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된 아이를 지우는 것(낙태수술)과 태어난 아이를 버리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죄입니까? 임신중절 수술을 허락하는 나라도 있고 허락하지 않고 불법으로 처벌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요즘 여성들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내 몸을 가지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하는 주장입니다. 오래도록 논쟁하여 왔지만 곳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다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신 기간에 제한을 두어 허용하는 것입니다. 임신 3개월 이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합니다. 그래야 위험 요소가 적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태아를 사람으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로 인하여 여전히 결정을 유보하기도 합니다.
‘소영’이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포대기에 싸가지고 와서 베이비박스가 있는 곳 앞에다 가만히 내려놓고 돌아섭니다. 소영이 떠난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이 나타나 아기를 박스 안으로 넣어서 사무실로 들어가 아기를 확인하고는 데리고 나옵니다. 아기 포대기 안에서 조그만 메모지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연락처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성아 꼭 데리러 올게’ 그 말이 ‘상현‘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동수‘에게는 뭔가 느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몰래 자기가 가집니다. 두 사람은 아기를 데리고 그곳을 떠납니다. 며칠 뒤 이 세 사람이 만납니다. 소영이와 상현이, 동수, 이 사람들 중 누가 더 큰 죄인입니까? 아기를 버린 자? 아기를 인신매매하려는 자? 그런 정보를 가지고 두 형사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성이는 어떻게 세상에 오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전혀 자기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엄마는 생각합니다. 살인자의 아들, 평생 이 표를 달고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성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데 왜 그 이름을 달고 살면서 불이익을 당해야 하지요? 설령 사랑이 없었을지라도 몸 안에서 열 달을 키웠습니다. 아비는 나 몰라라 도망쳐도 어미는 결코 그냥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3박4일 여행을 하며 함께 지내도 그 정을 잊지 못해 헤어지고도 오랜 시간 서로 연락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하물며 몸 안에 열 달을 데리고 있었으니 무 자르듯 떨어져 나갈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정신 차린 씨의 주인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일단 어미의 본능은 지극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려놓기는 하였지만 돌아서니 마음이 자꾸 끌립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왔겠지요. 어정쩡한 인신매매자들은 아기에게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합니다. 사람들의 모습이나 처신이 그다지 악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믿지는 못해도 지금 당장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팀이 되어 부모 찾기에 나섭니다. 연락을 주고받고 하면서 부모 후보자들을 만납니다. 자식을 가지고 싶어도 어떤 사정에 의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요즘이야 고의로 무자식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자식을 원하는 부부에게는 기막힌 형벌입니다. 그래서 입양이라도 하려는 것입니다.
입양기관을 통해서 정식으로 아이를 가지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암거래를 하려는 걸까요? 아마도 절차가 까다로워서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위 수속이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간단히 돈으로 해결해버리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아주 편할 것입니다. 인신매매자들도 바로 그런 점을 알고 이 사업(?)에 껴드는 것이라 봅니다. 아기만 있다면 자기 좋을 대로 넘기고 돈만 챙기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친모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직접 키우지는 못한다 해도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을 때는 만나볼 수도 있는 조건을 붙입니다. 데려가는 입장에서는 친부모를 모르고 자기네를 부모로 알고 자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후보자들을 만나려 여기저기 다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가족여행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묘한 풍경이지요. 그리고 여전히 두 형사들도 따라다닙니다. 분명한 인신매매자들입니다. 범죄자들이지요. 확실한 증거는 확보하였습니다. 이제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더구나 아기의 엄마가 그 아비를 살해한 범인입니다. 모두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기는? 다 잡아가버리면 아기는 어떻게 하지요? 그냥 고아원으로? 아니면 입양기관으로?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묘하게 진행되기도 합니다. 우성이는 어디로 가야 하지요? 세상에 온 것도 세상에 사는 것도 전혀 자기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점점 가족이 되는 듯합니다.
일차적인 가족은 물론 혈연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세상에 옵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고 다변화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특별한 조직체에서도 ‘가족’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합니다. 혈연은 아니더라도 끈끈한 관계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고 그 안에서의 의리 역시 대단합니다. 이 일본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가족을 만들어 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느리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전개됩니다. 그리고 가수인 ‘아이유’를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 ‘브로커’(Broker)를 보았습니다. 배우 ‘송강호’가 이 영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