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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20
12월30일[성탄 팔일 축제 제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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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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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T9eyoMaAGIU
[서울대교구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행당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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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 부대!>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라는 여예언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나 역시 시메온 못지않은 노인으로서, 평생토록 성령의 이끄심 안에 거룩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평균 연령이 40전후였는데 놀랍게도 한나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목격할 당시 나이가 여든 넷이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여윈 한나는 장장 60년 세월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한나의 충실한 신앙생활에 하느님께서 크게 응답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두눈으로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보게 되는 축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한나같은 자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의 보물이요 보루이십니다. 가장 확실한 교회의 우군이요 기도부대입니다. 눈만 뜨면 성당으로 나오십니다. 성당이 삶의 중심입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이 시대 또 다른 한나예언자이신 그분들을 크게 축복하시고 풍성한 은총을 선물로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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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cT4Q431T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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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녀가 삶의 방향을 찾게 하려면 먼저 자녀를 주님께 봉헌하라>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어제 시메온 예언자에 이어 오늘은 한나 예언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말합니다. 시메온과 마찬가지로 한나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속량”을 위해 오신 분임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속량’은 피 흘림을 통한 죄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언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나 축구선수의 자녀로 태어나면 그 방면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남들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런 분야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가 없기에 또한 훌륭한 성과를 내게 됩니다.
올해 차범근 감독의 아들 차두리 씨도 감독의 길로 들어서 자신의 팀이 U18 무패 우승하여 최우수지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상은 이을용 코치의 아들 이태석이었습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갈 길을 알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늦게서야 찾으려고 했던 사람과의 차이가 극명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부터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그 길을 아기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서 이 아이를 어떤 길로 이끄시려고 하는지 그 길을 빨리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속 ‘사하라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비셀 마을 원주민들은 켄 리먼(Ken Lehman)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한 번도 사막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막을 벗어나려고 길을 떠나도 걷다 보면 결국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게 마을 원주민들이 말한 이유였습니다.
1926년 이 마을을 찾은 영국인 켄 리먼은 이 사실을 알고 엑터라는 마을 청년에게 사막을 벗어날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북극성을 따라 걷는 것이었습니다.
리먼의 가르침대로 엑터는 낮에는 쉬고 밤에는 북극성을 보고 걸으며 마을 원주민 중에서는 처음으로 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사막의 개척자가 되어 마을 한가운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은 방향을 찾음으로써 시작된다.’
방향만 찾으면 천천히 걸어도 방향 모르고 달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덜 고생하면서도 훨씬 멀리 갑니다. 그러니 일찍 그 방향을 찾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청년은 하고 싶은 일이 하도 많아서 90개나 적습니다. 모두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중생들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이가 들어도 평생 해 놓은 것이 없어 인생을 허비했다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밑에 물이 있다는 확신을 줄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다행히 늦게나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만나 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방향으로 나아온 것에 지금까지 후회가 없습니다. 힘이 들어도 좋은 열매가 계속 맺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오늘 예수님의 미래를 말해 준 한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평생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50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여든네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나이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는 그 긴 세월을 혼자 성전에서 기도와 절제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한 삶이 아니라 한 길로 평생을 나아온 삶입니다. 그 정도면 하느님의 자신에 대한 뜻을 평생 따라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누군가의 삶을 예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발칙한 성공법칙』에 멘토의 조건 네 가지가 나옵니다.
1. 해당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낸 전문가일 것.
2. 타인의 성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 것(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됨).
3. 평생 자신과 싸움을 하며 성장하는 사람일 것.
4. 나를 편안하게 두지 않고 한 발 내딛게 만드는 사람일 것.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이 자신과 싸움을 통해 자신을 이긴 사람이어야 하고 이웃의 발전에 관심이 있어 그 사람도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아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도 저처럼 책을 통해서도, 혹은 기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느님께서 분명 어떤 좋은 일을 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분명 우리 부모 주위에, 혹은 아이들 주위에 놓아주었을 것입니다.이것을 빨리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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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중하는 것이 커진다>
한번은 두 자매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다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들어갔습니다. 손님이 없어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자매님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조금은 고급스러운 가게였습니다. 퇴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지 스마트폰을 보던 팔에 문신한 남자가 제 머리를 깎으려 조금은 투덜거리듯 다가왔습니다.
