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연중 제24주일) 믿음과 도움 수도원에 갓 입회한 형제가 왜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냐고, 사회복지 단체나 NGO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다.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주님이 거기에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한 교우가 환한 얼굴로 첫 수확이라고 하며 갓 내린 참기름 한 병을 내밀었다. 그렇게 수고해서 얻은 첫 수확을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제일 먼저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거였다. 그런데 하느님께 드린다고 공중에 뿌릴 수는 없으니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사제에게 가져온 것이다. 그 교우처럼 가난한 이웃, 가장 작은 이웃에게 해준 것이 곧 주님께 해드린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민을 느끼니까 신앙이 없어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연민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아니다. 여건이 안 좋아지면 봉사와 자선을 그만둔다. 미안하기는 해도 죄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계속 해서 주위에 가장 작은 이들을 찾는다. 우리는 연민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고 주님께 잘 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권력자들 앞에서 가난한 이웃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증언하고 순교했던 라우렌시오 부제(✝258)를 기억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게 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일깨워 준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 죄인이 되셨고,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마태 1,23). 죽지 않는 사람 없고, 사는 동안 자기 탓이든 자기 탓이 아니든 크고 작은 사건으로 가난해지고 실제로 장애를 입기도 한다. 도움이 필요 없이 살다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은 그런 때에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 도움을 받으며 또 도움을 주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된다. 이런 구세주 메시아를 이사야 예언자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여러 차례 예언했다.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잡아 뜯기며 모욕과 수모를 당하는 사람(이사 50,6), 사람 같지 않게 망가져 보는 이들이 질겁할 정도가 되신 분(이사 52,14)이라고 소개한다. 하느님은 우리들 가운데서 더 낮아질 수 없이 낮아지셨다.
도움은 신적인 행위다. 남는 시간과 재물을 내어주는 것도 그렇지만, 나에게도 필요한 것을 잘라내서 이웃에게 준다면 더욱 그렇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 친구가 된다(요한 15,13-14).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연민으로 시작된 도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반면에 믿음으로 행하는 도움은 지속된다. 믿음으로 행한 도움은 주님을 뵙게 하고 그 도움은 믿음을 더 굳건하게 한다. 더 굳건해진 믿음은 더 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가난한 이웃 안에, 그들과 함께 주님이 계신다는 게 점점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어려움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리 없다(야고 2,14).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 2,17).
예수님, 하느님이 아닌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듯이 나보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언제나 제 주위에 있습니다. 기도와 업적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도와준 것, 가장 작은 이들 하나에게 해준 것들이 마지막 날 심판 탁자 위에 올려진다는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름대로 저를 영원히 도와주셔서 하느님이 늘 저와 함께 계심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