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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죽어도 좋다2
「이사야서」풀이 5
미워하는 대적의 양심을 때리자
다정한 말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서 솟구치니까 자연히 그 말이 나왔지. 말이야 살아라 했거나 죽어라 했거나 그건 상관없어요. 내 정말 진정에서만 나오는 말이면 저 사람을 울리지 않을 리가 없어. 그건 내가 지내봐서 하는 말이야. 그러게 말 걱정 마세요. 내 속에 여기 참만 있나 없나 그것이 문제지, 말로 우리 대적을 정복하려고 하는 데가 잘못이야. 선언문 보고 물러갈 사람이면 거 19년 동안이나 정치해 먹었겠어요? 절대로 안 그래요. 거 맘이 돌보다 더 굳은 사람들이에요. 암초보다도 더한 사람들이야. 그걸 녹여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건성으로 도는 생각 가지고 그러는 건, 난 겁이 많은 사람이 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것 가지고 무너질 사람이 아닌데.
나도 어디선가 들은 소리가 있어, 보통 자리도 아니고, 누구한테서 들은 얘긴데, 아주 그인 두렵고 놀라서 와서 얘기해. 아주 높은 사람하고 얘길 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더니 “허, 우리가 군사정권이란 걸 아셔야 됩니다. 거저는 안 내놓고 나갑니다. 놓고 나간대도 크게 소리를 내고야 나갑니다. 소리 내도 크게 내고야 나갈 겁니다” 그랬다는 거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선언문이나 내가지고 되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겐 아마 안될 겁니다. 그보다도 힘 있는 게 있어야지. 그건 뭔고 하니 그 사람의 폐부를 찔러야지. 살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찔러야겠다는 데, 다른 게 아니라 이 노래대로, 이제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만, 요점은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내가 이제 이겨야겠는데 이기는 건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저 사람이 무서워서 굉장한 무장을 했는데, 무장은 왜 했는고 하니 양심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래. 사람의 맘을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내가 이기는 것은 그 사람 맘속에 있는 양심만 깨워놓으면 이긴다, 그 말이야. 이제 비폭력의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 아닙니다. 저쪽의 “그 무장한 것을 무슨 폭탄을 가지고 터칠까” 그런 시시한 생각 안합니다. 그런 건 되지도 않는 거고. 해도, 될 수 있대도 그건 죄악이야. 나도 사람 미워하고 사람 죽이고 뭘 “누구보다도 낫겠다”고 그래! 그래서 안하는 건데, 왠고 하니 내가 미워하 는 대적으로 보는 그 사람의 양심을 때리자 그 말이야. 양심을 때린다는 건 양심이 없어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양심을 일깨워놓자는 그 말이야. 그게 비결이야. 양심만 깨면 이 손에서 무기 저절로 떨어져. 내가 사람인데 사람 죽일 수야 없지.
그게 결코 공상이 아니에요. 공상이 아닌 것을 근대에 와서 잘 실현해 보인 이는 간디. 간디가 그걸 해보였어. 그리고 우리는 물론 예수님 보았어. 예수님은 당장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데, 돌아가서 영 없어지고 실패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살아있을 때 한 일보다 도리어 예수가 돌아가시니까 굉장한 일 나오지 않아요? 이제 거기,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지만 난 그걸 볼 때마다「마태복음」에 있는 말에 걸려버렸어. 옛날에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십자가에 예수가 달리니까, 오후 세시인데 천지가 캄캄해졌다고 하는 것하고, 그 다음 자던 성인들이 모두 일어났다고 하는 것, 정말 그럼 예레미야가 일어나고 이사야가 일어났겠냐? 이건 거짓말을 하는 건가? 여러분은 어떻게 푸세요? 그럴 때 어떻게 지나갔어? 자던 성인들이 모두 일어났다고 했는데, 거 무슨 소리로 해석을 합니까. 그럼 그적에 예수 못박히던 날, 그날, 그 전에 죽었던 뭐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하던 이들 모두 다 나와서 예루살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걸었습니까? 그랬다면 그놈의 예루살렘이 그대로 있었을 리가 없어요. 그 사람들 다 울고 회개했겠지. 한데 그런데도 그놈들이 예수를 갖다가 땅에 묻고 군사로 지키고 한 것은, 정말 그런 성인들이 나왔다면 아무리 악독한 놈들도 그냥은 못 있었겠는데, 그건 아닐 거요. 난 그렇게 봐.
