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중한담(茶中閑談)8 - 본편
-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여덟 번째
(2023년 12월 10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지난주에 소략하게 이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기고 또 서고 걷고 하는 문제를 말씀을 드렸는데요. 거기에 따르는 변화가 많아요. (아이가) 처음 기기 전에 누워서 퍼덕일 때, 처음에 이렇게 못 기고 있을 때, 그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연관된 게 있습니다.
아이의 성장과정과 소리
첫째 소리를 보면, 된소리와 센 소리를 할 수 있는 자음 발음을 못 해요. ‘ㅇ, ㄴ, ㄹ’ 밖에 소리를 못 내요. 굳이 모음 ‘아’를 붙여서 얘기하자면, ‘‘아, 나, 라’ 밖에 발음을 못 해요. 더 발음을 못해요. 그런 아이한테 ‘삼촌, 숙모’ 하라고 그러면, 애가 참 답답해 하겠죠. 듣기는 들으니까.
왜 못하느냐. 아직 목을 못 가누어요. 목에 힘이 생기면서 입에서 혀가 조금 더 나올 수 있어요. 그 이전까지는, 입에서 혀가 안쪽에 있기 때문에, 목을 못 가눈 상태에서는 ‘아, 나, 라’ 소리밖에 못해요. 어머니로부터 받은 또는 분유로부터 유사하게 받은 에너지만 가지고는 목을 완전하게 가누거나 길 수가 없어요. 그 목을 (이제) 가누게 되죠. 그런데 목을 가누게 되려면 또는 목을 가늠과 동시에 외부 에너지가 그때부터 투입이 돼야 돼요.
그게 보통 이유식을 하는 시기예요. 한 6개월, 7개월 좌우간이죠.. 그때도 물론 어머니의 젖을 계속 공급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젖에만 의존하게 하면 발육이 멈추죠. 더 진행이 잘 안 돼요. 그때는 이제 이유식을 하면서, 외부에 에너지가 되는 재료를 최대한 부드럽게 해서, 어머니가 원래 줬던 재료랑 큰 차이 없게 해서, 조금씩 거칠게 해서 그 음식을 제공하죠.
그러면 목에 힘이 생겨요. 목에 힘이 생겨서 어느 날 보면 기고 있어요. 앉혀놨더니 목을 버텨요. (원래) 앉았다가 기잖아요. 앉지 않고 기지는 않는데, 앉았을 때 얘가 기겠다라는 것은 목에 힘을 주고 바닥 있는 걸 보면, ‘이 애는 일주일 내에 기겠다’ 알아요. 관찰을 최근에 많이 하셨잖아요. 그렇죠? 할머니 되신 지 오래 안 되셨으니까요. 할머니 되신 지 오래 되셨죠? 그러니까 이미 기억이 안 나시죠. 한쪽만 생각하고 할머니 안될 것만 생각했습니다. 저기 멀리 계신 분은 생각 못하고. (웃음)
아무튼 이렇게 이제 목을 가누게 되면, ‘ㅁ, ㄱ, ㄷ’의 발음을 할 수 있어요. 기어다님과 동시에 ‘ㅁ, ㄱ, ㄷ’의 발음이 명확하게 나와요. 물론 그 이전에도 ‘ㅁ, ㄱ, ㄷ’에 해당하는 가까운 소리가 나오긴 하는데 정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혀가 안정적으로 일정 양 이상 나와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마, 가, 다’에 해당되는 소리를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마’ 같지 않고 약간 뭉개지고, ‘가’ 같지 않고 ‘까’ 소리가 나고 그러죠.
그러니까 언어학적으로는 ‘가’가 먼저 발음되고 ‘까’가 되고 ‘카’가 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까’가 먼저 나와요. ‘까’가 먼저 되고 ‘까’가 다듬어지면서 마침내 본소리인 ‘가’를 발음할 수 있어요. ‘가’를 처음부터 하는 게 아니고 ‘까’부터 해요. ‘까’와 ‘따’부터 해요. 그런 근원 때문에 사람들이 언어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ㄱ’을 자꾸 ‘ㄲ’으로 발음하는 관성 현상이 생기는 거죠.
분명히 ‘다’라고 그랬는데, 어느 날 ‘다’ 발음을 ‘따’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더블’이라고 안 그러고, 어느 날 ‘따블’이라 그러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렇다고 해서 요즘에 아나운서들이나 그렇게 하는 발음을, 유튜버들이 ‘효과’라고 하는 건 좀 거북하긴 하더라고요. ‘효꽈’라고, 있는 대로 발음해야 되는데 굳이 자기가 아나운서에 준하는 것처럼 하는 게 좀 그래요.
아무튼 그렇게 이제 발음을 하고 다음 어느 일정 단계가 되면 외부 에너지원 중에 좀 더 거친 게, 좀 더 다양한 게 들어가죠. 뭐가 들어가느냐? (양념된) 간이 들어가요. 간이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 자극성에 의해서 이제 돌기도 하지만, 서게 되죠.
서고 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ㅅ, ㅂ, ㅎ’가 가능하게 되죠. 이것은 ‘ㅁ, ㄷ, ㄹ’과 다르죠. 이 ‘ㅅ, ㅂ, ㅎ’은 변음이 가능한 자음들이에요. ‘ㅅ’은 ‘ㅈ’으로 발음 변음이 가능하죠. 그리고 ‘ㅂ’은 센 소리가 ‘ㅍ’같지만 여전히 ‘ㅂ’ 계통에서는 아주 애매한 ‘ㅂ’ 순경음 등 지금은 우리가 안 하지만 많은 변음들이 있어요. ‘ㅅ, ㅂ, ㅎ’들은 변음이 가능한 소리까지 해요. 혀가 입에서 마침내 끝까지 나와요.
그러면서 발음이 다 갖춰지죠. 이 발음이 다 갖춰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애들에게 밥을 먹이고, 국물을 먹이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국물을 흘리죠. 그런데 이 ‘ㅅ, ㅂ, ㅎ’을 다 하고 나서부터는 국물을 흘리지 않아요. 입술에 힘이 생겨가지고, 이제 밥을 꼭꼭 받아먹고 국물을 찔찔 안 흘려요. ‘마, 가, 다’를 할 때까지는 찔찔 물을 좀 흘리고 (입을) 제대로 못 닫아요. 이 현상이 또 언제 오죠? 제 나이쯤 되면 또 오죠. 그래서 먹으면서 주의를 하죠. 특히 이제 음료에 해당되는 걸 숟가락질을 하면서, 이렇게 뭔가 한 방울 맺힐까 봐 조심을 하면서 먹죠.
