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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가 'La Marseillaies'입니다. 감상하기 전에 틀어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이 영상은 길고 보여주는것이 많지만
음질이 '약간' 삑이 난다는것이 흠입니다. 그래서 더욱 좋은 버젼은 준비했는데, 유명한 성악가 'Placido Domingo'와 합창대가 부른 버젼입니다. (제가 좋아합니다.) 음질도 좋고 웅장합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국가가 세계의 국가들 중 제일 웅장하고 멋진것 같습니다...
프랑스 국기 '삼색기(La Tricolore)'과 프랑스 국가문장
대혁명 당시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세계 수많은 나라의 국기가 이 국기를 본땃다.
그리고 대혁명 당시 불리었다는 '라 마르세예즈' 가사. 피로 점철된 인류의 민주주의를 고스란히 대변해주는 웅장하고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Allons enfants de la Patrie
나가자, 조국의 형제여!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영광스런 날이 왔다!
Contre nous, de la tyrannie
폭군에 결연히 맞서서
L'étandard sanglant est levé
피묻은 전쟁의 깃발을 내려라
l'étandard sanglant est levé
피묻은 전쟁의 깃발을 내려라
Entendez-vous, dans la compagnes
우리 강토에 울려퍼지는
Mugir ces farouches soldats?
포악한 적군의 함성이 들리는가?
Ils viennent jusque dans nos bras
적들은 우리의 아내와 선량한
Egorger vos fils vos compagnes!
시민들의 목을 조르려 하네!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어라, 시민이여!
Formez vos bataillons!
모두 앞장서라!
Marchons, marchons!
나가자, 나가자!
Qu'un sang impur
피묻은 행진이여
Abreuve nos sillons!
목마른 밭고랑에서!
Amour sacré de la Patrie,
거룩한 애국심이여,
Conduis, soutiens nos bras vengeurs
복수를위한 팔을 들어올려라
Liberté, liberté cherie,
자유여, 귀중한 자유여
Combats avec tes defénseurs!
수호자와 함께 싸워라!
Combats avec tes défenseurs!
수호자와 함께 싸워라!
Sous drapeaux, que la victoire
우리 깃발아래 승기가
Acoure à tes mâles accents.
강인한 음악에 발맞추네.
Que tes ennemis expirants,
죽을 우리 적수들,
Voient ton triomphe et notre gloire!
우리의 승리와 영광을 보기를!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어라, 시민이여!
Formez vos bataillons!
모두 앞장서라!
Marchons, marchons!
나가자, 나가자!
Qu'un sang impur
피묻은 행진이여
Abreuve nos sillons!
목마른 밭고랑에서!
Nous entrerons dans la carrière
우리는 그 길로 들어가리
Quand nos aînés n'y seront plus
우리 선열이 없는 그 때
Nous y trouverons leur poussière
거기 그들의 흔적과
Et les traces de leurs vertus
용기의 자취를 발견하리
Et les traces de leurs vertus
용기의 자취를 발견하리
Bien moins jaloux de leur survivre
그를 위해 살아남자느니
Que de partager leur cercueil,
죽음을 같이 나누는,
Nous aurons le sublime orgueil
숭고한 자존심을 지키리라
De les venger ou de les suivre.
복수를 이루고 그를 따르리라!
Aux armes, citoyens!
무기를 들어라, 시민이여!
Formez vos bataillons!
모두 앞장서라!
Marchons, marchons!
나가자, 나가자!
Qu'un sang impur
피묻은 행진이여
Abreuve nos sillons!
목마른 밭고랑에서!
프랑스의 아름다운 육각형 (L'hexagone) 모양의 국토
바로 이땅에서 우리가 오늘날 마음껏 누리는 '민주주의'가 피어났다. 이땅의 수많은 피를 필요로 했기에 그것이 있는것이다.
영국과 함께 근대사를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랑스. 그러나 잦은 혁명과 내부 혼란과 식민지 상실. 그리고 미국의 성장으로 인해 한때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과 사이좋게 쇠퇴해버린 비운의 나라.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계의 절반을 호령했다는 자부심과 서구문명의 정수인 파리, 그리고 그들의 언어인 Français와 프랑스인임을 목숨과도 귀중히 여기는 자부심 강한 민족이 살고있는 나라. 그 '프랑스'를 살펴본다.
초기初期(대항해시대 부터)
프랑스는 초창기 대항해시대때만 해도 식민지 분야에서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하였다. 이는 대항해시대 당시만 해도 통일 '프랑스인'라는 개념대신 저마다 브류타뉴인,프로방스인,노르망디인들로 호칭하는 여러 민족들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치적 분열은 다른 제국들이 해외로 뻗어나가는 것을 프랑스로써는 지켜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후에 강력한 통일 프랑스 제국이 등장하기 까지 프랑스의 국력이 국내에서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선두주자인 에스파냐,포르투갈,네덜란드, 그리고 후발주자인 영국등에게 17~18세기까지 해외 식민지경영에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근대 2~300년간 정치적,문화적으로 명실상부한 유럽 제 1 강국이었으며, 그들의 언어인 프랑스어가 훗날 세계를 제패하는 영어에 한발 앞서 전 유럽의 공용어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바침 해준다.
