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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복위 사건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1.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일 경자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4면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左副承旨) 성삼문(成三問)이 사람을 시켜서 신을 보자고 청하기에 신이 그 집에 갔더니, 성삼문이 한담을 하다가 말하기를, ‘근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나고, 사옹방(司饔房)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니, 장차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과연 앞으로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일까?’ 하였습니다. 성삼문이 또 말하기를, ‘근일에 상왕(上王)이 창덕궁(昌德宮)의 북쪽 담장 문을 열고 이유(李瑜)306) 의 구가(舊家)에 왕래하시는데, 이것은 반드시 한명회(韓明澮) 등의 헌책(獻策)에 의한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 자세한 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왕(上王)을 좁은 곳에다 두고, 한두 사람의 역사(力士)를 시켜 담을 넘어 들어가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말하기를, ‘상왕(上王)과 세자(世子)는 모두 어린 임금이다. 만약 왕위에 오르기를 다투게 된다면 상왕을 보필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모름지기 그대의 장인[婦翁]을 타일러 보라.’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럴 리가 만무하겠지만, 가령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장인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307) 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우의정(右議政)308) 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으니, 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를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 그대의 장인은 사람들이 다 정직하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창의(唱義)하여 상왕(上王)을 다시 세운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 더불어 말할 때에는 성삼문은 본래 언사(言辭)가 너무 높은 사람이므로, 이 말도 역시 우연히 하는 말로 여겼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워서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을 집합시키게 하고, 급하게 승지(承旨)들을 불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우부승지 조석문(曹錫文)·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과 성삼문(成三問)이 입시(入侍)하였다. 내금위(內禁衛) 조방림(趙邦霖)에게 명하여 성삼문을 잡아 끌어내어 꿇어앉힌 다음에 묻기를,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삼문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혜성(彗星)이 나타났기에 신은 참소(讒訴)하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를 결박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폐간(肺肝)을 보는 듯이 하고 있으니, 사실을 소상하게 말하라."
하고, 명하여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은 그 밖에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뿐만이 아닐 것이니, 네가 모조리 말함이 옳을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명하여 하위지를 잡아들이게 하고 묻기를,
"성삼문이 너와 함께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의 일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날 승정원(承政院)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변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의 일로 인하여 불궤(不軌)한 일을 같이 공모했느냐?"
하였으나, 하위지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이개에게 묻기를,
"너는 나의 옛 친구였으니,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네가 모조리 말하라." 하니, 이개는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鞫問)함이 마땅하나, 유사(有司)가 있으니, 그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하고, 여러 죄수가 나간 다음에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이유(李瑜)의 집 정자를 상왕(上王)께 바치려고 할 때에 성삼문이 나에게 이르기를, ‘상왕께서 이곳에 왕래하게 되신다면 참소하고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기에 내가 경박하다고 여기었더니 지금 과연 이와 같구나."
하였다. 임금이 윤자운(尹子雲)을 노산군(魯山君)에게 보내어 고하기를,
"성삼문은 심술이 좋지 못하지만, 그러나 학문을 조금 알기 때문에 그를 정원(政院)에 두었는데, 근일에 일에 실수가 많으므로 예방(禮房)에서 공방(工房)으로 개임(改任)하였더니, 마음으로 원망을 품고 말을 만들어내어 말하기를, ‘성왕께서 이유(李瑜)의 집에 왕래하는 것은 반드시 가만히 불측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제 방금 그를 국문(鞫問)하는 참입니다."
