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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지중해 크루즈
일시:2015년 11월 4일 수요일~14일 토요일
탐방국가:터키, 그리스,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인천공항 출발. 터키 이스탄불 도착
* 인천공항 출발
며칠 전 춥던 날씨가 월요일부터 풀려 포근하다. 11시에 공항 미팅이다. 짐 부치는데 장사진이다. 우리나라의 여행문화 발당 상징이다. 대한항공 KE955 14:25분 비행기가 조류와 충돌사고로 16:15분으로 지연 되었다. 1만원권 식권을 주어 중식을 했다. 우리 부부 좌석은 45B, 45C다. 비행기에 탑승하여 순조롭게 이륙했다. 유럽으로 가는 항로는 기류와 마주치는 관계로 한국으로 돌아올 때보다 소요시간이 길다. 1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기내 모니터로 영화 3편을 보았다.
1.로마의 휴일:그레고리팩, 오드리햅번 주연
영국 앤공주가 로마여행 중 일행과 분리되어 미국에서 온 기자와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다. 로마의 유적지인 스페인 광장, 진실의 입, 베네치아 광장, 콜로세움 등 내가 여행한 곳이 배경이어서 정겨웠다. 마지막엔 서로 사랑하게 되어 애절한 이별이었다.
2.빠삐용:더스틴호프만 주연
살인 누명을 쓴 빠삐용 이야기다. 가슴에 있는 나비 문신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프랑스 감옥에서 탈옥하여 호주 갭공원 해변 아슬한 바위 절벽에서 빠삐용이 코코낫 줄기 엮은 더미를 던지고 나비처럼 뛰어 내리는 장면은 눈부신 아픔이다. 동행했던 친구는 결국 뛰어내리지 못하고, 빠삐용 홀로 바다에 투신하여 코코낫 더미를 잡아 누워 둥둥 파도에 쓸려 갈 때, 자막의 언어는 그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3.마션 임파서블 로그테이션:탐크루즈 주연. 최신 영화
나는 몇 년 전 CGV 영화관에서 가서 미션 임파서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두바이 버즈 칼리파 초고층 건물을 타고 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번에는 두바이 제벨 하핏 산악도로 질주다.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 등 역시 내가 탐방한 명소가 나와서 친근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음악을 들으며 기내시간을 보냈다. 기내식으로는 쇠고기 요리와 닭고기 요리, 빵, 야채 등의 중식과 석식을 했다. 창밖은 점점 짙은 밤으로 캄캄해지고 있다.
* 터키 이스탄불 공항 도착
인천 공항에서 2시간 정도 지연하여 이륙한 비행기가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 예정보다 빨리 착륙했다. 14:25분 비행기였을 때보다 30분 정도 늦은 터키 이스탄불 시간으로 오후 8시 40분 경 도착했다. 아주 사뿐히 활주로에 내린다. 공항은 약간 덥다. 기온은 14도다. 입국장은 장사진이다. 현지 가이드와 미팅하여 호텔로 가서 투숙했다. 나는 두번째로 이스탄불에 왔다. 그래서 정감어린 도시다.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터키 이스탄불, 크루즈 배 승선
* 터키 이스탄불 호텔
6시에 모닝콜, 7시, 조식, 8시 출발이다. 시차 관계로 새벽 3시에 기상했다. 한국시간은 오전 9시다. 오늘은 보스포러스 유람선을 승선하고 유람하고, 크루즈 배에 승선하는 날이다. 버스를 타고 호텔을 출발하여 보터키 시가지를 지나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먼저 이동한다.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승선은 몇 년 전 이곳 육로 여행 때도 승선하여 여행했었다. 그래서 설레이는 여정이다.
* 터키 이스탄불 시가지 풍경
호텔을 출발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이동하며 시가지를 지나간다. 아침 햇살이 해변에, 시가지에 서서히 내려온다. 도로변에 아파트와 건물들이 많다. 자동차도 많다. 터키는 연리가 14%란다. 기름 1리터에 2300원으로 비싸단다. 숨겨진 이야기가 많단다. 지중해를 놓고 로마와 싸움이 잦았단다. 그러나 여기는 동지중해다. 터키는 380년 지배당하였다. 이스탄불 인구는 2천만 명이다. 교통이 10부제로 운행된다. 차를 1대씩 더 사서 10부제가 사실은 무용지물이란다. 교포 현지 가이드 남자는 항공료가 비싸서 한국에 못 간단다. 터키와 한국 편도 항공요금이 150만원이란다. 터키는 투르크인이라고 해야 좋아한단다. 커피를 중요시하는 나라란다. 나와 알라신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단다. 무조건 신의 뜻으로 생각한단다. 1년에 3500만명이 터키에 여행온단다. 터키에는 시리아 난민이 많단다. 유럽으로 가는 마지막 종착지가 터키 이스탄불 이곳이다. 왼쪽으로 멋진 아파트가 지나간다. 서울의 강남 같은 최고의 해안지역이다. 아파트에 투자하는 붐이 일고 있단다. 부자는 아파트를 많이 보유한단다. 50채 이상 보유자도 있단다. 월세 받아서 생활한단다. 오른쪽에 마르마다 바다가 보인다. 이스탄불은 유럽쪽과 아시아쪽으로 양분되는 도시다. 터키 수도는 앙카라다. 점점 바다 해안에 가까워지고 있다.
*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유람선 항구 주변 풍경
지중해 사람들은 친절하여서 인사를 좋아한다. 우리들에게도 인사하면 그냥 대화하란다. 해변에는 시리아 난민이 많다. 안타까운 풍경을 보기도 할거란다. 해변 공원을 지나 유람선 승선 항구로 갔다.
*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승선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 승선했다. 아침 해가 동쪽 아시아쪽에서 떠서, 그 반대인 서쪽 유럽쪽 시가지가 아주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아시아쪽은 역광으로 인하여 어둡게 보인다. 해협의 다리와 시가지 풍경이 비경이다. 조금 가니 우리가 오늘 승선한 MSC 선사 크루즈 배가 정박하고 있다. 참으로 반가웠다.
* 터키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에 놓인 갈라타 다리는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주요한 다리다. 개폐 장치가 설치된 웅장한 다리다. 각종 차량과 전차, 사람들의 통행이 가능하다. 터키 이스탄불의 골든혼Golden Horn에 걸쳐진 역사적인 다리다. 여러 차례 재건되었는데, 현재의 다리는 1994년에 완공된 것이다.도개교로서, 총 길이는 490m, 폭은 42m다. 양방향으로 각각 3차선 차도와 도보가 있으며, 중앙에 트램 노선이 지나간다. 기록에 따르면 골든혼, 금각만에 처음 다리가 놓인 것은 6세기 부터였다. 동쪽의 갈라타Galata 지구와 서쪽의 에미뇌뉘Eminönü를 잇는 현재 자리에 다리를 놓고자 처음 시도한 것은 1502년이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건설되지 못했다. 1845년에 최초의 다리가 놓였고, 18년간 사용되었다. 1863년에 다리를 재건했고, 1870년에 프랑스 회사에 의해 확장 공사가 시작되어 1875년에 완공되었다. 그 결과 다리의 길이는 480m, 폭은 14m가 되었다. 이 다리는 1912년에 철거되어 상류로 옮겨졌으며, 현재 구갈라타 다리Old Galata Bridge로 불린다. 1912년에 독일 회사가 놓은 새 다리는 길이 466m, 폭 25m이며, 1992년에 화재로 파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현재의 다리는 터키 건축회사에서 놓은 것으로 1994년에 완공되었다. 현재는 갈라타 다리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여행객들에게는 다리와 함께 이 모습도 큰 비경으로 다가온다. 유람선에서 바라보니 더욱 생생하게 보인다.
*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 본 크루즈
보스포러스 유람선을 타고 해협을 유람할 때, 우리가 오늘 승선할 크루즈 배가 정박한 항구를 지나간다.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의 이탈리아 선사의 MSC 오케스트라호 크루즈 선박이다. 참으로 반갑고 정겨웠다.
* 보스포러스 유람선에서 본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과 신시가지
유람선에서 보이는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이곳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해변을 따라 길게 자리한 웅장한 궁전이다. 이곳 궁전은 나중에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다시 와서 육지 여행시에 관람할 것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양쪽 기슭을 따라 펼쳐지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돌마바흐체 궁전, 루멜리 히사르 요새 등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고급 주택, 오래된 목조 별장이 늘어서 있다. 궁전 뒤로 보이는 신시가지도 상당히 아름답다. 아시아쪽은 주택지역이고, 유럽쪽은 건물이 많은 근무지역이다. 궁전이 있는 신시가지에 SIZER PLAZA라는 푸른 색 건물이 두드러지게 높다. 원래 고층 건축은 금지되는 곳인데 저 건물 주인이 자기의 전 부동산을 다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고 허락받아 지은 건물이란다. 신도시의 비경이다.
*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러스 다리
유람선은 어느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러스 다리에 다가왔다. 아시아쪽 구시가지에 거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이 이 다리를 건너 유럽쪽 신시가지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 한다. 바다 가운데 장엄한 풍경으로 놓여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 해협의 동쪽이 아시아, 서쪽이 유럽이다. 유럽 지역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출구인 골든 혼을 기준으로 다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로 나뉜다. 이 해협은 예로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흑해와 지중해,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수로로서 지리적 가치가 높아 중세의 교통로와 무역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냉전 시대에는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던 소련을 막는 마지막 보루였다. 길이 약 30km, 폭이 가장 좁은 지점은 약 600m에 불과한 작은 바다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빨라서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아시아와 유럽 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 다리가 2개뿐이다. 차량 이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두 지역을 통근하는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연락선을 이용한다. 유람선은 이제 깊은 의미를 지닌 긴 보스포러스 다리를 돌아 다시 항구로 귀환한다.
*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다리를 돌아나오는 유람선
유람선은 보스포러스 다리를 돌아나와 항구로 돌아간다. 아직도 아시아쪽은 역광으로 경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몇 년 전에 왔을 때도 이곳 유람선을 승선했었다. 그때는 오후 시간이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모두 잘 보았다. 푸른 바다 위를, 양편으로 이스탄불 시가지 풍경을 선사하며 바다 위를 질주하여 나아간다.
*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유람선 선착장 도착
승선했던 항구로 다시 돌아왔다. 하선하여 주변을 돌아보았다. 터키 국기가 배에 크게 걸려 있다. 시리아 난민들이 많은 곳이라서 조금은 애처오운 풍경이다.
* 터키 이스탄불 가변도로
오전은 도시로 진입하는 차로다. 오후에는 도시를 나가는 차로다. 이스탄불은 교통체증이 심하여 이런 가변도로를 만들었다.
* 터키 이스탄불 항구에서 크루즈 배 승선
터키 이스탄불 항구 크루즈 배 승선 선착장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승선하였다. 우리 부부는 여섯번째 맞이하는 크루즈 여행이다. 이탈리아 선사 MSC는 세번째 승선하는 크루즈 배다. 그래서 익숙한 절차다. 우리 부부의 룸은 12156호실, 12층 후미다. 오후 3시 30분에 구명조끼를 입고 안전교육을 받는다. 5시 30분에는 5층 로비에서 가이드와 미팅하여 선내 탐방이 있다. 6시에는 정찬식당에서 정찬식으로 석식을 한다. 크루즈 배는 바다의 호텔이다. 짐을 모두 풀어서 정리하고 휴식하며, 탐방도 하며, 벌써 크루즈 여행의 낭만에 젖어 행복하다.
* 크루즈 배에서 본 터키 이스탄불 시가지와 바다 풍경
크루즈 여행은 언제나 여유로워서 좋다.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을 넓히기도 하고, 고요한 낭만에 젖어보는 아름다운 여행이다. 지금 나는 터키 이스탄불 항구에서 아직 출항하지 않고 정박한 크루즈 배에서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다와 시가지를 조망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방 발코니에서 본 바다는 저녁 햇살이 자작이는 눈부신 풍경이다. 또한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왕래하는 크고 작은 배들이 더욱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선내 탐방으로 배를 한 바퀴 돌아볼 때는 이스탄불 신시가지와 구시사지를 모두 조망하였다. 육지에서 보는 것과는, 또한 보스포러스 유람선에서 본과도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이다.
* 터키 이스탄불 항구 출항
오후 5시경 크루즈 배는 이스탄불 항구를 출항한다. 항구의 출항은 언제나 벅찬 감동이다.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육로여행에서 얻지 못하는 야무진 전경으로 큰 선물이다. 석양에 물드는 바다를 크루즈 배는 서서히 미끄러져 큰 바다로 나아간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6층 정찬식당에서 쇠고기와 연어요리, 과일, 후식 등으로 맛있는 석식을 마치고 잠시 룸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9시 15분부터 10시까지 공연하는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오늘 공연은 헤리포터다. 이탈리아 선사의 크루즈 배 공연은 항상 무대장치가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공연이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꼭 관람한다. 오늘 공연도 역시 웅장하고 멋진 공연이다. 묘기와 함께 헤리포터의 주제를 잘 살린 공연이다.
2015년 11월 6일 금요일 전일 해상,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 크루즈 배 전일 항해
오늘은 크루즈 배가 전일 항해 하는 날이다. 어젯밤 터키 이스탄불 항구를 출항하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항구로 간다. 낮과 밤을 항해하여 내일 아침에 도착할 예정이다. 배에서 여러가지 시설을 즐기며 하루를 보낸다. 터키와 한국과는 시차가 -6시간이었는데 여기는 -7시간이다. 1시간이 더 늦다. 조식 뷔페 후 방에 오니 지중해 망망대해에 섬이 보인다. 큰 산이 바다 위에 앉아 있다. 그리스의 어느 섬이거나, 육지의 일부다. 민둥산에 하얀 집들이 곱다. 크루즈 배에서 처음 만나는 산 풍경이다. 참새 한 마리가 발코니에 날아왔다. 바다에서 만나는 생명으로 매우 반갑다.
* 크루즈 배 갑판 야외 수영장
우리 부부는 크루즈 여행에서 전일 항해 하는 날이면 수영장에서 주로 시간을 즐긴다. 오늘도 아침식사 후 배의 갑판에 잇는 야외 수영장에 왔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소통하며 행복한 시간이다.
* 크루즈 배 뷔페 중식
수영장에서 휴식하고, 뷔페 식당에 가서 중식을 했다. 풍성한 식단의 아름다운 식사다. 자신에게 맞는 메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이탈리아 선사라서 이탈리아 음식도 많고, 특히 다양한 과일이 흐뭇한 식단이다. 두고두고 그리울 맛있고 아름다운 음식들이다. 바로 창문 밖은 푸른 물 출렁이는 지중해 바다다. 바다를 바라보며 환상적인 낭만의 식사다꿈 같은 시간이다. 먼 후일 우리 부부는 이날을 회억하며 참 많이도 행복할 것이다.
* 지중해에서 만난 섬 풍경
크루즈 배 여행은 고독한 바다만 보이기도 하고, 섬이 보이기도 한다. 무언가 바다에서 형체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흐뭇한 풍경이다. 지금 눈앞에 우람한 섬이 전개 된다. 하얀 구름이 드리운 섬이다. 청청한 바다에 굳건하게 떠 있는 섬이 석회암 민둥산이지민, 큰 경을 선사한다.
* 크루즈 배 갑판 풍경
중식을 마치고 크루즈 배 탐방으로 먼저 갑판에 올라왔다. 바람이 많이 분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운동할 있는 산책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지중해의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여정이다.
* 크루즈 배 갑판에서 본 망망한 지중해 바다
지금 크루즈 배가 지나가는 곳은 지중해의 망망한 바다 가운데다. 오직 청청한 하늘과 바다만이 전부의 풍경이다. 하얀 구름이 생명의 깃발인듯 하늘에 둥둥 떠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모자를 흔든다. 바다 위의 호텔인 크루즈 배는 계속 크로아티아로 향해 질주하고 있다.
* 크루즈 배 선내 화려한 낭만
크루즈 배의 선내 정경은 매우 그윽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다. 화사한 조명은 더욱 화려한 낭만을 선사한다. 우리 부부는 갑판에서 내려와 6층과 5층에 걸쳐 있는 로비를 중심으로 탐방했다.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고운 풍경 속에서 행복을 걸음을 걷기도 하고, 로비 의자에 앉아 고아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모두 다 두고두고 그리운 추억이 될 것이다.
* 크루즈 배 선실과 발코니 고운 풍경
크주브 배는 선실이 세 종류다. 창문이 전혀 없는 인사이드 룸, 창문은 있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요션뷰 룸, 창문을 열고 마음대로 바다 가까이 나갈 수 잇는 발코니 룸이다. 우리 부부는 항상 발코니 룸을 택한다. 여행요금은 조금 비싸지만 발코니에서 바다와 접하며 얻는 행복은 그 몇 배의 행복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전일 항해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아름다운 옷으로 차려 입고, 멋있고 단장도 하고,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발코니에는 벤치가 있어 앉아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저런 셀카도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크루즈 배 정찬 석식 1
오늘은 크루즈 배에 승선하여 처음으로 정찬식 복장으로 정찬 석식을 맞이 하는 날이다. 또한 갈라 디너 쇼가 있는 날이다. 가장 아름다운 선내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모두 고운 복장으로 차려 입고 정찬 식당으로 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그 나라의 고운 의상도 본다. 그리고 서로 눈인사로, 혹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크루즈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색 체험을 한다. 그리고 또한 나를 가장 아름답게 꾸미는 복장과 단장으로, 스스로 흐뭇한 행복에 젖기도 한다. 분주한 일상에서 가져보지 못한 화사한 행복이다. 우리 한국팀이 배정받은 정찬식당은 6층 후미 콰트로 벤티 식당이다. 오후 6시부터 식사가 시작된다. 오늘 메뉴는 연어, 샐러드, 왕새우, 와인 등이다. 모두 각 테이블마다 지정된 식당 승무원이 서빙해준다. 최상의 음식과 최상의 서빙으로 아름다운 석식이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2
첫날에 이어 두 번째로 보는 대극장 공연이다. 석식을 마치고 잠시 룸에서 휴식한 후, 저녁 9시 15분부터 시작하는 공연을 관람했다. 대극장은 배의 앞부분 6, 7층에 걸쳐 있다. 오늘 주제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세상'이다. 우리 부부는 극장의 앞자리에 앉아서 관람했다. 식전 행사로 4명의 남자들이 손님을 쫓아 따라오며 손님이 하는대로 따라하여 객석은 한바탕 웃음 바다다. 정작 선택받은 그 한사람만 모르고 있으니 정말 재미있는 연출이다. 출연자들이 고양이 복장으로 나와서 열심히 공연한다. 춤, 무용, 노래, 뮤지컬, 때로는 아슬한 묘기 등으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소녀가 줄을 타고 오르내리며 멋진 묘기를 부린다. 공을 치는 묘기를 부리는 남자도 인상적이다. 배는 바다를 항해하고 우리는 멋진 공연을 관람하는 아름다운 밤이다.
2015년 11월 7일 토요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고성, 스르지산 전망대
* 크루즈 배 지중해 일출
아직 배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가고 있다. 지중해에서 맞이 하는 일출은 비경이다. 고운 태양이 바다를 가르고 나와 눈부신 햇살이 장엄한 바다에 쏟아 내린다. 망망한 바다에 오직 찬란한 태양만이 크루즈 배의 감격스런 선물로 솟구쳐 오른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항구 입항
배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항구에 입항한다. 지금 시각이 오전 11시 30분이다. 우리 부부는 두번째로 오는 곳이다. 그러나 육로여행과는 다른 풍경이다. 아름다운 다리도 보이고, 붉은 지붕의 고운 집들이 바다와 함께 비경을 선사한다. 항구로 기항하며 타고 들어가며 두브로브니크의 전경을 보여준다. 전에 왔을 때 유람선을 타고 보았던 로크룸 섬도 전경이 보인다. 꿈속 같은 아름다운 뱃길이다. 중식을 마치고 하선 준비를 했다. 오늘은 두브로브니크 고성과 스르지산 전망대를 탐방한다. 수신기와 선글라스, 카메라, 선상카드만을 가지고 나간다. 여권, 돈, 약 등은 룸의 금고에 보관하면 된다. 선상카드가 바로 신분증을 대신한다. 우리 부부는 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입고 가능한 주머니에 넣어 가방을 메지 않았다. 가벼운 걸음으로 상쾌한 여행을 하기 위해서다. 하선하여 MSC에서 주선하여 준 버스로 이동한다. 지난번에 이곳에 여행 왔을 때의 회억으로 벌써 셀레는 마음으로 벅차오르는 여정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프란시스코 수도원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고성에 도착하여 서문인 펠레문으로 입장했다. 먼저 번에 왔을 때 입장햇던 바로 그 문이어서 반갑고 정겨웠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이는 풍경은, 이곳이 얼마나 값진 여행지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이미 두브로브니크 고성을 탐방했기에 그 가치를 익히 알고 있다. 성문을 들어서니 바로 성프란시스코 성당을 만난다. 오노플리안 분수도 바로 앞에 있다. 이 수도원은 외형도 중세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년 건축물이지만, 100년 된 약국이 안에 그대로 있다. 현재는 그 약국 업무는 정지되었지만 , 현대 약국에서 약사가 약국 업무를 맡고 있다. 오늘 우리는 스도원 안으로 입장하여 세밀히 탐방한다. 원래의 수도원은 14세기에 건설되었는데 당시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물이었으나 1667년 대지진으로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의 수도원은 오래된 프레스코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섬세한 기둥 장식이 정원을 감싸고 있다. 남쪽의 커다란 현관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조각 장식은 이 지역 최고 수준의 페트로비츠 형제가 일일이 제작했다. 현관의 웅장한 규모로 미루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약 제조로 유명했고 지금은 제약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중세시대의 약 제조에 관한 역사는 물론 기구나 방법 등에 관한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에는 유명한 도서관도 있는데, 고대의 원고, 귀중한 단행본, 손으로 일일이 쓴 원고, 보물급 공예품 등 수많은 작가들과 역사가들의 작품 및 방대한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벽면에는 성화도 걸려 있고. 오래 된 약국의 사진도 걸려 있다. 내부 곳곳을 탐방하고 나왔다.