프랑스의 근대 초기는 험난한 왕권 강화의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나 에스파니아왕국 같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자국내의 지방분열적인 잔재를 청소하는데 많은 힘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초반 부르봉 왕가가 집권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상황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부르봉왕가의 군주들은
수십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던 프랑스를 정략결혼,침략,합병,권한양도 등의 형식을 통해 프랑스라는 국가를 점차 하나의 국가로 통일 시켜 나갔다.
『중기中期 (혼란한 근대로의 시작)』
그러나 17세기 이후 수십여개의 국가들로 나뉘어져있던 프랑스가 마침내 통일을 맞게되고, 점차 해외 식민지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퀘벡과 뉴프렌치캐나다등을 개척하여 막대한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부흥에도 불구하고 1789년, 부르봉 왕조의 왕들에 실정과 연이은 사치스러운 왕실 파티에 의한 세금 징수로 폭발 직전의 불만에 차있던 군중이 폭발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Révolution française)'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의 해외개척의지는 잠시 꺾이게 되고 기나긴 프랑스민중의 '자유를 향한 고난의 대장정'이 시작되게 된다.
프랑스 혁명기 1789년,
막대한 왕권을 과시하던 부르봉 왕가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강권통치시기가 지난뒤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는 기존 독립국가로서 프랑스에 귀속된 지방영주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부르주아(bourgeoisie)'계급의 불만또한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수탈에 가장 시달리던 일반 시민들의 불만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고 절대 왕권에 의해 통치하던 루이 14세가 죽자 이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다.
(또 한편으로는 혁명이전의 '구시대舊時代 의 제도'를 타파했다고 하여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타파'라고도 한다)
이때 분노한 시민들은 당시 주요 정치범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왕궁으로 진격해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던 루이 16세를 붙잡아 파리로 이송한 후 감금하게 되고, 훗날 유명한 '단두대'에서 처형하기에 이른다. 이때 프랑스 시민들은 왕을 자기들 스스로 처형함으로써 절대 군주들이 다스리고 있던 유럽 전역에 프랑스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게 되었으며, 훗날 대 프랑스 전쟁의 빌미가 되어 다시한번 분열에 휩싸인 프랑스가 결국 나폴레옹의 집권을 허락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1792년, 프랑스 혁명후 혼란에 휩싸인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국민공회'로 불리는 새로운 의회가 조직되어 프랑스 제 1공화국이 선포된다. 이 공화제 정부가 조직된 후 제일먼저 시작한 것은 루이 16세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여 처형시킨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노골적인 반反왕정 움직임에 유럽은 점차 반 프랑스혁명 동맹이 결성되게 된다.
루이 16세의 처형과 반 프랑스 동맹의 전쟁 선포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시민들의 손으로 처형당하는 충격적인 사태가 벌어지자, 유럽 각국의 절대 군주들의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같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미 프랑스 혁명세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각국의 절대왕정국가들이 프랑스 루이 16세의 측근들의 협조하에 프랑스 혁명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본격적인 진격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혁명파가 승리)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루이 16세의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군중들>
제 1공화국 시대 (1795년 10월 26일~1799년 11월 9일)
프랑스 대혁명과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인한 격동의 시간이 지나자, 군중들은 극도의 흥분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대혼란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유럽각국의 무역중단으로 인해 프랑스 사회 전체에 불만이 쌓여가게 된다.
결국 혁명으로 집권한 제 1공화국의 무단독재와 공포정치, 공화국 정부인사들의 극심한 사치로로 인한 군중들의 소요가 또다시 발생하자, 이같은 불만을 잘 파악하고 있던 난세亂世의 영웅,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집권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집권한 통령정부의 인사들은 자신들을 왕족이나 다름없이 여겨 루이 16세때의 제정적 요소를 그대로 포함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이때의 사치와 폐단이 왕정시대를 능가했다고 한다.)
(영웅, 나폴레옹의 시대)
쿠테타(coup d'Etat)와 '나폴레옹 1세'로의 등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그로 인해 근대 프랑스가 혼란을 딛고 다시한번 일어설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지중해의 프랑스령 섬이었던 '코르시카(Corsica)'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한 시절에 군인으로 프랑스혁명에
참가하여 일단 군인계에 자신의 발을 들여논뒤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그뒤 프랑스 혁명정부에 봉사하며 각종 사회 소요, 왕당파의 봉기를 제압함으로써 혁명정부에게서 능력을 인정받아 각종
시위와 소요,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함과 동시에 이집트 원정, 이탈리아 원정과 오스트리아 빈 점령등의 높은 공적을 이루어
프랑스 시민들의 엄청난 인기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높은 인기로 인해 공화국정부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어 그 스스로
쿠테타를 꿈꾸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원정당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
이후 제 1공화국에 장교로써 복무하며 변함없이 공화국에 충성을 다하는척 하던 나폴레옹은, 점차 공화국정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던 프랑스 시민들의 민심을 파악한뒤, 이집트 원정에서 승리한 직후 혁명정부의 송환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몰래 이집트를 떠나 귀국, 1799년 쿠테타를 일으켜 사실상 왕정이나 다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통령과 통령제를 전복시키고 잠시 공화제를 유지한뒤 자신이 제 1통령(임시,종신제)으로 취임해 실권을 쥐다가 마침내 1804년 국민투표에 의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폴레옹 1세'에 즉위한다. (프랑스 제1제국: 1804년 - 1815년)
<나폴레옹 1세로 등극한 나폴레옹>
이후 나폴레옹 1세는 국내 안정과 외국 정복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 시절이후 불안감과 혼돈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지리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의 천재적인 지략과 전술로 인해 이탈리아,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로이센,오스트리아,폴란드,스페인등을 정복하여 그야말로 유럽대륙의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과 동생을 있따라 나폴리,네덜란드의 국왕으로 임명하여 명실상부한 유럽의 지배자로서 그 권력을
온 유럽에 떨치게 된다.