저는 머리를 감을 때 샴푸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샴푸가 있다고 해서 한 달 정도 샴푸를 썼습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다시 노푸(샴푸를 쓰지 않고 머리를 감는다는 뜻)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며칠 동안은 기름이 많이 나와 머리가 기름졌습니다. 대뜸 그 청년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침에 머리 안 감으셨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손에 머리 기름이 묻는 것이 기분 나쁜지 짜증나는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만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제가 보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면 머리를 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처럼 그냥 그 청년에게 머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매님들이 미리 계산을 다 해 놓았습니다. 자매님들이 저를 대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샴푸를 하고 난 후엔 그 청년의 태도가 눈에 뛰게 바뀌었습니다.
깊은 절을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또 오시라고 인사하고, 날씨도 추운데 나와서 저희가 걸어가는 것을 뒤에서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지방 총선을 앞두고 시장님이 저희 성당 신자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나왔습니다. 제가 사복을 입고 청년처럼 생겨서 그런지 시장님은 뻣뻣한 자세로 저의 폴더 인사를 받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다 신자들에게 혹시 신부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더니 다시 제 앞으로 와서 깊은 절로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뻣뻣하게 인사를 되돌려주었습니다. 받은 대로 되갚아줘야 하는 못된 청년이었던 것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최고로 느껴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커지면 사람은 개미처럼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밟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살게 되는 진짜 이유는 그 사람이 정말로 큰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자신에게만 너무 집중하며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집중하면 커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봤더니 79%가 천국에 가실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이 천국에 갈 확률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87%가 천국에 갈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다들 마더 데레사보다 잘 산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가정의 평범한 아이였고 성전에서 남들처럼 할례를 받기 위해 봉헌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커지셔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작게 만드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남편과 7년을 살다가 사별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도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식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자신의 낮은 처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밖에 의탁할 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지만 오직 자신을 작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만 구원자로 보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정결함과 단식, 그리고 기도로 작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자신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을 바라며 살아야겠습니다.
사람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생각만 하는 사람과 하느님과 이웃의 행복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은 자신이 너무 커져서 안하무인이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작아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처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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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5년 전에 미국에 온 이유는 주교님께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도록 권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라고 순명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왔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또 다른 이유는 본당은 맡지 않겠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기까지 20년 가까이 있어야 하는 현실이 있고, 저라도 양보하자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면 저를 포함해서 ‘원로사목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보좌 신부님들이 본당 사제가 되는 기간도 짧아 질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ME 대표 신부’를 맡았던 이유는 제가 한국에서 ME 주말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ME 대표 신부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 팬데믹 중에도 피정, 소풍, 주말 체험, 총회에 함께 했습니다. 부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감사했고, 유익했습니다. 제가 ME 대표 신부를 마치고 꾸르실료 지도 신부가 된 이유는 전임 지도 신부가 권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꾸르실료 봉사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신심단체들이 있습니다. ‘성령 기도회, 레지오, ME, 꾸르실료’와 같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사제는 가능하면 이런 신심단체가 성장 할 수 있도록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생, 노, 병, 사를 넘어서는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달마 조사는 527년 남인도에서 당나라 낙양에 도착하여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하였습니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면 달마조사는 동쪽으로 가신 것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서쪽에서 오신 것입니다.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행보로 인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조주 스님의 문답이 있습니다. 조주 스님은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달마 조사는 동쪽으로 온 까닭에 대해 답했습니다. “내가 본래 이 나라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미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어서 결과가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답했습니다.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사제가 된 이유를 모르면 방황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왔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친절하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성탄을 지내면서 카드를 보내는 것도, 구유경배를 하는 것도, 선물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탄을 지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인들이 삶을 살아가야 할 방향과 목적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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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36-40: 한나라는 과부의 기쁨