아무튼 입 닫아주는 힘이 떨어진 게 아니라, 입과 혀의 움직임을 동시에 딱! 할 수 있는 그 정확한 동시성을 상실하는 거죠. 그 순간 어떻게 되죠? 입맛을 잃게 되죠. 자기는 안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입맛을 가지죠. 그래서 입에서도 소리에서도 변화가 생겨요.
그 다음에 어디에서 변화가 오느냐 제가 그런 얘기를 드렸잖아요. 원숭이 보고 솜씨가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 아이들은 커서 기기 전에 이미 기는 네 발 도치로서의 성격을 배워요. 그래야만 네 발 도치가 돼요. 사람은 더 성장하기 때문에 네 발 도치가 되고 나서 네 발 도치의 성장 상징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드러내요. 소리도 어떤 아이들은 기고 나서 ‘마, 가, 다’를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기기 전에도 해요. 앞뒤가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그거는 어느 것이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초기 성장과정에서 소리 그리고 손의 움직임
다만 손의 경우에는 대개 먼저 해야 네 발 도치가 돼요. 네 발 도치 짓을 먼저 해야 네 발 도치가 되는데요. 애들이 태어나서 ‘아, 나, 라’ 발음밖에 못할 때는 손을 움직였는데, 이렇게 잼잼 밖에 못해요. 이렇게 손가락을 하나씩 다양하게 움직이는 건 안 돼요.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꼬무락거리는 순간이 있지만요. 그러나 원칙적으로 자기가 생각해서 하는 운동, 목적 의식적으로 동시에 하는 손 운동은 이 잼잼이 다예요.
이 잼잼이 쌓이면, 어느 날 자기가 이렇게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이고 막 이래요. 그럼 네 발 도치가 돼 간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원숭이 솜씨의 최대겠죠. (손가락을 움직이며) 원숭이는 이것도(?) 하지만 이것(?)과 이것(?)까지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네 발 도치들은 여기에서(?) 끝나요. 주1) 대개가 아주 훈련이 된 일부 동물들이 약간 좀 오므리는 것이 원숭이 같기는 하지만 좀 평균적으로 어려워요. 그래서 손에서도 (잼잼이 쌓이면) 이 일체형 운동에서 분산해서 펴고 하는 게 가능해요.
그런데 서고 걷고 나면 또 다른 운동이 가능해요. 당기고 밀고를 동시에 할 수 있어요. 돌리고 당기고 밀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쪽은 당기고 이쪽은 밀고 막 이렇게 가능해요. 그러니까 목검도 잡을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손을 움직이며) 이것만 되거나 이것만 된다 그러면 그 자꾸 이렇게 밖에 더 하겠어요. 그런데 이게 된다는 거죠. 이렇게도 되고요. 원숭이는 막대기를 사람만큼 못 잡아요. 딱 잡고 이렇게는 못해요. 그냥 이렇게 잡고 이러니까 아마 안 되는 거죠. 그거 갖고 타격이 오겠어요? 주2)
용인 동물원에 보니까 어느 곰이 인기를 얻으려고 막 막대기를 돌리던데요. 막대기를 잡고 돌릴 수도 있지만, 어느 손은 손가락을 당기고 어느 손은 밀고 하는 그건 안돼요. 그래서 그게 다 돼서 군대를 딱 갔어요. 군대에서 총을 주니까 총을 딱 잡는데, 예를 들어서 권총을 잡아요. 그러면 한쪽은 당겨야 되고 한쪽은 이렇게 받쳐줘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당겨 잡고 밀어 잡고 이것 (손가락은) 격발하고, 이렇게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게 되잖아요. 당시 그걸 잘 쐈어요.
그런데 시력도 줄어들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집중력도 줄어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나이가 들었더니 안 맞는 거예요. 왜? 자기 딴에는 열심히 했지만, 당기는 것과 미는 것과 격발하는 것이 동시에 잘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잘 보고 당겼는데 헛방인 거예요. 시력은 거의 변함이 없는데 말이죠. ‘왜 이러지?’ 하죠. 역시 뭐 결론은 쉽죠. 나이 드니까 안 된다! 그건 맞는데요. 동시에 다양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사라진 거죠.
(앞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 네 발 도치에서 두 발 도치로 서면서) 그러다 보니까 인간이 도구를 쓸 수 있게 되죠. 그런데 만약에 두 발과 네 발 도치 중에서도, 초급 수준의 네 발 도치의 성격만 갖추는 단계에서는 주먹으로 싸움을 한다 그러면, 싸워도 (주먹을 단순하게 왔다 갔다 하며) 이거밖에 없어요. 쉽게 말하면 현재 복싱은 뭐냐, 네발 도치가 하는 초급적 운동으로 겨뤄보는 거죠. 물론 이제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이 손의 움직임이 팔의 근육도 다양화시켜요.
그러니까 사람은 뭔가 피로했을 때, 풀어주려고 해도 복잡해요. 동물은 조금만 해주면 이 근육이 금방 편한데요. 나중에 오면은 이게 뜻대로 안 되니까 이렇게 갑자기 하려고 그러니까, (손바닥의 근육을 가리키시며) 여기가 어, 어, 어 하죠. 이렇게 뭔지 아시죠? 주3) 뭔지 아는 분들은 최소한 50이 넘은 걸로 하고요.
그래서 나중에 여기를 (손바닥을 주무르며) 막 이렇게 해야 되죠. 심지어 원숭이가 잡는 식으로는 이렇게 칼을 잡고는 썰지도 못하죠. 원숭이가 같이 사는 사람이 칼질하는 걸 그렇게 보고도 지가 칼 잡고 할 수 있는 것은 칼 이렇게 잡고 이거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칼을 이렇게 잡고 막 이거 안 되는 거예요. 부엌 칼질도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썰 수도 없고 써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안되고 엉성하죠.주4)
그런데 어느 순간 칼질을 하면 그렇게 되어가죠. 그러니까 이걸 제대로 했더니 마음 먹고 저대로 했더니 여기가 막 아픈 거예요. 여기도 뻑뻑하고요.