나폴레옹 일가의 몰락과 백일천하
나폴레옹은 황제로 등극한 뒤에도 많은 전쟁을 벌여 프랑스를 유럽대륙의 유일무이한 강자로 올려놓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뒤 러시아원정의 실패와 잦은 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프랑스 국력의 소진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폴레옹의 제국은 나폴레옹 스스로가 전쟁이 지속되어야만 유지될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나폴레옹 집권 내내 프랑스 국민들은 전쟁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미 자신의 제국과 프랑스라는 강대국의 계속된 패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잇따른 외국 열강들의 대對 나폴레옹 반동맹 결성으로 인한 타격과 프랑스 내부의 반발로 인해 점차
나폴레옹의 철권통치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한때 100만명이나 되던 막강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사실상 괴멸되어 버리고, 1814년 마침내 반反 나폴레옹연합군의 파리 입성을 허용하여 나폴레옹은 실각하고 만다.
그뒤 프랑스 제국의회와 연합국의 압력으로 인해 엘바 섬으로 쫒겨나다시피 한 나폴레옹은 1년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며
틈틈이 자신의 복권을 꾀하다 1815년, 과거 자신의 휘하에 있던 충성스러운 장군들의 호위를 받아 프랑스 남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한다. 그뒤 왕정복고를 통해 즉위한 루이 18세의 뒤떨어진 사고방식과 통치방식에 실망한 파리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입성에 성공한다.
한편 나폴레옹의 무혈입성(無血入城)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자, 경악한 유럽의 군주들은 또다시 반 나폴레옹 연합을 결성. 나폴레옹 타도를 외치며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나폴레옹이 벨기에로 진주하자, 그곳에
있던 영국군은 시간을 끌며 연합군의 합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100일동안 지속된 나폴레옹의 천하는 다시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대서양 망망대해에 떠있는 영국령의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그 후로 그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잠시 (1815년 6월 22일~1815년 7월 7일) 프랑스 제 1제정의 제 2대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아들 나폴레옹 2세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으나 연합국의 파리 점령과 더불어 그위 황제자리도 15일만에 허무하게 끝이나고 만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폴레옹 2세가 22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죽은 뒤에 아버지 옆에 묻어달라고 한 소원은 100여년 뒤인 '히틀러'의 파리 입성으로 인해 성사되게 된다. (히틀러가 파리를 접수한후 독일에 있던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의 아버지 무덤옆에 이장함)
왕정복고(王政復古)
나폴레옹의 천하가 끝난 1814년,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루이 18세가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나폴레옹의 귀환과 더불어
100일여 동안 잠시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뒤 나폴레옹과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가 죽음을 맞이하여 다시
왕위에 올라 10여년간 프랑스를 통치하게 된다. 그가 재위하던 당시 아직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는 잠시 온건 정책을 취하다 결국 절대 왕권으로의 회귀를 선언한다.
이로 인해 다시금 프랑스 국민들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그뒤 여러명의 부르봉왕가의 왕들이 프랑스를 통치하였으나 '샤를 10세'때의 7월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데(1830년) 1798년의 대혁명으로 인해 국왕이 처형되는 사태가 재발될까 우려한 샤를 10세가 그를 대신할 대리직으로 '루이 필리프'를 '시민들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에게 통치를 맡겼으나 혁명정부에 의해 샤를 10세는 퇴위당하고 루이 필리프가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연이은 그의 실정과 또다시 왕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과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또다시 '2월 혁명'이 발생. 결국 새로 왕에 오른 루이가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18년만에 또다른 혁명으로 왕정에 또다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루이 필리프는 왕이 되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잊지 않고 왕으로써 거만하지 않게 행동하고 철저히 입헌 군주제를 지켰으나 부르주아와 서민들과의 계급의 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혁명이 발생해그도 1848년 2월 혁명으로 사퇴하게 된다)
<당시 샤를 10세에 대항한 7월 혁명을 소재로한 '민중을 이끄는 여신'. 걸작중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때까지의 연표
*1589-1789 : 부르봉 왕조. 앙리 4세(1610년 살해됨)가 종교 전쟁을 종결시킴.
루이 13세, 루이 14세에 이르러 절대 군주 절정의 시대.
*1789-1804 : 프랑스 혁명에서 황제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1789 : 미중들의 바스티유 감옥 탈환 및 인권 선언문 낭독.
-1792 : 단일 연대의 공화국이 선포됨.
-1793 : 루이 16세(1660-1715)에 이르러 절대 군주 절정의 시대.
*1804-1848 : 제1제정 시대. 나폴레옹 1세가 자신이 황제에 오름을 선포. 새로운 영토 전쟁의 시대. 나폴레옹이 민법전 등을 편찬. 두 번이나 퇴위 강요를 받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추방당함.