시메온의 뒤를 이어 여 예언자 한나가 등장하고 있다. 먼저 시메온이 아기를 뵙고 품에 안아 본 다음에 한나가 나타났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38절) 한다. 신비적인 의미로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의미한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의탁한 사람이었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여든네 살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한나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한세상을 살아가면서 귀엽고 믿을 수 있는 자녀들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한 생애를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현세의 큰 축복이겠는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부부가 그렇지는 못하다. 또 부부 중에 어느 한 편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한나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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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한나라는 예언자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는 늘 성전에 머무르며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과부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만 살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고 하니, 어림짐작하여 60여 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철저히 자기 봉헌 생활로 평생을 지낼 수 있었을까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가 보낸 긴 세월이 메시아를 만나려는 준비의 시간이었고, 결국 메시아를 만나 그동안의 고된 여정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종말의 때에 예수님과 이룰 결정적인 만남을 준비하는 여정에 있습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나’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주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는데(9,23 참조), 솔직히 잘 버리지도 못하겠고, 버리고 싶은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과 우리 입에 맞는 것들을 손에 한가득 쥐고서는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욕심부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렇게 손에 꼭 쥐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 방해가 된다고 말합니다.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들인가 봅니다. 손의 힘을 풀고 세상에 초연한 자세로 있어 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랜 세월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 섬기는 일에 충실하였던 한나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히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히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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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보물찾기>
어릴 때 보물섬이야기는 꽤나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소풍가서 보물찾기에 열을 올리고 여기저기 뛰어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 한나라는 예언자는 나이가 들어 84세 보물 중에 보물인 주님을 뵈옵고 시메온과 같이 이 아이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찾던 것을 찾으면 기뻐고 행복해 집니다. 나도 80이 넘어서 귀한 보물을 발견하였으며 사람이 보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엘리사벳 집 성모영보 수녀원의 노인수녀들이 모여 수도생활을 하는 여덟 분의 수녀와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저분들이 우리 교회의 보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나이 같이 80이 넘은 수녀들, 얼마 전 까지 자기가 맡은 일이 있어 활발하게 일 하시였으나 지금은 힘이 없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저 수녀들이 한 일 돌보던 사람들 이제 주님의 길만 찾아 완성에 이른 수녀님들을 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은 50년 이상 수도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내공에 쌓으며 살아오셨기에 얼굴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살고 있고 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보물찾기 행사에 발견되는 보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세상에 귀한 사람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찾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다른 이들의 약점만 찾고 장점을 보지 않으려하여 손에 잡인 것이 보물인줄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 길을 밤중에 걷다가 웬 장애물이 발에 걸려 보니 돌이 가득 찬 보따리를 보고 다른 사람이 걸려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돌을 집어 바다에 던지다가 해가 뜨면서 마지막 잡은 돌을 빛에 비추어 보니 광채가 나는 다이야몬드 여서 마지막 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늦게 깨달아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몸이 늙고 병들어도 주님을 만나 기쁘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찾아 해매던 보물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아 각자가 보물이 되어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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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기나긴 기다림의 성취>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진 마리아의 정결예식과 아기 예수의 봉헌예식을 통한 예수의 공현(公顯)을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예언자 시메온에 이어 예언녀 한나가 등장한다.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는 기법은 루카복음의 특징에 속한다.특히 예수를 따라 다니며 도왔던 여자들(8,1-3), 겨자씨의 비유에 이어 누룩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3,18-21),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 잃은 은전의 비유에 등장하는 여자(15,3-10), 마티아를 비롯한 12사도와 함께 있었던 마리아와 여인들(사도 1,13-14) 등의 대목이 그렇다.
예언녀 한나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그녀의 나이가 84살인지 아니면 과부생활이 84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서원문을 따른다면 한나는 과부로 84년을 살았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는 구약에서 105살을 살았던 유딧처럼 대략 104-105살로 추정된다.(유딧 16,23 참조)
과부로서의 한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따라서 안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한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그녀가 시메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메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카는 한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메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었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카 2,29-32)
예언녀 한나도 시메온처럼 평안히 눈감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 시메온의 말씀과 메시아로서의 예수 아기에 관한 이야기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해진다.
이 말은 예수의 탄생사건이 그 자체로서 세상의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현존에 대한 의식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며, 동시에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공동체는 가난하고 경건한 예언녀 한나처럼 성령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이에 합당한 자신을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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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태정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영원한 세상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 아래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 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더 많은 물을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져 버렸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1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1요한 2, 15.)
위의 예화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떠주면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던 노인이 동전이 쌓여 가면서 더 많은 동전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고 이 끝 없는 욕심이 결국노인을 눈멀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재물에 눈이 멀게 되면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실 수 없으면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세상을 극복하는 사람은 얼마만큼 우리 자신의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우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세상은 지나갑니다.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 17.) 영원한 세상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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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2,38)
어제 복음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치러진 마리아의 정결 예식과 아기 예수님 봉헌예식의 자리에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던 ”(2,37) 예언자 한나도 있었습니다. ‘우아함’이라는 뜻인 한나는 구약 성경에서는 사울과 다윗을 임금으로 내세워 기름을 부은 사무엘의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본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로써 살았으며 주님께서는 한나의 애틋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십니다.
