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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번역한 데니스 사이노어의 말마따나 폭력을 아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나도 여러분께 폭력을 대접합니다. 추석 선물입니다. 막강 기마유목전사 뒤에는 그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어선 안되겠습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주석/참고문헌은 몽땅 생략입니다(분량 엄청남).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 101 (1981) pp. 133-144. (American Oriental Society)
내륙아시아 전사*
(The Inner Asian Warriors)
데니스 사이노어(Denis Sinor)
(
요약문
내륙아시아 기마“유목민”의 전술에 대한 일반적인 논평은 대중서적에서 조차 널려있지만, 세계사상 그들의 막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내륙아시아의 전통적인(화약시대 이전) 군대에 대해 통찰한 연구는 없었다. 여기서 관심사는 그들의 핵심-요소, 즉 전사(warrior)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겠다. 검토 순서는 이러할 것이다: 그 명성, 훈련, 규율, 기마술, 기마장비(등자, 편자), 개인무기(활과 화살, 칼, 창, 올가미 밧줄), 그리고 무장(arms)의 보급 확보수단.
*제186회 미국동양학회(American Oriental Society) 연례만찬(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대부분은 폭력에 묘하게도 마음을 뺐기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늘 전쟁놀이를 해왔었고, 폭력이 가득한 우리 영화와 TV 프로그램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사회적 논란이 된다지요. 믿을만한 설문 및 시청자 조사에 따르면 대중오락(show)의 지명도는 도입된 폭력수위에 비례하는데, 내 여러 정치보좌관도 나에게 이런 경향을 따르라고 강력히 권하더군요. 민주적으로 선출된 (미국동양학회) 회장으로서 나는 여러분의 원초적 본능에 비위를 맞추는 것이 내 의무라고 느끼고(비록 내가 재선출될 확률은 제로지만), 그래서 나는 생각하건대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주고자 여러분을 폭력으로 대접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또한 간판구절이 “병기와 인류…(Armavirumque cano . . .)”로 시작하는 베스트셀러『아이네이스(Aeneid)』를 쓴 베르길리우스(Vergil)를 열심히 흉내내 보려합니다.
이외에도 내가 이 주제를 택한 덜 실용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예술과 과학의 발전에 대한 내륙아시아인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많다곤 할 수 없지만, 그들은 빼어난 무력을 통해 인류역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그럼에도, 이 주제는 단 한번도 그들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연구성과는 다소 반복적으로 주지의 유목민 기병전술(예컨대 말등에서 활쏘기, 적의 진열을 허물기 위한 거짓퇴각)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중요하지만, 이 발표에서 나는 전술·전략 측면에서 그 군대를 다루지 않을 것이고, 이 보다는, 그런 군사력의 성공을 지탱한 아무개 내륙아시아인 전사를 다루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전통적인(화약시대 이전) 내륙아시아 무장병사의 훈련과 장비에 관련된 일부 문제까지를 내 자신의 한계로 둘 것이고, 아울러 그들이 武를 사용하도록 결정지은 경제적 요인에 대하여 저 끝에 가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 * *
내륙아시아 전사의 뛰어난 능력은 그 친구와 적수에 의해 널리 인정되어 왔었다. 지리결정론은 고전시대 종족학적 사고의 특징인데, 고전시대 사람들은 “북방민족(peoples of the north)”의 야만스런 기질은 그 사는 곳의 기후가 혹독한 탓이고 이는 또한 군사능력 발전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Problemata(난제들)』(XIV, 16)에서 물었다.: “왜 따뜻한 지방의 거주민은 겁쟁이고, 저 추운 지방에 사는 이들은 용감한가?” “이는 지역성 및 계절의 영향에 반동하는 자연스런 경향을 인간이 가졌기 때문일까? ...... 지금 자연에 의해 뜨거워진 사람들은 용감하고, 자연에 의해 차가워진 사람들은 겁쟁이다. 뜨거운 지방이 이곳 거주민에게 끼친 영향은 이들을 차갑게 만든 것이다 …… 그러나 추운 기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본성이 뜨겁게 되었다 …….” 비트루비우스(Vitruvius)도 마찬가지 분석을 했다.: “지금 남방사람들은 지식이 하늘을 찌르고 자원도 끝이 안보이지만, 용기가 필요할 때면 이들의 힘은 태양에 의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이들은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추운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무기를 부딪치기 위한 목적에 대해선 그 겁없는 용맹으로써 더 잘 갖추어져 있으되, 그들은 생각이 느려서 뒷일을 생각도 않은 채 돌진하거니와 전술도 모자라기 때문에 그 목적한 바를 허탕치고 만다.” 또한 프톨레미(Ptolemy)의『Tetrabiblos(四元의 數)』(II.2)에 따르면, 북방민족(프톨레미는 스키타이인을 통칭해서 이렇게 불렀다)의 습성이 야만적인 것은 이들이 거주하는 장소가 늘 춥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고대 기록에서 “북방민족(northern peoples)”이란 용어는 스키타이와 같은 유목형이든 아니면 켈트(Celts)와 같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스키타이의 군사적 우수성을 찬양했고, 이런 그의 견해는 투키디데스(Thucydides)에 의해 완전히 공유되었다. 투키디네스에 따르면 비록 “그들은(스키타이) 일반적인 지식과 문명 생활인 예술 측면에선 다른 종족(races)의 수준에 있지 않다” 고하나 아시아 혹은 유럽을 통틀어 그 어떤 사람들이라도 만일 스키타이가 통합된다면 강대한 이들을 대적할 수 없다.