* 크로아티아 두브르브니크 유럽 최초 약국
유럽 최초의 약국은 업무가 정지되어 볼 수 없다. 대신 벽면에 100년 전 운영하던 그때의 약국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 대신 오늘날 업무를 보는 현대의 약국을 탐방했다. 여자 약사가 있었다. 약국은 두브로브니크 고성 안의 프란체스카 수도원 건물에 있다. 약을 사러 오는 현지 주민도 보았다. 나의 작은 아들과 작은 며느리도 약사다. 한국 복지부 산하의 기관에서 약사 업무를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던 약국과 약사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다. 특히 이곳 약국에서는 천연 향기 그윽하여 더욱 흐뭇하고 좋았다.
* 크로아티아 두브르브니크 오노플리안 분수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성벽의 정문인 필레문으로 입장하여 고성에 들어오면 오노플리안 분수Onofrio's Great Fountain가 바로 눈앞에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원 바로 앞에 있다. 1448년에 오노플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만들었으며 분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아주 오랜 연륜을 지닌 분수다. 중앙에 커다란 돔 모양의 석조 물이 있고 그 아래는 16면으로 되어 있으며 각 면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원래는 돔 위에 커다란 쿠폴라와 조각상이 장식되었으나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규모가 크고 지리적으로도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분수의 물은 약 20km 떨어진 리예카 두브로바츠카(Rijeka Dubrovacka)에 있는 우물에서 공급받는데, 둘 사이에 놓인 수로는 크로아티아에서 건설된 최초의 수로이며 당시로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물을 공급받는 시설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플라차 거리가 길게 전개되고. 거리 곁에 한적한 곳에 분수가 있다. 오노플리안 분수는 그 규모가 매우 크다. 16개의 수도꼭지에는 부조상이 부착되어 있어 더욱 중세풍의 향수를 더해준다. 분수에서는 누구나 물을 먹을 수 있다. 사람들이 항상 많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 부부는 두번째로 온 곳이어서 더욱 반갑고 정겨웠다.물을 먹기도 하고, 물병에 받아 고성을 탐방하며 먹기도 한다. 이곳은 물을 급수하는 역할도 하지만 여기에 온 관광객들이 만나는약속 장소로도 주목받는 곳이다. 그래서 항상 이곳 분수 주변은 사람들이 많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플라챠 거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고성에 있는 거리다. 구시가지의 중심거리로 서쪽에 있는 필레 게이트(Pile Gate)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플로체 게이트(Ploce Gate)까지 이어진다. 1468년에 건설되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었고 도로의 총길이는 약 280m이다. 하루 종일 관광객과 사람들로 가득찬 활기찬 곳이며 대리석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았다. 스트라둔 거리라고도 한다. 스트라둔은 거리를 뜻한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1층은 상점,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고 위층은 대부분 주거용 집이다. 이전에 스트라둔 거리는 화려한 궁전들로 가득 찼으나 모두 지진으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667년 대지진 이후에 들어섰다. 이러한 이유로 주거용 건물이 빨리 들어서야 했기에 정부의 복구 프로그램 일환으로 건물의 높이와 건물의 외관 및 출입구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건물은 대체적으로 차분하고 수수한 모습이다. 길게 전개되는 중심도로인 플라챠 거리에는 세게 각국에서 온 여행객과 자국민들로 활기가 넘친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이번에도 여전히 붐비는 거리 풍경이다. 멀리 보이는 시계탑까지 걸어가며 돌아볼 것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골목길과 기념품 가게
달마티안(Dalmatian) 해변에 있는 아드리아 해는 13세기 이후 지중해의 요충지였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1667년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교회, 수도원, 궁전과 분수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90년대에 무력 분쟁 때문에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유네스코의 중요 복원 프로그램으로 복구하고 있다. 중심도로인 플라챠 거리를 걷다보면 많은 골목길을 만난다. 아주 좁은 골목길 양편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한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중세의 향수가 배여 있다. 또한 거리 양편으로는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모두 그 옛날을 재현하는 그윽한 풍경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고성 카페
플라차 거리 거의 끝 부분에서 만난 카페다. 유럽 여행에서는 곳곳에서 이런 노천 카페를 종종 만나곤 한다. 역시 이곳 고성에서도 만나니 참으로 정겹고 흐뭇하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블라이스 성당
성블라이스 성당은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고성에 있는 아주 웅장하고 깊은 의미가 담긴 성당이다. 구시가지의 중심가인 플라챠 거리 광장에 위치하며, 두브로브니크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성당이다.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에게 헌납되었으며 입구 위에 그의 조각상이 서 있다. 1368년에 건립되었다. 1369년에 화재가 나서 피해를 입었다. 1667년 대지진 때는 거의 파괴되었다. 지금의 바로크 양식 건물은 1706년에 시작하여 1717년에 완공되었다. 베네치아의 건축가인 마리노 그로펠리(Marino Gropelli)의 설계로 건축된 건물이다.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핵심이 되는 랜드마크로 도시인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하다. 1971년에 지역 예술가들이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몄다. 정면 계단에서는 도시의 주요한 행사인 새해 전날 행사 또는 여름페스티벌의 오프닝 등이 개최된다. 성블라이스를 기리는 페스티벌은 1972년부터 매년 열리는데 두브로브니크 시민들의 오랜 전통이다. 성당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리 부부도 두번째 온 곳이어서 낯익은 성당이다. 오늘도 자세히 둘러보며 이곳 시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성블라이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간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블라이스 성당 앞 올란도 동상
성블라이스 성당 앞에는 올란도라는 사람의 동상이 칼을 들고 서 있다. 올란도는 중세 프랑스 기사 이름이다. 두브로브니크의 독립과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동상 아래 받침대 길이는 척도를 재는 용도로도 쓰인다. 무역하던 상인들이 그 당시 상품의 길이를 가늠하던 것이다. 성인 남자 팔 하나의 길이인 약 51Cm다. 이곳 두브로브니크는 상품 거래가 아주 정직했단다. 그런 연유로 올란도 동상 받침대를 각지게 만들고 그 길이를 척도의 용도로 사용했던 것 같다. 지난번에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올란도 동상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게 되어 기쁘고 흐뭇하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폰자 궁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 있는 건축물인 스폰자 궁Sponza Palace은 구시가지의 스트라둔 거리 끝에 있다. 외형이 상당히 아름다운 구조다. 1516~1522년 해상무역 중심 도시국가 라구사공화국의 모든 무역을 취급하는 세관으로 지었다. 당시 드브로브니크에 지배적이었던 후기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로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가 건설을 맡았다.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으며 우아한 아케이드, 기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 등이 특징이다. 중앙홀은 예전에 많은 무역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용되었고 한쪽 부속건물에는 14세기 국립조폐국이 들어섰으며 그밖에도 은행·귀중품창고·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관과 건물의 조각장식은 안드리지치 형제가 담당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며 1667년의 대지진에도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본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16세기 말에 라구사공화국 중앙문화센터로 바뀌었다. 현재 매년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의 개막식이 열리며 중앙홀은 미술관으로 이용된다. 우리는 외관만 조망하였다. 아치형 문과 독특한 창문 등 중세의 향기가 물씬 배인 건물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시계탑
이것은 종탑이라고도 부른다. 구시가지의 중앙로인 스트라둔 거리의 동쪽 끝 루자 광장Luza Square에 위치한다. 우뚝 솟은 탑은 정문을 들어와 플라챠 거리에 들어서면 중심도로 맨 끝에 우람하게 서 있다. 맨 꼭대기는 종이, 중간 부분에는 시계가 부착되어 있다. 우아한 모양의 종탑으로 높이는 35m이다. 1444년에 건설되었으나 파괴되어 1928년에 다시 건설되었는데, 맨 위에 있는 종만은 처음에 건축했을 당시인 15세기 것이다. 탑은 맨 위는 왕관 모양이고 그 밑에는 사방이 아치형으로 뚫려 있다. 이곳에 커다란 종과, 양옆에 2명의 남자가 망치를 들고 종을 치려는 모습의 조각이 있다. 종은 유명한 주조자가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무게는 2톤이고 녹색을 띠고 있다. 종 밑에는 굴뚝처럼 긴 모양의 시계가 놓여 있다. 시계는 숫자가 표시되지 않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모양으로 시간을 알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그 당시의 시계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마린드르작 목사 동상
크로아티아의 극작가며 목사였던 마린드리르작 동상이 시청사 앞에 있다. 내가 기념사진을 찍으려 동상 옆에 서 있는데 어떤 여자가 곁으로 다가오며 함께 사진 찍자고 한다. 호의로 받아 들이고 함께 사진 찍고 난 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벨기에에서 왔단다. 나는 벨기에에 간 적이 있다고 말했더니 매우 반가워 했다. 여자 친구 둘이 이곳에 여행 왔단다. 세계여행을 하다보면 낯설지만 참으로 정겨운 만남이 이루어곤 한다. 이것도 세계여행의 큰 낭만이며 큰 소득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렉터 궁전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 있는 궁전은 1435년 두브로브니크 수로와 분수를 건설한 오노프리오 데 라 카바Onofrio de la Cava가 건축했다. 후기 고딕과 초기 르네상스양식을 혼합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며, 귀족들을 위한 업무와 종교행사 때만 사용하였다. 궁전 정면 입구의 아치형 문과 우람한 기둥들이 아직도 궁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총격으로 심하게 부서지고 1667년 대지진으로 건물이 심각하게 훼손된 후 17세기에 바로크양식으로 보수되었다. 문 앞에는 교회 의자처럼 장식한 석조 벤치가 놓여 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었는데, 두브로브니크 여름축제 기간에는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 들어서자마나 흉상 동상이 보인다. 그는 이 궁전 건물을 건축할 때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란다. 2층은 현재 시 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라구사공화국시절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1만 5000점의 회화작품 중 대부분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예술가들의 작품이다.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 있어서 외형만 촬영했다. 2층에도 둥근 기둥들이 아주 많다. 1층 곳곳에도 그 당시의 생활상을 잘 재형해 두었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원경
렉터 궁전을 나와 성모승천교회로 올라 가는데, 성 블라이스 성당과 렉터 궁전 사이로 멀리 스르지산이 보인다. 산정 꼭대기까지 오롯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곳 탐방을 모두 마치면 저 스르지산을 케이블카로 올라갈 것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모 승천 대성당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확히는 성모 승천 대성당이다. 렉터 궁전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돔 지붕이 오롯한 건축물이다. 원래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건축되었고 1667년 대지진에 의해 파괴되자 1672년부터 1713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인 안드레아 불파리니와 파올로 안드레오티가 로마-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다. 가운데 돔 모양의 지붕이 높이 솟아올라 있어 아름답다.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성 블라이세(St. Blaise)의 유물을 포함한 수많은 보물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으로 된 작은 보석상자에는 그의 유골과 발이 보관되어 있다. 성당 외부는 고급스러운 회색으로 되어 있고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내부는 밝고 바람이 잘 통하게 디자인했으며 로마네스크와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장식으로 치장했고 벽화로 마감하였다. 주 제단은 금색의 플립티크 디자인으로 되어 있으며 티탄(Titan)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졌고 옆 보조제단은 보라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다. 내부에도 잠시 들러서 탐방했다. 사진촬영은 금지 구역이다. 대성당을 나와 다시 내려올 때 우람한 건축물들의 긴 그림자가 골목길을 덮어 아늑했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올드 항구
올드 항구는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시계탑 앞에서 성문을 나와 바다쪽으로 가면 만난다. 구시가지에 있는 항구로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과 쿠르즈가 정박한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인 로크룸섬(Lokrum Island)으로 향하는 배를 탈 수 있다.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는 올드 항구 노천 식당에서 현지 특식인 오징어 먹물밥으로 중식을 하고, 유람선을 타고 로크룸섬 주변의 아드리아해를 유람했었다. 항구 옆에는 해양박물관이 있고 이는 성벽의 동쪽과 연결되어 있다. 햇살이 매우 강하게 내려 쪼이며 비경을 선사한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
두브로브니크 성곽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요새에 속한다. 우리는 성곽을 조망하며 스르지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가고 있다. 성곽은 10세기에 건설되어 13~14세기까지 증축하거나 보완하여 현재 성벽 모습의 기초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침략자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성벽을 더욱 견고하고 두껍게 보완하였다. 도시 전체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성벽의 총길이는 1.949km 이며 최고 높이는 6m, 두께는 1.5~3m나 된다. 두브로브니크의 역사와 중세시대 성벽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고의 관광지이며 시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산책길이다. 성벽에는 두 개의 타워와 두 개의 요새가 있다. 탑은 민체타(Minceta)탑과 보카르(Bokar)탑이고 성벽의 동남쪽에 위치한 주 출입구는 아주 웅장하며 파일 게이트(Pile Gate) 왼편에 위치한다. 아드리아 해안과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성벽 너머로 올드 항구도 보인다. 육중한 문을 나서 도로를 따라 걷는데 곁에 성곽이 매우 우람하게 늘어서 있다. 매우 높은 성곽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케이블카 승차장
스르지산은 두브로브니크 고성의 뒷편에 우람하게 선 해발 400m의 높은 산이다. 우리는 스르지산 전망대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승차하기 위해 점점 가파라지는 골목길을 올라가고 있다. 스르지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보인다. 승차장만도 고지여서 두브로브니크 시가지와 고성이 잘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케이블카 탑승
두브로브니크 고성 뒷편 언덕에서 스르지산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탑승했다. 서서히 열리는 아침 햇살이 아드리해를 촉촉히 적신다. 아직은 해무가 서려 아련한 바다 풍경이다. 그러나 두브로브니크 고성은 바로 아래에서 전경이 선명하게 눈에 담긴다.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장관이다. 우리는 고성 안을 모두 탐방하고 왔는데. 이곳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보는 고성은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바다 가운데 로크룸 섬도 아름운 풍경을 선사한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전망대
스르지간 전망대에 오르니 아드리아해 바다가 시원하게 전개되며 가슴을 벅차게 한다. 내 기억 속에 곱게 담긴 지난 여정의 추억이 더욱 솟구쳐 올라 진한 감동이 전율로 흐른다. 몇 년 전 발칸반도 여행에서 나를 미치도록 흔들었던 아드리아해 비경이다. 그리고 바다를 따라 줄기차게 이어지는 석회암 산들과 뽀얀 해변도로가 또한 그날의 버스를 타고 달리던 회억을 부른다. 그때는 이곳에 스르지산에 오르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서 여정을 보냈었다. 오늘은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행복한 여정이다. 붉은 기와지붕의 두브로브니크 고성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다. 그리고 카페도 있다. 커다란 십자가도 세워져 있다. 바다 위에 뜬 로크룸 섬이 환상적인 비경을 선사한다. 곳곳을 돌아보며 두브로브니크 시가지와 고성을 조망했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아름다운 전망대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스르지산 케이블카 하산
산정 전망대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탑승하고 스르지산을 하산했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자 스르지산에 오르는 도로가 보이고 울창한 나무들이 다가온다. 그리고 푸른 나무들 사이로 붉은 기와지붕의 아름다운 주택들이 산언덕을 따라 들어서 있다. 고운 풍경들이다.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항구 귀환
오후 4시경 다시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로 돌아왔다. 두브로브니크 항구에서 4시 30분 출항이서 서둘러 승선했다.
* 지중해 일몰 비경
크루즈 배에 승성하여 룸의 발코니에서 만난 지중해 일몰이 비경이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 떠나는 태양의 마지막 장렬한 빛이 장엄하게 물 위에 깔린다. 크루즈 여행에서 만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3
오늘은 두브로브니크 고성을 탐방하고 늦게 뷔페로 중식을 했다. 그래서 배가 불러 6시에 제공해주는 정찬석식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석식은 맨 처음 공연을 관람한 후 뷔페 식당에 가서 하기로 했다. 저녁 7시 15분 공연을 관람했다. 남자 출연자가 노래를 아주 잘 부른다. 관중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뜨거운 감성을 출렁이게 한다. 여자도 잘 부른다. 남녀의 사랑을 노래와 춤, 묘기 등로 표현하는 아주 흐뭇한 공연이었다. 행복한 밤이다.
* 크루즈 배 갑판 야경
맨 처음 공연하는 공연을 관람하고 나니, 저녁시간이 조금 여유로워서 공연이 끝난 후에 배의 갑판 위로 올라가 보았다. 망망한 바다가 어둠에 물들어 있다. 오직 크루즈 배에서 분사하는 불빛만이 바다를 수놓는다. 수영장의 푸른 물빛은 밤에도 찬란하게 갑판을 장식한다.
* 크루즈 배 뷔페 석식
공연 관람을 마치고 뷔페식당에 가서 푸짐한 저녁 식사를 했다. 풍성한 메뉴가 언제나 즐거운 식단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여러가지 신선한 과일을 먹는 것이 아주 큰 줄거움이다. 이 밤, 좀 늦은 저녁식사지만 우리 부부는 아주 고운 낭만을 곁들인 아름다운 저녁 식사를 했다.
* 크루즈 배 선내
저녁식사를 마치고 크루즈 배의 선내를 탐방했다. 곳곳에서 밝히는 실내 조명이 매우 고혹의 물결이다. 극장에서는 두번째 공연을 하고 있다. 아늑한 카페에도 앉아서 서구의 낭만을 느껴보고, 참으로 행복한 밤이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이탈리아 베니스, 베니스 탄식의 다리, 산마르코 광장 등
* 이탈리아 베니스 항구 입항 비경
아침 9시에 크루즈 배가 이탈리아 베니스 항구에 기항한다. 우리는 8시 45분에 로비에서 인솔자를 만나 하선할 것이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꼭 와 보고 싶었던 이탈리아 베니스를 탐방하는 날이다. 이번 동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선택하여 온 것도 이곳 베니스를 탐방하기 위해서다. 터키도, 그리스도, 이탈리아도 다 여행했지만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여행하지 못해서 그렇다. 뷔페식당에서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룸의 발코니에 나가 베니스에 입항하는 비경을 보았다. 베니스의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가르며 점점 깊숙히 베니스로 들어가고 있다. 바다 해변에 들어선 물의 도시 베니스의 중세풍 건축물들이 비경을 선사한다. 청청한 바다와 만나는 베니스 시가지가 운하로 연결된 풍경도 매우 아름답다. 나는 베니스 입항의 비경 앞에 행복하여서 하선하기도 전 벌써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른다. 육로여행보다 훨씬 생생하게 체험하며, 크루즈 배의 12층 높은 객실에서 베니스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두 눈과 가슴에 넘치도록 담는다. 먼 후일 쓸쓸한 바람이 흔들 때, 우리 부부는 육신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지금 이 순간을 회억하며 훈훈할 것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본섬 가는 배 선착장
크루즈 배에서 하선하여 걸어서 워터택시 승차장으로 이동했다. 본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다. 이제부터 베니스에서는 이동수단이 배다. 배가 바다 위의 이동 차량인 셈이다. 우리를 태우고 입항한 MSC 크루즈 배가 보인다. 이렇게 바라보니 참으로 정겹다. 배 선착장에서 약간의 시간이 있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큼한 닐씨이며 바다와 함께 모두 비경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본섬 가는 배에서 본 우리 크루즈 배
워터 택시 승선장에서 베니스 본섬으로 가는 배를 승선하여 가는데 우리를 태우고 베니스 항구에 입항한 크루즈 배의 곁으로 지나간다. 우람한 이탈리아 선사 MSC MAGNIFICA호다. 참으로 반갑고 정다운 풍경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본섬 가는 배
우리 일행만 태우고 가는 배다. 약 10분 정도 소요된다. 베니스에서 운행되는 버스, 택시, 자가용, 관광용 택시, 트럭 등이 모두 자동차가 아니라 배다. 우리도 베니스 항구에 입항한 크루즈 배에서 내려지금 베니스의 본섬에 들어가는 수상 버스를 승선했다. 시민들의 발 역할을 하는 버스격인 배는 길이가 10~20m에 달하는 선박으로 50~200여 명이 탈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버스격인 배가 많다. 요금이 저렴하여 시민들은 물론이고 베니스를 찾는 관광객들도 대부분 이 버스격인 배를 이용한다. 트럭 역할을 하는 화물선은 물건을 운반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베니스에서 배는 이렇게 사람뿐만 아니라 야채와 식료품 등 다양한 물품들도 운반한다. 바다를 달리며 베니스의 풍경을 가슴과 두눈에 담았다. 수신기를 차고 이어폰을 끼고 여러가지 안내 설명을 들어야 한다. 베니스의 비경은 벌써부터 낭만과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산마리코 광장, 종탑, 두칼레 궁전 등 바다를 달리며 조망하였다.