이처럼 한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은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 살았던 가난한 이들의 표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녀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자식도 없이 홀로 그 연세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그녀는 어떤 누구를 믿고 의지할 사람도 없었으며 가난한 삶을 살아왔지만,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2,38) 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그녀는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분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과부로서의 한나의 삶은 경제적인 면에서 궁핍하고 곤궁困窮했겠지만, 그녀는 모든 그리스도교 홀로 사는 여성(=어떤 이유에서든지 상관없이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분으로써 비록 삶이 거칠고 힘겹다고 해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우아함’을 잃지 않고 진정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인 어떤 삶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자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며 지난 세월을 살아왔기에 그녀는 바로 그 거룩한 자리와 시간에 구세주를 뵈옵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야기를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이 아기에 대해서”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2,29~30)라는 찬미는 단지 시메온 예언자만이 아니라 한나에게도 적용된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바로 이 거룩한 날을, 축복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힘겨운 여건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녀 또한 이제 시메온처럼 평안히 눈감게 되었을 것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서 원목 신부로 살면서 체험한 일 중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저에게 해주었던 많은 표현 가운데서 자주 들은 표현은 ‘신부님.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고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것을 누려봤고 겪으셨겠지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삶의 의미이며 행복의 주체인 자녀들이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더 이상 어떤 아쉬움이 없을 때 이렇게 표현하시더군요. 그런데 떠나야 하실 어르신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힘듦이나 어려움이 남아 있을 때, 흔히 ‘내가 어떻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어요!’라고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특히 보고 싶은 자녀가 보이지 않을 때도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느낌으로 강하게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족들에게 물어보면 정말이지 어르신이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꼭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외국에 그 자녀가 사는 경우, 늦어지는 경우엔 부득이 오고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로라도 그 자녀의 목소리를 들려드리면 정말이지 편안히 눈을 감고 임종하시는 분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온 그날을 맞았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구원을 목격하고서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으니 무슨 여한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한나는 정말 주님 자비의 섭리 안에서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눈을 감으셨으리라 믿습니다.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보낸 저 많은 날이 다 하느님의 자비였고 은총이었음에 감사하면서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으니,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여인이었을지 모릅니다. 한나는 오늘 독서의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2,17)라는 표현처럼 그리스도교 역사에 성경이 있는 곳에 영원히 그녀의 성덕은 남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한나처럼 하느님 안에서 저 임종의 순간에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는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 그녀처럼 삶의 모든 날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다짐합시다. 하느님의 축복 속에 평화로이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다면 그날이 바로 하늘에 곧장 태어나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저희 또한 한나처럼 당신을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영혼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저희도 삶의 마지막 순간 당신으로부터 사랑받았으며 제가 더불어 살아왔던 모든 이를 제가 사랑한 것 보다 그들이 저를 더 많이 사랑했음에 감사하면서 평화로이 눈을 감고 떠나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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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 젊은 사람들이 버릇없고 무례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세대 차이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 많으면 예의가 넘치고 무례하지 않을까요?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어느 국회의원이 상대 당 국회의원을 향해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더 예의 없고 무례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국회의원이 젊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손자 둘 셋은 있을 법한 나이였습니다.