그게 뭔고 하니, 이 믿는 사람들이 체험한 거야. 영감으로, 뭐 무슨 눈으로 봤거나간에 보았어. 저「히브리서」에 있지 않아요? “봐라, 너 뒤에 먼저 싸우고 갔던 모든 사람들이 말이야, 천군천사가 구름같이 두르고 있다”고 그러지 않아요? 그걸 노상 그저 과장으로 알아서는 여러분이 성경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난 첨엔 성경을 그렇게 알았어. 그리고 힌두교 경전을 읽으면, 여기 불교 아는 사람 더러 있을 터인데, 인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해. 석가가 턱 좌정을 하고 앉으니까 “무슨 천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부하 몇 천 몇 만을 데리고 와서 길이가 몇 천 척 되는 기를 받고, 그러고는 동쪽에 와서 좌정, 또 무슨 어느 천왕은 자기 군사 얼마를 데리고 와서 서쪽에 와서 좌정” 그런 말이 있어. 대체 인도사람들은 과장도 하기도 한다. 깃대가 높기를 뭐 우리가 말하면 몇 십 길이라든지 뭐 이런 거, 또 사람을 몇 천만 군중을 데리고 와서 여기 와서 좌정 저기 와 좌정, 이제 그렇게 한 다음에 그런 걸 말하고는 ‘설교를 하신다’ 그랬는데, 이게 뭐냐? 이게 다과장을 하느라 그랬느냐 그랬는데, 그런 게 아닐 거라는 걸 후년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어. 그건 뭔고 하니 이 속에, 맘속에 새 눈이 열리면 뻔히 이렇게 앉아 있으면서 새 천지가 보여, 새 천지가. 다른 사람은 그걸 꿈이라고 하든지 환상이라고 하든지 상관없어. 꿈이라고 하겠거든 꿈이라고 그러고 환상이라고 하겠거든 환상이라고 그러고. 하지만 체험한 ‘이 사람’에게는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이건 분명히 확실한 사실이야. “내가 봤다” 아주 그러는 거예요.
이제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야 그 뜻을 알지.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 잠자던 성인들이 일어났다.” 그건 예수님을 칭찬하려고 과장해서 그랬나?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이란 시나 쓰는 사람이냐? 나는 젊어선 그런 의혹이 많았던 거요. 근래에 오다가 정신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여기서도 보고 저기서도 보고 하는 동안에 다소 짐작이 가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주관만이 아니고 상상만이 아니고, 시적으로 형용하는 것만도 아니고, 그건 차원이 다른 세계가 이렇게 앉은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우리 맘이 어느 순간에 맑아지면 순간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잘하는 분들은 순간적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주 부동, 변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어.
『금강경』의 말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녹다라 삼막삼보리’ 에 영원히 주(住)할 수 있습니까?” 거기 머문다 그 말이야. 거기 머물러 내가 내 속에,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머물게 돼야 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 수가 있게 돼야 돼. 우리는 어느 순간은 예수님 품안에 있으면서 “아, 고맙습니다” 다 된 것같이 그래. 또 그다음 순간에 “쓸데없는 생각을 괜히 했군” 그러지 말고, 그런 거를 “아이고 내가 잘못해 그렇습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또 그렸으면, 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겠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오느냐 하면은,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럼 “이건 맹랑한데”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나고 그래요. 그런데 이거 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많이 많이, 내딴으로는 칠전팔전 쌈해보고 하는 거니까, 그래도 낙심을 말고 그대로 하면 혹 가다가 한 달 후에 두 달 후에, 다 잊어버리고는 자다가 갑자기 또 괜히 일어나 앉아 기도할까 그래. 또 그러는 동안에 오기도 하고, 또 안 오기도 하고 그러는 거요. 그걸 통해서 “그러면 옛날 사람들의 말이 헛말이 아니겠군.” 순간적으로 오는 것만 가지고 안되고, 그러나 순간적으로 오는 것이 있을 땐 또 “이것이 거짓이 아니군. 예수님이 거짓말 안하셨군,” 그럼 내가 “참 믿는 지경엘 가면 흔들리지 않는 지경엘 갈 수 있을 거다.” 이렇게 믿는 것 입니다.
