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건강이 허락되어야 하고 시간이 허락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유롭게 걷는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여유를 갖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올 9월의 마지막 날 수원지기학교 교사들은 문경새재길을 여유롭게 걷기로 하였다. 문경새재 옛길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 32호로 지정되어있고 문경 조령관문은 사적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로 난 새재 옛길은 약 7km에 달한다. 특히 주흘산은 영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 "걷는다...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경새재를 넘어본다" © 수원지기학교 제공 | |
조선시대에 한강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영남대로라 하였고 960여 리에 달하는 서울에서 부산의 동래부까지 가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9개 간선로 가운데 하나인 영남대로는 경기도와 충청도 각각 5개씩의 군현, 그리고 경상도 58개 군현에 걸쳐 있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는데 조령인 문경새재를 지나는 영남중로와 죽령을 넘어가는 영남좌로, 추풍령을 경유하는 영남우로가 있었다. 그 중 과거길에 이르는 선비와 길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길은 문경새재였다.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져서 떨어지고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말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럼 조령은? 새처럼 날아서 급제한다~~
문경새재는 한강와 낙동강을 갈라놓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고개이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아우릿재(이화령)사이의 고개, 새로 만든 고개의 여러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를 되새기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경새재를 넘어본다.
조선시대의 도로는 영남대로, 의주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등의 간선도로가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갔다. 길은 통치를 위해서 필요했고, 상업이 발달하면서부터는 교역의 기능을 맡았으며 사신의 왕래등의 군사 외교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의 도로망 중 사신로는 서울에서 의주를 연결하는 길로 사행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명과 청에 사신이 오고가는 길로 사신의 숙식 및 연향을 위하여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고양-파주-장단-개성-평산-황주-평양-순안-숙천-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천-의주로 연결되었다.
관동로는 서울-망우리-양근-지평-원주-안흥-진부-횡계-대관령-강릉-삼철-울진-평해다.
좌로는 일본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겸하였고 수륙 연결이 편리한 간선이었다. 서울-한강-판교-용인-양지-달내-충주-조령-문경-유곡역-낙원역-낙동진-대구-청도-밀양-황산역-양산-동래-부산이다.
우로는 서울에서 제주를 잇는 길로 서울-동작나루-과천-유천-수원-진위-성환-천안-공주-은진-삼례-전주-남원-함양-진주-사천-고성-통영(여기까지는 중로와 같다)-삼례역-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관두량-제주다.
서울에서 강화를 연결하는 길은 서울-양화도-양천-김포-통진-강화다. 문경은 영남대로이면서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길이기도 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대규모 외교사절을 말한다. 회례사, 보빙사, 경차관 등의 명칭도 사용하였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에서 에도까지 가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소요되는데 통신사가 지나는 각 번은 국빈대접으로 예우하였고,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통신사는 정사를 비롯하여 부사,종사 등 600여명의 규모였다. 한양에서 출발한 통신사는 용인- 죽산- 충주를 거쳐 문경을 지나 부산으로 향하였다.
책바위 표지판 앞에서, 부모가 되었으니 자식이 잘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당연하다. 그 잘되었으면 하는 바램 중 아마 가장 큰 것이 공부일 것이다. 인근에 살던 어느 부자가 늦게 아들을 얻었는데 자라면서 점점 허약해졌다. 유명한 도사에게 물으니 "살고 있는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정성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했으렸다. 3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날랐으니 건강해진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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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까...공부하는 자식이 소원을 빌고 간절해야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은 두 말이 필요없으리라." © 수원지기학교 제공 |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원급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요즈음도 입시철이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까...공부하는 자식이 소원을 빌고 간절해야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은 두 말이 필요없으리라.
새재의 2관문 근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머물렀던 이진터에서는 임진왜란의 경과에 대해 알았고 신립장군의 패배가 안타까웠으며, 주막근처에서는 영조때 6명의 선비중 술을 마신 5명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여유롭게 걸었다.
영남대로 길을 걸으며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옛사람들이야 과거를 보러가는 부담감이 있었을테고, 봇짐을 지고 가는 무게감도 있었을테지만 나!답 참가자들은 가벼운 가방 메고 괴산에서부터 내리막길을 물소리와 함께 걸었다.
버스안에서 김미진 선생이 나누어준 詩 한편을 새기며 자연이 들려주는 합창소리를 듣는 것은 행복을 누리는 순간이다.그것은 내가 스스로 가꾸는 시간이다. 내가 누리려고 노력해서 가져진 순간이다.
나는 나와 함께 걷는다.
나는 자연과 함께 걷는다.
나는 너와 함께 걷는다.
수원지기학교는 수원 영통구에 자리잡고 있다. '배워서 남주자'는 게 구호다.
역사와 문화 ‘현장체험’에 중심을 두고 공동체 교육에 힘쓰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대안학교다.
현장에서 대안을 찾는 교육을 하고 있는 길 위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기학교의 교육은 대부분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역사의 유산물이 남아 있는 곳은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031-205-3022 / 205-3055 수원시 영통구 청명로 87 7층 (운현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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