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그의 선조(先祖)는 밀양(密陽) 사람인데, 송당(松堂)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공의 증조는 좌찬성(左贊成) 박호문(朴好問)이고 할아버지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박철손(朴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박수종(朴壽宗)이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우리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의 손녀이다. (정부인의) 아버지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처음에 세자(世子)가 되었으나 우리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이 여러 왕자들 중에 훌륭한 덕이 있었으므로 거짓 미친 체하고 세자의 자리를 양보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태백(太伯)과 우중(虞仲)1)에 비유하였다.
명(明)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7년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선생이 태어나 아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랐는데, 아버지 참판공(參判公)이 이름은 영(英)으로 짓고 자(字)는 자실(子實)로 지어 주었다. 선생이 태어난 지 5년 만에 참판공이 죽고 7년 만에 어머니 정부인이 죽고 10년 만에 할머니 숙부인(淑夫人)이 죽어 3년상이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안동공(安東公)이 또 죽었으므로 선생이 나이 12세로 중복(重服)을 입고 거상(居喪)하였다. 3년상을 끝마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16, 7세에 이미 용맹으로 소문이 났고 21세에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 (여진(女眞)) 정벌에 참여하고 그 이듬해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에 무과(武科)에 선발되어 무사(武士)의 반열에 섰다. 그 뒤 3년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에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이 승하하고 그 뒤를 계승한 임금이 바로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선생이 정사가 어지러워질 줄을 알고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낙수(洛水)의 위에 살면서 당시의 명유(名儒) 정붕(鄭鵬), 박경(朴耕)과 더불어 교유하며 스승과 벗이 되었는데, 정붕의 문하에서 ≪대학(大學)≫ 경전(經傳)을 강론하였고 학문이 통달하자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우리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 4년(1509년)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에 반란을 일으킨 삼포(三浦)의 왜인(倭人)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크게 동원할 적에 공을 특별히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하여 창원(昌原)으로 출동하였다. 삼포의 왜란(倭亂)이 평정되자 다시금 벼슬하지 않았다가 3년 뒤에 황간 현감(黃澗縣監)에 임명되었고 부임한 지 3년 만에 치적(治績)이 좋아 강계 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로 발탁되었다. 그 뒤 또 3년 있다가 치적이 좋아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되어 좌승지(左承旨)까지 되었고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경술(經術)을 가지고 나아가 치도(治道)를 개진하였는데, 모두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시대의 고사(古事)였다. 일시의 선비들이 많이 추종하였으나 소인배들이 많이 질시(疾視)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속으로 걱정하다가 곧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해 여름에 성절(聖節)을 축하하기 위해 연경(燕京)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조광조 등이 모두 죄를 뒤집어썼는데, 조광조는 결국 사약(死藥)을 받았다. 선생은 품계가 강등되어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에 있다가 김해 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로 나가 1년간 있었다. 이때 훌륭한 선비들은 모두 배척을 당하였으며, 선생도 관작을 삭탈당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무고(誣告)의 사건이 일어나 선생이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과 같이 정권을 쥔 자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유로 의금부(義禁府)로 불려가 문초를 받고 사형으로 논죄되었다. 선생이 강개하여 변론을 벌여 그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극구 말한 끝에 무고한 자가 도리어 처벌을 받고 선생은 풀려났다. 선생이 낙수(洛水)의 위에 16년간 살면서 두문 불출(杜門不出)하고 오로지 학문을 닦았는데, 학자들이 송당 선생(松堂先生)으로 일컬었다. 권력을 쥔 자가 패배하자, 주상이 다시 훌륭한 인사들을 불러들여 등용하고 선생은 영남 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 뒤 3년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나 그 고을 소재지에서 20리 떨어진 관동(官洞)에 묻히었다.
처음에 정붕과 박경이 선생을 찾아왔을 때 정붕이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산 너머에 무슨 물건이 있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다시 ‘그대는 산 너머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선생이 말하기를, “산 너머에 또 앞산이 있다.”고 하니, 정붕이 기뻐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회암(晦菴, 주자(朱子))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를 지었는데, 오교지목(五敎之目)ㆍ위학지서(爲學之序)ㆍ수신지요(修身之要)ㆍ처사지요(處事之要)ㆍ접물지요(接物之要) 다섯 편은 인륜(人倫)의 근본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체(道體)의 표준으로 미루어나가 치국(治國)하는 방도와 (하ㆍ은ㆍ주) 삼대(三代) 손익(損益)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그 글이 24편이다.
(선생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도승지(都承旨) 이세광(李世匡)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박거이(朴居易)는 국자 상사(國子上舍, 성균 진사(成均進士))이고 딸은 사인(士人) 김창봉(金昌鳳), 진사(進士) 남수정(南守正)에게 시집갔다. 박거이는 박돈복(朴敦復), 박돈인(朴敦仁)을 낳았는데, 박돈복은 생원(生員)이고 박돈인은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박돈인의 손자 박경지(朴敬祉)는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고 또 외손(外孫) 이여발(李汝發)은 여러 도의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하고서 조정으로 들어와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모두 청렴과 정직으로 일컬어졌다.
