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의 정기산행에 빠진 탓에 늦깎이로 다녀왔다.
지리산둘레길을 빠짐없이 어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감 때문에...
멀리 섬진강을 조망하며, 섬진강변에 펼쳐진 넓은 들을 볼 수 있다는게 매력이다
산수유는 아직도 시뻘건 불빛으로 타오르고 있어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미마을–용두갈림길(1.1km)–상사마을(1.6km)–지리산탐방안내소(5km)–수한마을(3.2km)–방광마을(1.4km) 《총 12.3km》
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곤 개인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떠나왔다
오미마을의 시작점에는 우리들의 음성이 아직 머물고 있었다.
오미저수지 둑길을 따라 걷는데 제법 사나운 비바람이 불었다.
겨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시어머니처럼 심술을 부렸다.
저수지 위로 나있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활짝 핀 애기동백이 시선을 끌었다
애기동백은 꽃잎이 활짝 벌어져 재래종 동백꽃와 구분이 된다
동백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인 자생식물이지만 애기동백은 일본 원산이다.
하사마을은 특이하게도 저수지가 마을 바로 앞에 있다.
하사저수지를 품고 넓은 들을 바라보는 마을 정경이 아름답다.
저수지 바로 옆과 마을 앞에 당산과 정자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사도리(沙圖里)란 이름을 글자 그대로 풀면 ‘모래 그림 마을’이다.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 뜻을 전한 곳'이라 하여 사도리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때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구분해서 상사리와 하사리가 되었다고 한다.
사도리는 신라 흥덕왕 때부터 형성된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본래 승려 도선에게 이인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 뜻을 전한 곳이라 하여 사도리라 불렸다
마을 앞에는 하사마을 주민들의 사진을 모두 넣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마을회관 벽에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우물가, 디딜방아, 메주 만들기, 단옷날 풍경 등은 길손들을 추억에 잠기게 하였다.
하사마을 어귀에 효자 이규익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내렸다는 정려(旌閭)가 있다.
정려란 효자, 충신, 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이다.
팔순 아버지를 살리고자 맨살을 찔러 피를 받아 드려 3일 더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6년간 시묘살이 등 효행이 알려지면서 고종이 동몽교관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지리산둘레길에는 중요 길목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편하다.
상사마을은 들르지 않고 마을 위로 나있는 산길로 돌아간다
울창하게 우거진 대숲 사이로 길이 나있다.
마을 사람이 나무하러 갈 때, 멧돼지들이 물먹으러 갈 때 오가던 길이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 위로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못다 쓴 편지와
빛 바랜 사진들과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이제 떠나보냅니다
그리운 이름과
기다리는 아픔과
여린 눈물을
발밑 깊이 묻어둡니다................................................이재금 <가을에> 부분
빠알갛게 익어가는 산수유 열매가 함함하고 고혹적이다.
붉은 과실로 눈을 즐겁게 하고, 봄이면 꽃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나무다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런 CF가 유행했을 만큼 산수유는 남성들의 정력에도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둘레길 18구간에서 잠시 벗어났다
'고향가든'에서 한우로 끓인 육개장을 먹었는데...탁월한 선택이었다.
황전마을은 화엄사 입구 집단시설지구로 유명하다.
황전마을 하면 몰라도, 화엄사 아랫마을이라고 하면 안다.
식당과 숙박시설이 즐비했지만 한산해 보여서 마음이 거시기하였다.
'하늘이 내린 최고의 명약'이라는 하늘타리가 많이 보였다.
노란 열매는 참외를 연상케 하는데 '하늘수박'이라고도 한다
주성분인 트리테르페노이드 사포닌 성분은 매우 쓴맛을 내며 항암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황전마을에서 나가는 이정표는 화단 안에서 있어 찾기 쉽지 않다
주차장과 안내소를 왔다갔다 하다가 겨우 찾아냈다
조선시대엔 황둔마을로 불리다가 일제 때 우전마을과 합쳐져 황전마을이 되었다.
황전마을에는 민박촌을 포함한 각종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이 드물고 비어있는 건물이 많아서 쓸쓸한 풍경이었다.
수한마을은 길이 지나는 7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솔밭에 숨어우는 바람소리'란 찻집이 있었다.
응접세트와 작은 소품들로 치장된 정자 내부의 꾸밈새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멋진 정자에는 ‘송죽정(松竹亭)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본래 물이 차다 하여 물한리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수한마을이 되었다.
마을에는 52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다.
마을 당산에서는 지금도 매년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다.
수한마을을 떠나 방광마을로 가는 입구로 들어섰다.
문이 굳게 닫힌 정미소가 을씨년스러웠다.
한때는 밀려드는 나락 가마니와 농민들로 인해 북적거렸을텐데...
방광마늘은 임진왜란 때 외지인이 피란 와서 마을이 형성됐다.
본래 판관이 살았다 하여 '팡괭이'라 불리다 '방광'으로 변했다고 한다.
1930년대까진 남원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들머리였던 덕에 지나는 나그네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어귀에는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3그루와 함께 ‘종석정’이라는 정자가 길손을 맞는다.
종석정에는 ‘지리정기수방광(智異精氣受放光)’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서 빛을 내뿜는다’는 뜻이다
마을이름이 ‘방광(放光)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새미골 입구에 나오니 소원바위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지리산 산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가 간절하게 자식을 기원하는 것을 보았다.
아낙네의 정성과 소망이 너무 애절하여, 노고단 정상에서 가져다주었다는 바위다
2005년에 주민들에 의해 참새미골 계곡 입구로 옮겨져 이제는 마을을 수호하는 보물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 참새미골에서 <오미-방광> 구간은 끝이 난다
종점에 서니 비가 그치고 찬 바람이 강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구례 개인택시를 불러타고 운조루 유물전시관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