*1815-1830 : 왕정복고에서 혁명에 이르기까지.
*1815-1830: 부르봉 왕정 복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새)
*1815-1830: 부르봉 왕정 복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새)
*1830-1848 : 루이 필립 1세가 왕위에 오름.
*1848 : 새 혁명으로 프랑스의 군주제가 막을 내림.
나폴레옹 일가의 복귀(復歸)와 프로이센의 성장
대혁명이후 가난과 정체성 혼란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던 나폴레옹 일가가 연합군과 왕당파에 의해 몰락했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결코 나폴레옹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로 귀양을 가 그의 천하가 끝난지 30여년 만에 유명한 '프랑스의 2월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를 다시 내쫒고 그의 조카이자 의붓손자였던 '나폴레옹 3세'의 복위로 다시금 나폴레옹 일가의 천하가 시작된다.
(그가 집권한 초창기에 직함은 '대통령' 이었다. 이때를 '프랑스 제2 공화국' 이라고 한다.1848-1852)
그가 즉위하자 프랑스 시민들은 그의 등극을 열렬히 축복했으며, 프랑스가 다시금 유럽의 지배자로 우뚝 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기대대로 나폴레옹 3세의 치하동안 전임 왕들의 폐단이 어느정도 제거되고 프랑스의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말년의 프로이센 제국의 성장과 나폴레옹 일가에 대한 유럽 제국들의 반反 프랑스 분위기가 또다시 형성되어 결국 대외적인 고립이 심화되어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프로이센의 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와의 마찰과 그의 독일 통일정책에 대한 위협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대對프랑스에 대한 태도에 분노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제국으로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보-불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참패하여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는 수난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의 大 독일 제국 선포에 채찍을 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뒤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이라는 알짜배기 땅을 독일에게 넘겨주게 되었으며, 또한 통일된 독일이 프랑스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인 50억프랑을 요구하였으나, 단 몇개월만에 이를 갚아 전 유럽과 독일, 그리고 비스마르크 수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독일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1871년 3월 18일~5월 28일)의 결성과 프랑스 제 3 공화국(1871~1940)
나폴레옹 3세가 보-불전쟁에서 패한뒤 포로로 잡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자, 왕정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
있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도인 파리는 온갖 이념과 각종 정치세력의
대결의 장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으며 더욱이 '야만인의 나라'이라고 무시했던 프로이센에게 점령당한 수치로 인한 파리 시민의 소요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반 시민들중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무리가 무장을 하고 봉기, 1871년 파리를 장악한후 그들만의 사회주의적 자치 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로 불리는 파리 코뮌이다.
이들의 운동은 비록 단기간에 그치고 얼마못가 정규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마르크스나 레닌등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도 이들의 후신이다. 이 사회당 출신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 또한 파리 코뮌은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의 시초라고 언급한 사례가 있다.)
비록 민중에 의해 단기간 존재했던 짧은 자치정부지만,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당시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대도시들이 편견과 달리 이들로 인해 짧은 평화를 누렸다는 것은 짚고가야할 부분이다.
이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프랑스는 공화제로 체재를 바꾸었는데, 이는 프랑스역사상 3번째로 공화정을 채택한 정권이라 하여
'프랑스 제 3공화국'이라 한다. (1871~1940)
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돌프 티에르가 취임한후 프랑스 제 3공화국 이래 모두 13명의 대통령이 있었는데,
이 정권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가혹한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우선 제 8대 대통령 '레이몽 푸앵카레'가 집권하고 있을때, 호시탐탐 프랑스를 노리고 있던 독일이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때 푸앵카레 대통령은 '우리가 또다시 저 야만인들에게 굴복한다면 프랑스의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며, 프랑스 국민들의 단호한 대처를 요구했다. 또한 프랑스 국민들또한 이미 과거 '보불전쟁'으로 인한 치욕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어,
이번에야말로 독일을 무찌를수 있는 단호한 기회라고 여겨 독일이 예상한것과는 다르게 프랑스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된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정복하지 못한 독일은 점차 전세가 불리해져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항복하고 만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어 과거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비시 프랑스-임시 정부-제4 공화국-제 5공화국(현 프랑스 공화국)
프랑스가 연합국으로 가담하여 독일에 승전한 지도 20여년, 푸앵카레 이후 제 3공화국은 그 능력을 인정받으며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무시무시한 저력으로 다시 일어난 독일(나치독일)에 의해 또다시 전쟁을 겪으며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과 많은 물질적,문화적 유산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깊은 좌절에 빠져있던 독일국민들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파리가 또다시 독일인에 의해 점령되는 수모를 겪었으며, 남부 비시 프랑스라는 꼭두각시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프랑스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이후 나치독일에 협조한 비시 프랑스는 나치의 패망과 함께 자존심을 되찾았으나 이후 프랑스는 식민지의 독립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지위를 누리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전후 각종 사회문제, 나치독일 협력자색출문제, 제 3공화국
붕괴와 제 4,5공화국 등의 풍파와 최근에는 집시(롬인)추방문제, 톨레랑스의 몰락등의 홍역을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세계 5개밖에 없는 UN 안보이사회 회원국이며 공식적인 핵무기 보유국으로 아직
프랑스라는 나라가 강대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우주개발,각종 의학, 과학기술, 생명공학, 농업 분야에서 미국을
능가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선진국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이공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꽃피어난 발상지라는 점을 들어 철학,사상등 인문 분야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가 바로 프랑스이다.)