훈족(the Huns)를 두고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 (XXXI, 2, 9)는 “그들은 어쩌면 모든 전사 중에서 가장 끔찍할 것이다”고 분명히 말했다. 데오도로스 신켈루스(Theodoros Synkellus)가 했다고 하는 강론에서, 아마도 아바르(Avars)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실패(625년) 1주년 되는 해에 설교가 있었을 것인데, 이 연사(orator)는 사나운 이 야만인 군대의 "인생은 전쟁(life is war)”이라고 언급했었다. 내륙아시아인 천하(oikoumene)의 다른 쪽 끝에는 흉노(匈奴)가 중국인에게 끔찍한 위협으로 자리했었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전투행위(warfare)가 “그들의 타고난 성질”로 생각한 듯하다. 이것의 효과에 대해 그는 또한 흉노에 망명한 중국인의 말을 인용하여 “전쟁행위를 그들의 일상사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아랍 저술가 알-자히즈(al-Jāhiz, 776∼869)는 투르크(the Turks)의 “전쟁은 그리스의 과학, 중국의 예술과 같은 위치를” 차지했다고 느꼈다. 몽골 군대를 두고 페르시아인 역사가 주바이니(Juvaini, 1252∼61)는 "그들의 군대조직을 보건대 아담(Adam)때 이래 오늘날까지 …… 타타르(the Tartars)같은 군대를 일군 국가의 군주가 된 왕은 여태껏 역사에서 볼 수 없으며 기록한 책도 없구나……도대체 이 세상 어느 군대가 몽골군대와 맞먹을 수 있겠는냐”고 분통을 노래했다. 이와 마찬가지 견해가 스팔라토(Spalato)의 (카톨릭) 부주교이자 몽고의 헝가리원정 목격자인 토마스(Thomas)에 의해 표현되었다.: “저들은 적을 순수한 무력 혹은 군사적 비법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다. 특히 탁 트인 들에서 그러하다. 이 세상에 저들처럼 그와 같은 전쟁경험을 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어떤 근거로 이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할 것이며, 내륙아시아 군대를 강대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역으로, 그 약점과 한계로는 무엇이 있을까? 이제부터 나는 이런 중요한 의문에 대한 일부 답변을 시도하겠다.
내륙아시아의 경제, 사회, 그리고 군사구조에 대한 연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군대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민의 군대(people’s army)” 였다. 모든이가 언제든지 군사적 전투에 종사할 수 있도록 몸 단련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적어도 몽골제국의 경우, 평화로울 때 조차도 군사적 질서 하에 있었다.
주바이니에 따르면 (몽골군인은) “농노(peasantry) 차림을 한 병사(army)로서, 무엇을 부과하든 모든 면에서 군말없이 기여·헌신해야 할 책무가 있다. …… 또한 신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다 병사를 가장한 농노로서, 전투시에는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칼잡이, 활잡이, 그리고 창잡이 기타 등등 뭐든지 된다.”
이러한 몽골군인에 대한 주바이니의 말은 대부분의 강대한 내륙아시아 군대에게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군인은 무보수였다. 뒤늦게나마, 일-칸 가잔(il-khan Ghazan)은, 아마도 이란의 영향하에, 최하급군인에게 어느 정도 보수를 주기로 결정했다. 고급 몽골장교는 여전히 무보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가잔의 시리아 원정(1303)에서 맘루크(Mameluk)에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다. 그를 붙잡은 사람이 그의 보수가 얼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몽골인은 그 주군(sovereign)의 종(slave)이거니와, 몽골인은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오. 그 주군은 몽골인에 은총을 베풀고, 몽골인은 돈을 바래서 그 주군을 섬기지 않소. 내 비록 가잔의 여러 신하 가운데 말석에 있으되 나는 뭔가 필요한 적이 전혀 없었소.”
내륙아시아 사람들에 있어 병역은 자연스런 직업이었다. 투르크어나 몽골어에는 “군인(soldier)”이라는 고유단어가 없는데, 마치 그들은 전쟁 혹은 평화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없는 것과 같다. 싸움은 생존의 전제조건이었다. 말하자면 공동체적 군사행동은 생존 혹은 정치공동체의 번영을 보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군사훈련이 개인 단위는 물론이고 집단 단위로 매우 일찍 시작된 것은 놀랄 것이 못된다.
흉노에 대하여 기원전 200년에 사마천은 “사내아이는 양을 타고 활과 화살로 새나 쥐를 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조금 자라면 여우와 토기를 쏴 맞춰 먹을거리로 삼는다. 따라서 모든 젋은이는 활을 잘 쏘며 전쟁시에 무장기병이 된다”고 적었다. 13세기 중반에 몽골에 대하여 프란시스코회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는 사마천과 거의 동일한 말로 자신의 표현을 했다. “사냥하면서 활쏘기를 연마하고, 그래서 이들 모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뛰어난 궁사다. 이들의 어린이는 2살 혹은 3살이 되자마자 말에 오르고, 다루며, 올라탄 채 달리기 시작하고, 아울러 아이들의 키에 알맞은 활을 주어 쏘기를 가르친다. 이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용맹하다.”
내륙아시아 어디서든 규율은 그 군대의 뼈대였다. 승려로서, 개인적으로 규율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던 플라노 카르피니는 몽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 … 성직자 혹은 세속인을 통틀어 이 세상 어떤 사람들 보다 그 주인에게 잘 복종한다.”
묵돌(冒頓, 209∼147 BC)의 흉노 권력장악 과정에 관한 사마천의 묘사는 내륙아시아 군인의 규율에 대한 중국인의 경의를 잘 표현한 것이다. 묵돌은 자신의 활시위가 겨냥하는 표적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그의 군인들이 거기를 향해 활을 쏘게끔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는 차례차례 자신의 애마, 자신의 애처,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애마를 겨냥했었고, 그는 이런 연습을 할 때마다 그의 본보기를 따르는데 실패한 자를 처형했었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의 아버지를 겨냥했다. 그의 부대는 이미 잘 훈련된 상태였고, 그래서 그들의 화살은 다 똑 같은 표적으로 날라가 그의 아버지를 쏘아 죽여 묵돌을 위한 권좌를 무사히 지켰다.
