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멱리(黑羃籬:蒙首:부르카-히잡)의 元祖, 朝鮮? 大食? 唐? [제1편]
2021년 07월 18일
○ 부르카[burka], 또는 히잡[Hijab] 등으로 불리는, 회교도(回敎徒) 여성(女性)들의 의상(衣裳)은, 조선왕조(朝鮮王朝 : 總稱)에서도 똑같은 의상(衣裳)으로 부녀자(婦女子)들이 착용(着用)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이를 “멱리(羃籬)·흑멱리(黑羃籬)·몽수(蒙首)·조라몽수(皁羅:검은 비단,蒙首)·저멱리(箸冪籬)·너울·개두(蓋頭)”등으로 불리웠다.“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은, ➊ “오호(五胡)시대로부터 융이(戎夷)【서(西)쪽 오랑캐와 동(東)쪽 오랑캐】들의 풍속(風俗)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➋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의 코란[Qur'an]으로부터 유래(由來)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실정(實情)이다보니, 대부분(大部分) 위의 ➋ 설명(說明)에 따라 ‘이슬람교=회교(回敎)’로부터 시원(始源)한다고 설명(說明)하는 것이 주류(主流)다.
세계(世界) 3대 종교(宗敎)중 하나라는,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는, 「서력(西曆) 610년(年)에 무함마드[Muhammad : 570-629年]에 의해 창시(創始)된 종교(宗敎)라는 것이 정설(定說)인데, 알라(Allah)는, 다신교(多神敎) 시대부터 메카[Mecca]에서 최고(最高) 신(神)으로 숭배(崇拜)되어 왔는데, 무함마드(Muhammad)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神)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Allah)만을 유일신(唯一神)으로 내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회교(回敎)의 ‘하지라【이슬람(Islam) 역(曆) : 히지라 : 헤지라 : 聖遷】’는 ‘기원후(紀元後) 620년 07월 16일’부터 시작(始作)된다. 630년 10월에 메카를 점령(占領)하고, 632년 3월에 메카[Mecca]에서 예배를 드리고, 632년 6월 8일[하지라 11년 3월 13일]에 사망(死亡)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의 교인(敎人)들은, 코란[Qur'an]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생활(生活)을 하는데, 특히 『여인(女人)들은, 부르카[burka] 또는 히잡[Hijab]등으로 불리는 의상(衣裳)을 꼭 착용(着用)해야 한다.』
이것은 코란[Qur'an]의 말씀에 따라, 「여인(女人)들의 신체(身體)를 가족(家族)이 아닌 타인(他人)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에서 출발(出發)했다고 전해진다.
● 〈‘멱리(冪籬)=흑멱리(黑冪籬)=몽수(蒙首)’는, ‘부르카[burka], 히잡[Hijab]’과 똑같은 형태(形態)와 그 목적(目的)이 똑같다. 그러나 융이(戎夷)【서(西)쪽 오랑캐와 동(東)쪽 오랑캐】에서 처음 시작(始作)된 목적(目的)과는 다르게 크게 변형(變形)되어진 것이다.
▷ 결론(結論)부터 말하자면 :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면 : “여인(女人)의 신체(身體)를 타인(他人)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것 때문에,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行爲)가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의 영향(影響)인 것처럼 호도(糊塗)하는 것은, 명백(明白)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다.〉라고 주장(主張)한다.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가 생기기 전(前), 휠 씬 그 이전(以前)부터 남녀(男女)를 불문(不問)하고,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또는 근접(近接)한 곳에서, 모래바람(風沙)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다닌 데서 유래(由來)하는 것이며, 바로 서호【西胡; 戎】와 이【夷 : 東夷】 즉 ‘융이(戎夷)’들로부터 시원(始原)한 것이다.
또 이런 유래(由來)에서 볼 수 있듯이, ‘동이(東夷) 땅에도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증거(證據) 및 고증(考證)해 주고 있는 이야기다.
부르카[burka] : 히잡[Hijab]
※ 이슬람여성들의 의상[출처 : 두산백과]
○ 오늘의 주제(主題)는, 조선왕조(朝鮮王朝 : 總稱)였던 “고려(高麗)” 때에, 고려(高麗) 여인(女人)들 역시 너울【조라몽수 : 皁羅蒙首 : 멱리(羃籬) 흑멱리(黑羃籬)】이라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의상(衣裳)을 하고 나들이를 했다는 것인데, 위의 그림(圖)에서 “차도르 또는 부르카”에 가깝다고 보아진다.
