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창살 안에서 바치는 기도 세계 곳곳에 닿고…"
봉쇄생활하며 죄와 회개까지 봉헌
‘가난한 이’ 위해 ‘가난한 삶’ 당부
스페인 마드리드=우광호 기자
내가 “여자 봉쇄 수녀원에 다녀왔다”고 말하자, 한 신부님이 “봉쇄 수녀원에 갔는데 어떻게 빠져 나왔느냐. 거짓말 아니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다. 신부님 말도 맞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 그러나 난 거짓말 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난 그곳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 비행기 안
누군가 그랬다.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가르멜 수녀님들을 볼 때라고…. 그 가르멜 수녀님을 만나러 간다.
# 스페인 마드리드
6월 11일 정오. 마드리드 공항에는 엔리케(23, Enrique) 아나(23, Ana) 이란성 쌍둥이 남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누이가 가르멜 봉쇄 수녀회 수녀라는 인연으로 길 안내를 자청한 이들은 이마에 ‘친절한 사람’이라고 써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이들과 함께 차로 약 40분 가량 달렸을까. 지평선 아스라한 들판 위에 홀로선 건물 하나가 보였다.
육중한 철문. 그 뒤로 500년 전통 ‘가르멜 봉쇄 수녀회-동정녀들의 성모 수녀원’이 있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던 그 철문이 엔리케의 간단한 전화 통화 한번으로 정말 요술처럼 열렸다.
남매가 손님 숙소로 안내했다. 성직자와 수도자 외에 평신도가 이곳에서 잠을 자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들은 어디서 세수를 해야 할지, 화장실은 어디인지, 전등은 어떻게 켜는지 잘 몰라 어쩔 줄 몰라하는, 또 난생 처음 봉쇄 수녀원에서 자야하는 나를 버려두고 수녀원 인근에 위치한 자신들의 집으로 그렇게 가버렸다.
11시30분. 이름 모를 종지기 수녀님이 30분 넘게 종을 울렸다.
# 은총의 삶 22년
밤에는 몰랐는데, 날이 밝은 후에 보니 온통 쇠창살이었다. 창문과 욕실, 거실, 심지어는 방문도 쇠창살로 되어 있었다. 오전 11시. “주님 은총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아녜스 마리아 수녀’(이하 아녜스 수녀)와 이중 쇠창살을 마주하고 앉았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라고 했더니 “상관없다”고 했다. 맑고 고왔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다.
한국에서 대학 1학년 때(1984년) 하느님 부르심을 받았다. 자퇴서를 내고 주저 없이 짐을 싸 이 곳 봉쇄 수녀원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22년이 됐네요.”
자신을 포함해 스페인 수녀 9명과 페루 수녀 3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연령대는 25세에서 97세까지. 최근 치매를 앓는 수녀들을 돌보는 일은 모두 아녜스 수녀 몫이다.
무엇이 20살 한국 여대생을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22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느님 은총’에 철저히 묶인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루하루 얼마나 충만한 은총 속에 살면, 이곳에 계속 있겠습니까. 저는 불교식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수녀는 하느님의 피조물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는 봉쇄 수녀원이라고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걱정과 고민이 전혀 없을까. 조심스레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시도 방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잘못된 습성 하나하나 까지도 주의를 기울입니다. 작은 불씨가 집을 태우듯 순식간에 집 전체가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수녀는 그래서 매일 자신이 저지르는 죄를 하느님께 봉헌한다고 했다.
“진정한 회개와 죄의 봉헌이, 그리고 그 봉헌이 낳는 작은 사랑 하나가 영웅적 희생보다 교회에 유익하다”는 신념도 덧붙인다.