몽골부대의 훌륭한 조직과 규율은 도미니크회 수사 애쉬비(Ashby)가 아마도 1270년대에 지은 책『Les fais des Tatars(타타르의 피조물)』에 일부 디테일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어떻게 캠프를 차렸으며, 또 어떻게 그들이 밤과 낮으로 그 캠프에 경계병을 배치했는지 여러분은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밤에도 낮과 다름없이 마치 수도원에 있는 승려처럼 고요하게 가만히 있음도 여러분은 알았다. 여러분은 거기서 사람이 외치는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며, 말들도 종마를 제외하곤 잘 떼지어 있어 그 울음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들이 어떻게 캠프를 이동했고, 어떤 식으로 그 군대의 모든이가 언제 그 텐트를 걷고 적재해야 할지 알았는가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겠다. 그 우두머리 텐트를 동여매면 전면적인 우렁찬 호령이 떨어지는데, 이 때가 되면, 내가 여러분에게 이 그림에서 예시하듯이 거기엔 경이로운 북이 함께한다.
(이 북은) 청동 혹은 구리로 만든 거대한 휘슬(whistle)과 같고, 그 꼭대기 구멍엔 넓적한 가죽이 팽팽하게 깔려 있는 것이 마치 여러분이 물새를 사냥할 때 쓰는 북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내가 이미 그림에서 예시했듯이 이것은 사람허리 높이의 말뚝 네 개로 지탱된다. 만일 군장(chieftain)이 캠프를 이동하고자 한다면 그는
이렇게 규율이 아주 엄했음에도 그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심하게 고통 받은 것 같지는 않다. 티무르 시대의 페르시아인 역사가 미르흐완드(Mirkhwond, 1432∼98)는, 가잔 칸의 시리아 원정에서 5천명의 군사가 그 말[馬]을 잃었지만 이들은 쾌활하게 행진하며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해설하길, 이런 두 달 여의 행진을 거쳐 막 도착한 이들에게, 만일 또 다른 원정을 떠날 준비를 시키더라도 이들은 불만없이 따랐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규율이 엄한 만큼 그 불복종에 대한 처벌도 가혹했어야 했다. 1205년에 칭기스(Chingis)가 그의 장수 수보타이(Sübötei)에게 내린 명령 중에는 군사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가 그런 명령을 받은 이상”, 수보타이는 이렇게 지침을 받았고 이어 “불복종한 자는 처벌을 받아야만 할 것”이란 말을 들었다. 그 일반적인 기준은 “우리의 명령에 불복종한 자가, 만일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있다면, 우리에게 보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목할 가치가 없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야 할 것”이라고 칭기스가 말했다고 전한다 (『원조비사』).
겁쟁이짓에 대한 처벌은 진짜 아주 무거웠고, 전투병 사이의 결속은 크게 장려되었다. 카르피니에 의하면, “그들 (몽골은) 전투를 한창 치를 때, 만일 10그룹 중에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심지어 그 이상이든 뒤꽁무니를 뺐다면 모조리 죽음에 처한다. 또한 가령 이 10 그룹이 깡그리 달아났을 때 그 나머지 100 그룹은, 그들을 뒤따라 달아나지 않았다면, 모조리 죽음에 처한다. 말 한마디에, 주검이 되어 퇴각하지 않는 한, 냅다 도망친 모두에게 사형이 처해진다. 마찬가지로, (10에) 하나 혹은 둘, 또는 그 이상이 싸우러 대담하게 전진했을 때 그 10의 나머지는, 그들을 뒤따르지 않았다면, 죽음에 처해진다. 아울러 10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이 사로잡혔을 때 이들의 동료는, 그들을 구출하지 못했다면, 죽음에 처한다.”(『몽골 여행기(The Molgol Mission)』)
비잔틴(Byzantine) 사료는, 비록 되풀이되는 표현이지만, 저 야만인 병사의 규율에 대한 경의를 마지못해 나타냈다. 저들은 “애정이 아니라 공포 때문에” 그 군장(chief)에게 복종한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그 표현은 정말이지 끌끌 혀를 차게 한다. 심지어 현대에도 이런 개념이 남아있는데 이는 아마도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강렬하면서도 세련되게 서술된 편견 탓일 것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정복하고는 (피정복민을) 자유민으로서 대했다. 북아시아 사람들은 정복하고는 노예로서 대했다. …… 게테(Getae) 또는 타타르 국가의 기질은 언제나 여러 아시아 엠파이어와 닮았었다. 거기 사람들은 다 몽둥이찜에 의해 통제되는 바, 타타르 치하의 사람들도 매질에 의해 다스려졌다. …… 아시아에 군림하는 억압정신은 (거기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 나라의 모든 이야기(역사)에서 자유정신을 드러내는 주안점은 도저히 찾을 수 없고, 단지 억압의 영웅적 행위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XVII)
몽테스키외의 견해는 비잔틴 사료가 제공하는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 마리우키우스(Maurice)는 “튀르크(the Türks, 突厥)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자유롭다”고 명확히 말했고, 이 진술은 레오 6세(Leo VI)가 904년 무렵에 쓴『전술론(Tactics)』의 헝가리인 관련 내용에서 추임새처럼 반복되고 있다.
내륙아시아 전사의 특출함은, 타고난 용기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익힌 규율의 콤비네이션 때문이다.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테스(Theophylaktos Simokattes, 7세기)에 따르면, 무크리(Mukri, 중국 변방에 살던 어떤 내륙아시아 사람들이다)는 “날마다 훈련을 통해 익힌 경험 때문에 무장전투에서 대단히 용감하거니와, 위험이 코앞에 나타나도 흔들림이 없었다”. 또 동저자에 의하면, 남러시아 초원의 오구르(the Oghur)는 “그들의 수와 그들이 거친 군사훈련 때문에 거기서 가장 강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리우키우스에 따르면, 튀르크(돌궐)가 하는 일이란 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법을 연습하는 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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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륙아시아의 밀리터리 역사에 있어 보병의 사용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위대한 정복과 승리의 원정은 경기병의 성과였다. 그 우월한 기마술은 보편적인 경의를 얻었다. 『원사(元史)』는 “몽골은 기사(騎射)에 능하다. 때문에 이들은 활과 말의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차지했다”고 간단히 언급했다. 서방 저술가는 내륙아시아 전사의 승마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조시모(Zosimus)에 의하면 훈족(the Huns)은 “그들의 두 발을 땅에 굳게 심을 수 없었고, 말등 위에서 살았는데 심지어 잠자기까지 그리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의한 묘사는 더 세밀하다.: “저들은 참으로 다부지되 못생긴 그들의 말에 거의 착 붙어있는데, 때때로 이들은 그 위에서 계집이 하는 식으로 (쪼그리고) 앉아 (생리적) 볼일을 치른다. 그 나라의 모든이는 밤낮으로 말등에 있으면서 사고 팔기, 먹고 마시기를 하며, 그 짐승(말)의 좁다란 목 위로 고개를 숙이고 느긋하게 잠을 청해 깊은 꿈속에 빠진다.” 마우리키우스의『전략(Strategikon)』에 따르면, 아바르(the Avars)는 말등에서 키워졌기 때문에 거의 땅 위에 서있을 수 없었고, 그들의 다리도 약해지고 말았다. 대수도원장 레기노(Regino)에 따르면 9세기의 헝가리인은 “끊임없이 말을 타고 다닌다. 말 위에 오른 채 가거니 서거니 하며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나눈다.”