그래 그 점을 바라고, 내가 죽기 전에 되겠는지 안되겠는진 몰라요. 안돼도 난 믿을 거요. 내가 죽은 후에라도 그 자리에 갈 줄을 믿을 거요. 내 지금으로는, 이거 뭐 칭찬을 듣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에게 좋은 인기를 얻자고 하는 말도 아닌 거요. 있는대로 고백을 하는 데 “그것만은 난 믿어!” 저 인도식의 말을 한다면, 이생만이 아니라 열두 번 고쳐 태어나도 백 번을 고쳐 태어나서라도 하나님이 계신 이상은 내 그것 완성이 되고야 말거다. 그래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불교 믿는 사람처럼 이야길 하나 하겠어요. 재미도 있고 하니까, 그런 말로 하는 건데 모르는 말이에요. 시간 공간이 없어요. 여기 이 현상계인 여기서 생각을 하니까 시간이고 공간이고 몇 년이고 몇 해고 그러지, 그자리엘 들어가면 시간 공간이 없어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게 그런 말이에요. 그것은 이렇게 지나보면 조금씩은 짐작을 할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증거했단 말이야. 뭐 그 사람들이라고 영 흔들림이 없는 줄 아세요? 하지만 몇 번 그래 보면 확신이 가요. 그런 고로 이것은 분명히 썩어질 건지 썩어지지 않을 건지를 알게 되니까, 우리 같으면 저런 소릴 했다가 안 들어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할지 모르지만 그건 벌써 그 지경에 있으니까 걱정을 말고. “이게 참입니까?” 하고 선생님에게 물었댔자, 확실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목사님한테 가서 물었댔자 “글쎄 내가 아나. 하나님의 뜻이겠지” 그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지금 말한 그 지경을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물을 거 없어. 누구에게 갈 것 없이 “분명히 이렇다” 여러분에게 알려줘.
그렇기 때문에 인자가 오려고 할 때는 “어느 날에 오나 어디 오나 찾을 것 없다”고 하거나, 어느 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땅에 오는 것도 아니고, “번개가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는 모양으로 오신다” 하는 말은, 오는 것, 예수님 오는 것을 못 만날까봐 그래.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어느 시간에 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곳으로 오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환하게, 눈을 감으려도 감을 수가 없고 피하려도 피할 수가 없을 만큼 온다. 그게 뭘까? 뭔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그런 지경을 말하는 거요.
그것은 내가 그 지경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지경이 있다고 하는 것만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내가 여러분한테 고백할 수가 있다 그 말이야. 먼저 있는 사람들이 증거해 주는 것이 힘이 된다는 건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러니 간디는 비록 한 사람이라 하지만, 내 말이 참으로 철저한 비폭력의 사랑의 정신을 품기만 하면 백만군의 악이 있더라도 이길 수 있다 했습니다. 그것을 간디라고 해서 과장한 거다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그건 간디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해서 그래. 그 양반이 거짓말하고 과장하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말이 아니야. 의사들이 몇이 달라붙어서 “우린 당신이 그렇게 육식을 안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만두겠소. 당신 목숨은 또 모르지만, 당신 아내까지도 그렇게 고집을 부려 가지고 죽인단 말이오?” 간디가 하는 말이 “그건 안돼. 하나님에게 약속한 담엔 죽어도 변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가 요행으로 살아났고, 죽었다면 큰일날 걸 살아났다 그러겠지만, 간디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 진리의 나라요 정신의 세계요 하는 것은 속으로 아주 속은 듯이, 속아버리는 줄 알고. 그럭하고는 믿겠으면 믿고 안 믿겠으면 안 믿고. 그러니까 도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없앤 담엔 밑천도 못 건진다! 그런데 사실 밑천이란 게 어디 있어요. 밑천 본래 없는 거야. 없는 걸, 밑천으로 알고 있는 게 그만 잘못이야. 잘 믿다간,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고는 거길 못 올라가는 거야. 그러기에 그런 지경에 도달했다는 사람들 다 들어보세요. 반드시 그런 데가 있어. 우리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건, 거짓말할 것 같지 않은데, 그 사람들이, 그래 여기에 있는 이 말이 이거다. 보통 사람의, 그저 잡지에 쓰고 돈이나 받아먹는 그런 시인들의 말로 생각하지 마시오. 그래 자기도 이게 너무 좋아서 하는 말이야.