* 이탈리아 베니스 본섬 항구 주변 풍경
본섬에 도착하여 배에서 하선 하였다. 잠시 항구 주변 풍경을 조망하였다. 멀리 자연섬도 조망했다. 돔지붕 성당이 있는 섬에서 베니스 영화제가 열린단다. 그곳의 섬은 자동차로 다리를 건너서 가는 것이 가능하단다. 베니스의 교통수단은 오직 배라고 들었는데 예외도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곳 본섬에서는 자동차는 운행 금지다. 베네치아Venice는 기원 5세기 훈족의 왕 아티라에 쫓겨 바다로 달아나 그대로 섬에 정착하게 된 베네치아 족의 후예들이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강력한 왕국을 세웠다. 특히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 베네치아는 수송과 병참을 맡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상업적 재주를 발휘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378개의 다리로 연결되었고,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가 있다. 대운하의 공공 교통 수단인 수상 버스는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끝 지점인 로마 광장의 선착장 산타 키아라를 1번으로 하고, 영화 〈베니스의 사랑〉에 나온 기차 종착역 산타 루치아 역 앞 선착장을 2번으로 하여 15번의 산 마르코, 그리고 20번의 리도까지 차례로 선착장 번호가 있다. 10세기경 주요 해상도시로 발전하게 되면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항구 주변에 우람한 건출물들이 바다와 접하여 비경을 이룬다. 해변 도로를 걸으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건물의 외벽에 커다란 호치키스로 찍어 놓은 장면을 보았다. 다시 짓지 않고 고전적인 향수를 자아내는 노력에 감탄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운하
베니스는 물 위에 건설된 아름다운 도시다. 인공으로 조성된 도시다. 라틴어로 ‘계속해서 오라’라는 의미를 가진 베니스는 낭만적인 도시다. 곳곳의 골목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가득 서려 있다. 그런 베니스 시가지의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는 것은 운하다. 운하는 200개가 넘는다. 또한 운하를 중심으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400여 개의 다리가 있다. 웅장한 건물과 건물, 아름다운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는 운하가 곳곳에 많다. 지금 우리는 해변도로를 따라 그 운하를 건너서 가고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빅토리오 임마누엘 2세 동상
베니스 본섬 해변도로를 걷는데 초대 국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의 동상이 큰 자락으로 세워져 있다. 임마누엘 2세는 기마상으로 용맹하게 말을 타고 달리는 형상이다. 그 아래에는 베니스를 수호하는 상징의 크로 작은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감옥
베니스의 김옥은 두칼레 궁전과 마주 보고 있다. 그 사이에는 탄식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감옥보다도 그 탄식의 다리가 더 사연이 깊다. 베니스는 무역 상인들이 드나들어 이런 저런 이유로, 감옥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태어난 곳이 바로 베니스이고, 이곳 감옥에 갇혔다가 유일하게 탈출한 사람이기도 하다. 감옥은 하얀섹 건물로 지금은 고요하다.
* 이탈리아 베니스 궁전과 감옥 사이 탄식의 다리
탄식의 다리는 두칼레 궁전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나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다.
1600년부터 1603년까지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총독부가 있었던 두칼레 궁전과 프리지오니 누오베(Prigioni Nuove) 감옥을 연결했던 다리다.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정부 건물과 옛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로 이름의 유래가 있다. 왼쪽에 있는 팔라초 두칼레의 재판소에서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오른쪽 감옥으로 넘어갈 때 다리의 창 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 탄식의 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죄인들은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니스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다고 한다. 다리로 이어지는 감옥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과 감옥 두 건물의 2층과 3층에 걸쳐 연결된 하얀 아치형 다리가 바라보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데 그토록 서글픈 사연이 서려 있다니 바라보는 눈과 가슴이 애절하디.
* 이탈리아 베니스 두칼레 궁전
탄식의 다리로 감옥과 연결되어 있어 황홀하면서도 애련한 생각이 스친다. 이곳 두칼레 궁전에서 재판을 받고, 죄수들은 탄식의 다리를 건너 바로 곁에 있는 감옥으로 가야 했으니 말이다. 어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라보는 자의 눈에도 천국과 지옥을 동시 마주하는 느낌일 것이다. 이 궁전은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9세기에 처음 건설되었고,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이다.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네치아의 동방적 양식와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투표실, 재판실 등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곳은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로 유명한 틴토레토의 대벽화 《천》,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또 궁전 재판실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이곳의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에서 감옥으로 넘어가는 다리에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다리에 난 창으로 죄수들이 감옥으로 옮겨지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베네치아의 총독은 선출되기가 힘들었던 데 비해, 평의회 의원의 참석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고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의원이 동행해야만 베니치아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의 궁전에서 열리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의 비용을 시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지불해야만 했다.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궁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다. 우리는 이곳에서는 탄식의 다리로 연결된 감옥과 비교하며 보았다. 궁전은 아치형 문들의 독특한 구조로 매우 아름답다. 다음 행선지 산마르코 광장에서도 더 자세히 가까이에서 볼 것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주변
베니스 해변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산마르코 광장과 만났다. 이곳은 중식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광장 주변을 지나갔다. 광장 주변은 우람한 건축물들이 큰 자락으로 앉아있다. 산마르코 광장 입구에는 높은 기둥이 두개 우뚝 서 있다. 기둥 위에는 가마상이 올라앉아 있다. 날개를 단 청동 기마상이다. 삼각주와 갯벌 위에 세운 물의 도시 베니스는 동서양을 오가는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쌓아 다양한 건축물을 많이 지었고, 진귀한 예술품도 많다. 문화 행사도 많다. 북쪽의 포 강과 아드리아 해가 만나는 베니스는 아주 독특한 지형이다. 북쪽은 포 강에서 내려온 모래와 흙이 쌓여 삼각주가 형성했고, 남쪽은 아드리아 해에서 밀려드는 바닷물의 조수 간만의 차이로 인하여 엄청나게 넓은 갯벌이 형성되었다. 베니스가 시작된 곳은 토르첼로 섬이다. 5세기 중반 로마 제국이 분열되면서 북동쪽에 살던 훈족이 현재 베네치아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을 침입하였다. 훈족을 피해 사람들은 비교적 갯벌이 적고 땅이 단단했던 토르첼로 섬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다른 섬들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고, 6세기 말에는 레알토 섬을 비롯하여 12개 섬에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베네치아는 도시로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베니스는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여러 도시들과 무역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베니스는 보다 커다란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와 물건을 보관할 편리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베니스 사람들은 앞 다투어 섬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거대한 나무 기둥을 세우고 항만 시설과 창고, 주택, 사무실 등을 건설했다. 이런 작업은 근대까지 이어져, 자연 섬과 인공 섬을 합하여 모두 118개의 섬을 가진 거대한 물의 도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산마르코 광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베니스의 여정을 흐뭇하게 엮고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수상택시 곤돌라 승선
베니스는 물의 도시로 교통수단은 수상택시인데, 그 이름이 곤돌라다. 우리는 수상택시 선착장에서 곤돌라를 승선했다. 수상택시 곤돌라는 5~10명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보트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기도 하고, 외국인들에게는 관광용 택시격인 배다. 가끔은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갖춘 운전사들이 노래를 하면서 운전을 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는 베니스를 찾아온 대한민국 여행객으로 곤돌라를 타고, 베니스의 크고 작은 골목들을 돌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울 것이다. 베니스는 바다 위에 인공으로 건설한 섬의 도시라서 시가지 골목에는 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 작은 골목을 통과하는 수상택시 곤돌라는 아주 날렵하다. 우리 일행은 여러 척의 곤돌라에 나누어서 6명씩 승선했다. 베니스에서 가장 황홀한 체험을 하는 순간이다. 산 마르코 광장과 연결된 골목들을 돌며 탐방할 것이다. 현재 관광용으로 사용되는 앞뒤가 뾰족한 이 곤돌라는 원래 장례용으로 사용하던 배였다. 도시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베니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뒤 이웃의 섬으로 옮겨 묘지를 만들었는데, 이때 시신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배가 곤돌라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곤돌라는 원래 용도와는 다르게 베니스의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곤돌라는 노를 저어 움직인다. 그런데 노를 젓는 사람의 복장이 통일되어 있다. 곤돌라마다 운전하는 남자들은 모두 검정 바지에 하얀색 바탕의 티셔츠에 검정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있다. 넓은 바다 주변의 선착장에서 승선하여 성당를 비롯한 베니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유람한다. 큰 바다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며 아슬한 낭만을 선사한다. 겨우 곤돌라가 지나갈 수 있는 바다 위 작은 물길 주변에 오랜 연륨을 지닌 건축물들이 장엄하게 이어져 있다. 곳곳에서 운하를 지나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운하의 다리를 건너가고, 우리는 곤돌라 배로 운하 아래의 물길을 타고 간다. 운하 위에서 이곳 시민들은 이방인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모두 기막힌 비경이다. 바닷물에 잠긴 건출물 중 더러는 믈이 건물 안으로 스민 곳도 있다. 그리고 건물 벽면에는 굴 같은 바다 생물이 붙어 있는 곳도 있다. 좁은 골목길인 바다 위 물길에서 마주오는 곤돌라와 교차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낯선 세계각국의 사람들이지만 서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정을 나눈다. 나는 이것도 베니스 여정에서 체험하는 매우 흐뭇하고 훈훈한 순간이었다. 곤돌라는 다시 승선했던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결코 잊지 못할 베니스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Piazza San Marco, Venice에 들어왔다. 어쩌면 사람들이 베니스에 오는 것은 이곳 산마르코 광장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이곳에는 베니스의 역사와 낭만, 중세의 건축물 등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이다. 여러 독특한 건축양식의 건축물이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건축 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건물들의 긴 그림자가 그늘지게 한다. 산마르코 광장에는 나폴레온 집무실, 성당, 궁전, 카페 등의 건물들이 사각을 이루며 둘러 싸여 있다. 바닷물이 이곳 광장에 들어 오면 사람들은 그에 대비하여 설치되는 판자 위의 길을 따다 거러 다닌다. 오늘은 그런 길은 아니어서, 우리는 원래의 광장 모습을 보며 땅 위의 길을 걷는다. 오전에 일부를 보고, 중식 후 다시 이곳에 와서 자유로이 탐방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에서 이곳 베니스에 온 것이 가장 큰 소득이다. 여기는 베니스의 심장부 산마르코 광장이다. 나는 지금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에서 벅찬 가슴으로 행복에 젖고 있다. 베니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보고, 느끼고 보듬어 품어 갈 것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나폴레옹 집무실
산마르코 광장에 입장하여 맨 처음 만난 것이 나폴레온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다. 아치형 둥근 창문이 아름답다. 2층 건물 중에서 1층은 복합상가이고 2층이 나폴레옹 집무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이곳에서 근무를 하지는 못했다. 광장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아주 넓은 건물이다. 베니스를 점령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산 마르코 광장을 보고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했다. 그 만큼 산 마르코 광장에는 아름다운 구조의 건축물과 낭만적인 공간이 많음을 상징한다. 플로리안 카페와 해리즈 바는 과거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괴테 같은 문학가들은 베니스에 올 때면 어김없이 산 마르코 광장의 플로리안 카페를 찾아 손님들과 밤새 토론하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최고의 바람둥이로 불리던 카사노바도 플로리안 카페를 무대로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속삭였다. 또한 광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해리즈 바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지금도 그 작가들이 사용했던 테이블과 방명록이 보관되어 있다. 이런 연유로 나폴레옹은 저 2층 집무실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예찬 한 것 같다. 오늘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숨결까지 마주하고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세계 여러 나라의 무역 구역
산마르코 광장 바닥에는 하얀 색 금으로 구역을 나누어 놓고 있다. 그것은 예전 세계 여러 나라의 무역 구역이다. 무역이 성행했던 당시에 세계 각국에서 온 상인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상업을 하던 구역이다. 참으로 신비로운 정경을 본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좌우 구검찰청 건물
산마르코 광장의 좌우에는 길고 웅장한 건축물이 늘어서 있는데 그것은 구검찰청 건물이다. 나폴레옹 집무실 앞에서 바라볼 때, 좌측 건물은 하얀색으로 더 오래된 건물이고, 우측 건물은 회색으로 좀더 늦게 지은 건물이다. 얼핏보면 회색 건물이 더 오래된 느낌인데 그 반대다. 더 예전에 지은 건축물이 변함없는 아름다운 색상이다. 현재는 좌측 건물은 주상 복합상가이고, 우측 건물은 박물관, 도서관, 세계 최초의 카페 등이 있다.
(좌:구건물-하얀색, 우:신건물-회색)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세계 최초 카페
산마르코 광장에는 많은 카페들이 있다. 그 중에 세계 최초의 카페가 있다. 플로리안 카페다. 우측의 구검창청 건물에 있다. 플로리안 카페와 해리즈 바는 과거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괴테 같은 문학가들은 베니스에 올 때면 어김없이 산 마르코 광장의 이곳 플로리안 카페를 찾아 손님들과 밤새 토론하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보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최고의 바람둥이로 불리던 카사노바도 플로리안 카페를 무대로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속삭였다. 또한 광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해리즈 바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가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지금도 그 작가들이 사용했던 테이블과 방명록이 보관되어 있다. 카페에 가까이 다가가서 노천 의자에 앉아 그 옛날의 낭만을 느껴 보았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골목 상가
중식을 하기 위해 산마르코 광장 골목으로 갔다. 골목에는 상가들이 많다. 특히 아름다운 색상의 베니스 특산물인 유리공예 제품들이 시선을 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운하 곤돌라
중식식당으로 가는 길에 만난 운하와 곤돌라다. 우리가 아까 곤돌라를 타고 유람할 때 만났던 운하일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배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갔는데, 지금은 운하의 다리를 위로 걸러 가고 있다. 운하 위에서 곤돌라도 바라보니 매우 아름다운 진풍경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해물 중식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주변 식당에서 현지식의 해물 중식을 했다. 해물 스파게티, 해물 튀김 등으로 풍성한 식단이다. 맛있게 잘 먹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비둘기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산마르코 광장에 왔다. 오전에는 그늘진 풍경이었는데, 지금 오후에는 화사한 햇살이 많이 드리우고 있다. 거기에 비둘기들이 많이 모여 있어 더욱 정겨운 풍경이다. 지금부터는 자유휴식 시간으로 곳곳을 섬세한 눈길로 보고, 세밀히 가슴에 담아갈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행복한 순간, 순간들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성당
산 마르코 교회는산마르코 광장에서 나폴레옹 집무실과 마주 보고 있다.현재의 건물은 1063년 소실된 교회 자리에 절정기였던 당시 베니스 시민이 총력을 기울여 약 10년 간에 걸쳐 재건한 유럽 비잔틴 양식의 전형으로 그 화려함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828년 베니스 상인 2명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성 마르코 성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납골당으로 세워진 성당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된 성 마르코 성인의 유골을 운구하는 도중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재된 몇 안 되는 성당 중 하나로, 건물 정면 위에 있는 청동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네 마리의 청동마상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에서 가져온 그리스 시대의 작품으로 3세기에 경주장용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베네치아의 힘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따라서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도난의 위험을 겪었고, 실제로 1797년에는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청동마상을 전리품으로 가져가 파리 개선문 위에 장식하기도 했다. 이후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다시 돌아와 베네치아를 지켰으나 1982년부터 복제품이 대신 자리하고 원본은 마르치아노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베네치아의 전성기, 동방침략 때 건축을 장식할 물건들을 외국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매우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동양적인 정면 아치 위는 황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안의 모자이크 벽화는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계속 만들어졌다. 그리스 십자형 위에는 다섯 개의 돔 천장이 보인다. 성 마르코의 업적에 대한 그림과 티치아노가 바탕 그림을 그린 모자이크도 있다. 금박과 보석들로 장식된 황금 벽면, 팔라 도로(Pala d'Oro)는 화려함의 극치다. 제단 뒤에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제단 오른쪽 앞에 있는 보물관에는 동방침략 때 약탈해 온 보물과 전리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아름다운 비잔틴 공예가 볼거리다. 악장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만토바 공 빈첸초 1세가 1612년 서거했을 때 많은 종교 작품을 작곡했고, 후일 페니체 가극장을 설립한 모체니고 백작을 위해 가극 1624년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 등도 썼다. 몬테베르디가 70세를 맞이한 1637년, 베니스에는 시민들을 위한 산 카시아노 가극장이 설립되었다. 이 가극장은 십자군 전쟁 이래 부유해진 이곳 시민들의 민주적 성향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여러 길드의 후원에 의해 17세기 말까지 16개의 가극장이 설립되었고 350곡이 넘는 오페라가 창작되었다고 한다. 산마르코 성당은 외형적인 건축 구조나 설계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조각상들과 성화가 외벽면에도 많이 장식되어 있다. 실내에도 잠시 들어가 보았다. 아치형 문이 성스러움을 더해준다. 출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면 테라스로 올라가니 계단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면 청동마상이 있는 테라스가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산 마르코 광장은 정말 장관이다. 참고로 베니스 시 당국은 관광객들의 불경스러운 행동들을 막기 위해 대성당 계단에 걸터앉거나 품위 없는 행동을 할 경우 벌금을 물리고 있어 조심해야 한다. 바로 곁에는 종탑이 오롯하게 솟구쳐 오른다. 모두 중세의 향기를 머금은 유럽형 성당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종탑
베니스에 온 사람들은 산마르코 광장에 반드시 간다. 그곳에는 베니스아를 상징하는 산마르코 대성당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서기 828년, 성인 마르코의 유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와 도시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864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10세기 후반에 일부가 불에 타 버렸다. 11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고 일부는 13세기와 15세기에 증축한 것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은 864년부터 15세기 사이에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건물이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건축의 장점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베니스 양식이란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거대한 돔과 입구 정면의 화려한 모자이크, 여러 가지 색상의 기둥과 대리석 조각상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건축 기법과 재료를 이용한 것이고, 정문 위에 세워진 성 마가의 말 조각과 입구를 장식한 조각은 로마에서 가져온 것이다. 또한 성당 안에 장식된 여러 조각상은 로마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에서 구입하거나 전쟁 때 빼앗은 것도 있다. 이처럼 산마르코 대성당은 터키, 이집트를 비롯한 동양의 건축과 로마, 지중해의 건축이 혼합되어 있다. 동서양의 건축 기법과 장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최고의 건축물이다. 웅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하여 훗날 서유럽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로 곁에는 우람한 종탑이 오룻하게 서 있다.
베니스를 잘 보려면 헬리콥터를 타는 것도 있다. 그것은 돈이 많이 든다. 그 대신 산마르코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마르코 대성당의 종탑에 오르면 그래도 베니스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다. 아울러수많은 여행객을 태운 거대한 유람선도 보이고, 손님을 태우고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면서 곤돌라 운전사가 부르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종탑 위에서 맞는 석양은 장관이다. 낮 동안 강렬하게 타올랐던 태양이 아름다운 석양으로 변하여 나지막한 지붕들을 지나 바다를 향해 내려가면서 연출하는 모습은 정말 황홀하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올라가 보진 못했지만 종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과 종교적인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유리공예
베니스는 유리 공예로도 유명한 도시다. 산마르코 광장 주변에 유리공예품을 파는 상가가 많이 있다. 베니스에서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곳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배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무라노 섬이다. 1291년까지만 해도 유리 공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이 있는 본섬에서 크게 번성하였지만 베니스 왕실에서 작업장을 무라노 섬으로 옮기도록 명령을 내렸다. 겉으로는 공해 발생이 이유였지만 사실은 유리 공예로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유리 공예 기술이 다른 지역이나 나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장인들이 이주한 13세기 후반 이후 무라노 섬은 명실상부한 유리 공예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리 공예의 대표적인 기법은 모래와 자갈에서 얻은 규사라는 원료에 안료를 넣고 열로 가열한 후 긴 빨대를 이용하여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꽃병에서부터 여성들의 액세서리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졌고, 유럽 왕족과 부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공방들은 규모가 큰 곳은 5~6명, 작은 곳은 2~3명의 장인과 제자들이 모여 저마다 독특한 유리 제품을 만들어 냈다. 평생 동안 무라노 섬에서 유리와 씨름하던 장인들은 탈출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장인들을 빼내 새로운 유리 왕국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다. 특히 북유럽의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이다. 구스타프 왕은 스웨덴 스모랜드 지역에 새로운 유리 왕국을 만들었으며, 현재 이곳에서 베니스보다 더 예술적인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광장 주변의 상가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아름운 공예품임을 알 수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라이브 연주 카페
산마르코 광장에서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 라이브 연주 카페다. 우리 부부가 광장을 돌아보는데 카페 앞에 이르러서 다가가자, 연주하는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 준다. 이곳은 세계의 관광객에게 매우 친절하고 예우를 갖춰서 대해준다. 흐뭇한 시간이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시계탑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걸음이 분주하다. 성당 곁에 시계탑이 있다. 시계탑은 아주 독특하다. 시계 바늘이 없다. 그리고 시계와 다른 조각상이 단으로 쌓여 있다.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도 있다. 나는 베니스 여행 기념으로 산뜻한 물의 도시를 상징하는 모자를 두개 샀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기둥
산마르코 광장은 베니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웅장한 광장이며 열주로 가득한 건물이 광장을 'ㄷ'자로 둘러싸고 있어 광장은 하나의 거대한 홀처럼 보인다. 나폴레옹은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홀)이라 불렀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베니스의 수호신인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이 있다.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이 있다. 서쪽으로는 도서관과 카페 등의 건물이 있다. 해변과 접하여 비경을 이룬다. 두 개의 기둥은 매우 높이 솟구쳐 오른다. 맨꼭대기에 앉은 날개 달린 사자상과 성테오도르상을 보려면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한다. 또한 이 기둥 곁에는 사람들ㄹ이 많다.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도 자유 탐방을 하고 여기 기둥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산마르코 광장의 모든 것들은 여행객에서 큰 비경을 선사한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 두칼레 궁전
베니스의 두칼레 궁전은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베네치아의 총독은 선출되기가 힘들었던 데 비해, 평의회 의원의 참석 없이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의원이 동행해야만 베니치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궁전에서 열리는 모든 공식적인 축제의 비용을 시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지불해야만 했다. 건축물은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다.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대단하다.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현재의 외관은 14~15세기에 형성되었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이다. 북방의 고딕 양식과 베니스의 동방적 양식와 장식이 어우러진 모습을 베네치아 고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의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건물은 흰색과 분홍빛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회랑은 36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에는 두 개의 정문이 있는데, 산마르코 대성당에 면한 쪽의 '문서의 문(Porta della Carta)'은 옛날에 정부의 포고문이나 법령 등을 붙이던 곳이다. 문 위에 보이는 날개가 있는 사자는 베네치아의 상징이다. 내부에는 총독의 방과 접견실, 투표실, 재판실 등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곳은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로 유명한 틴토레토의 대벽화 '천',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또 궁전 재판실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이곳의 감옥은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궁전에서 감옥으로 넘어가는 다리에 '탄식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다리에 난 창으로 죄수들이 감옥으로 옮겨지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는 그 탄식의 다리를 오전에 건너고, 지금은 오후의 햇살 조명 아래 두칼레 궁전을 탐방하고 있다. 광장을 지나 성당을 지나 기둥 아래 해변에서 바라보니 더욱 우아하고 아름답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도서관과 주변 건물들
산마르코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16세기 경 정부청사로 건립된 것들이다. 나폴레옹의 날개(알라 나폴레오니카)라고도 불린다. 산 마르코 광장과 주변에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많다. 베네치아는 여러 양식의 건축물이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건축 박물관 같은 곳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반복적인 아치와 회랑이 베네치아 고딕 양식의 간결미를 잘 보여 준 건축물로 물의 도시를 지배했던 권력자들이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수많은 그림과 유물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두칼레 궁전의 안뜰과 입구, 그리고 건물 벽에 장식된 조각들은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인 틴토레토의 '천국, 산소비노의 조각 '마르스' 상과 '넵투누스' 상이 유명하다. 산 마르코 광장 남서쪽인 대운하 지역에는 베네치아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있다. 1630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도시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4만 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로부터 목숨을 보존한 시민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이 성당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56년 동안 지어졌는데, 팔각형의 바닥 위에 세운 커다란 돔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 돔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크다. 성당 안도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럭비공 모양을 하고 있다. 성당 안쪽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조각과 성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페스트로부터 베네치아를 보호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당 이름 중에 있는 ‘살루테’라는 말도 ‘건강과 구제’라는 의미로 페스트와 관계가 있다. 그 밖에 산 조르조 마조레 섬에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은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멋진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며, 토르첼로 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아순타와 산타 포스카 성당은 초기 기독교 양식과 후기 비잔틴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나는 지금 구 검찰청사였던 건물 한 블록 앞에 앉아 있다. 바라보이는 건물에는 도서관을 비롯해 오래된 카페, 살롱들이 들어서 있다. 구 검찰청 건물은 아주 큰 자락으로 앉아 있어서 곳곳이 모두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그 중 1720년에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은 과거 바이런, 괴테, 바그너 등이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행과 만나기 위해 기둥이 있는 해변에서 바라보니 종탑과 함께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 이탈리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앞 해변 풍경
산마르코 광장을 모두 탐방하고 해변으로 나왔다. 해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해변에는 수상택시 곤돌라 승선장이 있다. 배가 교통수단인 베니스에서는 여기가 택시 승선장인 셈이다. 바다 가운데에는 함선도 떠 있다. 그리고 베니스의 섬 풍경이 큰 비경을 선사한다.
