 노래 부르기가 빠질 수 없나 봅니다.
마론님 글 읽고 옛 기억 떠올라 쓴 글이라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칭찬은 힘이 되고 치유가 됩니다.
칭찬에 서툰 사람들이 많습니다.
골때리는 그녀들이 있습니다.
SBS에서 방송하는
여성들이 하는 축구 경기를 시청하면서
느낀바로 그녀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축구선수들이 서로를 칭찬하고 다독여서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어루만지는
여유를 보면서 감동을 느껴 참말로 즐겁습니다.
저도 축구를 좋아하다보니 줄여서 골때녀라는 그 프로 자주 봅니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마음들이 통해서인지 갈수록 축구 실력이 쑥쑥 늘고 있어서 놀라고 있지요.
진심어린 칭찬과 격려가 많아지는 사회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심인성음치였던
여고 때 내 짝꿍 현자 생각에
입꼬리 말리면 읽어 내려오다
목포의 눈물을 흐드러지게
부르셨다니
저의18번이라
다시 한 번 입꼬리 올라갑니다ㆍ
마음자리님의 필력으로
엮어내는 심인성음치
탈출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모란동백을 들을 수 있을 날이 오려나!ㅡ요 ㅎ
ㅎㅎ 고국방문시에 윤슬하여님 만나뵐 기회가 있으면 생달걀 하나 깨먹고 최대한 잘 들려 드리겠습니다.
심인성 음치. 그런 음치도 있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진속의 저 커다란 화물차를 운전하시는군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내보이는 것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군요. 어릴 때 특히 그렇고 어른 되어서도 극복하기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구요.
트럭 크지요? ㅎㄹ 저도 가끔 크기 보고 놀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