주 여호와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이사야 50:4)
얼마나 좋아요. “주 여호와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평소에 그는 귀가 메었어. 귀가 열렸다는 게 귀가 멘 거예요. 멘다는 건 열린 거고. 귀가 정말 메어서 세상소리가 안 들리게 되면 그건 귀가 열린 사람이고, 그저 남의 시비 소리 무슨 무슨 소리 다 들리는 것은 정말 귀는 멘 거로 반댄데.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공무니를 빼지도 않는다.” 이게, 꽁무니 떼지 않는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에요. 도망, 웬만한 사람들은 큰소리 꽝꽝 치다가도 정말 이제 죽을 자리가 나오면 설설 빼는 거예요. 꽁무닐 떼는 거예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런 말 못했어. 아 보니까 뭐 “우리가 이제 다 나가 죽읍시다” 하는데 이제 어떡하지? 저거 다 나가 죽자는데 어떡하지? 난 그런 용기 없는데. 그런데 그런 말 했던 자들은 언제 도망갔는지 다 도망가고 없었어. 생각이 좀 생겼다면. 거 내가 차마 그렇게 도망갈 수는 없지 않아? 그래 나는 머뭇머뭇하고 마지막까지 있어보았는데.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이걸 보고 생각나는 이 있죠? 예수님, 여기서 배워가지고 하셨구만, 그럴 거야 아마. “남이 오른 뺨 때리면 왼쪽 뺨까지 대라.” 밑천 없이 된 것이 아니야. 여기서 있은 것이지. 본래가 그런 거예요.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내가 얼굴이 차돌 같다, 저 놈의 얼굴이 돌 같다 하면 큰 욕이에요. 그런데 뭣이 와도 낯빛이 안 변해. 정보부에 가자고 그러면 그래도 붉은 기가 슬쩍 올라오지. 하, 상당히 겪었노라고 해도, 적어도 잠깐 조금 이랬다가 가라앉는 거지. 이제는 비교적 괜찮아요. 괜찮지만, 또 그랬다고 내가 부끄러울 것도 없어. 거 아무려면 내가 그렇게 잘났겠어요? 사람이란 그렇게 어려워.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그걸 참고해 보면 그 담엔 그렇지 않게 돼요.
“아이구 내가 한 것이 아니지, 하나님이 참 그런 걸 주셨지” 하고 생각하게 돼요.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아, 무서운 말이야.
“하나님께서 나의 죄 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여기 8절 이후는「로마서」8장에 있는 바울의 얘기에도 있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나를 송사할 자가 있느냐.” 그게 다 여기서 나갔어.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보자.” 아주 건방진 것 같아요.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나를 도와주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그르다고 하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아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잔도 끌 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아주 겁쟁이라면 겁쟁이고, 맘이 약하다면 약한 여자 같은 사람인데, 여자보다도 더한 사람인데 “누가 나를 감히 그르다고 하느냐? 그들은 모두 낡은 옷처럼 좀이 쓸어 삭아 떨어지리라.”
힘있는 영혼을 위하여
53장까지 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으니 그만둡시다. 다른 건 다 몰라도 53장에 있는 것, 그게 없으면 성경이 다 없는데 뭐.