▷ 우리 카페의 회원(會員)님께서 ‘히잡’에 대한 의문(疑問)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제(主題)로 한 것입니다. 오해(誤解)없으시길 바랍니다.
[1] 송(宋)나라의 사신(使臣)으로 고려(高麗)를 방문(訪問)했던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속에 그 자세(仔細)한 내용(內容)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즉(卽)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二十 婦人 / 貴婦 : 婦人之飾.不善塗澤.施粉無朱.柳眉半額.皁羅蒙首.製以三幅.幅長八尺.自頂垂下.唯露面目.餘悉委地.白紵爲袍.略如男子製.文綾寬袴.裏以生綃.欲其褒裕.不使著體.橄欖勒巾.加以采絛金鐸.佩錦香囊.以多爲貴.富家藉以大席.侍婢旁列.各執巾甁。雖盛暑.不以爲苦也.秋冬之裳.間用黃絹.或深或淺.公卿大夫之妻.士民游女.其服無別.或云王妃夫人.以紅爲尙.益加繪繡.國官庶民.不敢用也.: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皁羅蒙首),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 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鐸]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 자리를 깔고서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서긍[徐兢, 1091-1153年]이 고려(高麗)를 방문(訪問)했을 때가 서력(西曆) 1,123년(年)[宋徽宗宣和五年,高麗仁宗元年]이라고 전해진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원본(原本)에도 도(圖)가 있었는데, 정강지화(靖康之禍) 때에 망실(亡失)되었다고 전해진다[原本有圖,在靖康之禍中亡失.]】
[2] 해동역사(海東繹史) 예지(禮志) : “몽수(蒙首)와 흑멱리(黑冪籬)”
《부인(夫人)들이 출입할 때에도 역시 말과 노복을 공급하는데, 이들은 대개 공경(公卿)이나 귀인(貴人)의 처(妻)로, 따르는 종자(從者)가 2, 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얼굴을 가리는『너울(蒙首)』을 만들어 쓰는데, 그 끝이 말 위를 덮으며, 거기에 또다시 갓[笠]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만은 오직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轝)는 없다. 옛날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과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궁인(宮人)들이 대개 말을 타면서 대부분 『흑멱리(黑冪籬)』로 전신(全身)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高麗)의 풍속(風俗)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唐)나라 때 ’멱리(冪籬)의 유법(遺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인용(引用), 설명(說明)하였다.】》
주(注) :〈흑멱리(黑冪籬) : 송징강본 《高麗圖經》권 22에는 ‘저멱리(箸冪籬)’로 되어 있다. 멱리(羃籬)는 머리를 덮기 위해 쓰던 건(巾)으로, 면의(面衣), 즉 쓰개의 일종이다.〉라고 하였다.
[3] ‘몽수(蒙首)는, 흑멱리(黑羃籬)’라고 하는데, 「흑멱리(黑羃籬) 또는 몽수(蒙首)는 어디로 부터, 어느 시기(時期)에 유래(由來)된 것일까?」
➊ 지금까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을 보면 : 「이러한 예법(禮法)은, 회교도(回敎徒)의 성전(聖典)으로부터 유래(由來)한다.」고 보아지며, 「여인(女人)들의 신체(身體)를 가족(家族)이 아닌 타인(他人)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에서 연유(緣由)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➋ 역사서(歷史書)로 볼 때 이와는 전혀 다르다. 얼굴을 가리는 풍속(風俗)은, ‘융이(戎夷)’로부터 나온 것인데, ‘융이(戎夷)’란 「서호(西胡)와 동호(東胡)」를 말하는 것인데, 『서호(西胡)는 곧 서융(西戎)을, 동호(東胡)는 동이(東夷) 즉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의 유래(由來)가 “회교(回敎)에서 나왔다.”」는 말은, 역사해설(歷史解說)의 오류(誤謬)임이 분명(分明)하며, 왜곡(歪曲)이 확실(確實)하다.
즉(卽) 구이(九夷)의 이(夷)을 반도(半島)로 만들다보니,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의 기원(起源)에서 빼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의 본래(本來)는 사막지대(沙漠地帶) 및 주변(周邊)에서 바람에 날리는 모래(風沙)로부터 몸(身體)을 보호(保護)하기 위해 착용(着用)하기 시작(始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가(史家)들이 ‘오호(五胡)니 강인(羌人)’들로부터 유래(由來)하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호(西胡)와 동이(東夷)’의 땅 모두에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證據)’다.
