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갠 아침 시간은 레몬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상큼했다. 나의 발재간은 좁은 스물 몇 평 집안에서도 늘 빛나곤 했다. 봄이 올건지 방을 쓸어낼 때마다 살비듬이 바랜 장판 위에 슬픔처럼 내려앉았다.
방안 행어에 걸어둔 두꺼운 옷들을 걷어내려다 두껍게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는 화분의 꽃나무들이 더 위태롭게 느껴져 걸음을 현관으로 두었다. 치자나무는 새로운 싹을 내밀건지 푸르게 삣(빛)나는 눈들이 가지 사이에서 번뜩였다. 독일붓꽂은 앉은뱅이꽃 마냥 낮게 엎드려 있다 .그러다가 내 눈길이 서운하다 싶으면 그예 긴 줄기를 깃발처럼 내걸고 보란듯이 꽃몽우리를 내밀 것이다.
한껏 여유로운 사람이 난초 줄기를 붙들고 삼매경에 빠지듯 호사로운 아침이었다.
오늘은 새얼문학회 회원인 강성남시인의 첫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 북토크 날이다. 동인천 칠통마당에 자그마한 모임방을 무료로 빌렸다.
행사장에 걸 현수막과 웹자보는 제작업체에 부탁하여 미리 만들어 놓았다.
부산스러운 꽃다발과 꽃바구니는 배제하고 칼란디바 화분을 구입해 사람들 앉은 자리마다 놓을 것이다.
구상한대로 턴테이블과 식탁보 등을 와인과 함께 챙기고 잔을 챙기려다보니 전동 와인따개가 망가져 있다. 회원들한테 부탁하자니 설명이 구질해서 궁여지책으로 비트차를 챙기고 꽃차와 유리잔도 챙겼다.
3시부터 행사시작인데 벌써 많은 분들이 행사장을 채우고 있다.
인원이 적을거라는 생각에 작은 모임방을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다. 옆방에서 의자를 빌려와 행사장을 채우고 요소요소에 웹자보를 붙이고 현수막도 걸었다.
모임방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둥근 테이블에 시집을 넣은 바구니를 비치하고 텐테이블을 앉혀놓고 베에토벤의 '월광'을 걸었다. 축하케잌은 달달한 크림이 아닌 고소한 콩이 뭉쳐진 영양떡으로 준비했다. 예쁜 금희시인이 찬조한 것이다.
<당신과 듣는 와인춤>은 미리 읽어보지 못했다. 제목에 맞는 소품을 준비하고 싶어서 와인을 올려놓고 글라스에 와인을 따라 놓으려했다. 하필 뚜껑 따개가 망가져서 우려낸 비트차로 대신했다. 붉은 비트차가 시침 뚝 떼고 와인행세를 하고 앉아 있어서 혼자 웃었다.
북콘서트 하면서 시집을 읽다보니 각 부마다 '스위트와인' '레드와인' '로제와인' '화이트와인'이 목차로 되어있다.
와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건 표제이기도 한 48쪽의 <당신과 듣는 와인춤> 외에는 없다. 그 마저도 시 속에는 와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해설을 쓰신 김정수 시인께서는 이렇게 쓰셨다.
시인은 제목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1부 '스위트와인' 2부 '레드와인' 3부 '로제와인' 4부 '화이트와인' 으로 시집을 구성하고 있다 로드 필립스는 [와인의 역사] (시공사 2002) 에서 "와인은 발효라는 자연발생적인 과정의 산물. 이라고 했다 와인과 포도의 성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포도알은 저마다의 작은 양조장" 이라고도 했다 '와인'의 자리에 '시'를 넣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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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과 당분, 탄산가스에 의해 와인을 분류하듯이, 시와 빛깔과 맛의 특성에 따라 이번 시집을 구성한 것은 아닐까.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등을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와인은 병에 담긴 시詩 라고 했다. 지금 눈앞에 다양한 병에 담긴 다양한 와인 /시가 놓여 있다. 이제 시인이 정성껏 빚어 내놓은 와인/시의 맛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강성남 <당신과 듣는 와인춤> 김정수 시인, 해설 중
옛 스승님은 시를 고통스럽게 짓는 것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포도도 고통을 감내하며 술로 익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엮는 숙성의 너울을 타고 환희로써 톡 떠트릴 맛, 달거나 떫거나 혹은 순하거나 강한 와인.
시집 속 드러나지 않은 와인을 시로 바꿔 읽다보니 시간이 금방갔다.
당신과 듣는 와인춤?
당신과 듣는 시...시인의 절망을 희망으로 엮어 우려낸 붉은 포도주 빛 시이다.
2025. 03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