하니, 노산군이 명하여 윤자운에게 술을 먹이게 하였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휘(李徽)는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정원(政院)에 나와서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마침 권자신(權自愼)·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자네는 시사(時事)를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이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좌중을 눈짓하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잘 생각하여 보게나.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박중림(朴仲林)과 박쟁(朴崝) 등도 역시 알고 있다.’ 하기에, 신이 곧 먼저 나와서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아비까지도 숨기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행하려던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승·유응부·박쟁이 모두 별운검(別雲劍)309) 이 되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시기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제 연회에 그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장소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없앤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어전(御殿)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유응부·박쟁 등이 별운검(別雲劍)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정원(政院)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殿內)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후일에 관가(觀稼)310) 할 때 노상(路上)에서 거사(擧事)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박원형(朴元亨)·좌참찬 강맹경(姜孟卿)·좌찬성 윤사로(尹師路)·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형조 판서 박중손(朴仲孫) 등에게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호조 판서 이인손(李仁孫)·이조 참판 어효첨(魚孝瞻)과 대간(臺諫) 등과 함께 같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4면
2.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5일 계묘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모반과 연루된 자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명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의 모반 대역조(謀反大逆條)와 모반조(謀叛條)를 살펴보면, ‘무릇 모반(謀反)과 대역(大逆)은 다만 공모(共謀)한 자라도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다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고, 아비와 아들의 나이 16세 이상은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며, 15세 이하와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서 종을 삼고, 재산은 모두 관가에 몰수하며, 남자로서 나이 80세 된 자와 독질자(篤疾者), 부인으로서 나이 60세 된 자와 폐질자(癈疾者)는 모두 연좌죄(緣坐罪)를 면제하고, 백숙(伯叔)·형제(兄弟)의 아들은 호적(戶籍)의 이동(異同)에 관계 없이 모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내어 안치(安置)하고, 연좌된 사람이라도 동거(同居)하지 않는 자의 재산(財産)은 관가에 몰수하는 범위에 넣지 않으며, 만약 딸이 시집갈 것을 허락하고 이미 그 지아비에게로 돌아갈 것이 확정된 자와, 자손 가운데 과방(過房)319) 으로 남에게 준 자와 아내로 결정을 보았지만 아직 성례하지 못한 자는 모두 추좌(追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기를,
"지금 모반(謀反)한 사람들의 친자식으로서 10세 이상과, 그 밖에 연좌된 남자로서 16세 이상인 자는 수금(囚禁)하고, 친자식으로서 9세 이하와 그 밖에 연좌된 남자 15세 이하인 자는 보수(保授)320) 하며, 이미 자백한 자의 연좌인 가운데 부녀(婦女)들은 먼저 구처(區處)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4면
3.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6일 갑진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모반에 참여했던 전 집현전 부수찬 허조가 스스로 죽다
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 허조(許慥)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허조는 이개(李塏)의 매부로 역시 모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4.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7일 을사 1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성삼문과 권자신이 상왕이 모반을 알고 있었다고 하다
좌승지(左承旨) 구치관(具致寬)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에 가서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묻기를,
"상왕(上王)께서도 역시 너희들의 역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대답하기를,
"알고 있다. 권자신(權自愼)이 그 어미에게 고(告)하여 상왕께 알렸고, 뒤에 권자신·윤영손(尹令孫) 등이 여러 번 약속을 올리고 기일을 고하였으며, 그날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니, 상왕께서 대도자(大刀子)를 내려 주셨다."
하였다. 구치관이 또 권자신에게 물으니, 권자신의 대답도 성삼문과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6면
5.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7일 을사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이미 죽은 박팽년·유성원·허조와 연좌된 자들의 처벌 규정을 정하다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거열(車裂)321) 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의 잔읍(殘邑)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6면
6.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8일 병오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윤사로(尹師路)·강맹경(姜孟卿)·이인손(李仁孫)·신숙주(申叔舟)·성봉조(成奉祖)·박중손(朴仲孫)·어효첨(魚孝瞻)과 승지(承旨)·대간(臺諫) 등을 불러서 입시(入侍)하게 한 다음,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윤영손(尹令孫)·권자신(權自愼)·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이휘(李徽)·노산군(魯山君)의 유모[嬭母] 봉보 부인(奉保婦人)323) 의 여종 아가지(阿加之)·권자신의 어미 집 여종 불덕(佛德)·별감(別監) 석을중(石乙中) 등을 끌어 와서 장(杖)을 때리면서 당여(黨與)를 신문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이개·하위지·성삼문·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송석동·권자신·윤영손·아가지·불덕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아울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친자식들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안치(安置)시키며,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고, 드디어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 등을 환열(轘裂)324) 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성격이 출세에 조급하여 스스로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름은 남의 앞에 있으나 오래도록 제학(提學)과 참의(參議)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아비 성승(成勝)은 본래 이용(李瑢)325) 과 가까이 지냈는데, 일찍이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사람을 죽이고 관직이 떨어져 고신(告身)과 과전(科田)을 거두었으나, 이용(李瑢)이 자기 당류(黨類)들에게 말하기를,
"성승이 가장 나를 따르고 있다. 만약 변(變)이라도 있게 되면 의당 내 말[馬]앞에 설 사람이다."