발과 걸음도 변화
아무튼 그렇게 돼요. 손도 그렇게 달라져요. 발도 달라지겠죠. 아까 제가 구르는 이야기, 도는 이야기, 기지개 펴는 이야기를 했지만, 어느 순간 기지개를 안 펴잖아요. 그러면 남녀의 골반 구조가 달라요. 여자는 아기를 낳아야 되는 자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골반을 받쳐주고 있는 앞의 근육도 상대적으로 발전해 있어요. 그래서 여성들은 나중에 늙잖아요. 그러면은 이렇게 구부러지질 않아요. 이렇게 구부러져요.주5)
애들이 배꼽 인사 하라고 그러면, 원래는 허리를 숙여 하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배꼽 여기(배꼽 위쪽을 잡고)를 잡고 이렇게 하라 그러잖아요. 애들 배꼽인사잖아요. 여성들이 나중에 기지개를 안 켜면은 이 일정한 정도의 골반을 지나서 휘어요. 남자들은 바로 휘어요. 여기에 힘이 없어서 바로 휘면 어떻게 걷죠? (허리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또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여자들은 여기가(골반 조금 위) 못 굽어요. 이렇게 굽어요. 허리가. 어떻게 하죠? (허리가 굽힌 채 어정한 걸음걸이로)
어쨌든 여성들이나 남성들의 허리가 기지개를 안 켜서 휘었을 때, 걷는 게 달라지죠. 안 그러면 앞으로 엎어지니까요. 엎어지니까 남성들의 경우에는 이게 바로 숙여지니까, 이게 빨리 움직여서 이게 이렇게 되는데 어정거릴 수는 없잖아요. 그럼 바로 엎어지죠. 안 엎어지기 위해서는 쬐깨쬐깨 하면서 빨리 움직이는 거예요. 연세 드신 남성분들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 보셨죠? (앞의 선생님을 보시면서) ‘가까이서 보신 거 아니죠?’ ‘아니에요.’ (웃음)
그런데 여성분들은 그렇게 걷는 분이 없죠. (골반 위) 여기가 숙여지기 때문에 이렇게 걸을 이유가 없잖아요. 앞으로 다리를 내밀어가지고 약간 (골반 언저리를) 이걸 내리죠. 내린 상태에서 이렇게 어정어정 걷죠. 남자 늙은이는 딱 침팬지 걸음이고 여자 노인네는 오랑우탄 걸음입니다.
세 세대가 공존하는 시대에서 노화를 돌아볼 수 있다면
아무튼 그렇게 바뀌어 버려요. 그런데 그렇게 바뀌었을 때도 기지개를 켜면 일부는 돌아와요. 여전히. 그리고 계속하면 돌아와요. 그런데 그렇게 이제 감각이 어느 순간이 되면은 다 달라지죠. 우리가 왜 세대 차이가 있다고 예전에 얘기했잖아요. 30년, 30년, 30년 이렇게 해서 90살을 최대한 살아야, 세 세대를 옛날 같으면 겪을 수 있었죠. ‘나 때는 그러면’ 30년 전인 거죠. 최소한 ‘나 어릴 때’라고 하면 그럼 60년 전인 거죠.
요즘에 ‘나 때’라고 하면, 그러면 10년 전이죠. 그러니까 모르고 생각하면 요즘은 더 빨리 꼰대가 되는 것 같다고 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대가 워낙 빨리 가잖아요. 그러니까 예전에 30년, 30년, 이렇게 직렬로 가는데 지금은 교차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한 3분의 2가 교차가 되니까, 10년을 공유하면 20년 전과 한 세대가 되죠. 3분의 1을 공유하면 10년이 한 세대라 그러잖아요. 지금은 매 1년이 한 세대예요. 매 1년에 한 세대.
그러니까 세대가 공존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프를 그리며) 이렇게 비스듬하게 그러니까, 잘하면은 150년을 살아야 누릴 수 있었던 세대 차이의 통 감각을, 한 시대에 다 익힐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거죠. 그래야만 진짜 인간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다양성, 이 세상에 공존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죠. 이렇게 세대 차이가 직렬로 쭉 올 때는 누가 뭐라 해도 전체주의가 대세일 수밖에 없어요. 이 30년 세대들이 그 안에서 다양성은 좀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 30년이 그냥 흘러가거든요. 세월이 지나야 이어지니까.
어쨌든 그렇게 가요. 그렇게 가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어떤 노화 퇴화의 단계에 가는지도 잊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그냥 건강이라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현재 내 나이에 살면서 어떤 특징을 어떻게 극복해야 되고, 어떻게 이어가야 되고 어떻게 개발해야 되는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가 돼버린 거죠.
노화와 퇴화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소리의 변화
아무튼 그렇게 하는데 이것 하체 구조와 걸음처럼, 퇴화도 남녀가 서로 단계가 달라요. 퇴화를 소리로 보면 어떻게 되죠? ‘사, 바, 하’를 제대로 못하게 되겠죠. 어느 날 보면 ‘사, 바, 하’ 발음이 영 세죠. 그리고 tv에 나와서 한 70 되시는 분들이 얘기할 때 보면, 입이 제대로 안 닫아지는 경우가 많죠. ‘사, 바, 하’가 뭉개지죠. 언어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뭉개져도 들을 수는 있어요. 그분이 뭉개져도 의사를 전달할 정도로 오묘한 토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누구를 보면 알 수 있느냐. 이번에 국민의 힘에 혁신위원회 혁신위원장 하시던 인요한 선생 있으시죠? 그분은 한국말이 토착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연세가 드셨잖아요. 제가 그분이 40대 때 한국말 하는 걸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한국말을 정확히 썼어요. ‘사, 바, 하’가 정확했었어요. 그런데 요즘에 할 때 보니까 나이가 드셨는데, 토착어가 아니셨던 게 딱 드러나는 거죠. ‘사, 바, 하’의 발음이 뭉개지는 거죠. 어딘가 말이 이상합니다. 예전에는 한국 분들과 구분이 안 됐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tv에 나오는 거에서 예를 들어 그러니까 딱 그분이 딱 떠올라서 얘기를 드렸는데, 우리도 뭉개고 있어서, 사실상 ‘사, 바, 하’를 제대로 못 해요. 특징이 뭐라고 그랬죠? 숟가락으로 먹을 때 주의하게 된다! 웃으시는 분은 주의하시는 분이죠. 갑자기 웃다 마시네요. (웃음) 웃으시면서 걱정되시죠?
그렇게 되잖아요. 그 다음에 뭐가 안 되겠어요 ‘마, 가, 다’가 잘 안 되겠죠. 제가 병원에 병문안을 갈 때가 있죠. 최근에는 병문안을 안 가서 좋아요. 사실은 아픈 분을 보고 싶지가 않거든요. 병원에 와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병원 안 가는 게 그냥 상례가 됐죠.