잘 훈련되고, 잘 규율 잡힌 내륙아시아 전사는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맹우를 가졌다. 다름아닌 그들의 말[馬]이다. 이 상대적으로 작은 조랑말(pony) 타입의 동물은(외부세계의 관찰자들은 못생겼다고 생각했었다) 이른바 프로체발스키-말(Prjewalski-horse)과 관련이 있는데 야생종 만이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 이 품종의 억셈과 참을성은 그 상대적으로 쓸만한 스피드와 짝을 이루고 있었고, 게다가 유별난 지구력도 있었기 때문에, 내륙 아시아 군사력을 이룩한 가장 엄청난 한가지 요인이 되었다.
내륙아시아의 마구류 및 말 굴레(재갈, 고삐 등) 따위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 어느 것도 전체 지역에 적용할 만한 특성은 띠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주장과는 달리 등자는 내륙아시아인의 발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의 사용 시초를 어느 정도 확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들 대부분은 땅속에 묻혔을 때 분해되기 쉬운 유기재료(나무, 가죽, 뼈)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보다 믿을 만한 증거는 조각상이나 기타 기마전사에 관한 표현물로부터 긁어 모을 수 있다. 그 일부는 그런대로 꽤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분명히 정교한 솜씨를 기울여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등자의 실물(representation)은 코리아(Korea)와 일본에서 나왔는데 그 연대는 서기 4세기와 5세기로 비정될 수 있다. 훈족(370∼450)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되 이로부터 대략 1세기 뒤 아바르의 그 사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아바르)로부터 비잔틴 군대는 그 장비의 사용을 배웠고, 이어서 아랍까지 퍼졌다. 늦어도 7 세기 초까지 이란에선 여전히 등자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원주: ……물론 유연을 아바르로 비정하는 설을 전제한다면, 등자의 확산을 그들의 이주와 연결시켜보자는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연이나 심지어 이들에 이어 몽골리아를 지배했던 튀르크(돌궐)도 등자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 서방의 경우 등자는 8세기 초 어느 무렵에 출현했다고 하며 …… 등자를 뜻하는 몽골어 döröge는 (이를 뜻하는) 투르크어 형태로 연결되서는 않된다…… 분명히 등자는 알타이 사람들의 발명은 아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일부 말-관련 장비인 일부인 편자가 내륙아시아에 존재했었는지는 확실히 몽골정복시대 이전의 경우는 확증할 수 없다. 물론 발싸개(hipposandal, 말굽을 어떤 물질로 싼 것)의 사용도 증명하기 힘들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대개 가죽, 밧줄, 혹은 심지어 나무와 같이 썩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무덤 속에서 분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철제 편자는, 5세기 유럽의 그 사용 예는 잘 증언되고 있지만, 내륙아시아의 경우 몽골시대가 되기 전에는 나타난 것 같지 않으며 심지어 어쩌다가 사용되었다. 작치드(Jagchid)와 보든(Bawden)은 중국 원나라에 그것이 존재했음을 일부 지적한 바 있고, 간쟈크사람 키라코스(Kirakos of Gandzak, 1200∼72)는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몽골은 거주민 1인당 편자 1점씩 부과했다고 기록했다. 몽골의 헝가리침공 때 창작된 이름 모를 한 라틴 싯구절은 몽골의 말에는 신이 신겨있지 않다고 노래했다.: “Est silex equi ungula / ferri, clavi non gerla”. 라시드 앗-딘(Rashid ed-Dīn) 버전의 오구즈 카간(Oghuz kaghan) 투르크 전설에는 편자의 사용을 특히 예의주시하며 비중을 두어 언급되고 있다. 믿을 만한 증인인 스팔라토사람 토마스(Thomas of Spalato)에 따르면 몽골의 말은 “편자도 없이 바위와 돌 사이를 마치 야생 염소처럼 헤집고 달려간다.” 15세기 중엽에 오이라트(Oyirad) 사절단은 명나라 조정에 편자를 제공했어야 했는데, 이 사실은 서부 몽골인이 그 장비사용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엄청난 규모의 말떼에게 편자를 장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1722년 칼무크(Kalmucks)의 볼가강(the Volga) 도하에 대한 설명(18세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 칼무크 타타르는 그들의 통상적인 사막 겨울나기를 위해 강을 뒤덮은 얼음 위를 건너 찾아왔었다. 그들은 그 (얼음)길에 흙을 뿌려 그 소떼가 지나가게 했다. 