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어느 가을날 서울
벼룩시장인지 교차로인지를 뒤적인다.
어디 피씨방 알바라도 있을까?? 저녁 6시 이후 시간과 주말시간에 무엇인가 수익을 만들 일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보니 인연이 된 곳..바로 대리회사다.......
강남에 어떤 회사에서는 일당 5만원이라는 회사도 있었다...아마, 업소대리였던 거 같다.....
그러나, 시간 활용을 감안할 때는 대리회사가 그에게는 맞는 거 같았다. 핸드폰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교육을 끝내고,,,,,,,,,,12시 종이 울리자 말자,,,,,,,,,,,,,회사를 나가서 잡았던 첫 콜...................
그에게는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영동전화국 - 월곡동 12K.............'아,,,,나도 콜 잡을 수 있구나!'
손을 만나서 대리운전 하는 첫 손님이라고 말했다......결국...15K원인가 받고 끝내서 기분도 좋았다...
그렇게 또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어렵게 신불자가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그는 신불자가 되는 게 겁났던 게 아니고 또한 주위의 눈을 두려워했던 것도 아니었다. 신불자가 되면 또 잃어야 할 다른 게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초겨울 9월 시드니
밤이슬이 차다. 가끔 다링하버쥐위를 정처없이 거닐다 하버브릿지를 넘어,,,오페라 하우스에선 공짜로 하는 공연을 보다 써큘라키(Circluar Quay) 에서 맨리로 가는 보트를 타고 섬구경을 가곤했다. 우연히 택시를 탔다. 그에게 참 이상한 택시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낮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나가고 있었고 밤에는 택시운전을 한다고 했다. 참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 이 나라에서는 이루어지고 있구나! 위선과 체면치레에 익숙한 한국 교수들에게는 참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가 대뜸 “북한사람 아니세요?”라고 물었다. 또한 한국사람들은 김치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당신은 노린네가 많이 나요”라고 대답했다.
2005년 서울
모대학 영문과에 박사학위를 받으며 김포와 천안의 전문대에 강사로 일하던 그녀~ 그의 첫 사랑......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그녀지만,,,그에겐 단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20살 나이가 되어 동네 목욕탕 앞에서 조우하고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춘천으로 향하던 그녀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그 이후 연애편지를 재주껏 써봤지만, 번번히 거절하는 그녀의 답장만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죽마고우들과 밤새워 얘기꽃을 피우다 이른 새벽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찾아갔다. 학교 경비아저씨가 길을 막아 섰다. 그는 시골서 올라온 그녀의 친오빠라고 소개하고 여학생들만 있는 그곳에 들어가 그녀를 찾아냈다. 둘은 대학로의 한 영화관으로 가서는 꽤 유명했던 영화를 보았다. 아마, 조이럭 클럽이었던거 같다. 밤을 꼬박 새우고 찾아갔던 그는 결국 영화를 보며, 그녀의 가냘프고 고운 어깨에 잠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시 이별을 고해왔다.
그러던 그녀가 선봐서 결혼할 꺼 라며 막 독촉을 해대기 시작했다...아쉬운 대로 그와 결혼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내 비추었다...그는 바보였을까?? 고민은 계속되었다 몇 년 더 기다려달라고 하기엔 그녀의 처지가 너무 급했던 모양이다. 몇 개월 후 청첩장이 날아왔고,,,그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그 이후 몇 번의 전화통화와 그녀가 출산했다는 소식 이후에 그녀의 존재는 이제 그의 세상에는 없었다. '나보다 훨씬 나은 남자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겠지 그럼 된거지'
2006년 여름
이제 그도 대리 일을 한지 어언 6개월이 넘어갔다. 누가 봐도 자랑스러운 김대리가 어느새 되어있었다. 그는 많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쌀쌀한 새벽바람을 피해서 시흥대로변 한 건물 귀퉁이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났던 쵸이소속 기사분에게 밤이슬에 관한 정보를 전해 받고, 따스한 보금자리를 얻었다. 자신 말고도 밤이슬을 맞으며 다른 어느 곳에선가 고생하는 동료들이 생겼다는 즐거움에 사로잡혀있었다.
2006년 겨울
이제 그는 초보티를 벗자 슬슬 외곽이라는 곳을 나가는 대담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걸린 곳이 시흥시 포동…….25K 손에 쥐어 들고,,,,아파트 입구를 나가 대로변을 갔는데…대체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안양에서 온 기사분이 택시비 5천원씩해서 안양쪽으로 나가자고 해서 어찌나 기뻤는지….사실 2년 후인가 그는 인덕원 사거리에서 또 우연히 이 안양 기사분을 우연히 만났다. 대체 그 안양 기사분은 그를 어디서 봤다고 아는체 한걸까??