선생이 26세에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고 이미 학문을 쌓아 통달하자 자득(自得)을 제일로 삼아 주변 ≪소문(素問≫, ≪난경(難經)≫ 등의 글도 읽어 사방 풍토의 괴질(怪疾)을 잘 치료하였는데, 지금까지 남쪽의 의원들이 색상(色相)의 변화에 대해 저술한 선생의 글을 외워 전하고 있다. 선산(善山)은 예로부터 호걸의 인사들이 많았는데, 김주(金澍),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이맹전(李孟專), 정붕(鄭鵬), 히위지(河緯地) 7인과 선생이었다. 금오(金鰲)에 선생의 사당(祠堂)이 있고 황간현(黃澗縣)에서도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철인(哲人)이 우뚝 서니, 군자(君子)의 표상이도다. 고상한 행실로 높이 수립하니, 시끄러운 세속을 떠났도다. 무궁한 곳에 노닐어 오묘(奧妙)로 들어가니, 하늘과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꿰뚫었도다
송장정사(전)와 사당 문목사(후)
송당정사(松堂精舍)
조선 전기의 무신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건립하여 학문을 닦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200여 년 후 재건되었다.
영남의 학자 입재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지은 ‘송당정사 중건기(松堂精舍重建記)’에 ‘박영은 비봉산 아래 낙동강가의 오래된 마을로 내려와 집을 한 채 짓고 살면서 대학서목(大學書目)을 취하여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신당 정붕(鄭鵬 1467~1512)과 용암 박운(朴雲 1493~1562) 등 제현이 사우(師友)가 되어 함께 가르치고 인도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집을 세 칸으로 만들어 전후로 한 개의 시렁을 내고, 좌우에 방을 넣었으며 앞으로 당(堂)을 지어 봉산(鳳山)을 등지고 낙동강을 마주하게 하였다.’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현재 송당정사 앞에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비문을 쓴 박영의 신도비가 있고, 경내에 박영의 불천위 사당인 문목사(文穆祠)가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에 있다.
선생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그의 선조(先祖)는 밀양(密陽) 사람인데, 송당(松堂)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공의 증조는 좌찬성(左贊成) 박호문(朴好問)이고 할아버지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박철손(朴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박수종(朴壽宗)이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우리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의 손녀이다. (정부인의) 아버지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처음에 세자(世子)가 되었으나 우리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이 여러 왕자들 중에 훌륭한 덕이 있었으므로 거짓 미친 체하고 세자의 자리를 양보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태백(太伯)과 우중(虞仲)1)에 비유하였다.
명(明)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7년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선생이 태어나 아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랐는데, 아버지 참판공(參判公)이 이름은 영(英)으로 짓고 자(字)는 자실(子實)로 지어 주었다. 선생이 태어난 지 5년 만에 참판공이 죽고 7년 만에 어머니 정부인이 죽고 10년 만에 할머니 숙부인(淑夫人)이 죽어 3년상이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안동공(安東公)이 또 죽었으므로 선생이 나이 12세로 중복(重服)을 입고 거상(居喪)하였다. 3년상을 끝마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16, 7세에 이미 용맹으로 소문이 났고 21세에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 (여진(女眞)) 정벌에 참여하고 그 이듬해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에 무과(武科)에 선발되어 무사(武士)의 반열에 섰다. 그 뒤 3년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에 우리 강정왕(康靖王, 성종(成宗))이 승하하고 그 뒤를 계승한 임금이 바로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선생이 정사가 어지러워질 줄을 알고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낙수(洛水)의 위에 살면서 당시의 명유(名儒) 정붕(鄭鵬), 박경(朴耕)과 더불어 교유하며 스승과 벗이 되었는데, 정붕의 문하에서 ≪대학(大學)≫ 경전(經傳)을 강론하였고 학문이 통달하자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우리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 4년(1509년)에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에 반란을 일으킨 삼포(三浦)의 왜인(倭人)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크게 동원할 적에 공을 특별히 조방장(助防將)으로 임명하여 창원(昌原)으로 출동하였다. 삼포의 왜란(倭亂)이 평정되자 다시금 벼슬하지 않았다가 3년 뒤에 황간 현감(黃澗縣監)에 임명되었고 부임한 지 3년 만에 치적(治績)이 좋아 강계 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로 발탁되었다. 그 뒤 또 3년 있다가 치적이 좋아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소환되어 좌승지(左承旨)까지 되었고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경술(經術)을 가지고 나아가 치도(治道)를 개진하였는데, 모두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시대의 고사(古事)였다. 일시의 선비들이 많이 추종하였으나 소인배들이 많이 질시(疾視)하였으므로 선생이 마음속으로 걱정하다가 곧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해 여름에 성절(聖節)을 축하하기 위해 연경(燕京)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조광조 등이 모두 죄를 뒤집어썼는데, 조광조는 결국 사약(死藥)을 받았다. 선생은 품계가 강등되어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에 있다가 김해 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로 나가 1년간 있었다. 이때 훌륭한 선비들은 모두 배척을 당하였으며, 선생도 관작을 삭탈당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무고(誣告)의 사건이 일어나 선생이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인숙(柳仁淑)과 같이 정권을 쥔 자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유로 의금부(義禁府)로 불려가 문초를 받고 사형으로 논죄되었다. 선생이 강개하여 변론을 벌여 그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극구 말한 끝에 무고한 자가 도리어 처벌을 받고 선생은 풀려났다. 선생이 낙수(洛水)의 위에 16년간 살면서 두문 불출(杜門不出)하고 오로지 학문을 닦았는데, 학자들이 송당 선생(松堂先生)으로 일컬었다. 권력을 쥔 자가 패배하자, 주상이 다시 훌륭한 인사들을 불러들여 등용하고 선생은 영남 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 뒤 3년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년)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나 그 고을 소재지에서 20리 떨어진 관동(官洞)에 묻히었다.