그 말떼는 그들의 나머지 소떼와 마찬가지로 (편자)신기가 부족해서 (모든 말이 다) 똑같이 맨얼음 위로 그 발을 올려놓을 순 없었다.” [원주: ……투르크어에는 편자를 가리키는 고유범칭이 없으며, 古투르크어에 편자를 뜻하는 말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분명히 내륙아시아로의 편자 침투라인은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달려왔지 중국쪽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이 장비가 서방의 발명품이라고 합리적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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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내륙아시아 전사는 탁월한 기수(horseman)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활쏘기 솜씨도 이와 동등하게 우수했다. 이들이 ‘(말)세우기없이 말등에서 활쏘기’라는 어려운 예술를 발명한 것으로 보인다.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는 그리스 용어 ίππotoxótŋς 즉 “기마궁사(mounted archer)”에 뿌리를 두고, 이 말은 스키타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며, 이미 헤로도토스(IV. 46)에 출현했었는데 여기서는 종종 그들 (스키타이란) 이름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안나 콤네나(Anna Comnena)는 실체 미상의 어떤 ‘바바리안’ 민족(그녀는 스키타이라고 불렀다. 혹 뻬취넥(Pechenegs) 또는 쿠맨(Cumans)이 아닐까 한다)에 대하여 말하면서(1138∼1148 사이의 저술), 그들을 “두려움 없는 바바리안, 엄청난(공포의?) 기마궁사”라고 보았다. 훈족과 동시대에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는 그들(훈족)의 군사적 우수성에 우아한 표현을 바쳤다.: “드물게도 어린 아이는 말이 그를 등에 태우자 그 어머니의 도움없이 스스로 스는 법을 터득했다. 당신이 사람과 동물의 갈비뼈가 함께 태어났으리라 생각할 만큼 너무나도 견고하게 그 기수(rider)는 말에 들러붙어있다. 마치 그가 제자리에 묶인 것처럼. 다른 같은 패거리(folk) 또한 모두 말등에 몸을 싣고 거기서 살아간다. 틀림없이, 멋들어진 활과 화살은 그들의 기쁨이요, 또한 그들이 손에 쥔 가공함이다. 확고함이란 그 날림(missiles, 화살)이 죽음을 가져오리라는 그들의 자신감이다. (때문에) 그들을 울컥하게 하는 일은 한번도 잘못 나간 적 없던 한방(blow)을 잘못 향하게끔 해버린 짓이다.” 요르다네스(Jordanes)의 평가는 (표현이) 이보다 무뚝뚝한 편이다.: 훈족은 “탁월한 기수(horsemen)이고 …… 활과 화살도 익숙하게 사용한다”. 마우리키우스의『전략』에 써있기를 투르크는 말등에서 활쏘기를 끈덕지게 스스로 연마했다고 하며, 이런 글귀는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되풀이해서 사이사이 집어넣으며 헝가리인에 대해 써먹던 말이다.
헝가리 기마궁사는 그 동시대 사람들에 있어 각별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모데나(Modena) 사람들이 그 보호자인 성 제미니아노(St. Geminianus)에게 낸 탄원서에는 자신들을 헝가리인의 화살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청원이 실려있다. 대수도원장 레기노는 저들(헝가리)의 889년 원정에 대하여 기록(915년)하길, 헝가리인은 “인간처럼 살기 보다는 야생 동물처럼 살고 … … 저들의 칼에 의해 죽은 사람은 몇 안되나 저들의 화살에 의해 (죽은 사람은) 수 천명이었다. 저들은 뼈로 만든 활로 예술 작품 수준으로 겨냥했었다. 저들의 활쏘기로부터 자신을 거의 막을 수가 없었다.” 901년, 저들 (헝가리에) 의한 롬바르드인(the Lombards)과의 전쟁 중에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저들의 화살에 의해 비명횡사 했었다.” 롬바르드의 역사가 리우트프란트(Liudprand)는 바바리아(Bavaria)의 공작 아르눌프(Arnulf)의 아들인 루이스(Louis)와 헝가리인 사이의 전투에 대한 그의 기술에서 말하길, 후자는(텍스트에는 Turci라고 적혀있다) 적으로부터 등을 돌려 도주하는 체하면서 뒤로 화살을 쏘아 (적을) 많이 죽였다고 했다.
셀주크 기마궁사는 십자군으로부터 경외감을 얻었었다. “여러 라틴 저술가는 ‘pluvia’, ‘imber’, ‘grando’, 그리고 ‘nubea’ 등의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투르크 궁술이 차지하는 묵직함을 묘사했다고” 스마일리(R. C. Smaily)는 지적하면서 “이는 아마도 그 재발사 속도가 크게 유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은 비나 우박보다 더 하늘을 가득 메웠었다. 이보다 1천 여 년 전『한서(漢書)』는 이와 마찬가지 이미지를 이용하여 중국 장수 이릉(李陵)에 대한 흉노의 기습(99 B.C.)을 기술했었다(矢如雨下). 또한 로제리우스(Roger)에 의한『베라드 교회법(Canon of Várad)』에는 1241년에 몽골이 칼로차(Kalocsa)의 대주교 우골린(Ugolin)의 부대에게 얼마나 “그들의 화살을 비처럼 쏘았는지” 적혀있다.
물론 13세기의 몽골 궁사도 탁월한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아르메니아 사료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궁사의 나라(the nation of the archers)”란 용어를 사용하여 언급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는, 1241년 잉글랜드(England)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몽골인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활에 익숙하다고 여겼고, 이들을 “비길 데 없는 궁사(incomparable archers)”라고 묘사했다.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 자신도 이와 똑 같은 별칭을 썼다.