갓초보티를 벗은 그에게 찾아간 포동이라는 오지는 정말 추위와 서러움이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결국, 손에게 받은 25K를 다 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허탈함으로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 창문틈으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에 눈을 뜨고 말았다.
2007년 봄
물왕저수지를 지났다. 여기가 참 초보기사분들 여럿 힘들게 했던 그곳이구나 생각하며 그곳을 지나 김대리는 깊숙히 들어가고 있었다. 시흥시 장곡동이다. 정왕동쪽으로 나가는 버스만 간간히 지나갈 뿐 반대쪽으로 가는 버스는 끊긴지 오래다. 12시가 되자 대기하던 시흥시 택시들이 슬슬 일을 시작하려는 분위기다. 하상동에서 목동가는 17K 오다가 뻔쩍 하더니 사라진다. 그래 그런거 안타도 된다. 적어도 20K는 줘도 그리 비싼건 아닌거 같은데,,,참 별로 기분 안좋은 오다였다. 그나저나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도무지 방법이 없다.
시간은 바야흐로 새벽 1시가 넘어 다음날 아침 일찍 또 아침 해를 맞이하여야 하는 김대리에게는 복귀에 대한 압박감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시흥택시와 가격을 흥정한다. 15K에 미림여고 근처에서 떨궈주고 돌아가신다. 휴~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귀환이다.
2007년 여름
오늘은 동두천 50K로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은 대략 50분 남짓…그나저나 처음가보는 동두천에서는 대체 어떻게 나와야하는지…조금은 걱정이 앞선다. 그래, ‘내가 대리경력이 얼마인데,,,머가 걱정이여’라고 자신감을 가슴속에 되네이며,,,지행역 근처에서 종3
요즘엔 먹자골목도 있고 간혹 인적도 꽤 보이지만, 왜 그때만 해도 인적조차 드물었는지..특히 대리기사로 보이는 동료들을 찾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30분정도나 지났을까 이상한 오지라는 곳에 가서 디드어 김대리는 빽콜이라는 맛을 음미하게 된다. 동두천 장례식장-상일동 55K 낼름 잡아서 택시타고 가니 8천원 정도 택시비가 나온다.
장례식장 온 2명의 선후배다. 그들은 김대리가 운전대를 잡고 의정부 방향으로 나갈 때, “형, 우리 오늘 광탄으로 갔다 갈까?” 허걱, 그는 걱정이 앞선다. 제발, 거긴 나중에 가세요….
둘은 실갱이를 하더니, 이윽고 그들의 방향은 일산 유흥가로 운전대를 돌려달란다. 팁까지 60k를 받아들고, 좀 있다 나올 터이니 강동구까지 데려달라고 예약하고 들어간 후, 나중에 나와서는 20K의 대기료만을 지불하곤 자고 가야겠다고 했다.
2007년 가을
이제 어엿한 중견 대리가 된 김대리
뉘엇뉘엇 벼가 익어서 고개를 떨구듯 합당한 금액의 합리적인 코스를 골라서 타기시작했다.
중견 대리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10만원 이상 벌면 일하기 싫어지는 걸 느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교보근처 빨간공 2개와 하얀공 2개가 굴러댕기는 모습이 그리워졌고, 또한 공짜로 타먹는 커피 한잔이 끌렸다. 그렇게 시간은 즐겁게 흘러갔다
2007년 겨울 태국 그리고 캄보디아
대리가 태국엔 왜 왔을까? 김대리는 자신의 답답한 처지가 영 못마땅하다.
골프채 살 돈도 없고 캐디피 낼 돈도 사실 없는데, 이거 사람들 앞에서 티도 못내고
골프화는 인터넷에서 제일 싸게 파는 3만원 조금 넘는걸 구입했다. 남들이 한데서 그냥 그렇게 해야 한데서 그냥 그렇게 했다.
태국 남단 어느 도시에서 비포장길로 2시간 택시로 달려 다다른 곳 캄보디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는 앙코르와트사원. 와~ 김대리는 감탄이 절로 나왔고, 과거 이걸 만드느라 희생된 사람들과 문명을 일구겠다는 왕에 대한 복잡한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2008년 봄 서울-강북의 재발견
옛부터 서울하면 역시 강북지역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강북은 완전 한 수 낮은 지역처럼 인식되는 오류가 생겨버렸다. 차가 막혀서인가? 건물들이 낡아서 일까? 김대리는 그 원인이 항상 궁금해졌다.
