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죄를 씻으시고자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기억하는 오늘은 요한이 전한 복음을 듣게 된다. 니코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 복음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묵상해보고 싶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사람의 아들,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내려오셨기에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공적계시의 완성자이시다. 하느님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시지만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뱀이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죽어가던 이들을 치유해주었던 것처럼, 불순종의 죄로 인해 죽음을 향해가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치유를 안겨준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단 하나의 이유이다. ‘영원한 생명!’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너무나’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런 표현을 하셨을까? 외아들을 내어주심! 곧, 그분의 육화(肉化, incarnatio)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고백’이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참된 ‘경외심’이 아닌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곡해하는 것이다. 우리를 포옹하려고 다가오시는 분 앞에서 겁을 먹고 돌아서 도망치는 것과 같다. 이토록 큰 사랑고백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응답이 무엇일까? 당연히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복음 말씀은 정말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우리가 머리로 외우고 가슴에 새겨서 늘 꺼내볼 수 있다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의)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고통의 순간에도, 그분께서 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