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으로 타락
성경 말씀: 창세기 3:1-7; 로마서 3:9-18
요약
성경에서 타락은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개인적 충동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타락은 창조된 사람이 개인이 되는 것으로 말해집니다. 즉 타락은 개인화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자신의 개인적 속성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삶이 아닌 개인의 성질의 삶이 타락입니다.
창조에서 타락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 기술은 인간의 타락 기술로 이어집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된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난 것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하와는 탐스러운 열매에 충동을 느껴 따 먹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에서 사람을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삶보다 자신의 성향으로 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삶이 아닌 사람의 성향의 삶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된 삶입니다.
타락은 창조로부터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람의 성향으로 타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쓰인 타락은 언약의 근거합니다. 언약의 근거에서 벗어나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비도덕적인 삶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언약에 근거한 삶을 떠나 자신의 성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몰입니다. 자기 몰입은 자신의 개체성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타락은 자기중심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즉 개체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개체화는 개인의 성향을 보입니다. 개인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문화적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삶의 태도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서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에 대조되어 개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은 타락됩니다. 즉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문화적 추구는 타락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성향으로 나오니 타락됩니다.
성경은 언약으로 전개됨으로, 개인의 문화적 삶을 타락된 것으로 서사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연적 세상에서 그들의 개인적 활동으로 문화를 이룹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은 세상을 사는 결실로 여겨집니다. 문화는 이렇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문화적 성취가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으로, 타락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시각, 곧 언약의 시각에서 말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와 타락을 분리해서 보입니다.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삶을 살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향으로 타락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삶은 함께하는 언약의 삶입니다. 언약의 백성이 함께하는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경우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함께하는 언약의 삶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으로 향해지면, 단지 고립된 개인들의 삶을 보입니다. 개인의 마음이나 생각은 당사자에게만 의식됩니다. 그들이 서로 마음과 생각을 말로 소통하더라도, 단지 서로를 이해합니다. 그들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함께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소통될 뿐입니다.
타락된 개인
사람들이 개인으로 사는 한, 서로를 인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각기 고립된 개인으로 인정하며 더불어 지냅니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개인으로 인정함은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따라서 관용과 포용이 문화적 삶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차별의 제거는 그런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삶에선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은 창조 기술에서 봅니다. 창조된 사람이 말해짐으로, 개인의 우선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개인은 어디까지나 창조에서 타락된 사람으로 지칭됩니다.
세상은, 언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사람의 성향으로 타락되었습니다. 타락은 언약의 용어입니다. 개인적 성향에 의한 문화적 삶은, 언약의 삶에서 볼 때, 타락되었습니다. 어떻든, 타락된 문화적 삶은 언약의 삶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렇지만 언약의 삶은 개인적 성향에 의한 문화적인 삶에서 언급될 수 없습니다. 문화적 사람들은 단지 개인의 삶이 자연적이고 적절하지만, 언약의 삶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언약의 삶은 문화적 삶에서 보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적 삶으로부터 언약의 삶으로 갈 길은 없습니다.
언약의 삶으로부터 문화적 삶으로 가는 길은 유혹됩니다. 그러나 문화적 삶으로부터 언약의 삶을 만드는 길은 없습니다. 문화적으로 살던 이들이 종교로 갈지 모르지만, 언약으로 갈 수 없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삶으로부터 사람의 속성의 삶으로 타락은 이루어짐의 삶으로부터 변화의 삶으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자연은 지닌 속성으로 부단히 변합니다. 자연 속성의 변화를 따라 문화도 또한 변합니다. 변화가 보아지면, 변화를 야기하는 힘이 어쩔 수 없이 의식됩니다.
타락된 삶은 힘에 의해 진전됩니다. 힘에 의해 요동됩니다. 사람의 성향도 조건적으로 반응함으로, 부단히 바뀌어서 방향성이 쉬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부단히 요동되지만 방향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흐름으로 표현되지만 방향성을 갖지 않습니다.
변화는 요동일 뿐 방향성을 갖지 않습니다. 자연적 속성이 보이는 것은 요동입니다. 타락되는 것은 요동의 소용돌이 가운데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성향은 욕망으로 표현되고, 욕망엔 어떤 방향도 없습니다. 욕망은 만족을 추구할 뿐입니다.
개인 욕망의 삶에 욕망에 동반된 힘이 표현되기 때문에, 요동이라고 합니다. 개인들의 부단한 노력은 서로를 힘으로 견제하는 갈등을 보입니다. 조건에 처한 개인들의 욕망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그들의 말이 나오는 이상, 그들의 말도 어쩔 수 없이 힘을 싣습니다.
타락된 개인들의 말도 타락됩니다. 개인들은 자신들의 말에 힘을 실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힘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힘을 구사함으로 주위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가게 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지식이 축적됨으로 새로운 물건이 생산되고 그에 따른 새로운 말도 쓰입니다. 그러나 기본적 삶의 형태는 타락됩니다.
타락에서 구원
구약은 타락으로 가는 길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문화적 삶에서 언약의 삶으로 가는 길을 보입니다. 구원으로 길입니다. 하나님의 함께가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 언약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회복이 아닙니다. 구원의 뜻은 옛 언약에 없습니다.
언약의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이루어짐을 따라 드러납니다. 그러나 옛 언약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자신의 성향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옛 언약의 말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없음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에 빠져든 타락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타락된 세상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복음은 구원으로 이루어짐을 보입니다. 창조로 이루어지는 옛 언약의 말에 대조되어 구원으로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말을 보입니다.
타락된 세상에 예수님의 오심은 타락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창조로부터 시작된 옛 언약은 창조로부터 타락만 말합니다. 그러나 타락된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 타락된 세상으로부터 구원이 말해집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은 구원으로 들려집니다.
예수님을 들려주는 복음은 구원의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언약은 구원의 언약입니다. 창조에 비추어 구원은 새롭습니다. 구원은 창조의 부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새로운 말이고, 구원의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언약의 말은 함께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과 함께하시려고 주신 약속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분 백성과 함께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분 함께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락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새로운 약속의 말씀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이 이루어짐으로 그분 삶을 사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구원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타락에서 구원으로 이끕니다.
창조된 사람이 자신의 속성에 빠져드는 것은 타락을 통해섭니다. 타락에 사람의 성향이 반영됩니다. 그러나 타락으로부터 구원은 사람의 성향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성향으로 말해지면 종교가 됩니다. 사람의 성향 가운데 종교성도 있습니다.
타락으로부터 구원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말해집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으로 개시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단순히 세상에서 사신 것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의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하나님께서 타락된 사람들과 그들의 구원됨으로 함께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구원의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서사하는 복음은 구원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한 약속을 복음으로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자연적인 세상이 아닌 타락된 세상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을 삶의 근거가 아닌 구원될 터전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을 사는 ‘나’를 자연적인 세상에 안주하는 실존적인 ‘나’가 아닌
아버지와 함께로 구원될 ‘나’로 의식하게 하옵소서.
‘나’를 아버지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나
속성으로 타락된 ‘나’로 의식하게 하옵소서.
‘나’를 타락된 세상에 안주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자녀로 아버지의 영이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에 구원의 자취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