버릇없음과 무례함은 나이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보다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떤 자극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대는 무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의 없다며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며 외면할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이 다를 뿐이라면서 받아들일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틀렸다면서 예의 없고 무례하다고 말하기보다, 그런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요? 제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상황만을 보고 하느님은 제대로 보지 않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한 달이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서른이 되어서야 공생활을 하셨지요. 자그마치 하느님의 일을 위해 30년 동안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 예언자는 어떠한가요? 그녀의 삶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보통 15살쯤에 결혼했던 것을 기억하면, 60년 이상을 성전에서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 삶이 과연 쉬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기 예수님을 보고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리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던 한나 예언자를 떠올리면서, 우리 역시 섣부른 판단으로 하느님 바라보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 삶 전체에 퍼져있는 하느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큰 기쁨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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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벗들에게>
루카 2,36-40 (한나의 예언, 예수님의 유년 시절)
그때에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나를 벗들에게>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2,38)
나 홀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니
나의 믿음을 벗들에게
나 홀로 기쁨은
기쁨이 아니니
나의 기쁨을 벗들에게
나 홀로 희망은
희망이 아니니
나의 희망을 벗들에게
나 홀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니
나의 사랑을 벗들에게
나 홀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니
나의 정의를 벗들에게
나 홀로 삶은
삶이 아니니
나의 삶을 벗들에게
나 홀로 나는
내가 아니니
나를 벗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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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에 희망을 두어 행복하라>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고 걸려 넘어지며 은혜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오늘을 감사하고 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출신 '한나'라는 예언자를 생각합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벌써 이름에서부터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프누엘은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뜻입니다. 아세르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이겠습니까? 그는 충만한 은총 안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름만으로 행복을 주진 않습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나는 겉으로만 보면, 남편을 일찍 잃은 불행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 2,37) 불행한 처지에 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처지를 하느님을 섬기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있다면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찍 과부가 된 것은 불행일 수 있지만 온전히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음은 행복입니다. 한나가 행복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나의 행복은 그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천상 것을 희망하고 추구함으로써 누리는 행복입니다. 환경이나 처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나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왔다가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았고, 시메온이 예수님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루카 2,33-35) 그리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늘 성전을 찾아 기도한 덕택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둔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지금은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을 오로지 천상 것에 둘 수 있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한나' 예언자가 하느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였듯이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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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날로 자유로워지고 경쾌(輕快)해지는 선물인생을 삽시다>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을 통해-
“새는
가진 것이 없어
저리도 가볍고 기쁘게
하늘을 날 수 있겠지”-1998.3.17.
요즘 수도원에는 겨울철인데도 새들이 많습니다.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졌는지 그 많은 새들중 죽은 시체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 작은 새들이 무수히 하늘을 떼지어 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가볍게, 기쁘게, 비상하는 영적 삶을 상상하게 됩니다. 날로 무겁고 어둬지는 짐같은 삶이 아니라 날로 가볍고 밝아지는 선물같은 삶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몸도 마음도 무겁고 어둬지는 현실이 더욱 분투의 노력과 훈련을 다하게 합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자주 자문하는 질문이자 피정지도시 주제로 택했던 강의 제목인데, 참으로 날로 기쁨과 감사중에 가벼운 선물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어제 복음의 주인공이 시메온이었다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입니다. 한나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여 눈에 선히 그려집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며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복음의 한나처럼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치열한 선물 인생을 사시는 초대 안동교구장이었던 두봉 레나도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게시판에 붙은 주교님의 친필 성탄 답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많은 성탄 카드중 친필의 축하 서신은 이기헌 주교님과 두봉 주교님뿐이었습니다.
“축 성탄
보내신 카드를 잘 받았습니다. 사진! 예수님 성탄 계기로 삼아 우리는 예수님 닮은 삶을 삽시다. 2023.12.20. 두봉 주교”
1929년 생이니 저보다 20년 연상의 만 94세의 노년에도 ‘가볍고 기쁘게 감사하며’,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선물인생을 사시는 모습이 참 경이(驚異)롭고 이채(異彩)롭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새삼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항구한지 성찰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한나와 더불어 생각나는 90세에 선종하신 제 어머니 신마리아입니다.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기전 낙엽처럼 바짝 마른 참 가벼운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죽음을 직감하셨던지 제가 선물한 묵주, 시계를 내놓으셨고, 어느 수녀님이 선물한 묵주반지만 끼고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서울로 유학하여 공부할 때도, 군입대후 군대시절에도 가장 많이 생각났던 어머니이며, 작금의 나이 들어 가는 노년 인생중에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끊임없는 회오(悔悟)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써놨던 “어머니를 그리며” 후반부 내용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 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고 종교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1940-50년대 세상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없이도 과부아닌 과부처럼 흔들림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어머니.
내 수도원 들어올 때도 극구 만류하셨다. ‘왜 이제 살 만하게 됐는데 또 고생길에 접어드느냐’고 그러다가 하루 지나 내 방에 들어오셔서 ‘예 수철아, 네가 좋아하면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은연중 막내인 나와 살고 싶어 하셨다.
지금은 극도로 쇠약해 지셔서 온 종일 방에 누워계신 어머니. 정신은 여전히 맑으시고 마음도 고요하시다. 그냥 계시기만 해도 좋은 어머니. ‘신마리아’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나도 이제 나이들어 철이 들었나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전 얼마전에 썼던 고백시이며 제 어머니는 18년전 2005년 6월에 선종하셨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시다 지닌 것 없이 가볍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역시 오늘 복음의 한나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식과 기도로 깨어 지내던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예언자 한나도 시메온처럼 마음의 눈이 열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이에 대해 알립니다.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 예식을 마치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예수님 부모 모습도 참 홀가분해 보입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참 초탈(超脫)하고 경쾌(輕快)해 보입니다.