여기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하는 것처럼 보여요. 알 수가 없어요.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민족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몰라. 개인이라면 개인이지. 물론 여기 “내가 이스라엘을 뽑았다” 할 때는 민족 전체를 두고 하는 말로 보이지만, 이게 53장에 가서는 그 주석 놓은 사람도 이건 정말 어느 특정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러지 않아요?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는 이해하기가 쉬워요. 예수가 실제로 나타나서 보여주시기도 했고.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놀랄 것도 없어. 미안한 말이지만, 예수님이 어쩌면 여기 있는 이것을 몸으로 실현하셨을까. 그대로 예수의 일생을 보고 쓰기나 한 것처럼 그렇게 돼 있지 않아요? 이런 놀라운 문학이 도대체 어디 있나?
그래 일제시대에도 이런 걸 보면서 위로를 얻고 또 위로를 얻고 그랬지만, 마찬가지야. 어느 의미로는 일제시대보다도 더 어려운 시대야. 그저 기회 있는 대로 이런 걸 자꾸 읽어야 돼. 그럭하지 않고는 우리 영혼이 주려. 영혼이 살아 있지만 주리게 되면 힘을 못써요. 맹자가 그랬어. 누가 맹자보고 “선생님, 이제 그만하면 무슨 높은 지위라도 주면 맘이 좀 움직이겠습니까, 안 움직이겠습니까?” 그랬더니, “아이구 나도 이제 나이 마흔이다. 맘 안 움직인다.” “그래요? 그렇게 훌륭하십니까?” 그러니까 “야 이 사람아, 나도 내 기르는 게 있단 말이야.” “뭘 기릅니까?”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르지”(我善養吾浩然之氣) 호연지기란 우리 말로 하면 성령(聖靈)이에요. 하나님의 영을 내 속에 기르지. “그 호연지기라는 게 어떤 겁니까?” “지극히 크고 강해서 이걸 다 펼치면 우주 안에 가득 들어차고, 줄여서 거둬 넣으면 내 요 맘속에 다 들어가는 것, 이런 거다.” “그것 어떻게 자라나?” “의기(義氣)를 먹고 자란다. 그것 없이는 주려버린다.” “그런 의가 무엇에서 나나?” “기운을 길러서 된다.” “영혼은 뭘로?” “내, 성령 먹고 살아.” “성령은 어디서 나왔어요” 하니까 그건 또 반대로 말이야, 영혼에서 나온 거지. 영이 있으니까 나왔지. 서로 돌아가는 노릇이야. 그래 여가가 있으면 그 설명 다시 했으면 좋겠지만, 맹자의 아주 좋은 말이야. “지일즉기동(志一則氣動)하고 기일즉지동(氣一則志動)이라.” 뜻이 통일이 돼서 지극한 자리엘 가면, 그게 이 정신인데, 내 믿는 맘이 참 철저해지면 자연히 내 정신이 움직여지는 거고, 반대로 내가 정신통일을 열심히 하면, 맘 쏟아 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믿음이 생긴다. 우리말로 하면 그래요.
하나만 알면 못써요. 내가 내 몸가짐을 똑바로 하면 몸이 옳게 된다. 서로 되는 거야. 양쪽이 다 있어야 돼. 그래 모든 이치가 다 그런 줄 알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 어느 것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이것도 있지만 저것도 있다. 이렇게 서로 상호작용하는 거예요. 서로 뗄 수 없는 것을 분석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인 것을 분명히 아셔야 돼.