각각의 병장기(armament)에 대한 기술적인 묘사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게 할 것이고, 더군다나 내륙아시아 전사의 장비는 일률성도 없어 그 장소,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폭넓게 차이가 난다. 가장 중요한 한가지 장비는 합성궁(compound bow)인데, 그 다양한 타입이 비교적 양호하게 복원될 수 있다. 이것은 나무와 뿔로 만들어졌으며, 힘줄(sinew)을 나뭇고갱이에 붙여 특수하게 힘을 강화했다. 그 한가지 중요한 특성은 손잡이 부위를 활 중심 아래에 둔 것에 기인한 비대칭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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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수 천 개의 고고학적 지점 거의 전부에서 어떤 활촉이 발견되었지만 이것들 모두가 전쟁행위에 이용된 것은 아니다. 화살대의 길이와 재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나무로 만들어 진 것은 매장지점에서 분해되는 경향이 있어서다. 플라노 카르피니는 그가 살았던 13세기의 화살대 길이에 관련된 일부 기록을 남겼지만 그 자료의 해석은 어렵다. 스팔라토의 토마스는 몽골의 병장기에 관련된 그의 서술에서 몽골 화살의 화살대 끝 오늬(notch, 화살의 머리를 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는 너무나도 좁아서 그들은 “우리”(헝가리가 아닐까 한다) 활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몽골 화살의 화살대는 헝가리(?)의 그것보다 4 손가락폭(digit, 3/4 인치) 만큼 더 길고, 그 화살촉은 철, 뼈, 또는 뿔로 만들어졌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의 뼈 화솔촉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것은 대략 900년 뒤의 몽골도 계속해서 사용했었다. 이는 그것의 높은 품질을 표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륙아시아 군대가 극복해야만 했던 고질적인 금속의 부족을 시사하는 것인데, 후자에 대해선 내가 덧붙일 말이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이지만,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내륙아시아 궁사는 그들과 근접전도 벌여야만 했다. 이때 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개인무기 즉 칼(sword)은 그 많은 모양, 크기로 증명되고 있는데, 스키타이의 아키나케스(akinakes)처럼 다양한 짧은 길이의 곧은 단검(dagger)과 같은 것이든지, 아니면 (길이가) 더 길고 날이 한쪽만 혹은 양쪽 다 서있든지, 아니면 사브르(sabre)처럼 칼끝을 향해 커브를 그리면서 한쪽만 날이 서있었다. 아틸라(Attila, 4세기)때 훈족은 두 종의 칼을 무장했었는데, 이 중 하나는 길고 양쪽에 날이 서있는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더 짧으면서 한쪽만 날이 서있는 기병대(equites)의 찍어베기용 칼이었다. 사브르는 직검(straight swords)으로 무장한 前지배층 아바르를 7세기 말엽에 대체했던 사람들(아마도 아바르에 대한 반란민)이 사용했었다.
러시아의『원초 연대기(Primary Chronicle)』(『Povest vremennykh let(지난 세월의 이야기)』) 기사는 ‘劍’(sword)과 ‘刀’(sabre) 사이의 고질적인 경쟁에 관한 흥미로운 주안점을 던져주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슬라브 뽈리야인(Polyanians, 지금의 뽈(에)스카 즉 폴란드의 어원으로 짐작됨)이 투르크 카자르(Khazars)에게 1 가구 당 1 스워드(sword)을 세금(tribute)으로 바쳤는지 적혀있는데, 카자르는 이들 무기를 검토하고는 평가하기를 “군주(prince)시여, 이 공물(稅)에는 사악함(evil)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브리(sabre)라고 부르는 한쪽 날 무기를 얻었으되, 이 사람들의 무기는 양쪽에 날이 다 서있고 스워드라고 부릅니다. (이는 필시) 장차 이 사람들이 우리 그리고 다른 땅에게 공물을 부과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스워드와 사브리 모두 남러시아 초원의 10∼14세기 경 뻬치넥(Pecheneg)의 무덤에서 출토했다. 그런데 9∼10세기 뻬치넥 무덤에선 대량의 사브리가 나왔는데 약간 휘어있는 칼몸(blades)의 길이는 1미터를 넘지 못했고 나무로 만든 칼자루가 붙어있었다. 또한 칼몸의 휜 정도는 후대의 무덤에서 더욱 눈에 띄게 된다. 이 원인을 두고 쁠레뜨네바(Pletneva)는, 이들 무기가 가치가 있었고 그래서 당시 생존자는 이것들을 자신이 갖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제법 일리가 하다. 플라노 카르피니는, 칼은 부유한 몽골인만 사용했었고 가난한 군인은 도끼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활과 칼 다음으로 중요한 투창(spear, 이하 ‘스피어’로 표기)과 창기병용-창(lance, 이하 ‘랜스’로 표기)은 내륙아시아의 전통적인 무기고 목록 안에서만 언급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목제 창자루는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종종 스피어(멀리 던지기는 물론 찌르기 등 공격에도 사용되었다)와 랜스가 전투에서 어떤 식으로 써먹었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사르마트인(Sarmatians)은 이것들을 주요 장비로서 구성했지만 그 무덤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판티카파이움(Panticapacum,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케르치(Kerch))에는 일부 회화적인 증거가 있는데, 여기서는 사르마트인으로 짐작되는 기병(horsemen)이 아주 긴 랜스를 휘두르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또한 예니세이강 상류지대(Upper Yenissei)의 암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사르마트는 내륙아시아 밀리터리 역사상 구별되는 한가지 갈래를 이루며 그 전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스텝지대의 군사적 연속성은 스키타이식 원형(Scythian prototype)으로부터 발생하였다. 짧고 가벼운 스피어의 사용은 아마도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12세기의 셀주크(Seljuks)는 이 무기를 선호했었다. 