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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말은 소리다. 소리로 표현되는 말은 물리학적으로만 볼 때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은 단지 소리에 멈추지 않는다. 말은 여러 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어떤 경우에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이나 분노를 야기하기도 한다. 야고보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 심지어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 누가 듣는가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소리에 불과한 말이 이렇게 큰 힘을 갖는 이유는 말이 메시지 혹은 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인간의 말과 영의 관계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영의 문제라면, 신앙이 신자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아니 주어야 하는 영역은 말이다. 말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말과 마음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에 없거나 마음과 다른 말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상대방에게 잘 보여야 할 때와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한다. 만약 마음이 바뀌었다면 말도 바뀌게 된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정작 말은 그대로라면 그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신자들은 모여서 주로 무슨 말을 할까? 신자가 모여서 말하는 주제와 비신자가 모여서 말하는 주제가 다를까? 신자라고 해서 굳이 비신자와 대화의 주제가 달라야 할까? 일반화해서 말하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신자의 대화와 비신자의 대화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남자 신자들은 모이면 자연스럽게 재테크, 스포츠, 정치가 대화 주제가 되고, 여자 신자들이 모이면 자녀 교육, 미용, 드라마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을 쉽게 보게 된다.
물론 신자도 얼마든지 세상적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신앙이 언어 생활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주는가다. 만약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 얼굴 붉히고 대립한다면 비신자와 다를 바가 있겠는가? 자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학원이 좋다더라, 어떤 프로그램이 좋다더라와 같은 정보 교환만 이뤄진다면 맘카페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말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선거는 끝났으나
22대 총선이 끝났다. 총선은 그야말로 말의 잔치다. 수많은 류의 말들이 난무한다. 난무한 말들은 잔치에서 전쟁으로 변한다. 총선을 전쟁에 종종 비유하는데 총선은 말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 모두가 심판을 외쳤기 때문에 정책 선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야당은 원래 여당을 견제하는 것이 그 기능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여당마저 심판론을 주창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이번 전쟁에서 여당은 참패했고 야당은 대승을 거두었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당을 지지한 신자는 마냥 분개하고 야당을 지지한 신자는 마냥 기뻐해야 할까? 선거는 끝났다. 이제는 자신을 성찰할 시기다. 특히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했던 수많은 말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신자는 후보나 정당에 대해서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많은 말을 쏟아 냈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이 진실일까? 진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진실을 확신하다 해도 어느 정도로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신자가 어떤 후보를 향해 비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비판은 어디에 근거한 정보일까? 스스로 그 정보를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보는 누군가가 제공한 정보다. 그 정보원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대중매체일 수도 있지만 주로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받은 내용이다. 요즘에는 카톡방이나 유튜브가 근거 없는 정보의 근원지가 된다. 그들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나서도 사과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많은 거짓 정보를 유통시킨다.
어떤 신자가 카톡방에서 들었던 것을 가지고 어떤 후보자에 대한 비방을 사실이라 판단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고 가정해 보자. 선거가 끝난 후에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실한 신자라면 자신이 올린 카톡방에 거짓 정보라고 공지하면서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자는 그것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책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신자들에 의한 무책임한 퍼나르기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에 대해서 신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이 접하는 정보원에 대한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정보 제공자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것은 공영 언론이 공신력을 잃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이전과 같이 언론의 건전한 비판 기능을 많이 상실했으며 사주의 이익에 충실할 뿐이다. 방송을 제어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언론의 신뢰도를 더 떨어뜨리고 있다. 정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가장 신뢰할 만한 언론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기다.
자신이 신뢰할 만한 언론에서 얻은 정보라 할지라도 그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아무리 정직한 언론도 100% 진리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보 내용에서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카톡방에서 공유하는 것은 금물이다.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에 대한 책임도 마땅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참고만 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이 말은 어떤 정보도 공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내용이 확실하게 사실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 비판이 사실이니까 말해도 죄가 없는가? 신자도 거의 대부분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하고 상대 후보에 대해서는 나쁜 말만 하기 쉽다.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점은 말하지 않고 나쁜 점만 말한다면 그 말은 진실일 수 없다. 신자는 사실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거듭난 신자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죄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별식’과 같은 뒷담화
총선에서 했던 신자들의 여러 언행 방식은 진실한 회개가 없다면 교회 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신자들이 교회 생활에서 입으로 쉽게 짓는 죄는 뒷담화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한국 사람처럼 뒷담화를 좋아하는 민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신자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닌데 뒷담화는 위기의 순간에 교회 공동체를 심각하게 해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의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뒷담화가 조성될 여러 상황이나 제도가 존재한다. 교회에는 구역, 셀, 전도회 같은 수많은 소그룹 모임이 있다. 이 모임들이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여러모로 해를 준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소그룹 모임에서 자신들의 삶을 서로 나눌 때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쉽게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다. 공식 모임은 그나마 괜찮지만 통제되지 않은 비공식 모임에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수 있다. 정도가 심하면 그 소그룹은 다툼과 원망의 근원지로 바뀐다.