이러한 복식(服飾)들이 ‘제(齊)나라와 수(隋)나라’를 거쳐, ‘당(唐)’ 초(初)에 궁인(宮人)들이 사용(使用)하면서 유명세(有名稅)를 탔다는 이야기다. 즉(卽)
▷ 舊唐書 志第二十五 輿服을찾아보면 : 舊唐書 志第二十五 輿服 :〈武德,貞觀之時,宮人騎馬者,依齊,隋舊制,多著羃旂,雖發自戎夷, 而全身障蔽,不欲途路窺之. :무덕(武德), 정관(正觀)의 때에, 궁인(宮人)들이 말을 타고 다닐 때에, 제(齊)나라와 수(隋)나라의 옛 제도(制度)에 의지하여, 옷을 입어 가리고 다녔는데, 이는 융이(戎夷)로부터 나온 것이다. 전신(全身)을 막아서(障蔽), 길을 가는 도중에 엿보지 못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唐) 무덕(武德 618~626) ∼ 정관(貞觀 627~649) 연간(年間)에 궁인(宮人)들이 대개 말(馬)을 타면서 대부분 흑멱리(黑冪籬)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녔는데, 이것으로부터 시작(始作)되었다.』고 하였으며, 그 유래(由來)는 ‘융이(戎夷)’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 欽定四庫全書 / 藝林彚考服飾篇卷二 蓬萊縣知縣沈自南撰 冠幘類下 : 〈孔氏雜説齊隋婦人施羃罹全身障蔽也.:공씨잡설(孔氏雜說)에 의하면, “제(齊)와 수(隋)”의 부인(婦人)들은 멱리(羃䍦)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녔다.〉고 하였다.
‘제(齊)와 수(隋)나라’에서, 이때의 제(齊)나라 때에는 회교(回敎)가 태어나기 전(前)에 있었던 나라이므로,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의 코란[Qur'an]에 의해 흑멱리(黑冪籬) 또는 멱리(冪籬)를 착용(着用)한다.”라는 말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
즉(卽) 회교(回敎)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융(西戎)과 구이(九夷)의 풍속(風俗)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中華古今注羃䍦者唐武德貞觀年中宫人騎馬多著羃䍦而全身障蔽. 中略. : 〈중화고금(中華古今) 주(注)에서 말하기를, 멱리(羃䍦)는, 당(唐) 무덕, 정관(貞觀) 중에, 궁인(宮人)들이 말을 타고 갈 때에 멱리(羃䍦)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녔다.〉고 하였다.
이때는 회교(回敎)가 막 싹트는 시기(時期)에 해당(該當)됨으로 장안(長安)까지 전파(傳播)될 수 없다.
▷ 欽定古今圖書集成.明倫彙編.閨媛典 第373卷 : 〈羃䍦 : 羃䍦者,唐武德、貞觀年中,宮人騎馬多著羃䍦,而全身障蔽。멱리(羃䍦)는: 멱리(羃䍦)는, 당(唐) 무덕, 정관(貞觀) 중에, 궁인(宮人)들이 말을 타고 갈 때에 멱리(羃䍦)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녔다.〉고 하였다.
제(齊)와 수(隋)는, 6세기(世紀)의 왕조(王朝)들로써, 이때는 회교(回敎)라는 종교(宗敎) 자체(自體)가 존재(存在)하지 않았다. 따라서 ‘흑멱리(黑羃籬)=몽수(蒙首)’는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의 성전(聖典)에서 유래(由來)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물어 “서력(西曆) 618년 - 649년 즉(卽) 당(唐)나라 초기(初期)의 무덕(武德)과 정관(貞觀) 중에 말을 타고 다니는 궁인(宮人)들이 흑멱리(黑羃籬)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녔는데, 이것이 시초다.”라고 한 설명(說明) 역시(亦是)“잘못된 것이다.”