* 이탈리아 베니스 물 대비용 의자
베니스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뚝 위에 건설한 11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다. 그리고 동서양을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한 물의 도시다. 베네치아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손인 베네치아 상인들은 목숨을 걸고 거친 파도를 넘어 동서양을 오가며 무역을 하고 문화를 축적하여 오늘날 이곳 물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심과 개척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만든 지금의 베네치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베네치아는 조금씩 아드리아 해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몇 십 년 뒤에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물속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그때는 배를 타고 다니며 베네치아의 흔적을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은 물의 도시인 베네치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지구 전체가 지금 환경 오염과 온난화 현상으로 힘들어 하고 있다. 지금도 산마르코 광장에 물이 들락날락한다. 오늘 우리가 온 시각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물이 들어올 때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물 대비용 의자를 비치해 놓고 있다. 산마르코 광장 뿐만아니라 섬 곳곳이 그렇다. 크루즈 배가 있는 곳으로 나가기 위해 해변 선착장에 왔는데 물 대비용 의자가 곳곳에 포개져 놓여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자연섬 풍경
베니스 탐방을 마치고 크루즈 배로 귀환하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가며 본 자연섬 풍경이다. 산마르코 광장을 비롯해 지금까지 머물렀던 곳은 본섬으로 인공 섬이다. 지금 배가 지나가며 보여주는 섬은 자연섬이다. 자연섬에는 푸른 나무가 있어 천연의 아름다움이 드리워져 있다. 중세풍의 건축물들이 더욱 비경을 자아낸다. 베니스는 118개의 섬과 150개의 운하, 378개의 다리로 연결되었다. 그 한가운데를 흐르는 대운하도 많다. 대운하의 공공 교통 수단인 수상 버스는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끝 지점인 로마 광장의 선착장 산타 키아라를 1번으로 하고, 영화 〈베니스의 사랑〉에 나온 기차 종착역 산타 루치아 역 앞 선착장을 2번으로 하여 15번의 산 마르코, 그리고 20번의 리도까지 차례로 선착장 번호가 있다. 4번인 산 마르쿠올라에서 나오면 왼쪽에 3층 건물인 벤드라민 저택이 있다. 1882년 9월 〈파르지팔〉의 작곡을 완성한 바그너가 빌려서 거주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이듬해 2월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베네치아는 기원 5세기 훈 족의 왕 아티라에 쫓겨 바다로 달아나 그대로 섬에 정착하게 된 베네치아 족의 후예들이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강력한 왕국을 세웠다. 특히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 베네치아는 수송과 병참을 맡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베니스에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간다. 석양이 드리운 바다와 함께 고운 풍경을 선사한다.
* 이탈리아 베니스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
항상 기항지에서 내려 탐방하고 크루즈 배로 귀환한다. 다시 만나는 크루즈 배는 바다 위 호텔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우리 배말고도 다른 배들이 들어와 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일몰
크루즈 배에 승선하여 갑판으로 나갔다. 바다 위에 일몰이 비경이다. 바다와 베니스가 만나 절창이다. 우리 부부는 훈훈한 행복으로 한 동안 젖어 있었다.
* 이탈리아 베니스 출항
베니스를 다 보여준 크루즈 배는 이제 서서히 베니스를 출항한다. 들어올 때도 비경이었는데, 지금도 비경이다. 베니스의 섬들 사이로 지나가며 곳곳을 조명해준다. 석양의 고운 빛과 함께 베니스 풍경이 한폭의 명화들로 눈앞에 전개된다. 황홀한 행복이다.
* 이탈리아 베스니 야경
베니스 야경을 크루즈 배의 갑판에서 보니 장관이다. 점점 어둠이 내리면서 섬의 도시 베니치아는 환상의 빛을 발한다. 바다와 섬은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 이뤄내는 또 하나의 지상의 아름다운 조화다. 빛줄기가 바다 드리우며 춤춘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그리운 정경이다.
* 크루즈 배 정찬 석식 2
오늘은 정찬 식당에서 칠면조 고기와 해물 파스타, 그리고 스프 등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곱게 차려입고 서빙을 받으며 맞이 하는 정찬 석식은 언제나 큰 기쁨을 선사한다.
* 크루즈 배 뷔페식당 차와 과일
크루즈 여행에서는 음식에 대한 풍성한 메뉴가 큰 장점이기도 하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정찬식당에서 정찬 석식을 하고, 다시 이곳 뷔페식당으로 왔다. 여기서는 풍성한 과일과 커피, 티, 그리고 음식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식사가 아니고, 타임으로 정담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집에 가면 이런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그래서 고운 회억으로 남아 큰 행복을 주는 것이 바로 크루즈 여행이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4
석식을 모두 마치고 대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고운 의상을입고 나와 아름다운 뮤지컬로 기쁨을 선사한다. 노래를 잘 하는 그 남자는 오늘도 출연하였다. 모든 출연자들은 찬사의 환호를 받는다.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 알베로벨로 마을
*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 입항
오늘은 오후 1시에 크루즈 배가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에 입항한다. 항구 주변에는 화물을 싣는 장비의 배들이 많다. 푸른 바닷가 안온한 항구다. 이탈리아 남부 플리아 주 북동부 브린디시 현의 현도임 항구 도시다. 인구는 9만 5천명 정도다. 아드리아 해의 브린디시 해협에 면해 잇다. 옛 이름은 브룬디지움 Brundisium이다. 그리스 서아시아로 가는 어항 기지다. 수산 가공 · 석유화학 공업이 발달했다. 중세의 사원과 성 등 사적이 많다. 바리 남동쪽으로 선박들이 드나드는 Y자 모양을 한 작은 만의 지류들 사이에서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으며,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다. 천연의 양항으로, 고대부터 농업, 상공업의 중심지였다. 포도주와 함께 식품가공·화학, 플라스틱, 정유 등의 산업이 발달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에 아피아 가도(街道)의 종점으로, 로마-브린디시 사이가 직통으로 연결되면서 동방에 대한 군항·상업항으로 번영하였다. 또 중세에는 성지순례와 십자군의 출발지였다. 해안철도와 타란토 행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항구에서는 중동 및 극동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하다. 또한 이탈리아와 그리스 간의 관광객을 운송하는 주요 연락선 종착항이다. 도시는 대부분 현대화되어 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성채(1227)와 11세기의 대성당(1749 재건), 원형의 11세기 산조반니알세폴크로 세례교회(지금의 공공박물관) 등 중세의 건축물들이 많이 있으며, 고고학박물관도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요한 해군기지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두번 하고, 지금이 세번째인데 이렇게 새로운 도시에 들어오니 또 다른 이탈리아를 알게 되어 기쁘다.
*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 하선
이탈리아 브린디시 항구에 하선하였다. 오늘은 알베로벨로 마을을 탐방한다. 우리를 이동시키기 위해 버스가 동원된다. 이제 육지의 여정 시작한다.
*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바리 가는 길
브린디시 항구에서 버스를 타고 바리로 이동한다. 그곳 알베로벨로 마을을 탐방하기 위해서다. 이탈리아의 들녘을 보며 간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의 들녘 풍경과 유사하다. 농토의 작물재배 풍경도, 여러 수종의 나무가 그렇다. 바리는 아드리아해에 면한 반도 남동부 해안의 항구도시다.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로마시대에는 바리움이라고 불렀다. 풀리아의 풍부한 과수농업지대가 주변에 있어 포도와 올리브를 비롯한 농산물의 집산·가공 중심지이며, 금속·석유·기계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 이탈리아 남부 프리아 주의 주도다. 로마시대에 바이륨(Bairum)이란 이름의 항구도시로 번창했다. 중세에 들어 성 니콜라우스의 토지로 유럽 유수의 순례지가 되었다. 중요한 성당은 산 니콜라(1087~1132)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의한 대건축 석조의 사교좌(1098)가 특히 유명하다. 대성당도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후세에 개수한 부분이 많으며 11세기의 에크술테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산 그레고리오 성당 주회화관 등이 있다. 주요 수출품은 포도주와 올리브유, 아몬드 등이이다. 동서양 무역박람회인 피에라 델 레반테가 1930년 이래 해마다 열린다. 11세기에 건립된 대성당과 노르만의 성 등 옛 건물이 많고, 대학·고고학박물관·미술관·출판사 등이 있어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의 남부 이탈리아 상륙지점이었다. 알베로벨로 마을을 탑방하러 가며 이탈리아의 도시 바리를 알게 되어 흐뭇하다. 점점 바다 가까이 접근하자 올리브 나무가 아주 많다.
* 이탈리아 들녘 지중해 해변 올리브나무
이탈리아 들녘을 달리는데 지중해 해변의 올리브나무가 비경이다. 드넓은 영토에 올리브 나무가 한가득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의 진풍경을 목전에서 본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진입로 주변 풍경
알베로벨로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걸어서 갔다. 알베로벨로 마을은 돌집 마을이다. 그 입구 곳곳에도 돌집이 보인다. 기름진 농토를 지나, 올리브나무 곁을 지나 아름다운 망을로 점점 진입한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전망대
먼저 알베로벨로 마을에 진입하여 전망대로 올라갔다. 어느 기정집 옥상 같은데 높은 지대에 있어 알벨로베로 마을 전체가 보인다. 회색 돌집들이 요정이 사는 것 같은 고운 풍경이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거리 풍경
알베로벨로 마을 거리는 현대와 고전의 신비로운 조화다. 한쪽을 보면 현대식 주택들이 있고, 다른 쪽을 보면 고전의 알베로벨로 돌집이 무리지어 있다. 거리는 현대의 자동차들이 왕래한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트롤 마을 탐방
알베로벨로Alberobello 마을은 이탈리아 풀리아주에 있는 도시다. 석회암 대지를 이루는 이 지방에서는 투루리라고 부르는 석회암을 쌓아올린 원추형의 지붕으로 구성된 독특한 가옥들로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알베로벨로는 오래된 시가지 전체가 이 유형의 가옥으로 줄지어 있다. 부근은 대지와 해안평야가 전개되어 넓은 농업지역을 이루며 포도 ·잎담배, 올리브 재배와 포도주도 생산한다. 마을 전망대에서 내려와 알베로벨로 마을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늘진 풍경이라서 골목은 좀 어둡다. 회색 돌집들이 귀여운 요정에 살 것 같은 느낌이다. 트롤은 돌집을 뜻한다. 돌집들이 모두 이어져 있다. 골목은 여러 갈래인데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걸어가며 탐방했다. 골목길은 좁은데, 기념품들을 거리에 전시하기도 하고, 포도나무와 화분 등으로 골목은 화사하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기념품 가게들
기념품 가게가 골목에 많이 있다. 바깥에 상품을 진열하여 고운 풍경이다. 대부분 돌집을 축소하여 모형으로 만든 기념품이다. 이곳 특산품 가게도 있다. 화사한 물건들이 골목을 장식하고 있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트롤 돌집 지붕 문양
비탈진 언덕길 골목의 돌집을 지나다보면 고깔 모양의 둥근 지붕에 하얀색으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집도 있다. 태양 모양이 가장 많이 보인다. 별이나 달 모양도 있다. 종교적인 문양도 있고, 사냥에서 잡기를 원하는 동물도 그려 놓았다. 아득한 옛날의 도란거리는 속살거림 같은 숨결이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성안토니오 성당
골목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니 거의 끝부분에서 성안토니오 성당을 만났다. 성당도 역시 트롤 형식을 지었다. 1927년에 알베로벨로 마을 주민들을 위해 만든 성당이다. 외적인 구조는 종교적 건축양식인데 지붕이 트롤 모양으로 뾰족 돌집과 같다. 하얀 색 외벽이 성스럽다. 내부에도 들어가서 탐방했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트롤 돌집 포도나무
알베로벨로 마을은 포도주 생산 지역이다. 그래서일까. 골목 곳곳에서 크로 작은 포도나무가 많이 보인다. 이곳 돌집은 문 앞에 큰 포도나무가 있고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돌집 트룰리
알베로벨로 마을은 이탈리아 풀리아주 바리현에 있는 주거 유적이다. 이탈리아의 풀리아(PUGLIA)주에 있는 작은 도시 알베로벨로에는 고대부터 지중해 지방에 전해오는 주거용 건축인 트룰로들이 있다. 트룰리는 복수형이다. 기원 4세기 경부터 출현하여, 16세기 중반에는 약 40채의 트룰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옛 시가지인 몬티 지역과 아이아피코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에 1,000여 채가 골목마다 밀집해 있다. 이 가옥은 원통 모양의 벽을 세우고 그 위에 두께 6cm 정도의 납작한 잿빛 돌을 원뿔 모양이나 둥근 모양의 지붕을 얹은 형태이다. 한 개의 방마다 한 개의 지붕이 올려지며, 이같은 방이 모여 한 채의 트룰로를 이룬다. 처음에는 악천후로부터 몸을 피하고 도구들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 점차 주거지로 발전하였다. 지붕은 둥근형태와 원추형태가 있다. 벽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벽 사이는 흙, 자갈 등으로 메워져 있다. 바깥벽은 석회로 하얗게 칠해져 있고 돌로 만든 굴뚝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안쪽 벽에는 수납용 함이 설치되어 있고,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다. 방과 방은 복도 없이 곧바로 이어진다. 내부는 서로 다른 목적의 다양한 공간으로 창고, 식료품실, 일하는 방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물이 장식되어 있다. 쿠쿠르네오 또는 틴티누레라고 하는 둥근 쟁반 모양이나 공 모양의 장식이 붙어 있으며, 지붕에 별, 태양, 달, 촛대, 동물 등의 무늬를 그려놓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대부분 주거나 선물가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니 않는 돌집 트롤리가 진풍경이다. 왜 이곳을 세계인들이 찾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아름다운 골목길
이곳의 돌집은 모두 트룰로란 모르타르를 쓰지 않고 이 지방에서 나는 키안카렐레라는 돌만을 쌓아올리는 건축 양식으로 이 지방 풍경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 독창적인 기법이다. 네모난 혹은 둥근 집터에 트룰로를 세우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두꺼운 돌벽을 쌓는다. 원뿔형의 방수 지붕은 손으로 깎은 석회암 돌멩이를 동심원 꼴로 쌓아 올린 뒤 판암으로 덮었다. 지붕 꼭대기의 장식용 피니얼은 그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으로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구, 삼각형, 기둥, 별 모양 등이 뒤섞여 각각의 집에 개성을 부여하며, 이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의 태양 숭배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트룰리Trulli는 이탈리아어로 트룰로의 복수형이다. 알베로벨로의 역사는 이 지역의 향토 귀족이었던 콘베르사노 백작 가문이 새로운 거주지를 정하여 왕의 인가를 받는 데 드는 세금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시작했다. 이 지방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셀바 참나무 숲으로 이주 당하여 임시 거처에서 살게 되었다. 이런 집들은 헐었다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집들이 모르타르를 써서 지은 집보다 더 견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침내 무려 4세기나 유랑민에 가까운 삶을 살던 마을 사람들은 1797년 나폴리 왕 페르디난드 4세에게 호소하여 자신들의 거주 방식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이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며 이 지방을 찾는 관광객들이 독특한 하룻밤을 경험할 수 있도록 트룰리를 숙소로 제공하고 있다. 참으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돌집 마을이다. 과거 선인들은 오늘 이곳이 이런 훌륭한 유적지로 된 것을 알까. 그들은 죽어갔지만 그들의 숨결은 살아서 골목마다 아름다운 진풍경을 선사한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풍경
꿈속에서나 만날 것 같은 알베로벨로 돌집 트룰리 마을을 돌아보고 다시 입구로 나왔다. 뒤돌아 주변을 보면 회색 돌집이고, 건너편 앞을 보면 현대풍의 집도 있고, 나무가 울창하고,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풍경이다. 이곳 돌집 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면서 오늘날의 유적지로 형성되었다. 동화 속 이야기가 숨어든 환상의 아름다운 저 집들에는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예전에는 세금 추적을 할 때 지붕의 갯수로 결정했는데 이런 세금 조사가 나오면 집을 쉽게 부수려고 작고, 돌과 나무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199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가 된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할 시간인데 아쉬움으로 자꾸 골목을 서성이며 두눈에 가슴에 예쁜 돌집을 담고 있다.
* 이탈리아 알베로벨로 마을 카페
이제 마지막으로 마을 입구의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노천 카페다. 도로변 의자에 이곳을 찾아온 세계인이 함께 앉아 있다. 그 옛날에는 없었을 현대풍의 카페에서 묘한 생각이 교차한다. 타국이지만 이런 아름답고 독창적인 마을을 구성해 놓고 간 선인들에 대한 감사함도 들고, 그 옛날에는 없엇을 아름다운 카페가 호사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이탈리아의 알베로벨로 마을이다.
* 이탈리아 비옥한 농토
발베로벨로 마을에서 걸어서 버스 주차장으로 간다. 도로변에 비옥한 농토가 있다. 검붉은 황토빛 농토가 매우 기름져 보인다. 올리브 나무도 있다. 이것이 아탈리아의 풍요라고 읊조리는 것 같다.
* 이탈리아 지중해 석양
다시 크루즈 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여기서 1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한다. 서서히 석양이 드리워 지중해의 석양은 황홀하다. 올리브 나무의 광활한 해변 들녘이 온통 일몰의 비경으로 떠오른다. 지평선과 수평이 만나며 분사하는 석양빛이 하늘을 적신다. 고운 풍경은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는 지중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꿈꾸듯 행복한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세계여행에서 만나는 이런 행복은 나를 세계로, 세계로 이끌어 자꾸 여행을 하게 한다.
* 크루즈 배 정찬 석식 3
오늘은 정찬식당에서 석식으로 맛있는 새우와 생선, 송아지 고기 등을 먹었다. 서빙해 주는 남자 선원이 우리 테이블에 와서 수건을 말아 아름다운 꽃 모양을 만들어 준다.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아름다운 식사와 행복한 시간이다. 마지막에는 모두 수건을 흔들며 크루즈 여행의 행복을 읊었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5
오늘 대극장 공연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여전히 노래를 잘 하여 관객을 사로잡는 그 남자가 나온다. 애절한 로미와 줄리엣 이야기도 뮤지컬로 재현한다. 춤과 노래로 극장은 아름다운 밤이다. 크루즈 배는 밤바다를 질주하고, 이 시간 우리는 공연을 보며 행복한 시간이다.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올림피아 유적지
* 크루즈 배 뷔페식당 조식
오늘은 그리스를 탐방한다. 배는 아침 8시에 그리스 카타글론 항구에 기항한다. 아침 식사는 13층 뷔페 식당에서 오전 6시부터 10 30분까지 가능하다. 우리 부부는 일찍 조식을 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창가에서 낭만 섞어 맛있게 먹었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바다 일출
조식을 마치고 룸의 발코니에 나가보니 지중해의 일출이 비경이다. 바다를 가르고 산통 끝에 오르는 해는 장엄하다. 분무하는 빛줄기가 바다를 뒤덮는다. 우리 부부의 객실은 12층 맨 꼭대기 층이다. 그래서 갑판과 연결된 작은 기둥들이 발코니의 시야를 가려서 좀 불편하기도 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바라보는 풍경이 시야를 탁 트이게 한다. 크루즈 여행에서 맞이하는 비경의 선물이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입항
눈부신 아침의 그리스 바다에 입항하고 있다. 해변 마을이 비경이다. 그리스의 푸른 산을 이곳에서 본다. 아테네에서는 석회암 산만 보았었는데 말이다. 카타클론 항구에 입항하는 것은 고대 올림픽이 최초로 열렸던 올림피아로 가기 위해서다. 이곳이 바로 그 관문이어서 그렇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하선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에 하선하였다. 도시의 사기지를 한참 걸어서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여기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올림피아로 이동한다.