하고, 바로 계청(啓請)하여 환급(還給)하였다. 이 말이 남들에게 퍼졌으므로 성삼문이 그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였다. 박팽년은 사위 이전(李瑔)326) 의 연고로 항상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하위지(河緯地)는 일찍이 〈세조에게〉 견책을 받았으므로 원한을 품었었고, 이개(李塏)와 유성원(柳誠源)은 품질(品秩)이 낮은 것에 불평 불만하여 진달(進達)하려는 생각에서 마침내 서로 깊이 결탁하여 급급히 왕래하였는데, 정적(情迹)이 이상하여 남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36면
7.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8일 병오 3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성삼문이 끌어드린 심신·이유기·이의영·이정상·이지영 등을 가두게 하다
명하여 이조 좌랑(吏曹佐郞) 심신(沈愼)·진무(鎭撫) 이유기(李裕基), 별시위(別侍衛) 이의영(李義英)·이정상(李禎祥), 중추원 녹사(中樞院錄事) 이지영(李智英) 등을 가두게 하였으니, 성삼문(成三問) 등이 끌어들인 사람들이었다.
8. 세조실록4 권, 세조 2년 6월 8일 병오 4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 역모한 사람들의 사위들도 안치할 시킬 것을 명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역모(逆謀)한 사람들의 사위들도 모두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9.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9일 정미 1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우의정 이사철이 역신을 주륙한 것을 하례하여 전문을 올리다
"천도(天道)가 거짓이 없어서 죄인들이 이미 그 죄에 복주(伏誅)되었으며, 은택(恩澤)이 넘쳐 흘러 은명(恩命)이 아래에 반포되니, 기뻐하는 소리가 먼 곳에까지 퍼지고 기쁜 기운이 넓게 오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사사로이 신하는 장(將)327) 이 없어야 하는데 천고의 떳떳한 가르침이 밝고 국가의 법제에 정한 것이 있으니,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자는 반드시 주륙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로지 대의(大義)가 그러한 까닭이 불궤(不軌)는 용서 못하는 것입니다. 전자에 역도들이 서로 선동하여 흉포한 계략을 행하려 하였으므로, 성주(聖主)께서 비록 간악한 자들을 삼제(芟除)하였다 하지만, 뭇 추악한 자들의 여당이 남아 있어 마음에 보복할 것을 품고 장차 국가에 화(禍)를 끼치려고 하니, 그 뜻이 흉악하고 잔악하여 군부(君父)에 대하여 감정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리(逆理)와 순리(順理)는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며 귀신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불일간(不日間)에 하늘까지 넘치는 악을 바로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날리고 우레가 엄하여 요사한 기운은 확청(廓淸)328) 되고, 하늘과 별이 질서 있게 돌면서 현묘한 변화가 묵묵히 운행되고 있으니,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천년의 운수를 타고나고 덕은 백왕(百王)의 으뜸이십니다. 천토(天討)의 위세를 딛고 일어나 공손히 행하고 신무(神武)의 측량할 수 없는 천품을 타고나 더욱 귀신과 사람의 소망을 위로하고, 영구히 종묘와 사직의 안정을 굳혔습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자질로 성대한 공렬(功烈)을 얻어 보게 되었으므로, 대궐 뜰에 줄지어 서서 칠덕(七德)329) 의 노래를 화답하여 부르고 호배(虎拜)330) 로 아름다움을 선양하며 성상의 만년의 수(壽)를 빕니다."