▷ 이때의 당(唐)나라는 장안(長安) 중심(中心)의 나라였고,
▷ 대식국(大食國)의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는, 메카[Mecca] 중심(中心)으로 존재(存在)해 있었을 뿐이며,
▷ 페르시아(Persia)지방으로 전파(傳播)된 것이 서력(西曆) 660년 경(頃)이라고 하며,
▷ 이곳을 넘어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각 지방으로 전파(傳播)되는데 수백(數百)년이 더 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는, 처음 ‘서호(西胡)와 동이(東夷)’에서 시작(始作)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근거(根據)로 볼 때,
특히「당(唐) 무덕(武德 618~626) ∼ 정관(貞觀 627~649) 연간(年間)에 궁인(宮人)들이 대개 말(馬)을 타면서 대부분 흑멱리(黑冪籬)로 전신(全身)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 유명세(有名稅)를 탓는가? 이때는 대식국(大食國)에서
세계(世界) 3대 종교(宗敎)중 하나라는,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 淸眞敎]는, 「서력(西曆) 610년(年)에 무함마드[Muhammad : 570-629年]에 의해 창시(創始)된 종교(宗敎)로써, 당(唐)의 무덕(武德 618~626) ∼ 정관(貞觀 627~649) 연간(年間) 때는, 서서히 주변(周邊)으로 확산(擴散), 전파(傳播)되면서 맹위(猛威)를 떨치기 시작(始作)할 때와 시기(時期)가 딱 겹치는 때다. 즉(卽),
➊ 회교(回敎)의 성전(聖典)에 의거(依據)한 것이라면, 「‘당(唐)’이란 나라는 곧 ‘대식국(大食國)’이며,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땅이다.」 역사서(歷史書)의 설명(說明)이 타당(妥當)하다면, 〈당(唐)과 대식국(大食國)은, 같은 한 나라(國)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회교(回敎)의 탄생(誕生) 시기(時期)’와 ‘당(唐)의 무덕(武德), 정관(貞觀) 때가 똑같은 시기(時期)’이기 때문이며,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를 똑같이 공유(共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➋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에 비춰보면 : ‘당(唐)은 곧 고려(高麗)’다. 즉 ‘신라(新羅)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新羅)는 고려(高麗)가 흡수(吸收), 합병(合倂)해 버렸기 때문에, 그 의상(衣裳) 즉(卽) ‘몽수(蒙首)=흑멱리(黑羃籬)’가 그대로 전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環境)이었기 때문이다.
➌ 만약(萬若) ‘당(唐)과 대식(大食)의 나라가 별도(別途)의 나라였다.’고 한다면, 이는 흑멱리(黑羃籬)는, 회교(回敎)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일 수 없다. 만약(萬若). ‘흑멱리(黑羃籬)=몽수(蒙首)’가 대식국(大食國)의 회교(回敎)로부터 시원(始原)한다고 한다면, 당(唐)으로 전파(傳播)될 수 있는 시기(時期)는, 최소한(最小限) 수백(數百)년 이후(以後)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唐)과 대식(大食)은 같은 나라(國)였다」는 가설(假說)을 세울 수 있다. 「당시(當時)의 장안(長安)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중심(中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➍ 또 하나의 문제(問題)는, 혹자(或者)들이 말하는, ’신라(新羅)는 페르시아[波斯 : Persia]다‘ 라는 주장(主張)이다? 허나 어느 역사서(歷史書)를 보더라도 신라(新羅) 여인(女人)들이 흑멱리(黑羃籬)를 했다는 기록(記錄)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고려(高麗)의 여인(女人)들이 착용(着用)했으니, 신라(新羅) 역시(亦是) 그런 풍속(風俗)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推測)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즉(卽) 신라(新羅)는 당(唐)의 복식제도(服飾制度)를 그대로 따랐다고 했으니, 당(唐)이 대식국(大食國)이든, 별도(別途)의 나라였든, ’몽수(蒙首)=흑멱리(黑冪籬)‘ 역시(亦是) 그대로 따랐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기록(記錄)이 전무(全無)하다는 점이다.