플라노 카르피니는 몽골이 사용했던 특수한 형태의 랜스를 언급했는데, 이것은 그 철제 창머리에 갈고리(hook)가 달려있어 사람을 그 안장으로부터 끌어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무기용도의 올가미 밧줄(lasso)에 관해 몇 마디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언급은 아마도 헤로도토스(VII, 85)에 의한 것일 터인데, 사가르트인(Sagartians)에 연관된 것이었다.『수이다스 레시콘(Suidas Lexicon, 수이다스의 사전)』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파르티아인(Parthians)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그 군대는 이 장비를 완전히 임기응변식(σειροφóροι)으로 다뤄 싸웠다고 한다. 사르마트인에 대하여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그들은 어느 적을 만다든지 올가미 밧줄을 적 주변에 던져놓고, 이어서 그들의 말떼를 빙글빙글 돌려서 적을 약 올려놓아 올가미 밧줄에 걸리게 한다.”고 기록했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 A.D.)는 그의『유대인 전쟁사(Jewish Wars)』에서 72 혹은 73 A.D.때 아르메니아왕 티라다테스(Tiridates)가 알란인(Alan)이 던진 올가미 밧줄(βρócoz)에 잡혔을 때 어떻게 가까스로 빠져 나왔는지 기록했다. Moses Khorenatsci는 8세기 후반의 저술에서 이후 이어지는 2세기 동안의 일부 사건에 대해 이런 요세푸스의 묘사를 써먹었다. 그의 서술에서는 바르실(Barsil)의 왕이 “힘줄 가닥을 가죽으로 감아서 만든 가죽끈”을 티라디테스왕에게 던져 그를 잡았다고 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의하면 훈족은 “헝겊을 꼬아서 올가미로 만든 줄을 상대방에게 던진다. 그래서 그들을 얽어 감아 그 사지를 꼼짝 못하게 하고, 이들을 말타기 혹은 걷기의 힘으로 (질질 끌고) 데려간다.” 소조멘(Sozomen)이 들려주는 토미(Tomi, 흑해연안 도시)의 주교 테오티무스(Theotimus)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훈족이 테오티무스를 올가미 밧줄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도 그는 그 미래의 피해자가 훈족을 위해 하나님께 잘 말해 줄 때까지 손을 허공에 뻗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정보로 미루어 보아 누군가는 몽골도 지녔던 이런 밧줄의 용도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노 카르피니에 의하면 모든 몽골 군인이 그런 밧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정말로 전쟁의 엔진을 끌어당기기 위해서인지(프란체스코회의 견해처럼), 아니면 그냥 단순한 밧줄 올가미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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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기동성의 기병부대에 필요한 물질재료를 공급해야 하는 문제는, 전통적인 내륙아시아보다 훨씬 진보한 어떤 공업을 무리하게 짊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철은 그런대로 흔한 금속이지만 무기 제조(활촉, 랜스, 창머리, 그리고 특히 사브리)를 위해서는 전문직공의 기술과 상설 작업장을 가진 어느 정도의 복잡한 공업이 필요했기에 그들의 철은 수량이 적었다. 그 3가지 주요 무기공급원은
중앙유라시아 여러 민족과 주변 정주문명 사이의 교역은 그 관계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증거는 수출하는 측에서 나온 것이고 게다가 (유목민에 대해)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정주민의 국가는 공인되고 통제된 거래장소에서만 교역을 허용하려고 언제나 공을 들였고, 또한 늘 밀매를 막지도 못했었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 그 제국의 국경수비를 맡고 있는 병사가 그들의 적 흉노에게 철제무기를 팔다가 적발된 사례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 법은 다음과 같이 명시되었는데도 그러했었다.: “호시(胡市)에서, 아전과 백성은 병기 및 철을 가지고 관(關)을 나갈 수 없다. 서울의 저자에도 이 법은 매한가지다 [胡市, 吏民不得持兵器及鐵出關. 雖於京師市買, 其法一也]” 서기 2세기 후반, 선비(鮮卑) 구원부대가 중국군대를 돕고 있었는데 그 대가를 재화 대신에 철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서기 177년에 관한 역사기록은 병장기 금수조치(embargo)가 효과가 없음을 폭로했다.: “관새(關塞)가 엄하지 못해서 정제한 쇠(청동?)와 철은 다 (우리) 감시망을 몰래 많이 빠져나가 놈들(선비)에게 들어가니……흉노보다 병기는 더 날카로워졌고 말떼도 더 빨라졌다 [加以關塞不嚴, 禁網多漏, 精金良鐵, 皆爲賊有……兵利馬疾, 過於匈奴]" 서기 2세기 말, 응소(應劭)의『한서』에 대한 주석(한서집해)에 따르면, “호시(胡市)에서, 아전과 백성은 병기를 가지고 관(關)을 나갈 수 없었다 [胡市, 吏民不得持兵器出關.]”. 또한 당나라 때도 오랑캐 부족에 대한 철 수출을 금지했었다는 증언이 있다. 불법수출은 명나라 때 관원까지 계속해서 돌림병처럼 번져갔다. 세뤼(Henry Serruys) (교수가) 수집한 풍부한 문헌자료 중에서 나는 단지 몇 가지 만을 골라서 본보기로 말해 보겠다. 1407년, 조서가 감숙지방 관찰사에게 내려와 “옛날에 하던대로” 병기판매를 금지하라고 일깨웠다. 1437년, 한 고위관리는 그가 “갑주, 활, 그리고 화살을 몽고 조공사절의 낙타와 맞바꾸었다”는 책망에 대해 항변했었다. 1443년, 어떤 관리는 “몽골 사절과 서울에 머물면서 명나라를 섬기고 있는 몽골인 사이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자고 했고, 아울러 (그 몽고사절이) 서울까지 왕래할 때 병기, 구리 그리고 철을 (그들에게) 판매하지 (못하게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를 넘기고 넘겨가며 금지조치를 되풀이해야만 했던 분명한 사실은 이 법이 무시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세뤼는 또한 술단지 안에 활촉을 숨겨 오이라트에게 밀수했던 여러 케이스를 지적했었다.
병장기 교역의 중대한 역할은『금사(金史)』(본기 권1)에서 보이듯이 여진(女眞, the Jurchen)의 발돋움이 좋은 사례다.: “생여진(生女眞)은 옛날에 철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나라에서 갑주(甲冑)을 팔러 온 이가 올 때 마다 재물을 후하게 기울여 (그것과) 맞바꿔 샀었다. (금나라 시조 아골타의 할아버지 오고내) 또한 형제와 부족 사람을 다 불러다 그것들을 사라고 명했었다. (이런 식으로) 철을 많이 얻게 되었고, 때문에 활과 화살을 고치고 기계(器械)를 갖추었다. (그래서) 병세(兵勢)를 점차 떨치게 되었고, 잇달아 많은 무리가 달라붙고 싶어했다.”