* 그리스 농촌 풍경
그리스 아테네에서 5시간이나 걸려서 우리를 여행 안내하기 위해 온 교포 남자에게 고마웠다. 버스를 타고 올림피아로 간다. 올림피아는 도시 이름은 아니고, 최초로 올림픽이 열렸던 지역이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그리스의 농촌 들녘이 아름답다. 지중해변의 영토가 푸른 빛으로 촉촉하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진입로 풍경
버스에서 하차하여 올림피아 유적지로 걸어서 갔다. 진입로에는 올리브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열매도 달려 있다. 그리고 각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는다. 주차장과 유적지를 왕래하는 마차도 있다. 거의 유적지 입구에 다다랐을 때 조그만 강이 흐른다. 그리고 다리 놓여 있다, 가이드가 잘 보란다. 저리 작아도 그리스에서는 강이 없어 강이라고 한단다. 우리나라로 치면 실개천 정도인데 말이다. 그리고 지금 지나가고 있는 다리는 남자들만 건너갔단다. 여자들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서다. 모두 신비로운 풍경들이다. 유적지 입구 입장 문 앞에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올림피아 유적지에 입장하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많은 돌들이다. 그리고 돌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올림피아 Olympia는 그리스 서부, 일리아 주 중부의 고대 도시 유적.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부, 알피오스 강 오른쪽 연안, 클로니온 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종교 중심지로 기원전 776년 올림픽 경기의 발상지. 기원전 7세기의 헤라 신전, 전 6세기의 제우스 신전, 전 4세기의 김나시온(체육관) · 스타디온(경기장) 자리가 있으며 올림피아박물관이 있다. 1989년 고대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근처에 올림피아(인구 1800명) 마을이 있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서북부 에리스에 있는 제우스의 성지다. 전 그리스 인의 종교적인 중심지로 B.C. 9세기 경부터 4년마다 성대한 제전경기가 열렸다(우승명의 기록은 B.C. 776년에 시작하여 이것이 ‘올림피아드’라고 하는 기년법의 기원이 되었다). 알티스라 불리우는 성역에는 헤라 신전, 제우스 신전, 보고(寶庫), 대제단 등이 있고 그 주위를 스타디온, 브레우테리온, 체육연습장(김나지움, 팔라이스트라, 숙박시설 레오니다이온, 페이디아스의 아틀리에, 주랑 등 B.C. 7세기부터 비잔틴 시대까지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1875~1881년에 크루치우스의 제창으로 독일 학술발굴대에 의하여 최초의 발굴이 행해지고 그후 1, 2차대전에 의해 중단된 외에 조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우스 신전의 페디멘트와 메토프의 조각, 파이오니오스의 니케 상, 유명한 '올림피아의 헤르메스'상을 비롯한 발굴품은 현지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이토록 오랜 역사를 지닌 올림피아 유적지에 들어와 있다. 올림피아는 엘리스 지방의 피사(Pisa)에 위치해 있으며, 이오니아 해에서 15㎞, 아테네에서 257㎞, 스파르타로부터 127㎞ 정도 떨어져 있다. 올림피아의 북방과 동북방은 올리브와 떡갈나무로 우거진 산림지대이며, 남쪽은 알페이오스 강이 흐르는 지대와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클라디오스(Kladeos) 강의 급류를 바라보고 있다. 스트라보(Strabo : BC 63~AD 21. 로마의 지리학자. 17권의 지리학을 저술)에 의하면, 올림피아는 그 옛날 제전경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유명한 신탁소였다고 한다. 푸른 잔디와 울창한 나무들이 한가득인 유적지 입구, 돌이 많은 곳에서부터 탐방을 시작한다.
* 그리스 올림피아 신전 작업장
돌변에 신전의 건축물을 제작하던 작업장이 있다. 제우스 신전 앞에 남아 있는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작업실이다. 페이디아스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하는 데 크게 공헌한 건축가이자 조각가다.그가 이곳에서 작업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러 유물들이 발견되어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올림피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우스가 신탁을 내리는 장소였다. 신전은 후세에까지 명성이 높았는데, 성직자들과 올림피아 제전경기에 의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신에게 헌납되었으며 다른 어느 지방의 경기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믿어졌다. 올림피아는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지만 제우스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 그리스 올림피아 숙박소 레오니데온
신전 작업장에서 가까운 곳에 그 옛날 올림픽이 열릴 때 손님을 받던 숙박소 레오니데온이 유적이 남아있다. 페이디아스 작업실 남쪽으로는 기원전 4세기경에 만든 숙박 시설인 레오니다이움이다. 오늘날 올림픽 경기장 주변에 선수촌이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경기에 참여한 선수와 손님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다. 넓이만 보아도 올림픽이 얼마나 큰 행사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북쪽에는 레슬링과 복싱 같은 투기 경기를 했던 경기장과 각종 스포츠를 가르쳤던 김나지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그 옛날에 손님을 맏던 숙박소라니, 오림픽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 그리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기둥이 우뚝 솟은 곳이 제우스 신전의 유적지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의 성역 알티스는 그리스어로 '작은 숲'을 의미하는 조용한 평원이다. 알티스는 크로노스 언덕의 남쪽 기슭에 있다. 북쪽은 크로노스의 언덕에 가로막혀 있으며, 동쪽에 있는 에코의 회랑이 알티스와 스타디움을 구획하고 있다. 알티스 성역에는 장엄한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다. 제우스 신전 뒤에는 성스러운 올리브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로 우승자를 위한 올리브 관을 만들었다. 제우스 신전은 기원전 472년 엘리스인들이 피사와 그 연합군에 맞서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뒤 건립하였다고 한다. 제우스 신전의 규모는 높이 21.79m, 너비 30.44m, 길이 73.70m다. 건축가는 엘리스 출신의 리본Libon이고 건축양식은 도리아식이다. 신전 내부에는 유명한 그리스 조각가 페디아스가 만든 천지의 최고 통치자 제우스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왕좌에 앉아 있다. 상아와 금으로 장식된 이 조각상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으로 칭송받았다. 우리는 제우스 신전의 높은 기둥을 지나 헤라 신전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그리스 현지 여자 가이드가 월계수 가지로 월게관을 만들어 승리한 선수의 영광을 재현해 준다. 크고 작은 많은 돌들을 그대로 두었다. 그 돌에 앉아서 휴식을 하는데, 일정 선 안으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 특히 신전 주변의 돌에는 앉아선 안 된다. 근엄한 공간에서 신전에 대한 체험을 한다.
*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
헤라 신전은 제우스 신전 건녀편에 있다. 사이에 마당을 거쳐서 간다. 제우스 신전에서도 바라보인다. 큰 기둥만이 오롯하고, 그 터전만이 자리하고 있다. 성화 채화 장소 바로 앞에 있다. 알티스의 서쪽에 있는 헤라(Hera) 신전 헤라이온(Heraion)은 재화나 예술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헤라 신전 남쪽에는 펠로피온(Pelopion)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각형으로 담장을 두른 펠롭스의 무덤이 있다. 헤라이온과 펠로피온 사이에는 제우스의 제단이 있는데,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아래쪽 제단에서 희생물인 가축이 도살되었으며, 위쪽 제단에서는 희생물의 다리를 구웠다. 알티스 동북방 끝에는 엘리스인들이 올림픽의 우승자에게 향연을 베풀었던 향연관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서 있다. 크로노스 언덕 기슭에는 기원전 648년경에 세워진 보물창고가 열두 개 있는데, 이 보물창고들은 신전을 향해서 세워져 있었다. 여기에는 금은으로 만든 값비싼 도자기, 술잔, 솥 등의 봉헌물이 쌓여 있었다. 봉헌물은 그리스의 여러 식민지 또는 개인들이 제우스에게 바친 것이다. 올림피아에는 많은 제단이 있었는데, 파우사니아스는 그 수가 모두 70개라고 전하고 있다. 엘리스 시민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똑같은 날에 모든 제단에 제물을 바쳤다. 신전이나 보물창고에 들어 있는 금은보화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나가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제우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가장 소중한 물건을 제단에 바치고 소원을 빌었다. 제우스 신전 북쪽에 위치한 헤라 신전은 올림피아에 있는 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알려져 있다. 제우스 신전보다 130년이나 앞선 기원전 600년경에 세워졌다. 제우스 신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헤라 신전은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에는 어김없이 헤라 신전에서 채화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된다. 원래 헤라 신전은 그리스에서는 드물게 나무로 만든 신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40개에 이르는 기둥을 모두 응회암이란 돌로 교체하였다. 도리아식 기둥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 주는 신전이다. 성화 채화 장소와 함께 헤라 신전 앞에서 그 옛날 근엄한 모습을 보았다. 남은 흔적만으로도 얼마나 큰 규묘였는지,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헤라 신전은 올림피아 유적지의 중앙에 있어서 올림픽 경기장을 오가며 더 많이 보았다.
* 그리스 올림피아 성화 채화 장소
성화 채화 장소는 헤라 신전 바로 앞에 있다. 잔디밭에 큰 돌이 몇 개 놓여 있다. 가장 자리는 줄을 쳐 놓았다. 헤라 신전은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였다. 지금도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에는 헤라 신전에서 채화하는 장면이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다. 그 옛날 여인들이 성화를 채화하는 사진도 있다. 사진을 보며 불붙는 올림픽의 열기를 상상으로나마 더듬어 보았다.
* 그리스 올림피아 올림픽 경기장 스타디온
헤라 신전에서 올림픽 경기장 스타디온으로 이동했다. 선수만 지나가던 아치형 돌문을 지나서 그 역사적인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스티디온에 들어서니 드넓은 운동장이 다가온다. 그리고 사방은 잔디 언덕이 둘러싸고 있다. 그 옛날 고대 올림픽 경기장이다.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 그리스의 스타디온은 극장과 마찬가지로 언덕 혹은 골짜기의 경사면에 설치되었다. 이것은 자연의 경사지를 관람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형태는 가늘고 길다. 그래서 끝이 둥글게 되어 있는 경우와 직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출발선과 결승선이 남아서, 그것을 통해 트랙의 정확한 길이도 알 수 있다. 트랙은 600피트에서 700피트(182.88m∼213.36m)이다. 이곳 올림피아 경기장스타디온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스타디온이다. 그 유적이 후대(전 5세기 및 전 4세기)의 건조물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의 트랙은 정확히 1스타디온, 즉 고대 그리스의 길이 단위로 600피트(182·88m)의 길이를 가지며, 경기장이 그 때문에 스타디온이라고 불린 것이다. 트랙은 직선 코스이며 선수는 이 트랙을 왕복했다. 출발선과 결승선에는 두 줄기의 나란한 홈을 판 부석이 사용되었다. 최초는 세 측면에만 제방이 있으며 스타디온과 신역(神域) 사이에는 구분이 없었다. 스타디온을 제우스의 제단 및 신전에서 분리시키는 서쪽의 제방이 쌓여진 때는 기원전 4세기 중엽 이후이다.
클라디오스 강과 알피오스 강이 만나는 올림피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올림피아 사람들은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했지만 기원전 1000년경부터 제우스를 숭배하게 되었다. 올림피아 사람들은 제우스 신전을 짓고, 제우스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기 위하여 여러 행사를 벌였다. 그중 하나가 고대 올림픽 경기였다. 고대 올림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지만 기원전 776년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초기에는 달리기의 일종인 1스타디온(192.3m)이라는 한 종목의 경기가 단 하루만 열렸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176년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달리기를 중심으로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레슬링, 승마, 복싱, 전차 경기 등이 열렸고 기간도 5일로 늘어났다. 재미있게도 전쟁과 관련이 있는 나팔수와 전령들을 위한 경기도 열렸다. 물론 참가 선수의 수도 처음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당시 그리스에는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이 많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도시 국가에서 올림픽 경기에 선수를 내보내고 경기를 관람하기 위하여 올림피아를 찾았다. 이때부터 올림픽 경기는 4년마다 열리게 되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선수들과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대회 기간을 중심으로 앞뒤 3개월 동안에는 전쟁을 중지했다. 올림픽이 얼마나 중요한 행사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고대 올림픽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하나의 평화 행사였던 것이다. 이 올림픽 정신이 훗날 그리스를 통일하는 데 기여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초기에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 출신만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기원전 146년 이후부터는 로마와 주변 국가의 선수들도 경기에 참가했다. 이런 개방 정신이 오늘날 올림픽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올림픽은 로마 시대 때도 계속 열렸다. 로마 시대 때는 경기의 종류가 더 늘어났다. 달리기와 레슬링 같은 스포츠 외에도 음악과 문장을 창작하는 종목까지 추가되어 일종의 종합 문화·스포츠 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로마 황제 네로는 스포츠와 음악 등에서 7개 종목을 휩쓰는 실력을 발휘했다. 서기 400년경까지 계속되던 고대 올림픽은 언제부터인가 열리지 않게 되었다.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올림피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당시 올림피아에는 지금처럼 클라디오스 강과 알피오스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지진으로 물이 흐르는 수로가 바뀌면서 엄청난 모래가 들어와 유적지를 완전히 매몰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림피아 유적지 주변에는 지금도 두 강이 흐르고 있다.
올림픽 경기장은 아담한 동산과 구릉 사이에 터를 잡고 있는 올림피아 유적지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폭 3m에 높이가 2.5m쯤 되는 자그마한 아치를 통과해야 한다. 이 아치는 그리스 시대 때 만든 것이 아니라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했던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당시에는 선수와 심판만 아치를 통해서 경기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로마 황제조차 아치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경기장은 각 도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경기를 펼쳤던 경기장과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석, 그리고 심판석으로 되어 있다. 선수들이 경기를 펼쳤던 경기장은 오늘날의 육상 경기장과 비슷한데 바닥에 흙과 작은 모래가 깔려 있다. 달리기 출발 지점에는 선수들이 발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땅을 파 놓은 작은 도랑이 있는데, 오늘날 단거리 육상 경기에서 출발선에 한쪽 발을 받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발판과 같은 기능을 했다. 달리는 거리는 1스타디온인 192.3m다. 관람석은 경기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데 흙과 잔디가 깔려 있다. 그리스 시대에는 북쪽 크로노스 언덕 쪽에만 관람석이 있었지만 로마 시대 때 남쪽에도 관람석을 설치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관람석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자리가 있는데 심판들과 황제와 귀족들이 앉았던 일종의 귀빈석이다. 올림피아 경기장은 모양과 크기는 물론이고 전체적인 분위기까지도 오늘날의 경기장과 아주 비슷하여 기원전에 만들어진 경기장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곳 경기장에서 많은 시간 동안 머물며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 체험으 해보았다. 출발 선에 서서 출발 신호에 따라 달리기도 해보았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달렸다. 우리 부부는 둘이서도 힘껏 달려 보았다. 끝이 아득하여 다 가진 못해도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서 달려본다는 그것만으로도 흐뭇한 체험이다. 운동장으로 걷다보면 둔덕 잔디광장에 돌의자 같은 유적이 있다, 심판석이란다. 그리고 황제를 비롯한 귀족이 앉았던 귀빈석이다. 관중들은 언덕 잔디밭에서 관람햇을 것이다. 나는 잔디밭에서 관중 체험도 해보았다. 주변은 온통 푸른 나무들이 물결치고, 파란 잔디와 흙마당이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주 뜻깊은 고대 올림픽 경기장 스타디온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체험해 간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자유 관람
경기장에서 헤어져 각자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올림피아 유적지를 자유 관광했다. 경기장으로 이동하며 본 것들이지만 다시 지나가며 자세히 살펴 보았다. 헤라신전과 성화 채화 장소도 보고, 곳곳을 보며 아쉬운 걸음으로 떠나왔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강과 다리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에 갈 때 지나갔던 강과 다리다. 아주 작은 시내인데 그리스에는 강이 없어서 저것도 강이라 부른다. 강 위의 다리는 그 옛날 남자들만이 건넜던 다리인데, 오늘날은 이렇게 여자들도 마음 껏 지난다. 수많은 세계 각국의 여자와 남자들이 이 강과 이 다리를 거쳐서 올림피이 유적지를 탐방한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올리브 나무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의 국가다. 그래서 올리브 나무가 곳곳에 많다. 이곳 올림피아 유적지 부근에도 올리브 나무가 많다. 열매도 달려 있다. 올리브 나무는 수명이 1천 년이다. 보통 몇 십 년에서 몇 백 년 수령의 나무들이다. 올리브 나무에 열매도 달려 있다. 파란 것도 있고 갈색 빛으로 익어가는 것도 있다. 올리브유만 먹어 보았던 우리에게는 신비로운 풍경이어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 주변 마차
이곳 올림피아 유적지에서 주변에 마차가 있다. 주차장에서 유적지까지 약간 먼 거리여서 그렇다. 대개는 도보로 걸어서 가는데, 마차를 체험하고 싶거나, 다리가 연약한 사람은 마차를 이용하여 왕래한다. 이것도 고대 올림픽 시절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하나의 모습인 것 같아 흐뭇한 풍경이다.
* 올림피아에서 카타클론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올림피아를 떠나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는 카타클론 항구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그리스의 풍경도 본다. 주택 앞에 뽕나무를 기르는 집이 있다. 그늘을 만들기 위해서란다. 오렌지 나무도 있는데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이란다. 들녘에는 사이프러스나무가 오롯하게 솟구쳐 오른다. 도로변에 쓰레기 더미가 있다 미화원들이 파업을 해서 그렇단다. 어느새 지중헤 바닥 보인다. 이제 거의 항구에 도착한 것이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도시
올림피아로 갈 때 지나갔던 카타클론 항구 도시를 다시 지나간다. 항구로 기는 도로변에 기념품 상가가 양편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나는 그리스의 특산품인 올리브유를 한 통 샀다. 햇살이 화사한 항구 도시다. 민가 주택도 있고, 교회도 있고, 거리에는 마차도 다닌다. 아름다운 카타클론 항구 도시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MSC 매그니피카호 크루즈 배
기항지에서 항상 우리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다. 어머니 아버지 품 속 같기도 하고, 그리운 고향집 같기도 하고, 일류 호텔 같기도 한 크루즈 선박이다. 우리가 승선한 배는 이탈리아 선사의 MSC 매그니피카호다. 우람하고 아름다운 위상으로 지중해 바다 위에 정박해 있다. 이제 재승선 해야 하는데 아름다운 환상의 그리스에 매혹되어 걸음이 자꾸 멈춰진다. 햇살, 해변 비경 등이 그리스인들을 일은 안 하고 논다는 대목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우나도 저토록 눈부신 햇살과 바다와 놀고 계속 싶다. 하지만 정해진 해야 시간에 배는 출항하기에 우리는 다시 재승선해야 한다.
* 그리스 카타클론 항구 크루즈 배 재승선
지중해 바다 위에는 다른 크루즈 배도 정박해 있다. 우리의 크루즈 배 앞에서는 천막을 치고 더위를 식혀주는 음료를 한잔씩 주고 잇다. 선사에서 제공해주는 서비스다. 우리 부부는 고마움으로 청량음료를 시원하게 마시고 크루즈 배에 재승선했다.
* 크루즈 배에서 본 지중해 바다의 일몰 비경
크루즈 배에 재승선하여 뷔페 식당으로 가서 중식을 맛있게 했다. 오징어 요리, 피자, 햄버거, 대봉감 등을 먹었다. 풍성한 메뉴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며 먹었다. 젊은 부부가 오징어 요리를 한가득 담아 와서 먹기에 어디에 있느냐고 했더니 자세히 알려주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중식 후에는 갑판 시외 수영장에 가서 수영하며 휴식했다. 수영장에서도 외국인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폴란드에서 온 가족과 한국의 삼성전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핸드폰이 그 나라에서 아주 인기라 한다. 나의 남편과는 유명한 폴란드의 축구선수에 대해서도 서로 얘기했다. 또 다른 이탈리아 가족들 하고도 정담을 나누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여러번 갔었고, 로마, 밀라노, 피렌체, 피사, 나폴리, 소렌토, 폼페이, 시칠리아, 친퀘테레, 베니스 등의 여러 도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계인들은 크루즈 여행에서는 영어로 정담을 나누며 하나가 된다. 갤러리에도 잠시 들러서 탐방했다. 방으로 돌아돠 발코니에 나가보니 지중해의 일몰이 비경이다. 황홀하여서, 행복하여서, 다 비워지는 가벼운 깃털 같은 세상이 놀라워서, 눈부신 그리움이다. 찬란한 사랑이다. 크루즈 여행이 선사하는 값진 선물이다.
* 크루즈 배 선실과 복도
우리 부부는 정찬 석식을 위해 나가는 길에 선실과 복도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아주 아득하게 긴 복도가 배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12156호실이다. 즉 12층 156란 의미다. 13층은 뷔페 식당이다. 선실로는 최고 높은 층이다. 참으로 고운 실내 풍경이다.
* 크루즈 배 중앙 로비 환영행사
오늘은 갈라디너 쇼가 있는 날이다. 크루즈 여행에서 가장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하이라이트다. 크루즈 배 중앙 로비에서 환영행사를 한다. 피아노 연주와 샴페인으로 최대의 낭만은 선사하는 밤이다. 로비는 5, 6층일 계단으로 열려 있고, 온통 화사한 조명등으로 고혹의 풍경이다. 우리 부부도 가장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한껏 멋스런 자태로 크루즈 여행의 낭만에 젖었다. 행복한 밤이다.
