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서 정말 힘든 조건들을 갖추어야만 가능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3대가 내리 기로소에 들어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연속으로 문과 급제에다 종2품 이상의 벼슬, 그리고 70세 넘게 장수했다는 것이니 정말 특별하고도 대단한 집안이죠. 모두 5가문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진주 강씨 집안의 강백년, 강현, 강세황의 3대가 기로소에 들었고, 사천목씨 집안의 목첨, 목서흠, 목래선 3대가 역시 들어갔습니다. 강세황 집안은 당연히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불렸는데, 그 편액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이 썼습니다.
- 추사 김정희의 글씨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특히 동양화, 사군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2)을 잘 아실 겁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미술평론가로서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던 분이죠. 특히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정조대왕으로부터 ‘삼절(三絶)의 예술’이란 소리를 들었고, 궁중화원부터 재야의 선비까지 신분과 지위를 넘나든 교유를 하였기에 ‘예원(藝苑 : 예술계)의 총수’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표암 강세황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일등 공신이라고 합니다.
4대를 내려온 장수집안
표암의 증조부인 강주(姜籒, 1566∼1650)는 무려 85세까지 장수했습니다. 호가 죽창(竹窓)인데, 그가 소속된 당파인 소북파(小北派) 문인의 한시 모임 동일회(同一會)에서 ‘죽창선생집(竹窓先生集)’이란 문집을 발간했다고 합니다. 원래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풍을 추종한 소북파 문인 중에서 죽창이 두보의 시를 가장 잘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는다고 하는데, 그 대표작 중 하나가 열 살 때 지은 오언절시(五言絶句) ‘제길상사(題吉祥寺)’라고 합니다. 열 살 때 이런 시를 지었다니 천재시인이었다고 해야겠죠.
細雨靑山夕 보슬비 내리는 푸른 산 저물녘
桃花錦繡天 복사꽃 비단처럼 고운 절기로다
隔林橫一笛 숲너머 들려오는 한 곡조 피리소리
何處紫霞仙 붉은노을 탄 신선은 어디메뇨?
표암의 조부인 강백년(姜栢年, 1603∼1681)도 장수 유전자를 이어 받아 79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유전자도 이어받아 역시 대단한 시인이었습니다. 25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고 뒤에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이 승지, 관찰사,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청백리로 녹선되었습니다. 이 분이 지은 시도 많이 전해오는데, 그 중에 ‘제야차고촉주운(除夜借高蜀州韻)’이란 시가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에 이런 시를 읊으면 참 좋겠죠.
酒盡燈殘也不眠(주진등잔야불면) 술이 다하고 등불이 다해도 잠은 오지 않고
曉鐘鳴後轉依然(효종명후전의연) 새벽 종소리 울린 후에도 여전히 뒤척이네
非關來年無今夜(비관내년무금야) 내년을 생각마라 오늘 같은 밤 다시 오지 않으니
自是人情惜去年(자시인정석거년) 이제부터 사람들 마음 가는 해를 아쉬워하리
표암의 부친, 강현
강현(姜鋧, 1650~1733)도 역시 84세까지 장수했습니다. 26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31세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고,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후로도 한성판윤, 좌참찬을 지낸 뒤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대제학을 지냈으니 학문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데, 청백리에 올랐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장수유전자, 예술유전자를 물려받은 표암
표암은 아버지 강현이 낳은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무려 64세나 된 너무 늙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으니 사실 장수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었음에도 79세까지 장수했습니다. 부친에게는 손자보다도 어린 자식으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였기에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무릎에서 학문을 시작하여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짓기 시작하더니, 열 살 때 숙종임금이 승하하시자 국상에 바치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그림에 자질이 있어 열 살 때 예조판서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도화서(圖畵署) 생도(生徒) 취재(取才)에 심사관으로 직접 나서 등급을 매긴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면 국립 미술대학 선발시험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가 심사위원이 되었다는 얘기죠. 심지어 표암이 13살 때 쓴 글씨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병풍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천재였다고 해야겠죠.
- 강세황 초상화.
표암의 일생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부친이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었기에, 21살 때 부친이 여행 중 객사하시고 28세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식 중에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정도는 당시로는 보통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집안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소북계 남인(小北系 南人)인데 노론(老論)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죠. 여기에 맏형인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의 과거시험 부정사건이 아버지의 청탁에 따른 것으로 밝혀지고, 이어서 맏형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유배를 가게 되면서 강세황의 집안은 역적으로 낙인찍히고 벼슬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표암은 25세 때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인 처가의 빈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 자신의 작은 서재를 산향재(山響齋)라고 이름 짓고 그림을 감상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소일하였습니다. 서재 벽을 온통 산수화로 그려 붙이고 거문고 줄을 고르며 연주를 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옛 곡조의 고상한 음운이 산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을 느꼈기에 힘든 일상 속에서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풍류의 정취를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32세 때는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조선 시대 몰락한 양반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돈은 벌지 못하였으니 그의 가정은 빚더미에 오를 정도로 궁핍했고 식구들의 건강도 악화되었죠.
30년 궁핍에도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 나가다
가난한 선비들은 그야말로 삼순구식(三旬九食), 즉 한 달 동안 아홉 끼니를 먹을 정도로 몹시 빈궁한 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가장 고생이 될까요? 표암의 부인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돌보며 고생만 하다가 45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듯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표암은 양반의 체면을 지키면서 그림을 벗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며 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의 위기를 서예에 몰두하면서 극복했다면, 표암은 그림이었죠. 그랬기에 30년이나 되는 기나긴 백수(白手) 시절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학문과 예술 전반에 두루 전념하였고, 성호 이익 선생과도 교류했습니다. 또 당시의 이름난 화가였던 정선, 심사정, 강희언 등과 교류하고, 김홍도와 같은 제자를 키우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