이어서 사면령을 중외(中外)에 반포하니,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용(李瑢)331) 이 모역(謀逆)할 때, 널리 당파를 심어 중외에 반거(盤據)하였으므로 흉포한 도당이 진실로 많았지만, 내가 차마 모조리 처벌하지 못하고 그 괴수만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문에 부쳤는데, 남은 도당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서로 이어서 난(亂)을 도모하므로, 그때 그때 주륙(誅戮)하여 제거하였으나, 근자에 또 여당(餘黨) 이개(李塏)가 흉악한 마음을 품고 감정을 풀고자 하여 난(亂)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그의 도당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박중림(朴仲林)·김문기(金文起)·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허조(許慥)·박대년(朴大年)이 같은 악당으로 서로 선동하여, 장신(將臣)인 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박쟁(朴崝)·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성삼고(成三顧) 등과 비밀히 결탁하여 우익(羽翼)을 삼고, 권자신(權自愼)·윤영손(尹令孫)·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고,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날짜를 정해 거사(擧事)하여서 장차 과궁(寡躬)332) 을 위해(危害)하고 어린 임금을 옹립하여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흉포한 모략과 간악한 계략을 꾸며 그 죄역(罪逆)이 하늘을 뒤덮었다. 다행히 천지 신명(天地神明)과 종묘 사직의 도움을 받아 대악(大惡)이 스스로 드러나 모두 그 죄를 받았다. 마땅히 적족(赤族)333) 의 벌을 가하여 귀신과 사람의 분함을 씻어야 할 것이나, 오히려 너그러운 법에 따라서 같은 악당만 주륙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죽임을 용서해 주었다. 다행히 죄인을 이제 잡아 문득 하늘의 벌을 주었으니,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펴서 신민(臣民)과 경사를 함께 하여야 하겠다. 경태(景泰) 7년334) 6월 초9일 새벽 이전에 모반 대역(謀反大逆)335) 과 모반(謀叛)336) 한 자손으로서 조부모와 부모를 죽이려고 도모하거나 구타 또는 욕설을 한 자, 처첩(妻妾)으로서 남편을 모살(謀殺)한 자,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謀殺)한 자, 고독(蠱毒)337) 과 염매(魘魅)338) 한 것,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도모한 자와 그리고 강도(强盜)·절도(竊盜)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이 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죄를 면제한다. 감히 유지(宥旨)가 있기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주겠다.
아아! 포악한 자를 죽이고 간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모두 나라의 떳떳한 법을 실행하는 것이요,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깊은 은혜를 기리는 것이다."
이라 하였다.
10.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11일 기유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역모를 꾀한 황선보가 옥중에서 졸하다
황선보(黃善寶)가 옥중에서 죽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황선보는 권자신(權自愼) 등과 결당하여 역모를 꾀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황선보의 시체를 거열(車裂)하고, 적몰과 연좌도 율문(律文)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고, 연좌는 유성원(柳誠源) 등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였다.
11.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10일 무신 1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이오 등이 변궤를 꾀하였으므로 처벌할 것을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이오(李午)는 그 아내 아가지(阿加之)와 함께 상왕(上王)의 복위(復位)를 도모하기 위하여, 이달 초1일에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昌德宮)에 청하여 연회할 때, 내상고(內廂庫)339) 의 칼 한 자루를 몰래 별감 석을중(石乙中)에게 내어 주어 권자신(權自愼)에게 전하고 변(變)을 관망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고, 연좌는 유성원(柳誠源) 등의 예에 의하도록 명하였다.
12.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18일 병진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반역에 관련된 자들을 국문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니, 당직 도진무(都鎭撫)와 겸사복관(兼司僕官)이 시위(侍衛)하였다.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와 승지(承旨)·대간(臺諫) 등을 부르게 하고, 박기년(朴耆年)·심신(沈愼)·이정상(李禎祥)·이지영(李智英) 등을 끌어다 곤장을 때리면서 당여(黨與)를 신문하니, 박기년이 말하기를,
"다만 이 심신 등 몇 사람 외에는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다시 국문하니, 박기년이 또 말하기를,
"매부 봉여해(奉汝諧)도 역시 그 일을 알고, 김질(金礩)도 또 이 음모를 알고 있으며, 초1일에도 역시 창덕궁 집현전(集賢殿)의 모이는 곳에 갔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여해가 네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봉여해가 말하기를, ‘나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실행하려던 방법을 다시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지난달 그믐날 봉여해에게 그 일을 말하였더니, 봉여해가 말하기를, ‘내가 사옹원(司饔院) 별좌(別坐)로 칼을 차고 들어가니, 만약 막는 자가 있으면 곧 찌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초2일에 너와 심신이 말하기를, ‘어제 창덕궁에서 모르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는데, 너는 어떤 사람들을 보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은 없었고 성삼고(成三顧)·김질(金礩)·최득지(崔得池) 등의 무리였는데, 전에 듣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였다. 심신에게 묻기를,
"대역죄는 끝까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대로 당파를 모조리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박팽년 등과 비록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으나, 항상 신이 입을 삼가지 못한다 하여 왕래하며 모의에 참여시키지 아니한 까닭에 그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신의 청하여 부른 사람은 이정상과 이지영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자주 모여 활을 쏘았으니, 더불어 아는 자가 없겠는가?"