또한 프랑스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이자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의 근원지이며 이들은 이 대혁명의
후손이자 권리를 주장한 시민들의 후손이라는 점을 목숨보다 귀중이 여기고 살아가는 프랑스인의 조국이기도하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쓰여지고 낭독된 '인권선언문'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서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현재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많이 후퇴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며, 점차 사회가 분열되고 있는것
또한 문제이기도 하다. (2010년 남아공 축구대표팀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와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여전히 명백한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문화강국으로써의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현대 미국의 독주를 막는 서방세계의 선두주자라는 자부심또한 가지고 있으며, 이를 독일과 함께 미국을 견제할 유럽연합(EU)의 창설과 형성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독일에 이어 유럽연합회원국에 대한 개발원조 2위)
※ 1840년 이후 연표.
*1848-1852 : 제2공화정.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조카)가 남성들만이 참가한 보통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됨.
*1852-1870 : 1851년 12월 21일 쿠데타로 제2제정 탄생. 루이 나폴레옹이 3세가 됨.
*1870-1871 : 프랑스, 러시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 제정이 무너지고 나폴레옹 3세가 영국에서 추방됨. 3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 계속되었던 파리 코뮌(혁명 정부)이 진압됨.
*1871-1940 : 1875년 제3공화정이 선포되고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전쟁이 발발함(1914-1918, 1939-1945). 1936년에는 인민 전선, 2차 대전 중에는 프랑스 정부.
*1946-1958 : 제4공화국. 불안정한 정국과 계속된 식민지 전쟁(알제리와 인도차이나).
*1958 : 드골 장군이 다시 정권을 잡음. 새 헌법으로 제5공화국 출범.
*1962 : 알제리 전쟁 종결. 대통령 직접 보통 선거 실시.
*1968 : '68년 5월' 사건.
*1969 : 드골의 하야. 조르주 퐁피두가 대통령으로 당선.
*1974 : 조르주 퐁피두 사망.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으로 당선.
*1981 :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 1988년에 재당선됨.
(14년 임기 동안 각각 2년씩의 동거 정부를 2번 거침)
*1995-2007 : 자크 시락이 대통령으로 당선. 2002년의 재선으로 2007년까지 임기.
*2007-현재 : 헝가리 계 니콜라스 사크로지 대통령 당선. 현재까지 통치.
역시 보너스 자료. (아 하기 힘드네요 ㅠㅠ) 대항해시대 이후 역대 프랑스 국왕의 간략한 소개.
앙리 4세의 전신화와 '부르봉 왕가'의 문장, 그가 '부르봉 왕가'의 시초이기 때문에 삽입했다.
앙리 4세 Henri IV de France (재위기간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부르봉 왕가(branche dite de Bourbon)의 시초로 프랑스 역사상 성군으로 불리는 몇 안되는 왕중 한명이다.
당시 전 유럽대륙을 휩쓸고 있던 '종교 전쟁'을 종식시킨 인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품과 능력을 존경하여 따랐다고 전해지며 유명한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프랑스 내의 내전을 종식시킨 뒤 프랑스의 부국강병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1610년 파리 시 한복판에서 내전때 만든 적에게 암살당함으로써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까지도 우리의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앙리 대왕'으로 불리며 강국 프랑스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루이 13세 Louis XIII of France (재위기간: 1610년 5월 14일~1643년 5월 14일)
재위기간을 년단위로 재위한뒤 죽은 특이한 내력을 가진 왕이다. (딱 33년 0개월 0일 통치하고 사망)
친정 이전 섭정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귀족들이 반항을 시도, 내란의 위험이 생겼으며, 1617년부터 친정(親政)을 하였으나, 국무(國務)보다 음악이나 사냥을 좋아하여 국내의 동요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 귀족들은 이 기회에 옛 특권을 회복하고자 삼부회(三部會)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왕측은 삼부회 내부의 대립을 이용하여 이것을 해산시켰다. 그 후 프랑스 대혁명의 전야까지 한 번도 삼부회는 개최되지 않았고, 전제적 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1624년 당시 추기경(樞機卿)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점차 국가체제를 정비하였으며, 귀족 세력과 위그노파를 탄압하였다. 부르봉 왕권 절대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또 30년 전쟁(三十年戰爭)에도 개입하였다. (위키 통째로 인용)
프랑스의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을 독려한 왕이기도 하다.
<유명한 루이 14세의 성인때의 전신화와 글쓴 본인도 놀란 8세때의 루이 14세, 여자라고 해도 믿겠다.>
태양왕 루이 14세 Louis XIV of France (재위기간: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를 뽑는다면 이 인물이 꼭 들어갈 것이다. 그가 재위할 당시 프랑스는 선대 왕들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으로 인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위엄과 영향이 프랑스 전역을 통치하는데 쓰였으며 이들 선왕들로 인한
치세덕분에 루이 14세는 안정된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열렬히 지지하여 국왕의 권위를 절대 넘볼수없는 신성한 것으로 확립하엿으며, 이는 후에 프랑스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유럽뿐 아닌 전세계로 세력을 확대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반대로 100여년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사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대혁명'의 발발에 씨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대체로 성군으로는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매일 호화로운 파티와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고 유럽 각국의 왕족들을 초빙하여 프랑스 궁정문화를 유럽 전체로 퍼뜨려 '프랑스 문화-고급문화'로 인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을 명한것도 이 왕이다.)