* 크루즈 배 정찬 석식 4
오늘이 가장 좋은 메뉴로 정성껏 정찬 석식을 베풀어 주는 날이다. 갈라디너 쇼가 있는 환영행사가 있는 날이다. 테이블 담당자가 메뉴 안내지를 나누어 준다. 그러면 순서대로 메뉴를 선정하여 체크한다. 다시 거두어 가서는 주문한대로, 메뉴 순서대로 갖다준다. 어린 양구이, 랍스터 스프, 새우, 야채, 과일 등으로 맛있는 석식을 했다.
매그니피카호 선장 환영인사
석식을 마치고 대극장에서 이탈리아 선사 MSC 매그니피카호 선장의 환영 인사가 있다. 선장과 배의 여러 주요업무를 맡은 분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한다. 모든 분들께 감사의 박수로 보답했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6
오늘 공연은 선장 환영 인사로 조금 늦어졌다. 공연 직전에 청소원을 가장하여 입장하는 관객을 따라가 웃기는 컨셉으로 관중들은 참 많이도 웃었다. 본 공연은 늑대 인간 이야기를 주제로 공연한다. 전주로 어린리들이 무용을 한다. 줄 타는 여인, 뮤지컬, 등근 링을 굴리는 남자, 춤, 노래 등으로 황홀한 기쁨을 선사한다.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 터키 이즈미르 항구 하선, 에베소 유적지
* 터키 이즈미르 항구 하선
오늘은 터키 이즈미르 항구에 하선한다. 크루즈 배는 오전 9시 기항했다. 하선할 때는 어떤 기항지에서든 크루즈 선사에서 준 크루즈 카드를 꼭 가지고 내려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신분증이다. 수신기와 이어폰도 꼭 챙겨야 한다. 오늘 출항은 오후 3시에 한다. 우리는 그 동안 터키 에베소 유적지 탐방을 하고 다시 귀환한다. 중식은 이곳 배로 돌아와서 할 예정이다. 이즈미르 항구에 정박한 우리의 크루즈 배가 매우 크고, 높고, 우람하다. 든든하고 흐뭇한 바다의 호텔 정경을 선사한다. 이즈미르 항구 도시는 지중해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다. 항구의 해변 도르를 따라 버스가 있는 곳까지 갔다. 바다와 도시의 조화가 매우 아름답다. 탁 트인 풍경이 비경이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 도시 풍경
이즈미르 항구는 상당히 큰 규모다. 도시 역사 크다. 안온한 지중해 바다에 크루즈 선박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짐을 싣는 장치의 건설 장비도 곳곳에 많다. 화물선도 많다. 터키 서부 이즈미르주(州)의 주도(州都)다.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에게해에 접한 터키 제3의 대도시다. 이즈미르의 고대 이름은 스미르나(Smyrna)다. 소아시아 반도의 서해안 이오니아 지방의 항만도시다. B.C. 3000년대 전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발전한 도시로 B.C. 10(또는 B.C. 11)세기 이후 그리스 인이 이주하였다.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는 에페소스와 겨루는 이오니아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중세 비잔틴·십자군·아랍·투르크 간에 쟁탈이 거듭되었으나 그리스 문화의 한 중심으로 그리스상인에 의하여 무역이 성행하였다.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종점이 되고 있다. 1948~1951년 쿠크와 아쿠르갈에 의하여, 66년 이후는 아쿠르갈에 의하여 고고학적인 발굴이 행해졌다. B.C. 9~A.D. 6세기의 건축, 미술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출토품의 대부분은 시내의 고고박물관에 있다. 시내에는 2세기 중반경에 세워지고 178년의 지진 뒤 재건된 아고라의 건물이 보인다. 도시를 지나 에베소로 이동한다. 소박한 아파트도 보이고, 열대 식물들이 가로수로 줄 지어 서 있다. 싱그러운 도시 풍경이다.
* 터키 이즈미르에서 에베소 가는 길
터키의 들녘을 바라보며 달린다. 여기서 1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안개가 뽀얗다. 들녘에는 기름진 농토도 있고, 여러 종류의 나물이 많다. 우리 나라의 들녘 풍경과 유사하다. 다른 것은 우리 나라에는 없는 올리브 나무가 더러 보인다는 것이다. 스쳐지나 가는 타국의 풍경을 보는 것도 참 행복한 기항지 탐방이다.
* 터키 에베소 유적지
터키 에베소 유적지 문 앞에서 가이드가 표를 산 후 함께 입장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매우 청명하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니 산줄기를 타고 유적들이 많이 늘어서 있다 맞은 편에도 우람한 산이 서 있다. 저곳 산에서 우리가 가진 않지만 많은 유적이 있단다. 에베소, 또는 에페소스는 터키의 이즈미르주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유적지다. 고대
* 터키 에베소 청소년 체육관
앙상한 건물의 기둥이나 허물어진 살점만이 오랜 세월을 견디어온 애환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 시대에 청소년 체육관이 여기 있다. 그 당시 도시의 눈부신 발전 역사에 놀라운 일이다.
* 터키 에베소 목욕탕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 이곳에도 있다. 에베소 입구에서 가까운에 있다. 바리우스 목욕탕 터다. 1세기 경 만들어진 것이다. 대라석으로 된 목욕탕은 온탕과 냉탕,한증탕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그 물길이었던 수로의 연결 통이 수북이 쌓여 있다.
* 터키 에베소 크레테스 도로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긴 도로가 있다. 크레스테 도로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도로 양편으로는 우람한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여기서부터 에베소에 머물렀던 로마 총독 관저 터가 있는 셀수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모두 탐방할 것이다.
* 터키 에베소 오데온 소극장
오데온 소극장은 산자락 아래 아담하게 들어서 있다. 오데온은 이곳을 즐겨 드나들던 귀족 이름라고도 한다. 서기 150년 무렵 건설된 원형극장이다. 로마의 훤형 극장과 동일하다. 이곳은 동시에 15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었다. 화사한 햇살이 내리 쬐어 더욱 돋보이는 풍경이다.
* 터키 에베소 아데미 신전
아데미 신전은 높은 두 개의 기둥이 자리하고 있어 그 옛날의 우람했던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신전 터전도 넓게 자리하고 있다. 아야술루크 언덕의 대표적 유적은 이곳 아데미 신전이다. 원래의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파괴되었다. 기원전 550년 경에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재건한 두 번째 신전도 방화로 파괴되었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세 번째 신전이 세워졌다. 재건축을 거치면서 신전은 길이 137m, 너비 69m에 높이 18m의 기둥 127개를 세운 웅장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신전의 규모와 화려한 장식, 고품질의 건축 재료, 불안정하고 습지로 이루어진 하층토 문제를 해결한 당시 건축가들의 탁월한 예술적 자질과 기술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이 건축물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 보아도 대단한 이용이다.
* 터키 에베소 나이키 여신상
나이키 여신상은 크레테스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온 둔덕 아래에서 만났다. 그 유명한 니케Nike의 여신상, 즉 승리의 여신이 부조상으로 세워져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사의 나이키 로고가 니케 여신상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 모양을 형상화했다. 니케 여신상의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말이 있다. 가슴을 만지면 복을 받는다는 믿을 수 없는 낭설로 인해 원래 D컵이었던 가슴 크기가 B컵으로 작아졌다는 말도 있다. 산줄기 낮은 자락 아래 세워져 있다. 흙 위에 대릭석 조각을 놓고 불안정한 자세로 세워져 있다. 남성적인 인상의 여신은 광폭의 치마가 휘날리고 어깨엔 날개가 달려있고 한손에는 월계수가 쥐어져 있고, 다른 손에는 종려나무가 쥐어져 있다. 주변은 아직 발굴 작업 중인 곳도 있다. 건축물을 보수하기도 한다. 산 아래 곳곳에 돌기둥들이 무리지어 놓여있다. 헤라클레스의 개선문에서 셀수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크레테스 거리가 에베소 유적지의 중심이다. 이곳 주변에는 니케의 여신상과 메두사를 비롯한 다양한 아치형 신전,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 터, 극히 일부만 복원됐는데도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들어왔던 나이키 상표의 그 이름이 이곳 나이키 여신상에게서 유래되었다하니 먼 나라에서 정경운 이름의 여인을 만나 흐뭇했다.
* 터키 에베소 멤미우스 기념비
멤미우스 기념비는 나이키 여신상 건너편 아주 가끼이 있다. 아주 육중한 자태다. 멤미우스 기념비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장군이며, 로마의 독재자였던 술라가 손자 멤미우스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다. 기원전 86년에 세워닌 오래된 유적인데도 그 형태가 올곧게 남아 있다. 또한 멤미우스기념비는 에베소 안에서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느 독재자의 기념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다. 어쩌면 그 사람 개인보다도 로마의 권위를 세우고자 거대한 형상으로 압도적인 숨결을 내뿜는 듯하다.
* 터키 에베소 헤라클레스의 문
에베소의 유적지를 탐방하는 동안 긴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도로를 따라 놓여진 기원전 고대의 유적을 보는 것이다. 나이키 여신상에서 조금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니 헤라클레스의 문이 있다. 이 문은 깊은 의미가 담긴 문이다. 두 개의 기둥이 오롯하다. 우리가 들어와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는 말이나 마차가 들어올 수 없던 곳이다. 문에 헤라클레스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부른다. 지금 가려고 하는 내리막 넓은 길이 바로 그 옛날 마차가 다니던 길이다. 이곳 마차가 멈추던 비로 그 헤라클레스의 문 앞에 지금 내가 서 있다.
* 터키 에베소 마차 도로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 걸어내려온 길이 마보 고대의 마차 도로다. 아득한 길이 전개되고 있다. 얼마나 에베소가 큰 도시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에베소는 원래 바닷가 마을이었다. 지금은 해안선이 서쪽으로 멀어져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완만한 언덕을 이루는 도시의 모습을 따라 놓인 도로를 보면 바다에 배를 정박하고 길을 따라 올라오던 어부, 그리스나 로마의 해군, 또는 어떤 방문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저 아래 먼 곳의 지중해 바다와 만나는 곳에는 에베소 항구가 있다. 이곳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이오니아 주(州)의 수도였다. 당시 최대의 상업 및 교통 중심지였다는 것이 성경에서도 밝혀져 있다. 하지만 소아시아 대륙 서쪽 돌출부인 카이스테르 강 하구에 위치했던 에베소는 신약 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지난날의 영화를 잃어갔다. 그 유는 분별한 삼림의 벌채 때문이다. 당시 도시의 번창으로 많은 땔감인 숯과 목재가 필요했다.더욱이 과도한 육류 소비로 인한 지나친 방목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 염소들은 푸른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짓밟고 먹어치워 삼림을 훼손했다. 이 때문에 헐벗은 산위의 흙은 비가 오면 흘러내려 시내를 수렁으로 만들었다. 폭우 때는 진흙이 그대로 바다로 흘러들어가 결국 항구를 메워버렸다. 지난날 에베소 항구의 흔적은 현재의 항구에서 약 10.2㎞ 내륙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때 광활한 만(灣)이었던 곳이다. 바울 시대에는 항구와 해로가 발달되었던 곳이 갈대무성한 습지로 변하고 만 것이다. 저 아래로 뽀얀 들녘이 보이고, 산줄기도 보인다. 마차가 다니던 대리석 길은 맨질맨질하다. 오늘 날은 수많은 세계 각국의 걸음들이 밟고 지나가며 촉촉한 윤기를 더해준다.
* 터키 에베소 트라얀 황제 신전
에베소 유적지의 유적들은 색상도 아름답고, 형태도 매우 아름답다. 남은 돌기둥들도 고풍스런 자태다. 지금 다다른 트리얀 황제 신전도 매우 고운 자태다. 허물저닌 모습만도 저리 곱거늘, 원형의 신전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에베소에서 초로 황제의 이름을 붙여 지은 신전이다. 트리얀 황제 (AD 98-117) 동상이 신전 우물터 받침대 위에 있었다. 곳곳에 신전 기둥들이 오롯하게 남아 있다.
* 터키 에베소 주택이 있던 터
옛날 주택이 있던 유적지가 있다. 산자락 아래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에베소 마을의 큰 규모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도시 아래쪽의 길 양 옆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다. 이를 테라스 집이라고 하는데, 계단식으로 지어져 집이 길에서 멀수록 높다. 길가의 집들은 도시 부유층이나 귀족들이 살던 집으로 정원에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장식했고, 바닥은 타일로 장식했다. 수로를 끌어들여 집 안에 목욕탕을 만들었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전성기가 2~4세기인데 7세기까지 집주인이 있었다고 한다. 추쿠리치 둔덕은 비옥한 평원과 과실밭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신석기시대 후기와 금석병용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7000년의 주거 유적이 남아 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주춧돌과 양토 벽으로 세운 가옥에서 1000년 이상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가내 축산업으로 돼지·양·염소 등의 가축을 길렀음이 밝혀졌다. 밀로스섬에서 수입한 흑요석으로 생산한 고품질의 도기 용기 등의 유물을 통하여 이곳 정착민들의 기술적 전문성을 엿볼 수 있다. 에베소는 성경 에베소서의 무대이자 수신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찍부터 유대교 회당이 있었고,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이곳 회당에 들러 유대인들과 변론했으며, 오래 지체할 수 없어서 동역자를 남겨 두고 떠났었다. 그후 제3차 선교여행 때 이곳에서 2년 간 장기 체류하며 처음엔 회당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그 다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에베소 체재 기간 동안 바울은 날마다 복음을 강의하는 동시에 아시아 일대에 복음을 확산시키며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한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곳은 아데미 우상 숭배의 본거지였는데,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해 아데미 숭배자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소동 끝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남겨 두고 그곳 교회를 목양하게 했다. 그 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에베소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훗날 그곳 교인들의 식어버린 처음 사랑과 니골라 당의 행위를 지적하며 에베소 교회를 엄히 책망하였다. 그날의 사역자들의 횡보가 이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자나다녔던 길목일 것이다. 아직 바닥에는 그날의 길목 흔적이 남아있다. 색상이 들어간 모자이크 대리석 길이다. 사람이 거주하던 집들이 집집마다의 형태를 유지하고 남아있다. 주인은 간 곳 없는데 문앞에 풀들은 파랗게 일어서서 외객을 맞이한다. 고양이 한 마리 삭막한 길목 집잎에서 생명의 숨결을 부여한다. 떠나간 세월의 소슬한 정경이다.
* 터키 에베소 하드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 규모다. 아치형 문이 오롯하게 솟구쳐 오른다. 오늘날의 저 아치 형태의 건축물은 원형을 본떠 다시 제작된 것이다. 원형은 고고학박물관에 있다. 아치형은 벽면과 기둥을 지탱하는 건축공법으로, 로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 신전은 AD 138년에 건축되었고, 에베소 시민들이 그 당시에 로마의 황제로서 추앙 받아오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그에 앞서 AD128년에 이곳 에베소를 방문하였다. 로마와 에베소의 숨결이 고인 역사의 유적지다.
* 터키 에베소 공중목욕탕 화장실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서 로마의 목용탕을 보았는데, 이곳에서 또 목욕탕을 만났다. 지금 셀수스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이다. 마차가 다니던 도로변에 있다. 이곳에는 그 당시의 공중목욕탕 화장실이 있다. 대리석 기둥과 대리석 변기를 설치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꾸몄다. 이곳은 남자 화장실이다. 이용료를 냈던 곳이다. 아마 여자 화장실은 다른 곳에 있던 것 같다. 한두 개가 아니고, ㄱ자로 길게 꺾어진 통로에 많은 화장실 변기 시설이 놓여 있다. 대리석 돌판을 설치해 놓고, 구멍을 뚫어 대소변을 볼 수 있게 했다. 아래는 분비물을 처리하는 통로가 있다. 규모로 보나, 건설장치로 보나 대단히 발달된 화장실이다.
* 터키 에베소 셀수스 도서관
셀수스Celsus 도서관은 아직도 거대한 규모의 웅장한 자태로 그 형상이 남아잇다. 다 허물어져 앙상한 건물인데도 2층 구조의 기둥과 벽면이 그래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세계 3대 도서관 중 하나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서기100~110년 사이에 로마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아킬라가 아버지 율리우스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셀수스 도서관에는 아시아 속주의 총독을 지낸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의 무덤이 있다. 지하에서 셀수스 동상을 발굴했다. 도서관을 겸한 2층 구조로 된 건축물이다. 로마 시대의 1만 2000여 건의 두루마리 장서를 보유하였던 곳이다. 도서관 가까이 내려가 보았다. 벽면에 4명의 여신상이 서 있다. 그것은 지혜, 행운, 지식, 선행을 상징하는 석상이다. 도서관이기에 그런 상징 동상을 세운 것 같다. 외형으로는 궁전, 혹은 신전 같은 위용을 지니고 있다. 상당히 아름답고 세련된 건축 구조다. 셀수스 도서관 앞 대리석 길목에는 발바닥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요즈음의 사창가로 가는 안내기호였데 이곳을 사랑의 집이라고 불렸다. 고대 도시 에베소에서 처음으로 붙여진 광고가 아닐까 싶다. 구멍도 있는데 그곳에는 들어오는 사람이 돈을 넣으라는 곳이다. 성스러운 도서관 앞에 왜 이런 것을 마련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곁에는 큰 시장인 에베소 아고라가 있어서 좀 이해가 되었다. 셀수스 도서관은 에베소 유적지에서 아주 소중한 유적이다. 세계인들이 이곳 셀수스 도서관을 매우 관심있게 탐방한다. 나 역시 그렇다. 고대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기에 많은 시간 동안 탐방하며 지적인 숨결을 가슴에 저장했다.
* 터키 에베소 아고라 시장터
아고라 장터는 셀수스 도서관 바로 곁에 있다. 도서관에서 아치형 문을 거쳐 바로 진입한다. 우리도 그곳을 들어가 살펴보았다. 아고라는 그 옛날에는 아주 큰 규모로 마련된 시장이다. 스아고라는 장터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 집회 장소이기도 했다. 테이트 아고라는 4세기까지 공동묘지였다. 이후 선거, 모임, 집회 등 일련의 정치활동을 했던 시민의 장소가 되었다. 에베소 유적지 의 전체 지정된 면적은 663ha이며, 주변의 완충지역 면적은 1163ha이다. 등재된 유산은 크게 추쿠리치 둔덕, 에베소 고대 도시, 아르테미스 신전과 중세 주거지가 남이 있는 아야술루크언덕, 성모 마리아의 집 등 4개 구역으로 구성된다. 성모 마리아의 집이 불불산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유적들은 주로 불불산과 파나이르산 사이에 형성된 계곡의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대단히 큰 에베소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아고라는 지금 보아도 아주 큰 자락으로 놓여 있다. 군데군데 높고 우람한 기둥들도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 터키 에베소 원형극장
에베소 원형극장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들어서는 순간 그 위용이 대단하다. 기원전 3세기에 조성된 유적지인데 손색없는 형상이다. 산자락의 허리 부분쯤부터 바닥까지 가파른 계단을 만들어 객석으로 마련해 놓았다. 총 높이 18m에 단이 22개로 이뤄져 있다. 맨 꼭대기 객석에 앉으면 저 아래의 바닥 무대가 아득하다. 로마의 원형 극장은 작은 소리도 객석 끝까지 들린다는 과학적인 설계다. 세계여행 하면서 곳곳에서 많이 보아온 원형극장이다. 그런데 이곳은 높이도, 넓이도 매우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의 극장이다. 수용인원은 약 2만 5000명이다. 그 당시 에베소 도시의 문화, 사회, 정치 등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에베소 유적지 입구에서 보았던 오데온 극장은 이것에 비하면 아주 소규모 공연장이다. 에베소 고대 도시 유적에 보존된 대부분의 기념물과 건물들은 그리스로마 시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도시의 성벽은 기원전 300년 알렉사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인 리시마코스 왕의 치세에 헬레니즘 양식으로 축조되었다. 로마 원형극장을 마지막으로 에베소 유적지는 다 보았다. 이제 나가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조금 걸어가서 뒤돌아 로마 원형극장을 바라보니 전경이 아슬한 비경으로 떠오른다. 전면으로는 에베소 항구로 가는 길이 전개되고 있다. 주변에는 수많은 돌들이 놓여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돌들이다. 에베소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에베소 곳곳을 돌아보며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간다.
* 터키 에베소 유적지 주변 풍경
이제 많은 시간 동안 탐방한 에베소 유적지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입장문 반대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간다. 붉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도로변에 서서 외객에게 작별을 고한다. 싱그러운 길을 따라 나오니 출구 주변에는 기념품 상가들이 즐비하다. 고데에서 현대로 넘어온 느낌이다. 나무들이 매우 울창하여 아름다운 풍경이다.
* 터키 산녘 풍경
에베소에서 다시 크루즈 배가 있는 항구로 간다. 산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많다. 가끔 올리브 나무도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
터키 에베소 유적지 탐방을 마치고 다시이즈미르 항구에 왔다. 커다란 우리의 크루즈 배가 정박하여 우리를 반긴다. 이즈미르 항구는 주변이 매우 아름다워서 많은 시간 동안 산책하며 자유시간을 보냈다. 출항을 오후 3시에 하니까 그 보다 좀 더 이른 시간까지 재승선하면 된다. 우리 부부는 해변 낭만을 마음껏 즐겼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 에베소 유적지 사진 풍경
이즈미르 항구는 상당히 크다. 크루즈 배가 정박한 주변 길목에 에베소 유적지의 그림이 벽면에 아주 크게 전시되어 있다. 조금 전 보고 온 유적지이어서 정감이 서려 있다. 사진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그곳에 선 풍경이다.
* 터키 이즈미르항구 크루즈 배 재승선
크루즈 배에 재승선했다. 이제 오후 3시에 출항하여 터키 이스탄불 항구로 이동한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의 크루즈 배 뷔페 중식
크루즈 배에 재승선하여 먼저 뷔페식당으로 가서 중식을 했다. 날씨가 더워서 싱싱한 과일을 중심으로 맛있는 음식을 잘 먹었다. 이즈미르 항구가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지중해 풍경을 섞어 아름다운 식사다. 두고두고 그리울 순간들이다.