병문안을 예전에 가면은, 그분이 ‘아, 나, 라’ 발음 이외에 ‘마, 가, 다’를 하나 못하나를 봐요. ‘아, 나, 라’를 억지로 하고 ‘마, 가, 다’ 발음을 못하면, 저는 그분과 마음의 작별을 준비를 해요. 마음이 아프지만 작별의 준비를 합니다. 지금 쌩쌩해 보이고 나가서 커피 빼먹고 이러셔도, ‘마, 가, 다’의 발음이 뭉개질 때, 그리고 ‘아, 나, 라’ 도 어눌할 때, 그럴 때는 혀의 움직임이 이미 최소화돼 있을 때 돌아오시기 힘든 곳까지 갔다고 봐요. 거기까지 가면은 못 돌아온다는 얘기예요.
아무튼 그렇게 가요. 그런데 남자는 차근차근 가요. ‘사, 바, 하’를 먼저 못해요. 그 다음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 가, 다’를 제대로 못해요. 어느 순간이 지나면 ‘아, 나, 라’ 밖에 못해요. 그러면 이제 준비를 해야죠, ‘아, 내가 날이 멀지 않았구나!’ 그럼 내가 ‘사, 바, 하’를 못하다가 ‘마, 가, 다’를 제대로 못한 때가 언제였지? 기억 안 나실 거거든요. 조금 있다가 누구든지 안 나면 안 되는 기준을 말씀 드릴게요. ‘아, 나, 라’ 밖에 안 되네, ‘나 이제 준비해야겠구나! 많이 먹지도 말고‘
이제 어느 순간이 지나면은 규칙적으로 ‘마, 가, 다’를 못하고, 그 다음에 ‘아, 나, 라’를 못해요. 남성은 딱 3등분 돼 있어요. 여성은 같은 나이라고 치면 ‘사, 바, 하’를 못하는 것이 평균적으로 남성들보다 늦게 와요. 그래서 숟가락으로 액체를 먹으면서 먼저 흘리기 시작하는 거는 같은 나이의 경우의 남자예요. 여자는 조금 있다 해요.
원래 한국 사회에 평균적으로 남편의 나이가 더 많죠. 아닌 경우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그렇죠. 나이도 있는 데다가 남자가 먼저 오잖아요. 그래서 바로 구박을 들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질질 흘리고. ‘꼭! 다물어 꼭!’ (웃음) 안 하고 싶어서 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성들은 한 50% 정도 늦게 와요. 단, 그때 ‘ㅁ, ㄱ, ㄷ’가 뭉개지는 것과 함께 와요. ‘아, 나, 라’를 못하는 것은 자기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마지막에 비슷하게 와요.
소리의 변화와 보고 듣는 감각의 변화
그러나 남자는 두 단계에 걸쳐 갖고 ‘사, 바, 하’를 못하고, ‘마, 가, 다’를 못하는데, 여자는 어느 순간 중간에 ‘마, 가, 다’가 생략돼요. 그러면 ‘사, 바, 하’를 못하는 순간 어떤 현상이 오느냐? 고려 시대 때 벼슬 이름 가운데 ’버버리’라고 한 게 있어요. 벙어리는 참봉, 봉사 같은 거예요. 고려시대에도 그런 장애가 있으신 분들에게 오히려 사회적으로 존중을 해주라고,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해서 버버리란 벼슬을 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와서 벙어리가 됐죠.
그런 분들을 한자로 뭐라 그러죠? 농아(聾啞)라 그러죠. 농(聾)과 아(啞)가 같이 있는 거죠. 농은 뭐죠? 귀에 용이 들어 앉아 있는 거죠. 용이 다 틀어 막고 있는데, 용 용(龍)자 밑에 귀 이(耳)자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잖아요. 뭐 들리겠어요? 안 들리죠. 그러니 이제 입 구(口) 옆에다가 버금 아(亞)자를 쓰죠. 입에 버금가는 발음을 살리는, 그래서 못 들으면 말을 못해요.
그런데 이게 어디서부터 오느냐. ‘사, 바, 하’를 제대로 못하면 귀가 어두워져요. ‘사, 바, 하’를 못하면 귀가 어두워지는데, 다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소리의 강도를 들을 수 있는 능력부터 떨어지죠. 그래서 볼륨을 올리죠. tv를 갑자기 15에 놓고 있다가 18로 올리고, 18로 올려가 눈치 싹 보고 있죠. 집에서 그러다가 구박할 분이 방에 싹 들어가고 나면, 20으로 싹 올려가지고 편안하게 듣죠. 이 선생님 씩 웃으실 때가 아니신 거 같은데, 왜 웃으시죠? 느낌이 확 와서? 겪지도 않으시면서요. (웃음)
그런데 ‘마, 가, 다’가 안 되잖아요. 눈이 잘 안 보여요. 여성들은 잘 안 들리는 것과 눈이 잘 안 보이는 것이 같은 시기에 와요. 눈으로 보면 남자들보다는 빨리 오는 거죠. 귀로 보면 늦게 오는 거죠. 귀가 잘 안 들리는 걸로 보면은 남자들보다는 평균적으로 늦게 오고 눈이 나빠지는 걸로 보면 남자들보다 빨리 오죠.
그래서 한 5살 정도 차이 나면 집에 앉아가지고 열심히 애를 쓰는 척하다가, 남편한테 바늘 탁 건네주고 ‘꿰줘!’ 그러면 남편은 꿰주고 뭐라고 그러냐면, ‘아이고, 그 나이에 눈도 안 보이고 너무 고생해서 그래’ 그러죠. 원래 감각의 변화가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동정을 받죠. 남자는 한 50 돼가지고 귀가 살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구박을 받죠. ‘벌써 늙어가지고 볼륨 안 줄여!’
아무튼 그렇게 퇴화돼 와요. 그러다가 ‘아, 나, 라’까지 안 되면은 나머지 원래 쓰지 못했던 감각마저 죽어져요. 어떤 감각이 죽느냐? 오늘 이야기해야 되는, 스포츠가 아닌 순수한 지식을 습득하고 운동력을 가지고 하는 그 모든 지적이고 체력적인 그 감각들이 소멸되고 있어요. 그러면 이제 가기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그 감각을 애초에 안 썼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해요. ‘아, 나, 라’ 만 알아서 그 감각을 썼으면 그 나이가 되면 더 잘 쓸 수가 있어요.