한때 프랑스어를 유럽의 엘리트라면 반드시 구사해야할 언어로 만들어 프랑스 문화의 아버지로도 평가된다.
다음은 위키백과를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업적도 많이 있지만 실정도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낭트칙령'의 폐지이다.
그는 프랑스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이것은 그의 애첩 맹트농 부인의 사주 때문이라고도 한다.), 1685년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낭트 칙령을 폐지, 개신교를 탄압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을 공직자 취임제한등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차별금지정책이었는데, 이를 폐지함으로써 탄압을 받게 된 위그노 25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어서,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내가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불행하게도 내가 행하지 못한 모든 일을 해주기 바란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터서 100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루이 15세 Louis XV of France (재위기간: 1715년 9월 1일~1774년 5월 10일)
(위키)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인자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어 “친애왕” (le Bien-Aim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이 그의 결핍된 도덕성과 프랑스와 군주 정치를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점 그리고 외교 정책의 실패를 지각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식자, 결국 그는 프랑스의 인기 없는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역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루이 15세를 무자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가 실제로는 매우 지적이며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과업에 일신을 바쳤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가 통치기간 내내 나쁜 결과만 가져온 이유는 전제군주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뿌리 깊은 소심함과 문제를 앞당겨 혼란만 가중시키는 인식 때문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루이 15세가 나랏일을 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사위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가 (루이15세의 재종조부이자 왕고모부)1723년까지 섭정을 맡아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루이 14세는 섭정의 전횡을 우려해 그의 서자인 멘 공과 툴루즈 백작에게 권력을 분산시키는 유언을 남겼지만, 오를레앙 공은 고등법원(Parlement)의 도움으로 그 유언을 무효화시켰다. 오를레앙 공은 그 대가로 고등법원의 간주권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의 이러한 처사는 루이 14세하에서 억압받았던 고등법원의 권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그는 국왕참사회의 의견을 각별히 존중함으로써 귀족들의 권력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루이 14세가 탄압한 얀센주의자들을 해방시켰으며, 외교적으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였던 오스트리아와도 화해하였다.
한마디로 그의 정치는 루이 14세에 대한 반동의 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오를레앙 공과 자유롭게 강력해진 귀족들은 그 시대를 방탕과 스캔들로 물들였다. 16세기 이래 확립된 귀족들의 우아하고 세련된 양식은 그 시대에 향락과 방탕에 젖어 도덕적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환락을 즐기는 오를레앙 공은 100여 명의 애첩을 두었고 궁정에는 추잡한 정사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는 동안 왕권을 크게 실추되었다.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는 천연두에 걸려 몸져누웠으며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64살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당시 그가 운명했을 때에 어느 누구도 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약하면... 왕 자체는 인자한 왕이었지만 소심했고 신하들의 폭정과 문란으로 인해 왕이 크게 평가 받지 못하고 있음)
루이 16세 Louis XVI of France (재위기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궁전의 경비 등으로 인하여 초래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치세하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지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하여, 미국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는 한층 더 악화되고 말았다.
때문에 루이 16세는 즉위 직후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계속 골치를 썩어야만 했다. 여기에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적 모순이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구 체제하에서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능력이 아니라,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하여 문벌은 없지만, 학식,기술, 재산같은 실력을 갖춘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지역별로 서로 관습, 법 등이 달랐다. 북부와 중부지방의 세금이 가장 무거웠으며 파리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의 10~15%를 세금으로,8%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를 부양하는 돈으로 내야했으며,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때까지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소득의 10%를 교회에 헌금하는 십일조를 해야 했다.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세개혁을 통해서 난관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수구적인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1787년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인 명사회를 소집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모임을 가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여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삼부회를 소집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속셈을 알아차린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계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6월 제3신분의 대표들은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속한 일부 대표들과 합세,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했다. (이 선서는 훗날 ‘테니스 코트 선서’라 불리게 된다. )
그러나 루이 16세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하자, 팔레 루아얄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7월 14일 오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무정부 상태가 된 파리 시내에서 민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로 알아보기 위해서 밤나무 잎을 모자에 걸었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이 붙었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이다.
(위키)
루이 17세 Louis XVII of France (재위기간:1793년 1월 21일~1795년 6월 8일)
루이 17세는 프랑스의 명목상 군주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루이 샤를(Louis-Charles)이다.