교회 안에서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인기가 많다. 많은 신자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증거다. 다른 신자들의 삶에 대해서 궁금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신자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지혜로운 신자들은 남의 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와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신자들이 남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비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점에서 교리문답(하이델베르크 112문답)은 아주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첫째는 남의 말을 왜곡하지 않기다. 이 말은 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곡해로 인해 불필요한 다툼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고 확산되고 있다. 왜곡만 사라져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둘째 지침은 뒤에서 헐뜯지 않기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뒤에서 헐뜯는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자신이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헐뜯고, 지위 높은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를 따돌리기 위해서 헐뜯는다. 손쉽게 남을 해치는 방법이 뒤에서 헐뜯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 죄를 범한다. 신자들은 남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내가 이것을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으면 말해도 될 것이다.
셋째 지침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지 않고 성급하게 정죄하지 않기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성급한 판단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급한 판단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당사자 말을 들어 보면 납득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동의는 안 되지만 이해라도 할 수 있으며,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하얀 거짓말?
거짓말은 목적에 따라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별될 수 있다. 1) 남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 2)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 3) 자신의 유익을 위한 거짓말. 이 중에서 남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은 십계명에서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위한 거짓말에 대해서 신자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아내에게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했다(창 12장).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녀의 거짓말에 속은 바로에게 벌을 내리셨다. 이와 유사한 일이 두 번이나 더 반복되기 때문에(20, 26장) 신자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역사적 본문을 오늘날 윤리적인 지침으로 삼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 본문의 중심 주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가장 가볍게 여기는 거짓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은 보통 하얀 거짓말로 불리는데 대표적인 예로 “새 옷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와 같은 말이다. 물론 신자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항상 자신의 판단을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그런 식의 아첨을 남발하게 되면 상호 간의 신뢰감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하게 될 어떤 말도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살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가’라는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다. 병명을 속여서 환자에게 희망을 갖게 하면 실제로 치료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사실을 이야기해 당사자로 하여금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다.
착한 거짓말은 실제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희망고문으로 종종 나타난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이 격려의 말이 아니라 빈말로 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희망이라는 것은 정확한 사실에 기반할 때 힘을 갖는다. 희망이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망일 뿐이다. 이와 같은 희망은 종종 수련회에서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곳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전부가 거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기가 심히 어렵다.
일반적으로 부흥회나 수련회에서 강사들은 사실의 일부분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멋진 삶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언뜻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멋진 삶”, “위대한 계획”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하나님 말씀이라고 보기 어렵다. 설교란 청중이 가지고 있는 “멋진 삶”을 성경이 말하는 멋진 삶으로 바꾸는 것이지 청중의 생각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부터
상대방이 나쁜 일을 했음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하더라도 신자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은 상대방의 자그만 잘못은 부풀리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1-3에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남의 잘못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닫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비판을 하려면 그 비판이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어떤 기준을 갖고 비판하는데, 그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돼야 한다. 더 나아가서 신자가 정당한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있는 들보부터 제거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쁨의 정도를 판단함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로마교회의 교리를 비교하면 좋은 지침을 얻을 수 있다. 로마교회는 죄 자체를 죽을 죄(mortal sin)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로 구분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아무리 작은 죄라 하더라도 죽을 죄이며, 아무리 큰 죄라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고 주장하면서1 로마가톨릭교회의 죄 교리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가들이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동일한 죄라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해악의 정도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고, 그 인식은 대교리문답 151문답에 상세히 잘 정리돼 있다. 동일한 죄라 하더라도 1) 누가 죄를 죄었는지 2)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 3) 어떻게 죄를 짓게 됐는지 4)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죄를 지었는지에 따라 죄의 경중은 달라진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남을 비판할 때 아주 훌륭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침을 배우지 못하면 신자들은 불신자와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 신자들은 성급하게 남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거나 그 비판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전보다 지역 간, 계층 간, 남녀 간, 세대 간 갈등이 훨씬 심각해졌고 그 기저에는 수많은 거짓, 비방, 조롱 등이 깔려 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 내 분쟁 & 치리
최근에 많은 교회가 여러 이유로 분쟁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파벌이 조성된다. 주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교인들을 최대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다. 일단 비난이 시작되면 거짓에 의해 확산되고 그 이후에 제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도 야고보는 혀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셨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분쟁이 없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평안한 교회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분쟁에 휘말릴 수 있음을 교회 지도자들은 직시해야 한다. 교회 안에 분쟁이 일단 생기면 단지 “사랑합시다”, “기도합시다”와 같은 가벼운 말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 말 자체가 “입 다물고 조용히 하라”는 말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평소에 미래의 분쟁을 대비해 치리 제도를 잘 정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당회가 잘 조직돼 있다면, 당회는 거짓 유포를 매우 엄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만약 거짓을 전파하면 그에 상응하는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할 것임을 모든 교인에게 미리 교육을 통해 충분히 인식하게 한다면 분쟁이 생기더라도 확전되지 않을 것이다. 치리 제도가 교회의 분쟁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엡 4:15). 아무리 참된 것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랑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은 교회를 무너뜨릴 뿐이다. 바울은 또한 사랑의 속성 중 하나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례한 말은 아무리 그것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용납돼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무례하고 분노에 가득 찬 정치적 구호에 환호하는 신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총선을 통해서 드러났다. 이제 차분히 진정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의 들보부터 빼서 미래에 일어날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치리회를 잘 세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주
1) 이성호, 《비록에서 아멘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그책의사람들, 2022), p. 305.
첫댓글 말....말이라는게 참 위로가 되기도 하고 한번 잘못 쏟아놓으면 하루 종일 많이 힘들기도 하다...오늘이 그렇다...
사랑 안에서 무례히 행치 않는 행동과 말~~우리 함께 노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