세상에 이럴 수가. 22년간 봉쇄 수녀원에서 생활해온 수녀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죄에도(게다가 점점 죄의 강도는 심해지기만 하는데도) 둔감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잘못된 습성을 없애기 위해 늘 예수님께 의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에 죄짓는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늘 선물을 공짜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자물쇠를 채우고 나서 치유해 달라고 청합니다. 문만 열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으로 들어오시게만 하면 모든 치유가 저절로 일어납니다.” 수녀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기만 하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 멀고 높은 말이었다(물론 상당수 많은 신자들이 세속 안에서도 은총을 체험하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그래서 말했다. “예수님의 은총과 현존을 온 몸으로 느끼고, 또 그 은총 속에서 충만한 가운데 기거하기에는 우리가 세속에 너무 매여 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녜스 수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두 손을 앞에 모았던, 차분했던 모습과 달리 얼굴에 약간의 동요가 느껴졌다. 마음 속에 분명 심한 격랑이 일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녀가 두 손을 올려 쇠창살을 잡으며 말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가난을 택해 주세요. 저는 요즘 북한을 비롯해 전세계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굶어 죽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 사치스런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가난 속에 사랑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 누가 갇혀있는가
수녀원 문을 나섰다. 누가 쇠창살 안에 살고, 누가 쇠창살 밖에 사는 것일까. 쇠창살 안에서 20년 넘게 생활하는 아녜스 수녀가 갇혀 사는 것일까, 내가 세상에 갇혀 사는 것일까. 수녀원을 나서면서 더 큰 창살 안으로 들어서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쓰레기통이 보였다. 가방을 열었다. 수녀원 손님 숙소가 너무 깨끗해 차마 버리지 못한 쓰레기들을 꺼냈다. 담배꽁초, 카메라용 폐건전지, 껌 종이…. 한 웅큼이었다.
수녀원 하루
▲06:00 Levantarse (기상)
▲07:00 Laudes (아침기도)
una hora de oracion (묵상기도)
Sto. Rosario (묵주기도)
▲08:45 Sta. Misa y accion de gracias (미사)
▲09:30 Desyuno (아침식사)
Trabajo (소임)
▲12:30 Sexta y examen (육시과. 성찰)
▲13:45 Recreo (친교)
▲14:45 Estacion al Santisimo. Siesta (휴식. 소임)
▲16:00 Nona y lcctura espiritual (구시과. 영적 독서)
▲17:00 Trabajo (소임)
▲18:45 Visperas (저녁기도)
una hora de oracion (묵상기도)
refectorio (독서)
▲21:00 Recreacion (친교)
▲22:00 Completas (끝기도)
Recogimiento (잠심. 대침묵)
▲23:30 Maitines (밤기도)
▲24:30 Visita al Santisimo (성체조배)
▲24:45 Bendicion (강복)
Acostarse (취침)
◎가르멜회의 역사
스페인에는 현재 500여개의 가르멜 수도원이 있다. 아녜스 수녀가 있는 수도원도 그 중 하나. 이 500여개의 수도원은 분원 형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수도원이 모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스페인에 가르멜 수도원이 세워진 것은 1500년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의해서다. 하지만 가르멜회 전체의 역사는 기원전 900년경, 예언자 엘리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산과 사막에 은거했으며 관상을 목표로 은둔적 생활을 권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르멜(가르멜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해발 550여m의 산 이름으로 ‘비옥한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에 모여 그 가르침을 실천했다. 이후 12세기에 십자군 전쟁에 나선 일부 군인과 열심한 신자들이 성지 회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르멜에 남아 엘리야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봉헌하고 철저한 은수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후 이슬람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하면서 가르멜회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은수자들은 더 이상 가르멜 산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은수자들은 이후 유럽으로 이주,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에 가르멜회를 확산시켰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다. 데레사 성녀는 당시 많은(어느 정도 완화된) 가르멜회를 개혁, 1562년 새로운 개혁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했다. 이후 가르멜은 소화 데레사를 비롯 수많은 성인성녀를 배출하는 등 교회의 심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사진설명
▶22년째 수녀원서 생활해오고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아녜스 마리아 수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면 된다”고 말한다.
▶가르멜 봉쇄수녀회-동정녀들의 성모 수녀원 전경.
우광호 기자 woo@catholictimes.org/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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