처음에 정붕과 박경이 선생을 찾아왔을 때 정붕이 냉산(冷山)을 가리키며 ‘산 너머에 무슨 물건이 있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다시 ‘그대는 산 너머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아는가?’라고 묻자, 선생이 말하기를, “산 너머에 또 앞산이 있다.”고 하니, 정붕이 기뻐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회암(晦菴, 주자(朱子))의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를 지었는데, 오교지목(五敎之目)ㆍ위학지서(爲學之序)ㆍ수신지요(修身之要)ㆍ처사지요(處事之要)ㆍ접물지요(接物之要) 다섯 편은 인륜(人倫)의 근본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체(道體)의 표준으로 미루어나가 치국(治國)하는 방도와 (하ㆍ은ㆍ주) 삼대(三代) 손익(損益)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그 글이 24편이다.
(선생의 부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도승지(都承旨) 이세광(李世匡)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박거이(朴居易)는 국자 상사(國子上舍, 성균 진사(成均進士))이고 딸은 사인(士人) 김창봉(金昌鳳), 진사(進士) 남수정(南守正)에게 시집갔다. 박거이는 박돈복(朴敦復), 박돈인(朴敦仁)을 낳았는데, 박돈복은 생원(生員)이고 박돈인은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다. 박돈인의 손자 박경지(朴敬祉)는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렀고 또 외손(外孫) 이여발(李汝發)은 여러 도의 절도사(節度使)를 역임하고서 조정으로 들어와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고 한흥군(韓興君)에 봉해졌는데, 모두 청렴과 정직으로 일컬어졌다.
선생이 26세에 비로소 분발하여 글을 읽었고 이미 학문을 쌓아 통달하자 자득(自得)을 제일로 삼아 주변 ≪소문(素問≫, ≪난경(難經)≫ 등의 글도 읽어 사방 풍토의 괴질(怪疾)을 잘 치료하였는데, 지금까지 남쪽의 의원들이 색상(色相)의 변화에 대해 저술한 선생의 글을 외워 전하고 있다. 선산(善山)은 예로부터 호걸의 인사들이 많았는데, 김주(金澍),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이맹전(李孟專), 정붕(鄭鵬), 히위지(河緯地) 7인과 선생이었다. 금오(金鰲)에 선생의 사당(祠堂)이 있고 황간현(黃澗縣)에서도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철인(哲人)이 우뚝 서니, 군자(君子)의 표상이도다. 고상한 행실로 높이 수립하니, 시끄러운 세속을 떠났도다. 무궁한 곳에 노닐어 오묘(奧妙)로 들어가니, 하늘과 사람에 대한 가르침을 꿰뚫었도다
송장정사(전)와 사당 문목사(후)
송당정사(松堂精舍)
조선 전기의 무신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건립하여 학문을 닦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200여 년 후 재건되었다.
영남의 학자 입재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지은 ‘송당정사 중건기(松堂精舍重建記)’에 ‘박영은 비봉산 아래 낙동강가의 오래된 마을로 내려와 집을 한 채 짓고 살면서 대학서목(大學書目)을 취하여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신당 정붕(鄭鵬 1467~1512)과 용암 박운(朴雲 1493~1562) 등 제현이 사우(師友)가 되어 함께 가르치고 인도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집을 세 칸으로 만들어 전후로 한 개의 시렁을 내고, 좌우에 방을 넣었으며 앞으로 당(堂)을 지어 봉산(鳳山)을 등지고 낙동강을 마주하게 하였다.’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현재 송당정사 앞에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비문을 쓴 박영의 신도비가 있고, 경내에 박영의 불천위 사당인 문목사(文穆祠)가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