혹자(或者)들은 “신라(新羅)는 페르시야(Persia-波斯)와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다.”고 주장(主張)하면서도, 이런 유형(類型)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전무(全無)한 실정(實情)이다. 즉(卽) 당(唐)나라 때에 유행(流行)했다던 ‘몽수(蒙首)=흑멱리(黑冪籬)’ 이야기는 신라(新羅)와 관계(關係)되는 기록(記錄) 어디에서도 언급(言及)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이슬람교[Islam : 回敎 : 回回敎] 이야기는, ‘여름 한 철 지나가는 소낙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슬람 세계의 확대 ⓒ (주)천재교육 | BY-NC-ND
[4] 林下筆記 11권 / 文獻指掌編 / 머리를 감싸는 제도[蒙首之制] :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참고(參考), 인용(引用)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르기를, “남자의 건책(巾幘 한 폭의 헝겊으로 만든 두건)은 비록 당나라 제도를 조금 모방한 것이지만, 부인(婦人)의 타계(鬌髻)를 아래로 늘어뜨린 것은 오히려 완연한 좌수 변발(髽首辮髮)의 형태이다. 출입할 적에도 하인과 말을 주는데 대체로 역시 공경 귀인의 아내이다. 조라(皂羅)를 머리에 쓰고 왕비 부인은 붉은색으로 장식을 하되 역시 가마[車轝]는 없다. 당나라 무덕(武德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궁인(宮人)이 말을 탈 경우에는 대부분 검은 멱리(羃䍦 여자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를 하고 온몸을 가렸다는데, 지금 고려 풍속의 몽수(蒙首 부녀자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덮어쓰는 것) 제도가 아마 멱리의 유풍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5] 해동역사 제20권 / 예지(禮志) 3 / 의물(儀物)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참고(參考), 인용(引用)하고 있다.】
《궁부(宮府)에는 후궁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妾)이 있는데, 일반 백성들의 처나 잡역에 종사하는 비자(婢子)도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이는 그들이 일을 하고, 구실을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몽수(蒙首)를 아래로 늘어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 올리며, 옷을 걷고 다닌다.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이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부분 강낭(絳囊)으로 손을 가린다. 부인의 머리는, 귀천의 구별 없이 똑같아서 오른쪽 어깨 위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비단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 가난한 집에서는 몽수를 쓰지 않는데, 이는 대개 그 값이 은(銀) 한 근과 맞먹어 살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중략(中略). 살펴보건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송나라 사신 유규(劉逵)와 오식(吳拭)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나와서 관소(館所)에서 연회를 할 적에 우리 옷차림으로 단장한 창녀(倡女)를 보고는 불러서 계단 위로 오르게 한 다음, 넓은 소매의 옷과 색실로 만든 대(帶), 큰 치마를 가리키며 감탄하기를, ‘이것은 모두 삼대(三代) 시대의 복색인데 아직도 여기 고려에서 쓰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지금 부인들이 입는 예복(禮服)은, 대개 당나라의 옛 제도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주제(主題)와 조금 빗나간 이야기이다. 이 구절(句節)에서, “삼대(三代) 시대(時代)의 복장(服裝)”이란 말이 나온다. 삼대(三代)란 ‘하은주(夏殷周)’ 시대(時代)를 말하는 것으로, 기원전(紀元前)【2207-1766, 1765-1122, 1121-249】 2207년(年) ∼ 249년(年) 시기(時期)를 말하는 것이다.
「넓은 소매의 옷과 색실로 만든 대(帶), 큰 치마」를 입고 있는 고려(高麗) 여인(女人)의 옷차림이 바로 하은주(夏殷周) 시대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이는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즉(卽) 「고려(高麗)가 하은주(夏殷周)의 정통(正統)을 잇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융이(戎夷)【서융(西戎)과 동이(東夷) 즉 구이(九夷)】’로부터 유래(由來)했다.〉는 말은,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바람(風沙)을 피해 몸(身體)을 천으로 가리고 다닌 데에서 유래(由來)된 것이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혹(或), 그것이 유교(儒敎)로부터 파생(派生)된 것이 아닐까? 하였지만 그와 관계(關係)된 고전(古典)의 기록(記錄)은 찾지 못했다. [고전(古典) 발굴(發掘)은 계속(繼續)됩니다.]
2021년 07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장마철에 "장마"는 없고 "무더위"만 있을 뿐이네!
책상앞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찜통이다.
노트북의 열기와 33도의 열기가 함께 이우러지니 말이다.
이런 바보같은 짓을 왜 하지?
생각해 봐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나 자신이다.
이런 짓을 경제적분야로 넓혔다면......후회스러운 일이다.
허나 지금 후회한 들 무슨 소용?????
좋은 날은 다 지나가고 말이다.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
'명언'입니다.
문무님 덕분에 역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릴뿐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영주'님!
무더운 날씨에 댁내 평안하시지요?
'새로운시각을 갖게 되었다'니 반갑습니다.
여러 회원님들께서 조선사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