하니, 심신이 대답하기를,
"다른 곳에서 모여서 활쏜 적은 없고, 다만 정언(正言) 유계분(柳桂芬)의 집에서 〈활을 쏘았는데〉 동료이기 때문에 가서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모였던 사람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정상의 종형 정랑(正郞) 이정원(李貞元)과 봉교(奉敎) 최한보(崔漢輔)·대교(待敎) 이문환(李文換) 등 10여 인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정상이 이정원과 말을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먼저 나와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들에게 말하기를,
"유계분은 활을 쏘자고 창언(倡言)하였고, 또 유성원(柳誠源)의 형의 아들이니, 이 사람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하고, 또 이정상과 이지영을 곤장을 때리면서 심문하니, 고하기를,
"이정원(李貞元)·이문환(李文換)·사경(司經) 정효상(鄭孝常)·직장(直長) 박시형(朴時衡)·최숙손(崔淑孫)·이효종(李孝宗)·이지영의 형 이말생(李末生)의 처남 정관(鄭冠) 등이 모두 그 일을 압니다."
하였다. 이정상은 심신의 이웃 사람이고, 이지영은 유응부(兪應孚)의 사위 이의영(李義英)의 아우였다. 또 권전(權專)의 아내 아지(阿只)에게 묻기를,
"권자신(權自愼)이 너의 말대로 홍주(洪州) 사람을 청하여 왔다는데 【최득지(崔得池) 등이 홍주(洪州)에 살았다.】 그 성명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상왕(上王)에게 아뢸 때 어떤 사람들이 이 일을 한다고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하위지(河緯地)와 성씨(姓氏)가 성(成)이라고 하는 자였습니다."
하였다. 또 판수[盲人] 나가을두(羅加乙豆)에게 묻기를,
"몇 사람이 몇 번이나 와서 점을 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난번에 봉보 부인(奉保夫人)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부엉이[鵂鶹]가 대궐 북쪽에서 우니 무슨 까닭이냐?’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평안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상왕(上王)께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상왕께서 오래지 않아 왕위로 돌아갈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시녀(侍女) 춘월(春月)과 충개(蟲介) 등에게 묻기를,
"누가 이 일을 알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초하룻날 아가지(阿加之)가 우리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바깥 사람들이 장차 우리 임금을 다시 세우려고 한다.’ 하기에, 저희들이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그렇다면 언제쯤 한다는 말이냐? 하니, 아가지가 말하기를, ‘오늘 잔치가 끝난 뒤에 하려는 것이다.’ 하므로, 저희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상장(上將)은 반드시 직계가 올라가 금띠를 띠게 될 것이다.’ 하였고, 그 밖에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장(上將)이란 아가지의 남편 이오(李午)를 가리킨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7책 138면
13.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7일 을축 10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역적 내은덕·심상좌·덕비·나가을두의 처벌을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무녀(巫女) 내은덕(內隱德), 최면(崔沔)·심상좌(沈上左)·덕비(德非)·나가을두(羅加乙豆) 등이 역적의 당이었으니, 그 죄는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모두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모두 처참(處斬)하되 나가을두(羅加乙豆)만 연좌시키지 말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4.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7일 을축 6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사람들의 처벌 규정에 대해 명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사람 중에서 공사(公私)의 천구(賤口) 이외의 여인은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서 여종이 되게 하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은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고, 그 딸로서 혼인을 허락하여 그 남편집으로 시집갈 것이 결정된 자와, 자손으로 과방(過房)372) 으로 남에게 준 자와, 아내로 정하였으나 아직 성례를 치르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연좌시키지 말라. 이러한 일들은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15.