비잔틴 자료는, 수량은 훨씬 적지만, 중국 사료가 제공한 정보와 딱 들어맞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5세기 초의 훈족은 로마인과 교역하기를 갈망했었는데, 마치 흉노와 이들의 몽골초원 계승자가 중국인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다. 아틸라의 죽음 뒤, 465년에 (비잔틴) 황제 마르치아누스(Marcian, 항상 對훈족 비타협 정책을 추구했었다)는 ‘바바리안’에게 무기는 물론 그 제조에 쓰일 수도 있는 모든 물질재료에 대하여 수출금지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1세기 뒤에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Justinian’s code)에 삽입되었다. (그러나) 562년, 유스니니아누스 입장에선 낙담이지만, 콘스탄티노플에 온 아바르의 사절이 어떤 병장기를 구입했고 그래서 이들과 비잔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교역을 통해 얻은 병장기의 보완을 위해서 혹은 심지어 대체를 위해서 장인이 필요했다. 아마도 무보수는 아니었겠지만, 무기의 제조 혹은 수리에 종사하는 이들은 특수한 신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강한 연대의식(esprit de corps)으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특수한 경우지만, 이를 바탕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으로, 튀르크(돌궐)는 6세기 중반에 그들 자신의 제국을 만들기 전에 유연(柔然)의 “철공(鐵工)”이었음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비슷한 예는 코카서스인(Caucasian)의 왕국 자리카란(Zarïkaran)의 경우인데,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마수드(Mas’ūdi)에 따르면 이 왕국 이름의 “뜻은「쇠미늘 갑옷(coats of mail)을 만드는 자」인데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쇠미늘 갑옷, 안장, 재갈·고삐류, 칼, 그리고 기타 철제 병장기의 제조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특징적이되 어떤 면에서 아주 근대적인 예는 몽골의 이익을 위해 “금을 캐고 병장기를 제조했던” 게르만인 전쟁포로다. 프란시스코회의 뤼브뤼크(Rubruck)는 13세기 중반에, 탈라스(Talas) 동쪽으로 1달 가량 걸리는 곳 어디쯤이며 틀림없이 볼라트(Bolat)라는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는 그들(게르만 전쟁포로)을 찾아서 돕겠다는 헛된 시도를 했었다. 이 마을의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그 명칭(페르시아어 pūlād, 즉 “강철(steel)”에서 유래)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사하게 아나톨리아(Anatolia)에는「Demirciler」(대장장이들)란 지명이 있고, 그래서 자비에르 드 플라놀(Xavier de Planhol) (교수는) 이러한 정착지는 유목민의 장인이 그 직업의 전문화를 이유로 함께 집단을 이뤄 설립한 것에 기원한다고 올바르게 결론 내렸다.
라시드 앗-딘은 일-칸 가잔 통치하의 페르시아와 몽골의 병기제조자 조직을 기록했다. 각 도시 안에는 이들로 이루어진 길드(guild)가 있었고, 작업자는 각 생산물 단위마다 표준적인 보수를 받았다. 시간급에서 도급(삯일)으로 교체되면서, 우리의 자료에 따르면, 생산이 5배 늘어났다.
금속 및 이것으로 만든 무기가 부족했기에 몽골은 부과한 세를 그런 종류로 지불해도 좋도록 했다.『원조비사』(단락 279)에 의하면, 그 징세 개편의 일부로서, 오고타이(Ögödei)칸은 비단과 은 외에도 화살통(qor), 활(numun), 갑옷(quyag), 그리고 병기(ĵebe)를 거두어 모아두었다. 뤼브뤼크는, 몽골이 돈강(the Don) 以西 지방, 심지어 발칸지방(the Balkans)까지 과세하여 1가구 및 1년 마다 도끼 1점씩 거두었으며, 그들은 또한 가공되지 않은 철을 보는 대로 모두 가져갔다고 기록했다. 아르메니아의 역사가 간쟈크사람 키라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훌라구(Hülegü)의 통치 때 그런 종류에 대한 아주 무거운 과세부과가 그 정복지에 있었고, 그 내용에는 화살 1점과 편자 1점이 포함되었다는데, 아마도 1 가구 당 부과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가상의 “평균” 내륙아시아 전사를 꾸미는 데 필요한 금속의 양을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덤에서 발견된 것(정복시대[9 세기] 헝가리전사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속제무기의 중량)을 근거로 사볼치 디 바야이(Szabolcs de Vajay)는 대략 2만 명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를 무장하는 데 30톤 가량의 덩이쇠(crude metal)가 필요하다고 추정했다. 불행히도 고고학자들은 발견된 무기의 중량을 좀처럼 명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자료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공업적 토대의 크기와 실상을 유추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스키타이의 무덤에서 발견된 수 천 개 화살촉의 중량을 고찰한 어떠한 지적도 만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수장급-분묘(sepulchre)에서는 정말로 대단히 수많이 나오는데, 예컨대 엘리자베토브(Elizavetov)의 제8호 쿠르간(kurgan, 4세기 후반기로 비정됨)에서는 청동 985 점과 철제활촉 59점이 출토했다. 전투 또는 사냥이 시작되고자 할 때면 일부 회수될 수도 있겠지만 화살은 잘 나가는 소모품이었다. 이것들과 기타 새로운 무기에 대한 수요는 응당 끊임없었고 꽤 심각한 문제였다.
역사상 다른 어떤 군인처럼, 내륙아시아의 전사는 그 무기를 그가 속한 사회의 기술과 자원에 의존했고, 이것들은 환경 요인에 의해 크게 결정되었다. 말떼의 공급을 장악하는 것은 농경민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이었고, (때문에) 기마유목민전사는 스텝지대에 머물러 묶여있었다. 그가 필요한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 그는 야금술(metallurgy)에 의존했어야만 했고, 여기에는 두 가지 필수요소, 즉 광석(ore)과 연료(combustible)가 없으면 작업이 불가능하다. 이중 두 번째 요소는 스텝에선 얻을 수가 없었다. 금속의 공급은 삼림지대 너머에서 나왔는데 이곳도 기마전사의 것이었지만 그 통제는 한정되어 있었다. 스텝은 그 전사에게 그 탈 것(그 군사적 성공의 핵심요인)을 마련해 주었으나 그들에게 그 군비개발에 필요한 수단은 내주길 거부했다. 내륙아시아 군대의 군사적 우위를 지탱하기 위해 필수적인 장인 또는 어느 정도 공업의 토대를 공급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 역사상 아주 일찍부터, 저들로 하여금 그 활용 가능한 자연과 인간의 자원을 조화롭게 쓰는 법을 배우게 했을 따름이다.
첫댓글 좋은 논문 자료 감사합니다.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