“그러니깐 내 속에 어떻게 하면 이 산 정신이 충만할 수 있습니까?” “그건 네가 믿지 않고는 안되지.” “그럼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그건 네가 정신력을 충실시키지 않고는 안되지.” 그것이 서로, “그럼 그건 순환론입니까?” “난 그 이상 말 못한다. 네 맘에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네가 알아들을 것이다. 알아듣고 싶은 맘이 없어 그렇지 알아듣고 싶은 맘이 있으면 그 말을 알아들을 거다.” 믿음은 뭘로 됩니까? 정신력이지. 정신력은 뭘로 됩니까? 그건 믿음으로 되지. 거 순환론인 것 같지만 그걸 알아들어야 왜. 그래야 귀가 열린 사람이야.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거 알기 쉽게 깨쳐 말해줍시오.” “너 같은 건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그러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약(藥)이나 쓰면 깨치겠는지, 그 사람의 맘이 트이라고 하는 소리예요. “너 같은 건 못 들어간다” 하고. 어떤 사람이 어거스틴인가 보고, “천지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뭘하고 계셨습니까?” 그러니까 “너 같은 놈 잡아넣으려고 지옥 만들고 있었다” 그랬다는 거야. 그 소리를 신학 토론하면 우스운 거야. 거 무슨 소린고 하니 “저놈 맘이 한가해서, 막혀서 그러는데” 그것 맘이 열리게 되면 ‘탁’ 이렇게 돼야 양심이 이제 살아나게 돼. 그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양심을 깨우는 일이야. 우리나라 대통령이 신앙이 생기면 굉장히 좋은 일 할 거야. 참 그럴 거야. 그 성격! 그런데 그런 좋은 재목을 두고 한번 못써먹는단 말이냐? 그건 내 믿음이 모자라서 못 써! 안돼! 그러니 부끄럽단 말이야.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할 말이 없을는지 몰라. 몰라, 하나님 어떻게라도 해주실는지……. 적어도 나는 그 책임질 생각해야 돼. 너 왜 그때 낫살도 더 먹었지, 경험한 것도 많지, 그런데 너 왜 못했느냐? 그럼 뭐라고 대답을 하지 ?
이제 그런 것을 뭐 꼭 그렇다고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참고로 들어보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먼데 있는 게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 속에 변화가 못되는 것 이게 문제지, 영으로 완전히 때를 벗고 새로 나기만 하면 모든 의문이 일시에 활짝 열려서 걱정이 없어요.
난 도대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근심 걱정 많았어. 아무 준비도 못하고, 그냥 갔다가 어떡하지? 나 정말이야. 실지로그랬어. 그랬는데 그래도 안을 수 없어서 “가지” 그러고 왔는데, 오니까 이 말대로 나와서 하는 겁니다.
요만큼한 생각이라도 내가 지금 말하고라도 “죽어도 좋다! 이제 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죽어도 좋다.” 기분이 그런데 말이야. 그래요. 정말 그래요. 그거 물론 더 큰게 있으면 더욱 좋지만, 크고 작고가 아니라 문제는 맘이 살았나 죽었나 거기 있어요. 그럼 내 맘이 살아만 나면 미운 사람 없어. 미운 사람 없는데 두려운 게 있겠어요? 또 두려운 게 없는데 미운 게 있겠어요?
그 자리가, 예수의 그 말씀 거짓말 아니라 그 말이야.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 아니시지”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데, 예수님에 대한 모욕도 그런 모욕이 어디 있어? 나는 자꾸 말할 때마다 그럽니다마는 그 사람이 불쌍해서 못 견디겠어. 전 생명을 걸고, 역사상으로 내려오던 약속 이게 실현이 안되면 헛말이다, 하나님의 말이 헛말이 된다, 그 순간에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모든 예언자 다 생각 했을 거예요. 옛날 모세 이래의 모든 것이 이 순간 다 내 맘에 몰킨 것 아니냐? 이제 그 책임을 졌으니, 그래서 이 세상 죄를 이렇게 지기 위해 왔다면, 그것을 그저 시적(詩的)으로 하신 말씀인 줄 아세요? 예수님 같은 이는 그거 하나하나 허투로 했을 리 없으신 분이오. 그러니까 하나 하나 이게 무슨 뜻이냐, 씹고 또 씹고 해서 자기 마음에 “그렇다! 이게 그거다!” 어느 학자에게 물어볼 것 없이, 그거다 하셨을 겁니다. 마치 내가 이 순간에 말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래서 말하리만큼 되는 자리, 그거만큼만은 아니지만 하여간 이런 정도로 이렇게 되는 데가 아니고는 안돼! 어디 가서 물을게 없어요. 왜? 살았냐 죽었냐는 사실 자체가 증거하는 거지 말이 소용없습니다. (1979.8.2-5)
친우회보 1981 여름호
저작집30; 21- 131
전집20; 11-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