손바닥을 펴는 것과 주먹을 쥐는 것 사이의 에너지 작용의 차이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돼요. 여러분들 여기 한번 여쭤볼게요. 카톨릭? 기독교? 그 다음에 불교? 도교? 이슬람교? 그냥 유교? 무교? 무교도 종교예요. 왜 안 믿겠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니까요. (웃음) 무신론자도 종교에요. 신이 없다는 믿음을 확고하게 갖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맑시즘도 종교에요. 아무튼 손을 웅크려서 마주 붙이고,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 보셨나요? 아직 못 봤죠.
카톨릭에도 수도원이 있고 하지만 수도원의 수사들이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본 경우는 드물 테니까. 그럼 불교의 스님들이, 도가의 도사들이 또는 옛 유가의 수행법을 한다는 사람들이 (주먹 쥐고) 이러고 앉아가지고 참선하는 사람 봤나요? 앉아가지고 다 손바닥 펴고 있죠.
손바닥을 오므리는 것은 심장과 연결돼 있어요. 심장이 두근두근할 때 주먹을 쥐어요. 더 빨리 두근두근해요. 뭐라도 해야 돼요. 그런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을 쫙 펴버리면 달라요. 이 손바닥을 펴는 것은 피를 움직여서 뭔가 신체 에너지를 쓰겠다든가 하게 되고, 그리고 주먹을 쥐면 생각이 훨씬 더 긴밀하게 돌아가요. 소비하고 있죠. 스포츠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일단은 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가지고, 주먹을 쥔다든가 손을 아주 오므리고 있는 자세는 인간에게는 굉장히 에너지를 짜내는 자세예요. ‘손 바닥 펴고 일어나’ 이런 인간이 없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속에서도, ‘주먹 쥐고 일어나’는 있어도요. 그러고 나서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려고 이렇게 마취를 시키려 술을 먹여야 돼요. 술을 먹일 때도, 술을 먹여 놓고 나서도, 옆에 하다못해 창이나 칼집을 잡게 하고 있어요. 그래야 흥분을 하고 나갈 수 있어요.
술 먹이고 “자, 손바닥 쫙 폅시다” 하면, 갑자기 맥이 쪽 빠져서 (에너지가)안 일어나요. 그러면 술을 먹이고 뭐라 그러죠? “자, 주먹 불끈 쥐고!” 이래야만 이제 에너지가 발산이 돼요. 에너지를 쓸수록 주먹을 쥐게 돼 있어요. 물론 이제 좀 멋있게 하려고 시위를 하면서도 (손바닥을 펴고 손을 뻗는) 이렇게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주먹을 쥐고 손을 올리며) 이게 자연스러운 힘쓰는 겁니다. 이렇게 손바닥을 펴면은 오래 안돼서 금방 맥 빠져요. 처음에는 이렇게 펴고 하면 착착 멋있을지 몰라도요.
아무튼 그래요. 그런데 이 손바닥을 펴는데 하나의 특징이 있어요. 제가 아까 그랬죠. 기는데, 옆으로 돌고 있는데, 아이는 눈이 없는데 벽에 안 부딪혀요. 기는 초기에는 안 부딪혀요. 오히려 일어날 무렵에 부딪혀요. 언제일까요? 신문(神門)이 닫힐 때에요. 우리는 가마라 그러죠. 가마를 한자로 어떻게 쓰죠? 가마 신(神)이라고 쓰죠. 납 신(申)이라고 쓰죠. 우리가 신고(申告) 할 때 쓰는 신(申)자, 이렇게 날 일(日)처럼 쓰고 쫙 그어놓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문이 있다
그렇게 쓴 것이 지금 현재 약속된 글자고, 옛날에는 벌어져 있죠. 벌어져 있죠. 이게 머리뼈예요. 그 안에 이렇게 들어가 있죠. 그러니까 신문은 무언가 머리통 안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게 신이에요. 원래 납신이 뭐죠? 들어온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납(納)이라는 건, 납신다는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들어간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들어간다는 입(入)의 뜻이죠. 들 입(入)의 뜻이죠.
어쨌든 그렇게 받아들여요. 받아들이는 감각이 있어요. 그 감각이 서면서부터 닫혀요. 직립하면서 내줘요. 그래서 인간은 그 순간부터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적어도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인간인 두 발 도치예요. 두 발 도치가 되는 순간 신문이 닫혀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흔히 사회에서 오용되는 말들이 많은데, 제가 후덕재물(厚德載物)도 그런 거라고 얘기했습니다만. 여기 있는 덕이라는 게, 자신이 현재 있는 과정상의 자신의 삶이 진실된 그게 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덕은 더 새로워져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후덕재물은, 그 덕이 두터워지면 물건을 움직인다는 것이죠. 실제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그런데 그걸 이제 오용을 하면은, ‘사람이 덕을 많이 쌓으면 재물이 쌓인다’ 이렇게 되지만요. 그게 해석이 훨씬 더 좋고 속류가 훨씬 더 편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속류로 쓰이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그런 거예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죠. 하늘이 무너지는데 솟아날 구멍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데도’ 하는 것은, 내게 죽음이 닥쳤을 때에요. “내게 죽음이 닥쳐도 내 드나드는 문은 있다”예요. 내가 인간이고 영적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한자로 인간이 아니라, 인격화된 밝은 태양이라는 의미에서 사람인 이상, 내 생명이 다 하더라도 내 몸이 무너지더라도, 여기서 내 몸이 나한테는 하늘이죠. 이게 무너지더라도 내 실체가 솟아나갈 구멍이 있다! 그게 신문이고 천문(天門)이에요.
그리고 신문과 천문의 감각은 누구나 느낄 수 있어요. 누구나 느낄 수도 없어요. 주먹 쥐고 있는 이상 느낄 수 없어요. 주먹을 쥘수록 천문은 닫혀가요. 그런데 성격도 급해져요. 일단은 신문이고 천문이고 다 떠나가지고 손바닥 펴고 사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오래 가요. 오래 살아요.
예전에 돌아가신 김영삼 대통령이 25년생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26년생인가 27년생으로 되어있는데 23년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비슷한 연배시고, 그 연배는 현재 여기 계신 분들의 3분의 1의 아버지 뻘이시잖아요. 그리고 3분의 1의 할아버지 뻘이시고, 일부는 증조 할아버지 뻘이 되시는 거죠.
그런데 그분들 사회적으로 겪은 걸 치면 오래 사실 분들이 못 됐어요. 고생들 많이 했죠. 누구는 37일을 넘겨 단식하고, 누구는 현해탄에 빠뜨려지기도 하고 다리도 부러지고, 온갖 걸 다 겪은 분들이잖아요. 누가 더 고생했냐를 떠나서 공히 고생하신 건 틀림없어요.