* 크루즈 배 갑판에서 본 터키 이즈미르 항구
오후 3시에 이즈미르 항구를 출항한다. 갑판으로 가서 주변 풍경르 보았다. 항구에는 화물선박과 화물을 싣는 장지들이 많다. 도시의 풍경도 보이고, 무역 건물도 보이고, 산자락을 타고 조성된 소박한 주택단지들도 보인다. 모두 고운 풍경이다. 터키 이즈미르 항구의 환상적인 선물이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를 출항하려는 크루즈 배에 몰려드는 갈매기들
터키 이즈미르 항구를 출항하는데 배에 갈매기들이 날아오른다. 점점 따라온다. 배가 가르는 물살에서 물고기를 먹으려는 행위인데, 우리는 우리를 배웅하는 뜨거운 날갯짓으로 다가와 훈훈한 풍경이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 출항
이제 정말 크루즈 배가 힘차게 질주하여 이즈미르 항구를 뒤로 하고 떠나간다. 물살을 가르며 이스탄불을 향해 나아간다. 이즈미르의 비경이 눈과 가슴에 가득담겨 이별하기가 아쉬운 순간이다. 한 동안 머물며 두눈과 가슴에 고운 풍경을 담았다.
* 터키 이즈미르 항구 석양
이제 이즈미르 항구를 떠나야 하는데, 룸으로 가야 하는데 석양이 또 다시 발목을 잡는다. 저 고운 풍경을 두고 어찌 갈까. 바다에 내리는 석양빛이 비경이다.
* 크루즈 배 정찬 석식 5
오늘이 크루즈 배에서 먹는 마지막 정찬 석식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서빙해주는 선원이 오늘도 수건 접기를 하여 식탁에 놓아준다. 우리도 따라서 접었다. 모두 이별이 아쉬운 시간이다.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주던 그분들께 고맙다.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7
대극장 공연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아침에 이스탄불 항구에서 하선하기 때문이다. 아주 화려한 무대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출영자들이 열연한다. 우리 부부는 이런 순간들이 그리우면 다시 크루즈 여행을 할 것이다. 이런 행복은 크루즈 여행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밤이다. 공연관람을 미치고 룸으로 와서는 대형 짐 가방에 미리 받은 짐텍을 부텨 복도에 내어 놓았다. 밤 12시까지 내놓으면 밤 시간 동안 선원들이 짐택을 보고 하선하는 항구 터미널에 국가별로 가방을 날라다 놓는다. 그러면 우리는 내일 아침 하선하여 선박 터미널에서 자기 가방을 찾아 간다. 크루즈 여행은 언제나 큰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크루즈 배 이스탄불 항구 하선, 성소피아 성당, 블루 모스크, 톱카프 궁전, 지하 저수조
* 크루즈 배의 마지막 뷔페 조식
오늘 아침식사는 크루즈 배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다. 1주일 동안 바다 위 호텔에서 행복한 여정을 보내고 이제 육지로 간다. 아쉬운 마음이 파고든다. 풍성한 메뉴, 특히 풍성한 과일이 내게는 꿈 같은 선물이었다. 돌아가면 사무치게 그리울 것다. 과일을 중심으로 넉넉한 식단에서 아름다운 식사를 했다. 이런 시간이 그리우면 우리 부부는 또 크루즈 여행을 해야할 것이다. 이토록 그리운 시간을 다시 밟을 것이다.
* 크루즈 배 뷔페식당에서 본 이스탄불 바다의 일출
크루즈 배에서 보는 마지막 일출이다. 지중해를 가르고 일어서던 태양을 이제 더 이상 보지 못 한다. 우린 오늘 바다를 떠나가야 한다. 13층 뷔페식당 창가에서 아침을 먹으며 이스탄불로 항구롤 입항하는 시간에 바다 일출을 맞이한다. 찻잔에 햇을 풀어 마신다. 가슴 속에 꼬옥 담아가서 먼 후일 정원에 그늘진 시간이 다가올 떄, 걸어두면 나는 행복하여서 어둠을 사르리라.
* 터키 이스탄불 항구의 일출
크루즈 배가 터키 이스탄불 항구로 들어간다. 거대한 도시 터키 이스탄불이 서서히 바다 위로 들어난다. 이스탄불은 육로여행으로 예전에 왔기에 낯설지 않은 도시다. 조식을 마치고 룸으로 가기 전에 갑판에 올라가 일 비경을 보았다. 아름다운 이스탄불 항구의 일출이다.
* 터키 이스탄불 항구 입항
이제 크루즈 배가 서서히 터키 이스탄불 항구로 입항한다. 맨 처음 출발했던 그 항구다. 배가 바다를 흐르며 이스탄불의 시가지 풍경을 선사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다리가 바다 위에 몸을 늘이고 있다. 또한 유럽 쪽과 아시아 쪽 시가지가 눈앞에 전개된다. 해는 도시를 밝히, 도시는 우리를 밝혀준다. 오늘은 하선하여 이스탄불을 탐방할 것이다.
* 터키 이스탄불 항구 하선 준비
모든 것이 아쉬운 순간이다. 이제 크루즈 배에서 하선해야 한다. 룸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도 놓아야 한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1주일 동안 머물며 수없이 걸음을 남긴 배의 곳곳도 참 많이 그리울 것이다. 그 동안 동행던 세계 각의 사람들과 함께 5층 로비에서 모여 하선한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우리 부부는 바다가 그리워서, 또 다시 크루즈 여행을 할 것이다. 그날을 기약하며 보람되고, 흐뭇한 걸음으로 하선할 것이다.
* 터키 이스탄불 항구 하선
터키 이스탄불 항구에 하선했다. 출항할 때 승선했던 이스탄불 신시가지 유럽 쪽 항구에 배가 정박했다. 이제 이탈리아 선사의 MSC MAGNIFICA 호와 정말 이별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선사는 곳곳 바다의 크루즈 여행에서 또 만날 것이다. 전에 몇 번 탔었던 선사다. 선박 터미널에서 밤새 선원들이 날라다 놓은 대형가방을 찾았다.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에 승차하여 현지 교포 남자 가이드와 만나 이스탄불 시가지로 향했다. 오늘은 이스탄불 시가지를 탐방할 것이다.
*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다리
오늘은 터키 이스탄불 시가지를 탐방한다. 지금은 이동 중에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다와 다리를 본다. 이스탄불은 아주 특별한 도시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도시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다.보스포러스 대교 중 3차 건설한 것은 우리나라 건설사 에서도 관여했다. 터키는 한국을 상당히 선호한다. 어려서부터 한국은 형제 나라라고 가르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사자들이 아직도 한국에 묻혀 있다. 해저터널도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선을 타면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아시와와 유럽을 잇는 다리를 더 자세히 만날 수 있다. 금각만, 골든혼에 걸쳐 있는 갈라타 다리에는 사람들이 낚시를 하기도 하고, 자동차와 전철이 왕래한다.다리 아래로는 배가 유유히 드나든다. 이스탄불은 묘한 매력이 서린 도시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다리가 해협 위에 놓여 있고, 유럽 쪽 과 아시아 쪽을 잇는 다리가 바다 위에 놓여 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고, 그리고 유럽 쪽은 신시가지, 아시아 쪽은 구시가지다. 골든혼, 즉 골든만에 건설된 다리도 보인다. 매우 아름다운 구조다. 해변도로를 달리며 이스탄불의 낭만적인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 터키 이스탄불 도심 교통
터키 이스탄불의 시가지 교통이 복잡하다. 도심으로 갈수록 더욱 심하다. 항상 그렇단다. 이곳은 지하철이 없다. 지상철만 잇다. 공중에 전철선이 늘여있다. 지상전철과 일반 차량들이 함께 다니는 교통도로라서 더욱 혼잡한 느낌이 든다. 이것도 세계여행이 주는 이색 풍경이다.
* 터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는 두번째 왔다. 그래서 낯설지 않은 곳이고, 물건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약간은 안다. 이곳은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적당히 협상하여 쇼핑을 잘 해야 하는 곳이다. 아치형 돔 지붕이 있는 대형 시장 앞에 다다랐다.이곳은 터키의 전통 특산품과 기념품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터키 이름으로 카팔르 차르쉬라고 하는데,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드넓은 장터에 60여개의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져 약 5000여 개 이상의 점포가 가득 들어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치형 돔 지붕으로 덮인 대형 실내 시장으로, 일반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로 알려져 있다. 1455~1461년 술탄 메메드 2세의 명에 의해서 건축된 아주 오래 된 시장이다. 16세기 술탄 술레이만 1세 통치 시기의 대대적인 확장을 비롯하여 여러 번의 증·개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개의 주요 통로 끝에 있는 입구 4개를 포함하여 모두 20여 개의 입구가 있다. 시장에는 금, 은 세공품을 포함한 각종 보석류, 피혁류, 카펫, 향신료, 형형 색색의 도자기와 기념품을 포함한 각종 공예품과 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비잔틴 시대부터 동서양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에는 하루 최소 25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출구가 많아 지난번 이곳 여행 왔을 때와는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 상가마다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화려하고, 고상하고, 섬세한 터키의 상품들이 외객의 걸음을 흡입한다. 지난번 여행에서는 가죽 벨트를 많이 샀는데 오늘은 눈으로만 쇼핑을 즐겼다.
*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주변
그랜드 바자르에서 걸어서 갔다. 이스탄불에서는 거의 걸어서 탐방해야 한다. 유럽 여행은 대부분 그렇다. 도심일수록 좁은 구도로가 그대로 있어서 그렇다. 바닥도 돌로 된 곳이 많아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곳이 많다. 옛스런 향수에 젖어 이스탄불 시가지를 걸어 성소피아 성당 주변에 이르렀다. 웅장한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에는 벌써 관광객들이 모여 든다. 성당 앞에는 지상 전철 정류장도 있다. 바로 곁으로 지상 전철이 지나 다닌다. 성서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소중한 여행지다.
*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입장
성소피아 성당은 입장권을 사야 한다.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이다. 우리도 입장권을 구입하여 줄을 서서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두번째로 온 곳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동일한 문이다. 그래서 익숙한 풍경이다. 정원에는 꽃과 나무가 곱다.
*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내부
성 소피아 성당은 매우 웅장한 건축물이다. 공식 명칭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성한 지혜(Holy Wisdom)’를 의미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이다. 그 위대한 예술적 가치는 모자이크, 대리석 기둥, 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483-565, 재위 527-565)의 명령으로 세워진 유명한 돔은 비잔틴 건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1520년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약 1000년 동안 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또한 그리스 정교회 창설의 중심지이었으며 비잔틴 제국 황제의 의식이 치러지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무슬림 등의 건축물과 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라틴족의 지배를 받았던 1204년에서 1261년까지를 제외하고 360년에서 1453년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대성당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는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945년 2월 1일 미술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교회당은 360년,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동로마 제국시기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첫 번째 건물은 궁전 근처에 위치했으나 404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415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으로 두 번째 교회가 축성되었으나 이 건물도 532년경의 화재로 인해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사라졌다. 몇몇의 대리석 조각들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번째 건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으로 532년에서 5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황제는 이전 건물과 완전히 다른 거대하고 웅장한 바실리카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그리스 물리학자 밀레투스의 이시도르스와 수학자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를 고용했다.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각 지역에서 재료가 조달되었으며 고용된 인부들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황제는 대주교와 함께는 537년 12월 27일 거대한 행사와 함께 새로운 바실리카를 열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는 후대(565–578)에야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53년에서 557년의 지진으로 건물의 메인 돔과 동쪽의 돔이 피해를 입었으며 558년 5월 7일에는 추가적인 지진으로 메인 돔이 붕괴되었다. 황제는 즉시 복원할 것을 명하며 밀레투스의 조카 이시도르스에게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돔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는 정방형의 평면 위에 돔을 설치할 때 돔 밑바닥에 쌓아 올리는 구면 삼각형의 부분과 함께 늑골이 있는 돔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건물과 내부의 인테리어는 지속적인 시련을 겪었다. 726년경에는 많이 파괴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림과 조각들은 사라졌다. 1204년에서 1261년까지는 유럽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1453년부터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종, 제단 등은 제거되었으며 대부분의 모자이크는 회반죽으로 덮였으며 이슬람적인 상징물들이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서 추가되었다. 현재는 다시 복원 중에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은 성당 내부의 곳곳에 그대로 배어 있다. 웅장한 천장과 장엄한 실내 건축 구조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장대한 규모다. 오늘날의 방문객은 기독교 시대에 남겨진 채색된 대리석과 호화로운 모자이크와 더불어 이슬람의 미나레트와 비문도 볼 수 있다. 거대한 중앙부 돔은 지름이 32.6미터에 이르며, 네이브에서부터의 높이는 50미터에 달한다. 중앙 돔은 다시 맞물린 돔, 세미돔, 앱스 공간으로 압축된다. 그 아래로 40개의 채광창은 쏟아져 들어온 빛이 흩어져 마치 돔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돔의 커브와 그 아래 벽의 수직 각도가 만나는 부분을 해결해 준 건축적 장치인 펜던티브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이다. 그 덕분에 돔의 하중이 분산되지만, 이후 수차례 돔이 무너지기도 했다. 외부에서 본다면 무엇보다도 온갖 기하학적 형태가 한데 모인 난해함이 눈에 띈다. 디자인 자체의 명확한 파사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말이다. 16세기,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는 과정에서 추가된 미나렛으로 인해 보다 프레임이 알아보기 쉬워지기는 했다. 한때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기독교 교회였던 하기아 소피아는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에서 성소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보수 작업은 상당히 까다로운데, 이슬람교도들이 '우상 숭배적인' 모자이크를 뒤덮어 버렸으며 이를 도로 벗겨 내려면 그 위에 남겨진 작품이 손상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조명으로 그윽한 성당 곳곳을 돌아보았다.
* 터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외경
성당 내부를 모두 탐방하고 밖으로 나왔다 외경이 매우 아름답다. 블루모스크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걸어가며, 뒤돌아 보며 성소피아 성당의 외경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기독교 바실리카와 무슬림 모스크였던 아름다운 비잔틴 건물이다. 훌륭한 돔 지붕이 달린 거대한 바실리카 하기아 소피아('신성한 지혜')는 비잔틴 건축이 정점에 달한 영광스러운 건물 중 하나이다. 그 외관은 이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동의 긴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 건물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동방 정교회 교회가 되었으며, 이 지역을 정복한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1453년에는 중요한 모스크가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1930년대에 박물관이 되었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이 자리에는 이미 두 채의 커다란 교회가 서 있다가 사라졌으며,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세 번째 교회의 건축을 감독했다. 바로 이 교회가 현재 건물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는 그의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걸맞은 자랑거리가 되었다.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돔이 한 차례 이상 무너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 다양한 수준의 재건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건들 중 일부가 기초적인 설계 오류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그 무엇도 이 건물이 지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비전, 대담함, 그 규모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높이가 55m 이상이며 직경이 30m가 넘는 육중한 중앙 돔은, 마치 네이브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하다는 찬탄을 받는다. 이러한 효과는 부분적으로 돔의 아랫부분에 수많은 작은 창문들을 내어 내부를 마법과 같은 빛으로 가득 채우게 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또한 우산처럼 여러 개의 살로 이루어진 돔의 디자인과, 돔이 전형적인 직사각형 모양이 아닌 돌로 만든 거대한 네 개의 삼각형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도 떠 있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는 데에 일조한다. 돔의 무게는 육중한 돌기둥으로 전달되기 전에 먼저 이 삼각형 구조물에 실리게 된다. 그런 모든 조화로운 비경의 건축물, 성소피아 성당을 가슴에 두눈에 담아간다.
* 터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 외경
블루모스크는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있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걸어서 두 명소를 탐방한다. 우리도 지금 소피아 성당에서 걸렁서 이곳에 왔다.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에 있는 모스크다. 회색 웅장한 건출물이 성소피아 성당과 마주보고 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블루모스크 바로 앞에서 하고 내부에 입장하여 더 자세히 볼 것이다. 모스크 곁을 지나며 외경만 관람했다. 블루 모스크는 영어 통칭으로, 정확하게는 술탄 아흐메트 1세 모스크다.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하고 입장하여 더 자세히 볼 것이다.
* 터키 이스탄불 식당 현지 중식
이스탄불 도심에서 점심식사로 닭고기 케밥을 아주 맛있게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일가게에 석류가 많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석류는 식당에서 쥬스로도 먹을 수 있었다.
* 터키 이스탄불 히포드럼 광장
이곳 이스탄불의 히포드럼 광장은 몇 년 전 여행에서도 왔던 곳이다. 그래서 오롯하게 솟구친 오벨리스크가 유난히 반갑게 보인다. 히포드럼은 경마장 같은 곳으로 로마시대 대전차 경기장이었던 유적지다. 서기 203년 마차 경주대회가 최초로 열렸던 곳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로마에서 보았던 대전차 경기장을 연상케 한다. 32m의 높은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찌른다. 이곳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낮의 햇살을 더욱 영롱한 빛이 서린 오벨리스크가 발걸음 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 터키 이스탄불 블루모스크
이스탄불 블루모스크는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붙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한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 푸른 모스크는 오스만인들이 1453년 비잔틴으로부터 빼앗은 이스탄불의 예전 중심지에 1609년에서 1616년까지 세워졌다. 이 모스크는 예전에는 정교 교회였다가 모스크가 되어 버린 웅장한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서 정확하게 맞은편에 있다. 아메드 1세는 일부러 이런 장소를 선정한 것이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과 건축 장인들이 기독교의 선임자들과 필적할 만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바랐던 것이다. 결국 푸른 모스크의 돔은 하기아 소피아의 돔만큼 크지는 않게 되었지만, 푸른 모스크의 건축가 세데프하르 메흐메트 아가는 건물의 구조의 완벽한 균형미로써 그러한 점을 벌충하려 했다.조각된 대리석 민바르(설교단)는 모스크 안 어느 곳에 있어도 이맘(이슬람교도 공동체의 우두머리, 혹은 모스크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모스크의 중앙 돔은 직경 33m이며, 높이는 43m이다. 내부에는 꽃, 나무, 추상적인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즈니크에서 가져온 2만 개가 넘는 수공예 도자기 타일들이 늘어서 있다. 200개 이상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일광이 내부로 넘쳐든다. 아메드 1세는 모스크가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으며, 모스크 벽 바로 외부에 있는 마우솔레움에 묻혔다. 푸른 모스크에서는 1만 명 이상이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수백 명의 무슬림들이 여전히 이 장소에서 하루 다섯 차례씩 매일 기도를 올리고, 금요일이나 무슬림 축제 기간 중에는 더 많은 이들이 찾는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북쪽 현관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서쪽 현관이 가장 눈부시게 장식되어 있다. 우리 부부는 몇 년 전에 탐방하고, 다시 찾아온 곳이다. 그래서 더욱 정감이 서린 곳이다.
* 터키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매우 넓은 자락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름다운 해변 언덕 평지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서 근위병들과 말이 시선을 끈다. 한참을 걸어서 입장문에 다달랐다.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이 많아 매우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톱카프 궁전은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가 건설을 시작해 1467년 메흐메드 2세 때 완공되었다. 톱카프는 ‘대포 문’을 뜻하는데 과거 해협 쪽에 대포가 놓여 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오스만제국 때 세워진 톱카프 궁전은 단순한 왕족의 거처가 아니라 술탄과 중신들이 회의를 열어 국가 정치를 논하던 장소였다. 당시 궁전에 거주하는 시종과 군사, 관료의 수만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정원 4개와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증·개축으로 오스만 건축 양식의 변화 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볼 수 있다. 제1정원이 가장 넓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규모가 작아진다. 각 정원에는 회의실, 알현실, 교회,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고 술탄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도 갖추어져 있다. 볼거리가 많아 전부 천천히 둘러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야소피아 성당의 북동쪽에 자리한 황제의 문으로 입장하면 제1정원이 나온다. 정원 왼쪽에 보이는 ‘성 이레네 성당’은 아야소피아 성당이 건설되기 전 세워졌으나 ‘니카의 난’으로 소실되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문을 지나 제2정원에 자리한 하렘(Harem)은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들만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이곳 입장문 근처에서 하렘을 보았다. 술탄과 거세한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통로로 이어진 하렘에는 약 400개 방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의 모든 창에는 철창이 달려 있는데, 이는 외부의 침입과 여성 노예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하렘 입장권은 별도이며 가이드 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제2정원 내 오른쪽에 위치한 굴뚝이 늘어선 건물은 요리사 수백 명이 음식을 준비하던 주방이다. 현재 도자기 전시실로 사용된다. 전시된 도자기 수가 무려 1만 2천여 점이나 된다. 제3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이 유명하다.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던 제4정원은 가장 작지만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골든 혼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어느 한 곳 소홀히 장식한 곳이 없는 매우 수려한 궁전이다. 역사적 향취도 배어 있고, 온갖 나무와 꽃들로 현재의 향취도 배어 있는 잘 보존된 궁전이다.
* 이스탄불 지하 물 저장 저수조
이스탄불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적인 도시가 되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남쪽 입구에 있으며, 묘하게도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다.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유적들이 분포해 있다. 그 중 하나가 이곳 지하 저수조다. 이곳 지하 저수조은 동로마 제국시절의 저수조다. 수많은 석제 기둥들과 아치를 세워 만든 곳으로, 당시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신전 등의 기둥을 징발해서 세웠다고 한다. 약 100km 밖에 있는 수원에서 높은 수로로 물을 끌어와, 이 지하 시설에 저장했던 것이다. 수로가 그리 많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이토록 완벽한 지하 물 저장소를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곳 저주조로 인해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오늘 날의 이스탄불은 적에게 포위당하거나 가뭄이 들어도 3개월 정도는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입장하여 어둠 속에서 물 위에 설치한 길목을 따라 갔다. 물 속에는 물고기도 있다. 조명등이 그리 밝지않아 자세 보인진 않는다. 기둥들을 지나 끝부분에 이르면 메두사 동상이 받침대에 새겨져 있다. 사람이 메두사를 만나면 돌이 전설 때문에 거꾸로 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거꾸로 뒤집에 놓은 것이 이주 독특하다.