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6월 28일 병인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모반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사람들의 처벌을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벌써 그전에 이개(李塏)의 삼촌숙(三寸叔) 이계정(李季町)을 흥덕(興德)에, 하위지(河緯地)의 삼촌질(三寸姪) 하보(河甫)를 무안(務安)에, 박중림(朴仲林)의 삼촌질 박용이(朴龍伊)·박사평(朴斯枰) 등을 장기(長鬐)에, 박사제(朴斯梯)·박사강(朴斯杠)·박사정(朴斯楨)을 기장(機張)에, 박쟁(朴崝)의 삼촌질 박겸문(朴謙文)·박신문(朴信文)·박수문(朴守文)·박사문(朴思文) 등을 진해(鎭海)에, 유성원(柳誠源)의 삼촌질 유문성(柳文成)·유문산(柳文山) 등을 칠원(漆原)에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켰으나, 지금 전지(傳旨)를 받들어 보니, ‘난신(亂臣)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백숙부(伯叔父)와 형제(兄弟)의 자식은 안치(安置)하라.’고 하였으니, 청컨대 윗 항목의 사람들을 그대로 소재(所在)한 곳에 안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의금부에서 또 아뢰기를,
"오순(吳諄)은 정관(鄭冠)의 반모(反謀)를 들었고, 최한(崔漢)과 최반(崔泮)은 그 형 최면(崔沔)의 반모를 들었고, 이효종(李孝宗)과 허증(許曾)은 이지영(李智英)의 반모를 들었고, 내은이(內隱伊)와 정향(丁香)·막금(莫今)은 아가지(阿加之)의 반모를 들었으나 모두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율(律)에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리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명하여 최한·최반과 내은이·정향·막금은 변방 고을의 노비(奴婢)로 붙이게 하였다.
16. 세조실록4 권, 세조 2년 7월 1일 무진 6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대간에서 역모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처벌을 청하나 불윤하다
대간(臺諫)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전일에 이유(李瑜)384)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한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지금 역적 박팽년(朴彭年) 등이 유(瑜) 등과 몰래 통하여 서로 응원이 되었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로는, 전하께서 만약 전일에 신 등의 청에 따르셨다면 오늘과 같은 화단(禍端)은 반드시 없었을 것입니다. 대저 유(瑜) 등은 전일에 전하의 천지(天地) 같은 은덕을 받아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해 왔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뉘우치지 아니하고 역당(逆黨)들과 내통하였으니,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처자들과 모여 살게 하시니, 신 등은 그것을 옳다고 보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 친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지극하다 하겠으나,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써 공의(公義)를 폐하겠습니까? 또 이계전(李季甸)은 이개(李塏)의 숙부로 이개의 말을 듣고도 다만 책망만 하였을 뿐이요, 즉시 달려와 고(告)하지 아니하였고, 또 김문기(金文起)와 박팽년의 고백한 것도 있으니 이개가 비록 ‘이계전은 실지로 알지 못한다.’ 하였어도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희안(姜希顔)은 서연(書筵)에서 한 말과 성승의 집에서 모였던 점으로 보아 그 정적(情迹)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안철손(安哲孫)은 그 아우 안신손(安信孫)이 직접 역모하였다고 고하였으니, 형제 간에 어찌 형의 정상을 알지 못하고 고하였겠습니까? 김인(金嶙)은 역적의 당과 연혼(連婚)한 사이요, 또 최면(崔沔)의 고백한 말도 있습니다. 정효상(鄭孝常)은 심신(沈愼)과 교제를 맺어 상종하고, 또한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으니, 그도 모의에 참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모두 특별히 용서하여 주시니, 비단 신 등만이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다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유(瑜) 등의 일은 실제로 정적(精迹)이 없으며, 박팽년이 어찌 이유 등을 응원으로 삼았겠느냐? 다만 어린 임금을 끼고 정권을 마음대로 하려던 것뿐이었다. 이계전은 이개의 말을 듣고 그를 책망했다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내 도리어 그를 가상하게 여기어 오히려 포상하려고 하는데, 어찌 연좌시키겠는가? 강희안이 술 마신 일은 본래부터 정실(情實)이 없고, 최면은 한낱 망령된 사람에 불과하다. 정효상 역시 그 역모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고론(高論)을 하였을 뿐일 것이다. 내 일찍이 유자(儒者)들과 같이 집현전(集賢殿)에 있어 보았는데, 그 유자들은 이와 같은 고론(高論)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17.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7월 1일 무진 5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권기와 최정강이 역모와 관련해 이계전·김인 등의 처벌을 청하나 불윤하다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 권기(權技)와 장령 최청강(崔淸江) 등이 아뢰기를,