그런데 당시 그분들의 세대로 본다면 굉장히 장수하신 분들이에요. 다 90을 넘기셨잖아요. 그분들 평상시 모습 생각 안 나세요? 의자에 앉았을 때. (주먹을 쥐고) 이러고 앉는 일이 없어요. (손을 펴고) 늘 이러고 앉아 있어요. 완전하게 펴고 있지는 않지만 의자 팔걸이를 잡을 때도 팔걸이 늘 이렇게 잡고 계시지, 이렇게 (주먹쥐고) 있는 적은 없어요.
YS와 DJ의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여기 서선생님이 안 계셔서 예를 못 드는데 옛날에 서선생님이랑 우리 김대표랑 북악터널을 봉고차를 타고 같이 지나온 적이 있었는데 북악터널 오기 전에 정릉에서 내기를 했어요. 누가 북악터널을 통과하기 전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티느냐. 승부는 무승부로 끝났어요. 둘 다 잤어요. 그 1분도 안 걸리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제가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그런데 주먹들을 잘 안 쥐어요.
사람이 사실 잠이 안 오고 불면증이 오면은 손바닥을 궁둥이에 깔아가지고 접어지게 하면 잠은 금방 자요.
잠은 금방 잘 수 있는데 치사해 가지고 그렇지요. 손 이래 갖고 궁둥이 놓고 자다니! 어쨌든 다른 걸 하면 금방 또 생각하다 또 오므려지니까.
아무튼 그렇게 하면 심장이 천천히 뛰어요. 심장이 천천히 뛰니까 상대적으로 편안하죠. DJ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 다음에 대통령 하신 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결정에 의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분이 그렇게 안 했더라도 그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분은 보면 의자에 앉았을 때 보면 늘 주먹을 쥐고 있어요. 늘 이렇게 얹어 갖고 있어요. 여러분께서 옛날 뉴스에서 잘 안 떠오르시지만 막연하게 떠오르실 수 있어요. 제가 그분들의 정치적 성향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분들이 얼마나 느긋한 분이냐 덜 느긋한 분이냐, 그러니까 성격이 불 같은 분이냐 아니냐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YS는 진짜 생각이 불 같은 분이 아니라 제가 볼 적에는 성격이 불 같은 척했던 분인 거예요.
아무튼 이 문제는 이 정도 (손바닥을) 편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만으로도 심장의 흐름이 늦어지고, 빠르게 거친 에너지를 소모하는 또는 머리에서 지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 줄어들어요. 마음이 편안해지고 잡생각이 덜 일어나요. 모으는 것보다는 사실은 다 펴고 있는 자체가 중요해요. 그러면은 이제 다른 감각이 생길 수 있어요. 다른 감각이 납 신자의 신이 이게 상형 문자이지만 정말 상형 제대로 했구나 하는 걸 느낄 수가 있어요. 일단 파장으로 느껴요. 찌릿한 파장으로 느껴요.
아무튼 그런 파장으로 느껴지려면은 최소한 ‘아, 나, 라’ 는 잘 되는 선에, 그러나 ‘아, 나, 라’가 되면서 얘네들은 잼잼을 해가지고 펴기도 하지만 오므리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평상시에 대충 사람마다 다른데 이 정도냐, 요 정도냐, 이 정도냐 다 달라요 자기는 몰라요.(이에 대한 표현의 정도는 아래 글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듯 합니다)
옆에 사람한테 봐달라고 해야 돼요. 언제? 잘 때 봐달라고 하면 내가 (손 모양을 각기 달리하며) 이러고 자는지, 이러고 자는지, 이러고 자는지, 이러고 자는 지를 알 수 있겠죠. 주먹을 쥐고 이러고 자는 분 없을 것 같죠? 있어요. 이런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제가 자는 분을 많이 못 봐서 그렇지, 분명히 없을 수가 없어요. 사회에서 행동하는 거 보면 그래요.
(주먹을 쥐고) 이렇게 주무시는 분은 뭐가 되느냐? 생각이 너무 엇갈려요. 엇갈리면 뭐가 되죠? 일본어로 한다면요. 여기 일본어 하시는 분 계시나요? 일본어 하시는 분? ‘당신은 최고입니다’를 일본어로 뭐라고 그러죠? 모르시나요? ‘최고’가 일본어 발음이 뭐죠? 사이코さいこう(Saikō). 해석해서 “아나타와 사이코데스あなたは最高です(Anata wa saikōdesu)”가 되죠.
이렇게 하고 주무시면 진짜 사이코 되는 거예요. 최고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사이코가 있다는 이상 이렇게 주무시는 분 있을 거예요. 제가 짧게, 짧은 시간에 한 번 본 적 있어요. 그렇게 주무시는 분을 사회에서 우연히 한번 본 적 있어요.
풍과 치매
아무튼 그래요. ‘아, 나, 라’ 는 돼야 돼요. 우리가 흔히 이러죠. ‘오른쪽 손이 아프면 왼쪽 다리에 연결 된다”고 얘기를 하죠. 왼쪽 손이 아프면 오른쪽 다리로 연결된다 그러죠. 그러면서 어떻게 생각하죠? 혈맥이 교차하는 손 모양처럼 이렇게 되나 보다 그러는데, 그렇지 않아요. 혈맥은 그렇게 교차하지 않아요. 붙어 있을 뿐이에요. 이 혈이 붙어 있을 뿐이에요. 이 혈이 떨어지잖아요. 떨어지면 이쪽이 아프면 반대편 쪽이 아파요.
(팔의)이쪽이 아프면 (다리의)다른 쪽이 아프다! 혈맥이 교차가 불완전하다 또는 일정하게 간격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제대로 된 아픔이 오지 않아도 이건 뭐죠? 풍이에요. 풍이 뭐죠? (같은 쪽) 이쪽 아프면 이쪽 아픈 거는 혈맥이 꼬여 있는 게 아니라 만나서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에요. 이게 벌어지면은 풍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몸으로 벌어지면 풍인데 더 심해지면 이게 분리되는 순간 이건 악화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살짝 아프고, 살짝 아프다가 조금 조금씩 가면서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게 악화될 수밖에 없어요. 떨어진 이상 못 쓰게 돼 있어요. 풍은 결국 증상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이 신경의 교차를 다시 잡아줘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에요. 풍인데 다행이라고 하니까 웃기죠.
왜? 이 교차가 마치 컴퓨터로 보면 0과 1 같은 거예요. 0과 1, 장과 단이 있어서 장과 단을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서 모스 부호가 만들어지죠. 0과 1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디지털적인 정보가 만들어지죠. 그래서 이 정보를 다시 아날로그로 펴고 꺼내죠. 그리고 아날로그를 다시 디지털화시켜서 저장하죠. 그런데 이게 안 되잖아요. 아날로그적인 것을 디지털적으로 전환을 시키지를 못해요.