아, 나이들어갈수록 무겁고 어둬지는 삶이 아니라, 푸른 창공을 자유로이 나는 새처럼 몸도 마음도 삶도 밝고 경쾌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한나도 예수님 부모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하니 그 부모에 그 아들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자녀 교육에 집착없는 지혜로운 사랑, 자유롭게하는 사랑보다 더 좋은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날로 따름과 닮음의 여정이 깊어갈수록 이탈과 초탈의 경쾌한, 자유로운 빛속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이런 영혼들은 제1독서 요한 사도의 말씀에 더욱 공감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이탈과 초탈의 삶을 살았던 한나가 우리에게 주는 말씀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모두가 다 지나갑니다.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우리 선물인생을 참으로 자유롭고 경쾌하게 하늘의 새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깨우침을 주는 주님의 참 귀한 가르침입니다. 소유하되 소유되지 않는, 소유가 아닌 존재의 자유로운 본질적 삶을 살라는 말씀이며,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주님을 따름과 닮음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을 닮아 밝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참으로 초탈과 이탈의 자유롭고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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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안주하는 세상 사랑과 구원하는 세상 사랑>
오늘 요한 서간은 세상과 그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우리는 알고 특히 주님 성탄 축일에 그 의미를 특별히 기념하는데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 세상 사랑은 뭐가 다르기에 사랑치 말라고 하는 걸까요?
오늘 요한 서간은 이어서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이 말씀들에 비춰 볼 때 세상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의 세상 사랑과 우리의 세상사랑. 영적인 세상 사랑과 육적인 세상사랑.
그리고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안주하는 세상 사랑이고, 주님은 구원하는 세상 사랑입니다.
우리의 세상사랑은 영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에 안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불행해지겠지요?
그런데도 우리가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고 안주하려고 하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주님께서 설마 우리처럼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안주하게 하는 것을 육의 욕망이라고 서간은 또한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악이 아니고 주님처럼 세상을 사랑하면 죄나 악이 아니지만 육의 욕망에서 비롯된 세상 사랑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지향하지 않기에 악이고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사랑하고, 그리고 지나가는 이 세상을 우리도 안주하지 않고 지나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한다면 우리도 구원하는 세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저의 동기 수사님의 장례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신 거지요.
그래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고별식을 주례하며,
돌아가셨다는 말을 새삼 의미 새김을 하였습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묵상하니 고향에 돌아가듯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저도 같은 곳에서 왔으니 제가 돌아가야 할 곳도 수사님이 가는 곳이고, 수사님이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선명하게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에 저는 세상을 떠남과 하느님께 돌아감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께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죽지 말고 돌아갑시다.
그리고 올해 마지막 날 교회 묘지에 가면 쓰여있는 이 경구를 기억합시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이것을 이렇게 바꿔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네가(Hodie Tibi).
내일은 내가(Cras Mi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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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한나는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2,38)
<성탄과 한나의 예언!>
오늘 복음(루카2,36-40)은 '한나의 예언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한나의 모습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2,36-38)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지내고, 여든네 살이 되도록 오랜 기간을 과부로 지낸 한나는 인간적으로 볼 때 불쌍한 모습이지만, 한나에게는 그 기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기간이었고, 그래서 시메온 예언자와 함께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뵈옵는 영광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구원)을 위해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어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성당에서 있었던 원유성 베드로 수사님의 장례미사(09시)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떠나왔던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함께 지냈던 형제들과 만남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75세의 나이로 떠나가신 수사님의 죽음 앞에서 그동안 수사님으로부터 받았던 따뜻한 사랑도 떠올려 보았습니다. 수사님은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따뜻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많은 형제자매들이 수사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이제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년을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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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n16n_1sR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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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루카 2, 38)
처음도 마지막도
희망입니다.
희망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희망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나누어야할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의 속량이
희망입니다.
희망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에
가장 귀중한 희망이
여기에 계시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충만한 희망은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희망으로 돌아가는
희망의 매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속량과 구원은
희망으로 향기롭고
희망으로 더욱
뜨거워집니다.
예수님 진실된
희망을 원합니다.
주님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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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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