루이 17세가 죽기 몇달 전에 기록은 거의 없기 때문에, 루이 17세가 가까스로 탕플 감옥에서 탈출하거나 독살당했다느니, 죽은 소년은 루이 17세가 아니라 그와 닮은 대역이었다느니 등의 여러 소문들이 무성하였다 한다. 루이 17세 사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주장한 사람이 3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루이가 죽고 난 뒤, 그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가 루이 17세의 심장을 몰래 훔쳤는데, 프랑스 생 드니 성당 지하묘실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 심장이 두고두고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 않았으나, 루이 17세의 모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과 같이 DNA 검사결과 서로 일치하여, 진짜 루이 17세의 심장으로 밝혀졌다. (위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프랑스 혁명기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훗날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재위기간 1804년~1814년, 1815년)로 즉위한다. 또한, 라인 동맹의 보호자 겸 이탈리아의 왕이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2세 Napoléon II (재위기간:1815년 6월 22일~7월 7일)
(나폴레옹 父子부분은 위에서 상세히 설명했기에 생략합니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많고 복잡함 ㅠㅠ)
루이 18세 Louis XVIII of France (재위기간: 1795년 6월 8일~1824년 9월 16일
그러나 사실상 1814년 4월 11일부터 1815년 3월 20일까지 통치한후 나폴레옹의 복권으로 물러났으나 그 다음 복위되어 1815년 7월 8일~1824년 9월 16일까지 통치)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대(對)프랑스 동맹군에 의해 쫓겨나고 이후 빈 회의에서 여러 나라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복귀가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돌아와 왕으로 즉위하였다. 다만 당초엔 연합국으로부터 생사가 확실치 않은 루이 17세의 섭정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2년간은 명목상의 왕으로 취급되었다. 나폴레옹 1세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루이 18세는 다시 프랑스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복귀가 백일천하로 끝나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즉위하여 친정을 실시하였다. 말년의 왕족 암살 사건으로 인해 전제 군주제로 복귀하여 훗날 다시 혁명을 촉발하게된다.
(위키)
샤를 10세 Charles X (재위기간:1757년 10월 9일~1836년 11월 6일)
부르봉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프랑스에 귀국하나, 나폴레옹이 되돌아와 백일천하가 시작되면서 다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그를 비롯한 부르봉 왕가는 나폴레옹에 대해 무력하기만 했다.
1824년, 형 루이 18세가 서거하면서 국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루이 18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루이 18세는 프랑스 혁명 시절의 자유 사상을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던 반면, 샤를 10세는 혁명 전의 귀족들에게 특권을 다시 부여할 정도로 보수-반동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당시 시행되었던 입헌 군주제에 대해서도 철두철미하게 반대하며 절대 왕정의 부활을 기원했다.
선왕이자 형이었던 루이 18세보다 더 철저한 전제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1820년대 말에 이르러 프랑스의 경제가 불안하게 되었고, 1830년에는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7월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인해 퇴위당한 샤를 10세는 일단 앙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시민들에 의해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되었다.
예전의 루이 16세와는 달리 체포되어 처형되지는 않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1836년까지 생존했다. 그는 북이탈리아의 고리치아에서 죽었다.7월 혁명 이후, 부르봉 가는 이제 왕가가 아니게 되었고 루이 필리프가 국왕으로 옹립되면서 오를레앙 가가 1848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트리컬러를 국기로 다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위키)
(샤를 10세가 퇴위하고 그의 손자 앙리 5세가 1830년 잠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혁명파가 옹립한 루이 필립의 즉위로 자동퇴위된다. 앙리 5세는 부르봉왕가의 마지막 정통 후계자였다.)
루이 필리프 Louis Philippe I (재위기간: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평등한 필립(Philippe Égalité)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중에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로 불렸으며 나중에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지냈다.
그는 그의 통치 모델로 선택한 영국의 정치 제도에 열광하였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금융과 수공업 부르주아들이 빠르게 자본을 쌓아갔던 반면 노동자들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로 인한 끊임없는 민중 반란이 그의 통치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치하의 부르봉 왕정복고기간 동안 루이 필립의 인기는 커졌다. 그는 극단적인 왕권주의에 반대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잊지 않았다. 루이 필리프는 자녀들을 일반고등학교에 보냈고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다.
루이 18세가 죽은 다음날, 그는 새로운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에의해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폭동의 전개 이전,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자신의 어린 손자 《루이 필리프 2세》에게 왕권을 양도했다.[5]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일을 겪을까봐 그는 변장을 하고 《Mr Smith》라는 평범한 마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갔다.하지만 상원의회는 그의 손자를 왕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꿔서 여론을 쫓아 프랑스 2공화국의 발표를 결정한다.루이 필리프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그의 죽음(1850년 8월 26일)까지 클레어몬트에서 지낸다. 1876년 그의 시신과 그의 부인의 시신은 1816년 드뢰에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가 건설하고 1820년대 루이 필리프가 성장한 왕실성당으로 옮겨졌다. (위키)
프랑스 마지막 군주 나폴레옹 3세를 끝으로 프랑스에서 '왕정'은 사라지게 된다. (나폴레옹 3세 또한 위에서 자세히 설명)
그 후로 프랑스는 '대통령제'에 입각한 공화국으로써의 길을 걸어나가게 된다.
-The END-
마치며..
과거 영국과 함께 전세계를 지배했던 프랑스지만, 근대는 참으로 복잡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의 역사를 겪어온
나라가 바로 프랑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도 프랑스 편을 쓰면서 대충 알고있던 프랑스의 역사가 상상외로 너무 복잡하고 써야될것이 많아 그냥 중심적인 사건만
적어논것 같아 아쉽습니다. (너무 길어서 힘듬 ㅠㅠ 영국이 좋았지..)