광화문, 종로, 을지로, 대학로 그리고 서울을 대표하는 남산 그리고 시청, 남대문
경복궁, 창경궁(비원), 덕수궁 그리고 박물관 미술관 그리고 복원된 청계천을 다시 가보고
김대리는 서울의 깊이 있는 문화는 역시 강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청앞도 파이넨스센타가 들어오면서 더욱 발전된 새로운것과 옛것이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강남지역엔 새롭게 지어진 고층건물과 주상복합단지가 많은 건 사실이나, 그래도 그 깊이를 생각하니 너무 허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를 하는 동안, 강북을 기피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서울 그 서울의 중심은 바로 강북이다. 강북에서 시작되는 경기 남부 외곽요금은 최소 5천원이상 더 찍어줘야 하며, 많게는 1만원 정도 더 찍어주어야 한다. 강북을 더 사랑하는 대리가 되어야겠다고 김대리는 가슴속에 새겨본다.
2008년 여름 과천
김대리도 이제 어엿한 대리 4년 차가 되어간다. 대리일도 지겨움을 느낄 때다. 먼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일까? 택시기사나 대리기사처럼 하루에 조금씩 월급대신 일당을 챙기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이 느끼는 그 유혹에 빠져든다.
복잡한 건 너무도 싫었던 김대리……..어느새 말 번호를 선택할 때 쓰는 오엠알 카드와 복승식 쌍승식 등등의 표현에 익숙해지고, 잘 뛰는 말이나 기억하고 싶은 말이름이 머리속에 하나 둘 자리잡기 시작했다. 손대면 집 날린다고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바로 그 짓을 이제 그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삼삼오오 경륜장이나 경마장 등 사행성 산업에 흥미를 느끼는 동료들을 보면서 또한, 가끔 들려오는 대리업체 사장들의 도박과 그 사업의 축소…등등 과연 대리짓이 누구를 위한 짓인지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되새기며, 초라한 일용직 대리의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졌다.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서 시작한 대리일 언제나 새로운 하루를 만들어주는 대리일 또 하나의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대리일
김대리는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남은 길고 긴 여정에 흠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콜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네, 김대리입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첫댓글 님의 인생역정을 쓰셨군요.앞으론 좋은일만 있으실 겁니다.김대리님! 홧팅하세요.
ㅎㅎ 창작소설입니다. 보고 들은게 대부분이죠.
2005년에 영동에서 월곡동이 12k?
소설의 일부인데...언제 그 가격이었는지 중요한 걸까요?? 그냥 편히 읽어 주시면 감사^^
아 죄송합니다.....
아니요..괜찮습니다..
마바리님이 이제서야 진정한 대리의 세계로 들어온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그동안 주변인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는데..아닌가... 잘 지내시죠 ^^
ㅎㅎ 초창기에 오프모임에서 뵌적이 있으신 분은 아니시죠?? 요즘, 카페닉넴이 변경된 분들이 많아서요^^;;; 카페활동여부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수는 있을꺼 같습니다.
플레잉폴리틱스!!!!!!홧``팅!!!!!
ㅎㅎ형님은 연애인 하셨어야될 관상인데...화면빨 잘 받을듯~~ 아차..담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밥이나 먹죠..ㅋㅋ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시드니 달링 하버와 오페라 하우스....하버 브릿지....그립네여...ㅠㅠ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곳인데....
ㅎㅎ 국제미아들 집합소라던데요...요즘엔 중국이 인기라죠...^^
제 첫콜이 생각나는군요... 신정네거리 -> 검단사거리 15k ㅋ ㅑㅋ ㅑㅋ ㅑㅋ ㅑㅋ ㅑㅋ ㅑ......검단이 먼지 지가 있어봐야 경기도겠지 했던 ㅋ ㅋㅋ............ 손은 시체 전 길 못찾아서 지금의 감정동쯤이라 생각됨 해매다 해매다 손님 술깸 직장인 송파로 도착... 15k 받으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히 돈 받던 저희 모습이 생각나면 웃음만 나요 ㅋ ㅋ ㅋ 그땐 정말 많이 쫄아서 땀 뻘뻘흘렸는데 욕도 마니 먹고 ㅋ ㅋ 첫 스타트를 그리 시작해서 그래두 아직까지 버티는건가바요? ㅋ ㅋ ㅋ
대리회사들이 신입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봅니다...집사님이나 저나 초보때....어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