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 / 이상인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
가끔씩 고갤 좌우로 흔든다.
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
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
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
나는 아직 잴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시집『UFO 소나무』(황금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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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 / 강경호
자벌레는 땅을 측량하지 않는다
부동산투기를 하지 않는다
묵묵히 길을 간다
오체투지를 하다가
남들 안 보는 나무 그늘에서도
허투루 그냥 걸어가지 않는다
부처를 향해 가지 않으며
천국을 꿈꾸지 않는다
연약한 그의 몸엔 사리 같은 건 없다
헐벗은 지구의 옷
초록색 실로
한 땀 한 땀 바느질 한다.
-『2010 한국카톨릭詩選』(카톨릭신문사, 2010)
-시집『휘파람을 부는 개』(시와사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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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 / 복효근
오체투지, 일보일배一步一拜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이다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시집『마늘촛불』(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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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 / 임연태
포탈라 궁을 향해 오체투지하며
길에서 한 생을 마친 사람
오늘은, 연둣빛 법의(法衣) 입고
봉선사 설법전 난간에서
그때 못 다한 절인 듯
저토록 지극하게
생멸(生滅)의 간격 재고 있다.
-시집『청동물고기』(황금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