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崔用德(1898~1969)】 "1945년에는 광복군 참장(參將)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장"
최용덕(崔用德, 1898~1969)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등 군의관인 최익환(崔益煥)이고, 어머니는 태안 이씨(李氏)다.
최용덕은 1908년 서울 미동의 봉명학교(鳳鳴學校)에 입학해 중학 과정까지 이수한 뒤 1912년에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후이웬중학[匯文中學]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총시중학[崇實中學]을 2년 만에 졸업했다. 1914년에 난위엔[南苑]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1916년 졸업한 뒤 중국 군벌 돤치루이[段祺瑞, 1865~1936]가 창설한 참전군 제2사단에서 근무했다. 이때부터 최용덕은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경험을 차근차근 쌓아 갔다.
베이징에서 지내는 동안 최용덕은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서왈보(徐曰甫, 1886~1928)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 그들이었다. 서왈보와 지청천, 그리고 최용덕은 닮은 점이 많았다. 세 사람은 일본제국주의에 빼앗긴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무장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는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배격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창한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따랐다. 1919년 6월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한흥교(韓興敎, 1885~1967)가 대한독립청년당(大韓獨立靑年黨)을 결성하자 서왈보는 군무총장으로, 최용덕은 당원으로 각각 이 단체에 참여했고, 최용덕은 자신의 집을 본부로 사용토록 내줬다. 지청천도 서왈보, 최용덕과 연대를 지속하며 반(反)이승만 노선을 견지했다. 1921년에 신채호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성토하자 서왈보와 최용덕은 함께 지지 서명을 했고, 김원봉(金元鳳, 1898~?)이 결성한 의열단(義烈團)에도 같이 가입했다. 하지만 서왈보와 최용덕은 무장투쟁론을 지향하는 의열단에 동조하면서도 김원봉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그리하여 의열단 내에 정치적 대립이 격화하자 서왈보, 최용덕은 의열단에 대항하는 신의단(信義團)과, 공산주의와 아나키스트 계열을 배제한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 등을 함께 조직하기도 했다.
서왈보, 지청천, 최용덕은 전력 강화를 위해 공군 창군이 절실하다는 데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서왈보는 공군 창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직접 비행술을 익혀 중국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또 최용덕이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하고 공군 창군의 의지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최용덕이 서왈보가 비행술을 배운 난위엔항공학교에도 들어갔다가 퇴교를 당하자 바오딩항공학교[保定航空學校]로 복교할 수 있게 해 준 이도 다름 아닌 서왈보였다. 서왈보는 1925년 장자커우[张家口]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해 공군 창군이라는 꿈을 펼쳐보지 못했으나 그 꿈은 사그라들지 않고 최용덕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지청천은 서왈보, 최용덕과 같이 비행술을 배운 조종사는 아니었으나,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 시절 최용덕을 핵심 참모로 기용하고 공군 창군 계획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최용덕은 바오딩항공학교를 마친 뒤 중국 군벌 소속 전투기 조종사로서 여러 차례 실전에 참여했다. 1926년에는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혁명군에 합류, 1등 비행사로서 북벌(北伐)에도 참여했다. 1928년 북벌이 끝난 뒤 최용덕은 난징[南京] 제4항공대 부(副)대장, 난창[南昌] 공군기지 교관으로 활동했고, 군 내에서 신임이 두터워 중국인 비행사의 처제(胡用國)와도 결혼했다. 최용덕에 대한 장제스의 신임은 대단했다. 1935년 당시 장제스는 자신 전용기의 조종사였던 손기종(孫基宗, 1911~1991)을 최용덕으로부터 추천받아 임명할 정도였다. 또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했을 때는 중국 공군 대령으로서 대일전선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0년에 김구(金九, 1876~1949),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지청천 등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해 9월 17일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했다. 최용덕은 그해 10월 비서처장으로 임명돼 총사령관 지청천을 보좌했다. 1942년에는 최연소 광복군 소장이자 총무처장으로 임명돼 중국군과 광복군을 잇는 역할을 했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끈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광복군에 들어오면서 내부에선 좌우 이념이 격하게 대립했다.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 계열이 미얀마의 영국군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우파를 대표하던 지청천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에, 지청천은 베이징에서 의열단 활동을 할 때부터 김원봉과 대립했던 최용덕을 지휘부의 고급 참모로 다시 기용했다. 최용덕은 광복군 내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김원봉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고 지청천이 광복군 내 주도권을 끝까지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한편, 최용덕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일찍부터 품어오던 공군 창설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1943년 8월 조직된 공군설계위원회 부주임으로 선임되어 중국뿐 아니라 미국과 합작해 공군을 창설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우선, 조종사와 정비사를 모으고, 중국과 미국에서 비행기를 빌린 뒤 수송 작전에 뛰어들고자 했다. 그런 다음 양국 항공학교에서 비행사를 양성한 뒤 동맹국 작전에 참여함으로써 정식 비행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비록 이 계획은 양국으로부터 비행기를 빌리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으나 비행사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소득이 없지 않았다. 광복군에서의 공군 창설은 무산됐지만 전투력 강화를 위해 공군이 필요하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는 광복 뒤에도 꺾이지 않았다. 그가 48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와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는 수모를 견디면서도 공군 창설에 매진했던 것도 그만큼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45년에는 광복군 참장(參將)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