"전일에 이유(李瑜)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신 등은 실망하였습니다. 또 강희안(姜希顔)은 척리(戚里)로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못들은 체하고 피하여 갔을 뿐이요, 즉시 아뢰지 않았습니다. 또 성승(成勝)의 집에서 박팽년(朴彭年)과 하위지(河緯地)가 함께 서로 술마시는 것을 보았는데도 어찌 알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정효상(鄭孝常)은 일찍이 서연(書筵)에서 심신(沈愼)이 전위(傳位)한 일을 논할 때에 분개하는 말까지 발설하는 것을 보았고, 심신도 역시 정효상의 집에 가서 사사로이 서로 이야기하였으니, 그들이 의논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인(金嶙)은 성삼문의 처형(妻兄)이요, 성삼고(成三顧)의 장인이며, 또 최면(崔沔)의 고백에도 ‘거사(擧事)하려던 날 김인을 창덕궁(昌德宮) 동구에서 만났다.’고 하였으니, 김인이 참여하여 들은 것도 분명합니다. 또 이계전(李季甸) 등은 법에 있어서 연좌되어야 마땅한데도 모두 그대로 두고 그 죄를 논하지 않으니, 신 등은 통분(痛憤)하게 여깁니다."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이계전은 본래 원훈(元勳)으로 그 마음이 충직하고, 최면의 말은 허탄(虛誕)하여 실지가 없다. 그리고 정효상의 일도 또한 논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강희안은 그 마음이 본래 미열(迷劣)한데도 이개의 말을 듣고 피하여 갔다니, 진실로 현명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모두 용서하여 준 것이다."
하였다. 권기 등이 다시 아뢰기를,
"역모(逆謀)는 천하의 대악(大惡)이니, 청컨대 율문 이외의 형벌을 가하여 후세 사람을 징계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대체로 사람의 죄는 정상이 이미 드러나면 죄 주는 것이 옳겠으나, 만약 정상이 드러나지 않는데도 취모구자(吹毛求疵)한다면, 대체(大體)에 손상이 있을 것이니, 더욱 옳지 못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18.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7월 7일 갑술 3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정난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공·사천 이외의 부녀는 공신의 종으로 주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정난(靖難) 당시에 난신(亂臣)에게 연좌되어 정역(定役)한 사람들 가운데 공천(公賤)·사천(私賤) 이외의 부녀는 모두 공신(功臣)의 집 종으로 주라." 하였다.
19.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7월 12일 기묘 2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역모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청하는 대사헌 신석조와 좌간 이종검의 상소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左司諫) 이종검(李宗儉) 등이 상소하기를,
"죄가 있는 자를 반드시 벌(罰)주면, 악한 일을 하려는 자가 두려움을 알게 되고, 죄가 중한데 벌이 가벼우면 악한 짓을 하는 자를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근일에 신 등이 역도(逆徒)들을 모두 법대로 처치하기를 청하여 여러 번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였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하여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없어 또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 등이 삼가 《서경(書經)》392) 을 보니 이르기를, ‘악을 제거할 적에는 그 근본을 길이 근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유(李瑜)393) 등이 무사(武士)들과 교결(交結)하여 비밀히 사사 당파를 부식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지친(至親)인 까닭에 그대로 두고 불문(不問)에 붙였으니, 은혜가 지극히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징계되지 아니하여 도리어 분함과 원망을 품어 다시 흉악한 무리를 모아 안으로 궁인(宮人)들과 결탁하여 난(亂)을 선동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기미(幾微)를 밝게 보시는 밝음이 없었더라도 화단(禍端)을 반드시 도모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인데 다만 기내(畿內)에 유배하여 평안히 살게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호랑이를 길러서 근심을 남기는 것이므로, 신 등은 평소부터 분하게 여기던 바입니다. 지금 모역한 자들은 거의 모두 유생(儒生)의 오합(烏合)한 무리로서 본래부터 위망(威望)이 없었으니, 저들 〈이유(李瑜) 등〉의 이름을 빌리려고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분함을 품은 저들의 마음으로 어찌 기꺼이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모역에 참여한 정상이 명백한데 모조리 따져서 묻지 않고, 특별히 너그러운 법에 따라 먼 지방으로 옮기기만 하고 법대로 처치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어찌 ‘악을 제거할 적엔 뿌리까지 없애는 데 힘써야 한다.’는 뜻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은혜에 따르지 마시고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어 이유(李瑜) 등을 빨리 법대로 처치하여 화단의 근본을 끊어 버리소서. 