그러면 오늘 아날로그적으로 누구를 만났어요. 박선생님을 만나고 조선생님 만나고 손선생님을 만나가지고 얘기를 하고 기억을 했는데, 돌아서니까 아무것도 디렉터리(directory)에 없는 거예요. 왜? 연산장치를 통해서 0 1 0 1 1 1 0 1 1 이게 안 된 거예요. 디지털로 되지 않으니까 그냥 보고 나서 그걸로 끝난 거예요. 돌아서서 기억이 없는 거예요.
봤더라도 다급해가지고 못 봤으면 특별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디지털로 전환될 시간적 또는 환경적 요인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잠시, 이게 상습화되는 거예요. 그럼 뭐죠? 안에 디지털화돼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아날로그로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그럼 뭐냐? 이미 아날로그 앞에 나와 있는 것만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이게 뭐죠? 치매죠. 그 치매 초기는 뭐죠? 저죠. 차를 즐기는 치매 초기, 낙차치초예요. 곧 치중이 될 거예요.
이 얘기를 왜 드리느냐. 디지털 신호와 아날로그 신호 이 사이를 전환시켜주는 힘 자체는 별도의 에너지라는 거예요. 이것이 소위 말한 사람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기(氣)에요. 이게 없어지면 기운이 없고 기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옛 것은 기억 못해, 현재 있는 것은 연산도 못해, 그냥 보고만 있는 거예요. 보고는 있는데 하나도 안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뭘 앞에 틀어놓고 있는데 뭘 얘기하다 보니까 그냥 30분짜리 연속극이 그냥 지나갔는데 뭐가 됐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로 집중해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혈맥) 이게 벌어지는 그런 분을 보고, 병원에서 희망이 없다 저분과 나는 작별해야겠다고 각오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분들의 특징이 있어요. 손 만져보는 순간 알아요. 이분은 벌어졌는지 이게 교차하고 잘하고 있는지를. 교차되고 있다고 사는 건 아니에요. 교차되고 있던 수많은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갑작스럽게도 돌아가실 수가 있죠. 그런데 교차가 안 되고 있으면 이건 확실하게 돌아가시는 거예요. 달리 방법도 거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건 가능해요. 그런 면에서 그걸 관리시켜주고 일정하게 신경을 최대한 붙여준다는 의미에서 치매 치료제는 가능할 수 있어요. 원칙적으로 치매가 심해지고 나면 그렇게 해주기는 매우 어려워요. 그래서 치매 치료제는 어떤 방법으로, 어떤 성분을 갖고 연구를 해가지고 나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 전체의 기운의 핵심 포인트와 관련돼 있어요.
그러면 이제 아까 (주먹 쥐고 손을 붙여) 이렇게 기도하는 분 없다 그랬죠. 기독교는 가끔 (손을 맞잡아 쥐고) 이렇게 기도해요. 기독교는 이렇게 해요. 가톨릭은 이런 게 없죠. 기독교는 원래 종교가 아니라 정치 세력이었죠. 얀후스(Jan Hus)도 그랬고,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그랬죠.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 등을 하기 위한 세력들이 종교를 비판하면서 생성된 것이지, 엄밀하게 종교로 생성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종교 생활을 오래 하고 이렇게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올바를 수 있는 종교 생활이겠다고 해서 나온 게 아니고, 기독교의 타락의 현실적인 모습을 고치기 위해서 제기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이 출발점이에요.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종교적 생활로서는 가톨릭에 닿지를 못해요. 이거 농담 삼아 그래요. 옛날에 카톨릭을 믿을 때 개신교 믿으면 잡아가잖아요. 그러니까 비밀리에 집회하고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더욱 더 또 공고해진 거죠. 초기에 카톨릭도 탄압을 받으면서 공고해졌잖아요. 탄압을 하면 공고해져요. 그런데 이제 숨어 있고 이러면 가서 문 똑똑 두드리고 ’여기 사람, 누구 계신고?’ 해가지고 개신교가 됐다는 거잖아요. 개신교 분들 계시면 웃어버리세요. 저라고 헛소리 하지 말란 법 있나요? (웃음)
신문을 열어주는 손 동작
아무튼 손을 모으는 것은 신문(神門)을 최대한 여는 행위, 신문의 감각을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어느 으슥한 데 가면 제일 불안한 건 뭐죠? 안 들릴 때가 제일 불안하죠. 안 보일 때는 좀 불안하긴 하지만 나도 안 보면 그만이니까요. 소리는 뭔가 들리는데 안 보여요. 제일 불안하죠. 귀가 하는 기능을 뭐라 그러죠?. ‘말하다’, ‘듣다’에서 ‘듣다’라는 것도 ’들이다’는 뜻이죠. 들 입(入)이죠. 같은 말이죠. 들리는데 손 모으는 순간, 귀에서 안 들리는 소리가 들려요. 누구든지 여러분 집에서 해보세요.
여러분 마약을 왜 하시는지 아시죠? 마약을 하는데 5분, 10분, 30분 있다가 효과가 오면 아무도 마약 안 해요. 마약은 하면 즉시 효과가 오니까 마약 하는 거죠. 그죠? 마찬가지예요. 지금 뭐 되겠어요? 그래도 조금은 환경이 좋은 데가 안 좋겠습니까? 그런데 손바닥 모으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 신문은 열려요. 그런데 어떻게 모으느냐 어떻게 펴느냐에 따라서 더 잘 열릴 수가 있죠. 그런 것이 이른바 뭐죠? 또는 다 펴더라도 완벽하게 펴지 않고 일부를 덜 펴서 더 핀 효과를 더 누릴 수도 있죠.
더 늘릴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어느 쪽의 감각에 파장을 더 강화시킬 수도 있죠. 그게 옛날에 소위 손가락을 이용한 인법(印法)이에요. 제가 원리적으로 봤을 때 손가락을 펼 때 어디를 오므리고 어디를 감고 해서 더 펴주는 방법이에요. 옛날 같으면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 안 했어요. ‘꼬부려, 펴봐’ 이랬는데, 저도 이렇게 원리로 설명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이에 살펴봤기 때문에 그런 거죠. 아무튼 어떻게 펴느냐 이런 걸 떠나서 일단은 펴는 게 중요해요.
