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르타 기념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Date entered: 07-29-2015
베타니아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타는 자매지간이지요.
요한복음 저자는 마리아에 대해서 다른 공관복음과는 또 다른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자라는 것입니다.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다 보면 오리 남짓의 거리에 있는 베타니아 마을과
마르타와 마리아가 함께 있는 집에 들려서 식사대접을 받을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녀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연후에야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인사의 말을 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마르타의
이 말의 배경에는 섭섭함이 묻어나지요.
오빠가 몹시 앓고 있을 때에 그녀들은 급한 마음에 주님께 전갈을 보냈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 경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살아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3절)
예수님께서는 그 기별을 받고도 바로 가지 않으시고 라자로가 죽은 후에나 찾아가시지요.
당연히 마르타와 마리아는 주님께 대해 한편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리아는 집에 있었지만 마르타는 마중나와서
오빠의 죽음을 알립니다.
주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라고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하시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절)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질문 ‘과연 마르타가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듯 다시 마르타에게 질문하시지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5-26절)
마르타는 마치 베드로처럼 반장이나 된 듯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인간이신 예수님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갈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친했던 베타니아 식구들, 그 중에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 대접해드린다고 분주하던 마르타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동생이
밉살스럽고 또 주님이 원망스럽기도 하지요.
자기는 음식준비에 바쁜데 하나도 거들어 주지 않는 동생에 대한 마음으로 마르타는
한 마디하지요.
“주님, 제 동생이 저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르타를 나무라시는 듯한 말씀을 하시지요.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
루카가 전해주는 좋은 몫은 마르타도 가졌다는 사실을 요한복음 저자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음식준비만 하며 분주하던 마르타가 어떻게 주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인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르타의 이런 모습에서 희망을 간직할 자리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면서도 인간적인 바람 앞에 때로 흔들리고 갈등을 맞고 합니다.
또 인간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분이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더딜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보듯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낱 예수님을 예언자로
받아들이려하는 몇 개의 종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 갈등과 믿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갈등과 정화의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어요?’
요한 서간의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의 말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우리는 곧잘 우리 자신이 노력해서 신앙을 얻었다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세상이 말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니지요.
신앙은 하느님께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무 댓가 없이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마치 나의 공로로 신앙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면 어떻게 죽은 지 사흘이 넘은 라자로가 살아 날 수 있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시고 한 없이 좋은신 하느님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멋지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