대저 법률에 연좌가 있는 것은 그 뜻이 그 당자만을 죽이는 데 그치면 대악(大惡)을 징계하고 후세 사람을 징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계전(李季甸)·이맹진(李孟畛)·유사지(柳士枝)·조철산(趙鐵山)·조영서(趙英緖)의 아내 등은 법에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는 자들인데, 홀로 그대로 두어 불문에 붙이고 작위도 그대로 두니, 대역죄는 실로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것인데 어찌 전하께서 사사로이 하실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춘추(春秋)》의 법에서도 ‘난신을 죽이고 역적을 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강희안(姜希顔) 같은 자는 범연하게 공사(供辭)에 관련된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아니됩니다. 일찍이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洶洶)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역도(逆徒)들이 성승(成勝)의 집에 모여서 모반을 꾀하던 날에도 역시 참여하였고, 또 성삼문(成三問)을 끌고 함께 이웃집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그 음모를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이제 다만 법대로 처치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전적으로 풀어 주고, 또 벼슬할 것을 명하시니, 그것이 ‘먼저 당여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으로 볼 때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시경(詩經)》394) 에 말하기를, ‘형제가 집안에서는 싸우지만 바깥의 모욕은 함께 막는다.’고 하였으니, 골육(骨肉)의 친친 가운데에서도 지극히 가까운 것은 형제입니다. 화란(禍亂)이 있을 적에는 오히려 또 서로 구원하는 법인데, 어찌 형(兄)을 대악(大惡)이라 무고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집에서 그 정을 확실하게 아는 자는 형제(兄弟)와 같음이 없습니다. 안신손(安信孫)은 안철손(安哲孫)의 동모제(同母弟)인데, 그가 들은 것은 반드시 사실일 것입니다. 어찌 하루 아침에 기생의 말을 듣고 급하게 고발하였겠습니까? 더욱 그 아비가 아직도 살아 있으며, 안신손은 사리를 아는 문사(文士)로서 비록 그 형은 돌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그 아비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들은 것은 반드시 사실이었으며, 안철손이 음모에 참여한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죄를 묻지 않으시니, 그것이 옳은지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은 상례(常例)를 답습하고, 구례(舊例)를 도습하는 말로써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역도(逆徒)들에게는 마땅히 법에 정한 이상의 형을 사용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너그럽게 법을 쓰시니,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제왕(帝王)이 형벌과 상을 주는 도리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사람의 마음에 맞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는 것이니, 하늘의 뜻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큰 법을 폐하십니까? 신 등은 그래서 간을 헤치고 쓸개에 사무치도록 강력히 말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의 재량으로 신하와 백성들의 분함을 풀어 주시면, 종묘와 사직에 심히 다행하겠으며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7책 142면
20. 세조실록 4권, 세조 2년 7월 12일 기묘 4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역모와 관련하여 이휘의 처벌을 청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이휘(李徽)는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등과 함께 모이어 역모를 꾀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하며,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모두 율문(律文)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명하기를,
"처참(處斬)과 연좌(緣坐)는 권저(權著) 등의 예에 따라 하고,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휘는 이개의 매부로서 역시 역모에 참여하였다. 처음에 사건이 발각되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와서 아뢰기를,
"신이 그들의 음모를 알고 벌써 병조 판서 신숙주(申叔舟)에게 고(告)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음모했던 상황과 음모에 참여한 사람들도 모조리 아뢰었다. 그가 신숙주에게 고하였다고 하는 것은 6월 초1일의 조회 때 예조에서 대가(大駕)를 수행할 때였는데, 이휘가 말하기를,
"근일에 고론(高論)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였을 뿐이요, 다시 다른 말이 없었는데, 이휘는 이로써 스스로 면할 것을 바랐던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