다음편에는 진짜 간략하지만 심도있고 핵심적인 내용만 써서 회원여러분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유럽언어쪽과 관련된 (프랑스어는 아님) 학과의 학생이기 때문에 유럽사에 대해 원어민 교수님에게
자주 물어보는 편인데, 제가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년도를 그땐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데 굉장히 놀라시더군요. (저만 모르는게 아니라 수업시간에 물어봤는데 학생들 다 모름)
유럽쪽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적어도 유럽인이라면 꼭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어도 대혁명 발발시기를 꼭 알아야된다고 강조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이루어낸 그 업적은 인류를 해방시킨 것에 비유된다고 생각한다면서 프랑스인들의 그런 정신과 프랑스인들을 굉장히 존경하시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프랑스 인들은 언제든 또다시 위대한 '대혁명'을 이루어낼수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하셨죠. 깊이 감명 받았었습니다.
(참고로 프랑스와 앙숙인 나라의 분이심 ㅋㅋ)
첫댓글 나폴레옹이후 굴욕의 연속인 프랑스 ㅠㅠ
세계사 배우면서 욕이 아니 나올수 없는 혁명기 프랑스 ㅠㅜ
낙양화님의 댓글과 더불어 답글을 답니다. 프랑스편을 쓰다가 생각한게 있는데 그거슨 바로 프랑스의 역사를 요약하면
'왕의 폭정-혁명-폭정-혁명-개혁-영웅의독재-또다시 왕의 폭정-혁명-개혁-오늘날'로 요약할수 있겠더군요. 정말 이렇게 많은 혁명이 발생한 나라는 드물겁니다;
말하기 나름이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1789년의 대혁명이후의
연속된 혁명들이 근대이후 자유-민주의 이념을 세계로 전파하는데는
큰역할을 했지만 프랑스 하나만을 보자면 연속된 혁명의 휴우증으로
국력에 큰 타격을 입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이런저런 세세한 타격을
댓글로 쓰기엔 좀 긴거같아서 생략하구요.. 물론 그전에 영국과의 7년전쟁에서
아메리카, 인도를 잃고 제해권을 완전히 뺏기면서 2인자로 밀려났구요.
이후 더딘 공업화와 극악스런 인구증가율은 프랑스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고
(18세기만 해도 독일을 훨씬 웃돌던 인구가 2차대전즈음에는 독일절반으로..)
2인자는 커녕 독일, 미국, 그리고 소련에 밀리며 대전기에는 독일에 완패하고
ㅄ프랑스라는 치욕적인 역사도 지니게 됩니다. 헌데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강대국 자리를
유지하는걸 보면 프랑스란 나라의 저력은 무시할수가 없군요.
L'Hexagon->L'Hexagone
교수님께서 영쿡인이신 모양이군요. 1789년은 꼭 기억해야 될 연도죠.
근세에 들어 프랑스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나라의 분이십니다. 그래도 오늘날엔 어느나라보다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시더군요.
뭐 독일 프랑스는 요새 사이좋죠. 오히려 영국 프랑스가...
자, 잠깐, 루이14세가 저렇게 생겼었다고?!?!? ㄷㄷㄷㄷ
14세입니다. 여기서 확인사살 하세요.
http://ko.wikipedia.org/wiki/%EB%A3%A8%EC%9D%B4_14%EC%84%B8
네, 잘못썼네요. 확인사살당하고 수정했습니다(....)
프랑스왕가는 16세 후 역변이 유전??
삭제된 댓글 입니다.
뭐, 이상은 높고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지요. 저도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들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민자출신의 사르코지가 이민자들을 탄압하는것을 보면 나름 씁쓸...
사르코지가 헝가리계였군요...
.....
외국인들 다쓸어버리는 사르코지;;
나름 헝가리에 최근까지도 '영지'를 갖고있었던 귀족의 후손이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몇몇 역사가들은 프랑스 혁명기동안 중앙의 혁명군이 방데 (Vendee) 지방의 카톨릭 농민들을 쳐발른 방데 전쟁을 근대사 최초의 대학살로 보기도 하지요.
서로 그렇게 싸웠으니 영국에 비해 엄청나게 뒷전으로 물러난 것은 당연한 일.. 2차대전 직전에는 이탈리아에도 인구수가 뒤지는 굴욕을 겪기도 하고요. 2차대전 이후의 미친듯한 경제발전 시기동안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 되나 토니 블레어 총리집권 시절에 다시 영국에 뒤쳐지고... 이제는 한국따위 듣보국가도 프랑스 잡을수 있다고 말까고 있으니 허허
한국이 잡겠다는 건 이탈리아지요. 그 유명한 747 공약에서 세계7위가 이탈리아입니다.
뭐 이탈리아도 총리라고 앉아있는 자가 그모양이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프랑스는 한국보다 한체급쯤 위일겁니다. 프랑스는 항상 유럽 최강국의 자리를 놓지 않았지요. 괜히 유럽의 중국이 아님.
통일이 되고 후유증이 가라앉는다면 프랑스를 잡을 수도 있겠죠. 시간은 많이 걸리겠군요.
통일되면 프랑스 정도는
루이 필리프씨가 영국으로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프랑스 왕정은 좀더 유지되엇을까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만신창이인데 저시기에 해외식민지는 꽤 활발하게 만들지 않았나요?? 하여간 대단함..ㄷㄷ
유럽민족주의 발현 근대법전의 효시 나폴레옹법전 (나폴레옹 왈 내가 후세에 기억된다면 이법전 때문일것이다)
가장신기한게 50억프랑을 몇개월에 갚은거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