얼마 전 금요일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청담동에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이제 저보다 한 10살 많은 분을 뵈었는데, 심장이 안 좋아 심장병원에 가셨다고 하셨어요. 그분은 늘 이러고 주먹을 쥐고 계세요. 그래서 펴고 계시면 편안해진다고, 막 펴시라고, 이게 주문처럼 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절대적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얼마 안 가 앉은 자리에서 주먹을 쥐시더라고요.
여러분들이 손바닥 펴는 게 참 중요해요. 손바닥 피는 순간, 어떤 분은 어느 각도에서 이렇게 펴서 돌리다 보면, 소름이 오기도 해요. 손바닥 펴서 이렇게 돌리다 보면 어느 각도에서는 봐요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하세요. 저는 그것까지는 더 말씀 못 드려요.
아주 정확한 각도가 있어요. 그러면 어느 경우에는 정말 온몸에서 전기가 흘러요. 전기라고 할 수 있는 게 흘러요. 어쨌든 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닿는 순간 바로 받아들여요. 그 소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허망해지면서 그냥 돌아오죠. 그 텅 빈 느낌의 허망함은 말로 못해요.
사람에게 있는 혹 통하는 한 길
제가 지난 수요일 날과 목요일 날에 지방으로 갔다 왔는데요. 수요일 날 함양을 갔다가 올라왔다가 또 전주를 갔다 올라오기가 힘들어서 어디선가에서 1박을 했어야 했습니다. 저야 차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저를 옮겨주시는 분이 힘드셔 가지고 그냥 일박하자 하고 남원으로 예약도 안 하고 내려갔죠. 우리 잘 데 없으랴 해서 남원에서 하루를 잤어요. 자고 난 뒤 이제 전주로 가려니까 모임이 저녁인데 너무 시간이 많잖아요. 여기저기 댕겨보자. 가본 데지만 광화루도 또 한번 가보고, 그리고 만복사지를 갔어요. 만복사 들어보셨어요?
만복사라면,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浦記)가 있죠. 금오신화의 김시습, 그 스토리가 그렇죠.
만복사라는 절에 양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곤궁해서 전에 들어와서 살았는데 너무 궁핍해서 처자를 만날 엄두를 못 냈죠. 그런데 (어느날) 그 금당에 있는 현신한 부처님이랑 가죽나무로 되어 있는 주사위 놀이를 했는데요. 그래서 주사위놀이를 했는데 이긴 거죠. “제가 이겼으니 저한테 예쁜 처자를”. 그래가지고 오케이 하죠. 부처님은 영어도 잘해요. 오케이! 이래서 갑자기 어디서 예쁜 아가씨가 탁 나타난 거죠.
17살 정도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거죠. 옛날 17살이면 성인이죠. 14살부터 성인이니까. 그래서 서로 정을 나누고 연애를 하고 했어요. 그러다 며칠 있다가 자기가 불광산 가는 절에 볼 일이 있어 가야 된다. 가족 만나러 간다고 그러고 갔어요. 그런데 헤어지는 김에 이렇게 금잔을 하나 징표로 주고 갔어요. 구리 잔이었겠죠. 코팅한 금잔을 주고 갔어요.
양생이 궁금해서 그 불광산에 가봤죠. 갔더니 거기서 어떤 양반네들이 그 아가씨의 대상을 치르고 있었어요. 대상은 3년 상이죠. 이제 마지막 상이죠. 대상을 지내고 있는데 보니까, 가만히 보니까 그 아가씨인 거예요. 그래서 잔을 내미니까, 그 가족이 ‘우리가 묻어준 건데’ 이렇게 나온 거죠.
아무튼 그러고 나서도 계속 사귀어요. 사귀다가 어느 날 사라지고 꿈에 나타나서 그래요. 나는 저 먼 나라의 남자로 태어나서 간다고. 그러고 뿅! 하고 끝이에요. 이제 완벽한 결별이에요. 내가 죽어야 만날 수 있는데, 죽어도 남자가 돼가지고 있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찾아가 봐도 남자고, 더 이상의 가능성을 다 봉쇄해버린 거죠. 김시습의 소설이 완벽한 거죠. 그 가능성을 남겨놓으면 부족하니까 완벽하게 끝 해준 거죠. 그러고 양생은 산으로 들어갔고, 더 이상 그의 자취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죠. 이게 만복사저포기의 골조죠. 그런데 거기서 그런 얘기가 나와요. 그 대상 치르는 데서 양생만 그 처자를 본 걸로 이렇게 나와요. 가족들은 못 보고.
실제로 사람이 한 번 와서 간다면 생각에 따라서 망연하죠. 죽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다 죽을거잖아요. 어떻게 보면은 정말 양생이 마지막 산으로 들어갈 때의 그 운명만 남겨놓은 거잖아요. 지금 웃어본 들, 울어본들 그렇죠. 저는 그래서 그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 감각을 통해서 정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한 구멍이 나한테는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유가에서 옛날에 어떤 사람들이 사람의 인체도를 그릴 때 사람에게 혹통일로(惑通一路)라 그랬어요. ‘혹통일로’로 가는 한 길이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길을 알면은 이사 가는 거죠. 그 길 모르고 가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도 그 길에 대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시키는 대로 사회적 가스라이팅이 돼서 살았죠. 그러니까 자승 스님 같은 경우 갔는데 사리 나왔다고 하니까 ‘와, 그래도 고승이었나 보다’ 그러죠. 조개가 얼마나 수련을 많이 해서 진주가 생겼을까요? 개도 태우면 나옵니다. 그것도 구박도 안 받고 곱게 자라면서 고생 하나도 안 해도 태우면 나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의 한 길로 통하는 그 문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해요. 그 문으로 가느냐, 그냥 폭삭 하고 주저앉았느냐 그게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그 감각은 오늘 아주 구체적이지만 더 깊이는 말씀을 안 드렸어요. 어느 날 또 이렇게 또 하다 보면 농담 삼아 한두 마디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끝)
#주
1. 위 녹취문 가운데 사선으로 된 부분은, 선생님이 지시어로 말씀하신 부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워서 그렇게 한 경우입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시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아 먼저 녹취 정리글을 올립니다.
많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2. 박현 선생님의 '차중한담' 이야기마당은 매주 화요일 2시에 서현점에서도 진행중입니다. 12월12일자 분위기를 점장님이 아래와 같이 전해주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마당은 시종 즐거운 분위기였습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시고 듣는 분들은 많이 웃으며 들을 때는 집중하여 들었습니다.
오신 분들은 궁금해하던 것을 지난 시간보다 더 문의드렸고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3. 문답편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렇게 먼저 본편을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