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님의 카톡 메일.
2023년 05월 01일[Mon.] Good Morning!
【바닥이 판판한 돌만이 주춧돌이 되는 게 아니다.】
저는 폐사지(廢寺址)에 가면 가끔 주춧돌을 눈여겨볼 때가 있습니다.
폐사지의 주춧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것은 나무기둥이 놓였던
자리가 동그랗게 잘 다듬어져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다듬어지지 않고 울퉁불퉁한 것도 있습니다.
주춧돌은 집을 짓기 위해 기둥을 세울 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저는 그런 주춧돌을 볼 때마다 주춧돌로 쓰이는 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돌 위에 똑바로 앉히기 위해서는 꼭 바닥이 판판해야 주춧돌로서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주춧돌이 대부분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어느 한옥 관련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살 궁궐이나 고관의 집을 지을 때는 건축 미학적 측면에서 돌을 미끈하게
잘 다듬어 주춧돌로 썼지만, 일반 백성들이 살 집을 지을 때는 생긴 돌 모양 그대로
주춧돌로 썼습니다. 그것은 돌의 생긴 모양을 따라 나무기둥의
밑 부분을 파내면 되었기 때문인데, 그렇게 하는 것을 '그랭이질' 또는
'그레질'이라고 합니다.
그랭이질을 하면 돌바닥이 울퉁불퉁해도 집의 기둥을 세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돌을 다루기보다 나무를 다루는 게 더 쉽기 때문에 나무 밑동을 돌 모양에 맞춰 파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부터 이 사실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인생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바닥이 판판한 주춧돌이 필요했으나
그런 돌은 애초부터 제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내 인생의 집을 제대로 짓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그랭이질을 알고부터는 바닥이 판판하지 않은 돌로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허술해서 곧 무너질 것 같은 내 인생의 집이지만 그래도 지금
이 정도나마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랭이질에 대한 이해와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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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 P. 149 ~ 151 중에서
옮긴 이: S.I.AHN [정수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