* 터키 이스탄불 지상 전철
지하저수조에서 나오니. 도로에 지상 전철이 자나간다. 이스탄불은 지하철이 없어서 지상으로만 다니는 교통순단이다. 전철선이 놓인 도로에는 자동차도 함께 다닌다. 눈앞에서 양 방향 오가는 지상철을 보니 흐뭇했다.
*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
터키 이스탄불에는 역사지구가 있다.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Bosphorus) 반도의 전략적 위치에 있는 이스탄불은 2,000년 넘게 정치·종교·예술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대 전차 경기장, 6세기에 건축된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16세기에 건축된 쉴레이마니예(Süleymaniye) 모스크가 있다. 이런 유적들 전부가 과도한 인구 집중, 산업공해, 통제되지 않는 도시화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 북쪽으로는 자연 항구인 골든 혼(Golden Horn), 동쪽으로는 보스포루스 해협, 남쪽으로는 마르마라(Marmara) 해에 둘러싸인 반도에 있다. 이전에는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이 발전했던 역사적 반도 지역인 이곳은 5세기 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최초로 건설한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스탄불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수세기 동안 유럽과 아시아가 교류한 사실을 반영하는 건축물의 독특한 통합에 있으며,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창의적인 천재 건축가들이 창조해낸 비교할 수 없는 스카이라인에 있다. 이스탄불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스카이라인은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역사지구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감싸는 거대한 돔은 6세기 건축과 장식 분야의 전문 지식을 반영한 것이다. 15세기의 파티흐 복합 단지와 19세기까지 계속 확장된 톱카프(Topkapi) 궁, 수석 건축가 시난의 작품인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복합단지와 셰자데 모스크 복합 단지는 16세기 오스만 건축의 절정을 보여준다. 17세기 술탄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와 항구 근처에 있는 예니 모스크(뉴 모스크)의 가느다란 첨탑은 1664년에 완성되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유산이 있는 네 지역은 고고학 공원으로 역사적인 반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이 네 지역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복합단지와 함께 쉴레이마니예 쿼터(숙소), 바자르(시장)와 바자르 주변의 거주민의 주택 양식, 제이레크 모스크, 옛 판토크라토르의 교회) 주변에 있는 제이레크 지역, 그리고 예전에 블라헤르나이 궁 유적을 포함하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양쪽을 따라 펼쳐진 지역 등이다. 이 지역들은 또한 17세기 블루 모스크,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 모스크, 16세기 셰흐자데 모스크 복합단지, 15세기 토프카프 궁, 콘스탄티누스 전차경기장, 발렌스(Valens) 의 수도교, 성 소피아 성당의 유스티니아누스 교회, 성 이레네(St. Irene) 성당, 퀴큐축 아야소피아 모스크, 콤니너스 왕조의 요한 2세 하에 이레네 여제가 지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14세기와 15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회화를 간직하고 있는 옛 코라의 성스러운 구세주 교회, 그리고 목욕탕, 저수조, 무덤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의 독보적인 사례들을 포함해 제국이 융성하던 시기의 건축적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스탄불 역사지구는 19세기, 20세기 들어 급격한 변화와 쇠락을 겪는 도시 지역에서 벗어난 구역에 있으며, 이스탄불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이미 국가에서 법률을 제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4개의 역사지구 안에 있는 주요 기념물과 고고 유적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대부분 완전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관리 계획이 부족하여 취약하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환경과 도시의 뛰어난 스카이라인은 발전에 취약하다. 이스탄불은 비잔틴과 오스만 문명의 독특한 증거를 담고 있다. 역사를 통해, 도시 중앙의 기념물들은 건축의 발달, 기념 미술과 공간 구성에서 유럽과 아시아 양쪽 모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47년에 탄생한 제2의 방어벽을 가진 6,650m의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상 벽은 성 소피아 성당 이전에 벌써 군사 건축의 선도적 표준 중 하나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은 모든 가족 교회, 후에는 모스크, 그 전에는 동양과 서양 기독교 예술 양쪽에 모두 영향을 끼친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와 왕궁들의 모자이크의 모델이 되었다. 이스탄불은 두 대륙이 교차하는 지점에 건설되어 연이어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까지도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종교·예술에서 주요 사건과 끊이지 않고 연관되어 왔다. 동시에 이스탄불은 인구가 3백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다. 이 역사적 도시는 지난 30년 동안 인구가 증가해 왔는데, 이 때문에 유산의 보존 상태에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화와 급속하고 통제 불가능한 도시화로 인해 생기는 공해는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유산 유적은 네 지구로 나뉘는데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기념물들은 도시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방문객들은 주로 역자지구의 유적을 탐방한다. 우리도 전체를 볼 수는 없지만 역사지구 안에서 몇 군데의 유적을 본 것이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돌마바흐체 궁전, 피에르 롯티 언덕, 탁심 광장
* 터키 이스탄불 호텔 출발
이제 터키 여행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호텔에 머문 것도 오늘 이시간이 마지막이다. 호텔 뷔페 조식도 지금이 마지막이다. 맛있고 풍성한 식단을 대접 받는 것도 끝이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소중한 순간들이다.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치면 저녁에 조국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호텔 정원에 올리브나무 같은 나무에 도토리가 열려 있다. 신비로운 광경이다.
* 터키 이스탄불 아파트
티키 이스탄불에는 아파트가 하나의 재산 형성 수단이다. 부자는 3천 채의 아파트릉 소유하고 있단다. 이곳 아파트 임대는 전세는 없고 모두 월세만 있다. 해변 풍경이 조망되는 아파트는 매우 고급이다. 현지 교포 가이드도 월 80만원의 아파트에 산단다. 그것은 학생들이 사는 수준의 아파트란다. 이스탄불 시가지를 탐방하면서 크고 작은, 높고 낮은 아파트를 많이 보았다.
* 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 성벽
이스탄불 시가지를 탐방하다보면, 높은 성벽과 만나게 된다. 아주 높고 긴 성벽이다. 이 성벽은 도시 침공을 막기 위해서 세웠다. 꼬챙이로 죽이고 침입했던 적군을 막기 위해서 건설했단다. 오스만 병력 12만 명이 투입되어 건설했다. 로마 병사는 조금 투입되었다. 콘스탄틴노플의 3중 성벽이다. 그런데 지금은 관리가 소홀하다. 성벽 아래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 성벽은 역사적 보존을 위해 소중한 유적이다. 이스탄불은 고대 도시이자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고고학 공원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전차 경기장(324년), 쉴레이마니예 지역에 있는 발렌스 수도교(378년), 그리고 4개 지구의 맨 마지막에 위치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413년에 짓기 시작한 이곳 콘스탄티노플 성벽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여러 개의 주요 기념물로 대표된다. 고고학 공원 안에는 성 소피아 성당과 성 이레네 성당의 교회들이 있는데, 유스티니아누스(527~565)가 다스리던 지역에 건설되었다. 제이레크 지역에는 고대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이 있는데 콤니너스 왕조의 요한 2세(1118~43) 시기에 이레네 여제가 건설했다. 성벽 지구는 초라(지금의 카리예 카미이)의 성 사비우르의 오래된 교회가 있다. 이곳에는 경탄을 자아내는 모자이크와 회화가 있으며 이것은 14세기와 15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벽 배치는 7세기와 12세기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서 거주 지구와 블라헤르나이 궁을 포함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들로 대표된다. 고고학 지구에 있는 토프가프 궁과 블루 모스크, 쉴레이마니예 지역에 있는 세흐자데와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쉴레이만 대제(1520~1566) 통치기에 건설되었다. 이 유산은 모두 건축가인 코차 시난의 주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토착민 거주지가 있으며 거주지에는 525개의 목조 주택이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여러 곳에서 이어져 도시 곳곳에서 많이 보았다. 이스탄불의 깊은 역사를 참 많이 보고, 배우고 간다.
* 이스탄불 시가지 아침 해변도로 풍경
우리는 오늘 이스탄불을 탐방하기 위해 해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출근하는 자동차들이 많다. 이곳은 하얀색과 은색을 선호한다. 그래서 하얀색 차가 가장 많고 은색도 많다. 자동차가 더러우면 벌금을 내게 된다. 가끔씩 경찰이 검사한다. 지상 전철도 지나간다. 해변도로 맞은 편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다와 함께 아름다운 해변도로 풍경이다.
*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에서도 그 비경을 선사한다. 나는 두번째 이곳에 왔다. 먼저번에도 큰 감동을 준 궁전인데, 오늘 역시 내부와 외부 세밀히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궁전은 바다와 접해 있다. 해변 주차장에 내리면 큰 시게탑이 있다. 신시가지의 높은 청색 타워도 보인다. 궁전 입장문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궁전에 이른다. 궁전 건물 앞에는 에메랄드빛 연못이 꽃과 나무로 둘러싸여 비경이다. 이런 풍경과 함께 정원이 비경이다. 이곳에는 총리가 거주한다. 대통령은 앙카라에 거주한다. 실내는 사진촬영 금지다. 샹드리제, 도서관, 영접실, 가족실 등을 관람했다. 기둥은 겉은 대리석으로 입혔고, 속은 나무다. 무거워서 깨질까봐 그렇게 만들었다. 히변이 비경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술탄의 왕궁부터 옛 오토만 제국 귀족들의 여름 별장이었다, 단아한 바로크 풍의 메지디예 모스크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함은 끝이 없다.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재된 돌마바흐체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동양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는 톱카르 궁전과 대비되는 서양식 궁전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이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들은 톱카프 궁전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도 영빈관으로 이용된다.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285개, 홀 43개, 발코니와 목욕탕이 각각 6개 있다. 규모는 톱카프 궁전보다 작지만 역사적 유물이 많다. 궁전 건립에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으며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실내를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것이다. 바닥에는 최고급 수제 양탄자가 깔려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다.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대기 시간을 포함해 궁전을 전부 둘러보기까지 약 1시간 30분~2시간 소요된다. 우리는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이어폰을 끼고 설명을 들었다.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이다. 이 궁전은 자신의 하렘과 궁정, 그리고 외국의 군주들과 사신들을 영접할 넓은 응접실을 갖춘 건물을 원한 오토만 투르크의 술탄 아브뒬메시드 1세를 위해 지어졌다. 술탄의 전속 건축가였던 가라벳 아미라 발리얀(1800~1866년)은 이러한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웅장하고 압도적으로 큰 궁전을 세웠다. 발리얀이 채택한 스타일은 정교한 신 바로크 양식이었다. 2층 높이의 포르티코와 풍부한 조각은 웅장함과 정교하고 값비싼 장식을 결합하는 효과를 낳았다. 수많은 방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방은 36미터 높이의 돔과 늘어선 기둥들, 아치들로 꾸민 무도회장이다.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은 계단 홀인데, 이 중 말발굽 모양의 층계는 크리스털 난간으로 유명하다. 또 끝없이 이어지는 접견실, 화려하게 도금한 개인실, 그리고 설화석고를 두른 욕실 역시 돌마바체의 자랑거리다. 20세기 들어서 터키가 공화국이 되면서 돌마바체는 국가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관저가 되었다. 1938년 무스타파 케말은 돌마바체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오늘날 터키에서 돌마바체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바치는 기념비와도 같다.
내부를 사진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두눈과 가슴에 가득 담아왔다.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다가 눈앞에 전개된다. 이곳 바다의 문으로 외국이 사신들이 드나든 것이라니, 그 역사적인 곳에 내가 서 있다. 우람한 궁전 건물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드넓은 정원을 걸어서 떠나왔다. 보석 같은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코라 성당으로 이동하며 본 이스탄불 시가지
돌마바흐체 궁전의 해변에서 도심의 코라 성당으로 이동한다. 이스탄불 시가지 곳곳에 큰 모스크가 많이 보인다. 자동차들도 많다. 거리에는 검은 천으로 두른 이슬람 여인들도 있다. 로마 교를 통과하여 지나간다. 역사적인 수로교를 눈앞에서 보는 것이 큰 선물이다. 버스로 이동할 때의 그 나라 풍경을 보는 것도 아주 큰 의미가 감긴 여정이다.
* 터키 이스탄불 코라 구세주 성당
코라 구세주 성당은 그리 큰 구모는 아니다. 역사지구 안에 있지만 주변에는 일반 시민들이 주택이 둘러싸여 있다. 성당 앞에 큰 기념품 상가가 있다. 코라 구세주 코라 성당을보고 중식을 하고, 롯티언덕에 오르고, 탁심광장에 갈 것이다. 코라 구세주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건축되었다. 안타깝게도 558년 대지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개축하였다.1315-1321년에는 현관과 부속경당을 증축하였다. 성당은 중앙의 메인 돔을 을 비롯한 5개의 돔이 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세운 4개의 미나레, 즉 이슬람사원 첨탑도 있다. 성당 건물 입구의 긴 벽면에 성화와 설명이 붙어 있다. 허름한 벽면을 장식한 독특한 풍경이다. 보수 중이어서 철제 설치물도 얽혀 있다. 실내로 입장하여 들어가 보았다. 비잔틴 왕조의 비잔틴 교회였던 곳으로 벽면과 천정에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성화가 아주 많이 장식되어 있다. 부속경당의 '최후의 심판', '부활' 등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작으로 남아있다.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예수님께 성당을 바치는 모자이크도 있다. 이슬람 침입으로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반죽을 덮여졌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슬람 사원으로 상용되다가 1948년 이후 복원되어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다. 현재는 박물관(Kariye Museum)을 사용하고 있다. 큰 규모도 아니고, 그리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성당에 와서 터키의 교회 역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간다.
* 코라 성당 주변 주택들
코라 구세주 성당에서 나와 이동하는데 뒤돌아 보니 성당 주변에 온통 주택으로 가득차 있다. 주택들 사이에 성당이 들어앉아있다. 4개의 첨탑 중에 하나가 오롯하게 보인다. 터키는 복지가 잘 나라다. 초.중.고.대학의 교육이 무상이다. 국립대학이 95%다. 복지 때문에 대통령이 독재를 해도 당선이 된단다. 또한 터키는 정이 많은 나라다. 살기 좋은 나라란다. 한국의 6.25 전쟁에 참전국으로 철군시 철모 등 모두를 한국인에게 주고 떠난 나라다. 우리와는 혈맹국으로 상당히 우호적이다.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다음 탐방지로 간다.
* 이스탄불 로마시대 수로 발렌스 수도교
로마시대의 유적인 수로 발렌스 수도교가 아주 크고 웅장한 모습으로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남아있다. 얼핏 보면 일잡적인 다리 같지만 로마시대에 멀리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오던 수로다. 로마시대 4세기에 발렌스 로마황제가 건축하여서 발렌스 수도교로 이름 지어졌다. 매우 소중히 보존해야 하는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로마 수로는 세계 곳곳에서 보아왔다. 대부분 저런 형태인데 규모는 이곳 이스탄불의 수도교가 가장 큰 것 같다. 로마의 장엄한 숨결이 고인 발렌스 수도교의 아치형 문을 통과하여 이동한다. 큰 감격이다.
*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의 해변 풍경
이스탄불 여행에서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지나가던 구역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에는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가 있다. 크게 보면 지중해다. 바다와 도시, 바다와 사람, 바다와 자동차,바다와 모스크, 바다와 주택들 모두 그 해변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해변도로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의 해변도로를 따라 달려간다. 중식식당으로 가기 위해서다. 도심을 벗어나니 한적하다. 바다와 접한 해변도로가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 이스탄불 케밥 현지 중식 식당
이스탄불 현지식당에서 터키 전통음식인 케밥을 먹었다. 닭고기 케밥이다. 이것이 현지식사로는 마지막이다. 저녁은 한식으로 먹을 예정이다. 맛잇게 먹고 나와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 피에르 롯티 언덕으로 가며 본 이스탄불 시가지
이제 이스탄불의 여정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다. 피에르 롯티 언덕으로 간다. 해변도로를 따라 가기도 하고, 시가지 사이로 가기도 한다. 바다와 마주하는 시가지가 매우 정겹고 아름답다.
*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본 피에르 롯티 언덕 공동묘지
피에르 롯티 언덕에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 승차장으로 왔는데, 비탈진 언덕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이곳 공동묘지는 우리나라의 국립묘지와 같은 곳이다. 개인의 묘지는 아니다. 나무 사이로 아슴아슴하게 수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다. 롯티 언덕은 슬픈 사연이 있는 곳이다. 피애르 롯티(1850-1923)는 프랑스의 작가로 활동하던 소설가의 이름이다. 그는 해군 장교였다. 그가 1876년부터 이스탄불에 해군 장교로 머무는 동안 남편이 있는 여인 아지야데와 사랑을 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을 사랑하려니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이곳에 오게 되었고, 공동묘지가 그들을 품어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이곳 언덕이 그리 유명하지 않았을테니 사람들의 걸음이 뜸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피에르 롯티가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터키 여인은 홀로 이스탄불에 남게 되었는데, 그만 이슬람 가문에서 용납하지 못하여 그녀를 명예 살인시켰다. 얼마 후 피에르 롯티는 그 사랑햇던 여인을 찾아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은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자기로 인하여 죽어간 그 여인을 위해, 피에르 롯티는 이곳 이스탄불 골든혼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를 위한 글을 썼다. 죽는 날까지, 이곳 언덕에서, 사랑했던 한 여인을 위해, 시와 소설 등의 작품을 쓰는 것으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달랬다. 그녀에게 아픈 가슴으로 사죄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 공동묘지가 줄지어 늘어선 산언덕 이름을 피에르 롯티가 부르게 된 것이다. 비록 불륜이지만 피에르 롯티의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 앞에, 후세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아직도 그들의 붉은 사랑을 떠올리며 이곳 피에르 롯티 언덕에 오르고자 장사진을 이루는 것이다. 나는 케이블카 승차장의 긴 인파 줄 행렬 속에서 자꾸 공동묘지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남아 있을 것 같은 두 남녀의 사랑을 찾고 싶어서다. 보이지 않아도 숲에 흐르는, 무덤을 타고 흐르는 살빛 사랑 이야기가 가슴 아리도록 스며든다.
* 피에르 롯티 언덕 케이블카 승차장
피에르 롯티 언덕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케이블카가 계속 오르내리며 사람을 실어 나른다. 걸어서 가는 길도 있지만 우리는 일정 관계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 케이블카로 피에르 롯티 언덕에 오르며 본 풍경
케이블카를 타고 피에르 롯티 언덕으로 오르며 바깥 풍경을 본다. 지중해 바다, 골든혼 즉 금각만이 아름답게 전개된다. 해변으로는 고운 색상의 주택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산언덕에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공동묘지의 무덤들이 간간이 보인다. 바다 위에는 다리가 길게 놓여 더욱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본 골든혼 해협
케이블카를 타고 피에르 롯티 언덕에 올라왔다. 아래로 보이는 골든혼 해협이 비경이다. 이곳 아담하게 들어온 바다는 골든혼, 금각만이다. 골든혼의 갈라타교가 장관이다. 골든혼은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도시 가운데로 아담하게 파고 들어온 바다는 자연 요새이며 훌륭한 항구가 되었다. 케이블카 승차장 바로 곁에는 전망대가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골든혼과 시가지를 조망한다.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 피에르 롯티 카페에서 본 창밖의 노천 카페 풍경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꼭 가야할 곳은 카페다. 우리도 피에르 롯티가 들나들던 그 카페에 갔다. 실내 카페 의 자에 앉아 창문으로 밖을 보니 노천 카페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잇다. 골든혼과 마주하여 자이차를 즐긴다. 여기 온 모든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죽어간 여인과 평생을 죽어간 여인을 위해 이곳 언덕에서 글을 쓴 피에르 롯티를 그려볼 것이다. 그들의 숨결을 찾아 온 것이리라.
* 피에르 롯티 카페에서 마시는 터키 전통차 자이
오늘 우리는 피에를 롯티를 만나러 이곳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 이름도 피에르 롯티 카페다. 카페의입구 문 위에 PIERRE LOTI 라는 상호가 붙어 있다. 피에르 롯티가 머물던 곳이다. 벽면에 그의 족적을 사진에 담아 놓았다. 그가 마셨던 터키 전통 자이차를 우리도 마셨다. 붉은 색 자이차가 그들의 붉은 사랑을 진하게 읊는다. 차 한 모금마다 피에르 롯티를 그리워 하고, 유부녀인데도 피에르 롯티를 사랑했던 여인의 뜨거운 사랑을 마신다. 이곳 사람들은 자지차를 즐겨 마신다. 하루에 5~6잔 정도 마신다. '자이 한 잔 하자'히며 만난다. 달게 마신다. 보통 차 한 잔에 각설탕 5봉지를 넣어 마신다. 음식도 짜고 달게 먹는다. 달콤한 자이차가 슬픈 사랑이었지만 아름다운 전설로 남은 눈부신 두 남녀의 사랑을 입안 가득, 가슴 가득 담아준다. 죽어도 좋은 그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하는 환상 속에서 사람들은 그리운 눈빛을 찻잔에 채운다.
* 피에르 롯티 카페에서 사진으로 만난 작가 피에르 롯티와 그의 연인
피에르 롯티 카페에서 터키 전통 자이차를 마시며 사진으로나마 피에르 롯티와 그의 여인을 만났다. 150여 년 전 그들의 모습을 사진과 그림에 담아 카페 벽면에 걸어 두었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는 매우 잘 생겼다. 사진만으로도 그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사유가 되는 얼굴이며,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보이는 남자다. 여인은 가문에서 불명예스런 죽임을 당하여서인지 사진은 아니고 아련한 그림으로 걸려있다. 그 당시의 여러가지 사진들을 걸어 두었다. 애련한 모습들이다. 그들은 무덤 곁의 이 아담한 카페에서 자이차를 마시며 골든혼을 바라보며 사랑을 엮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그 남자는 이곳 카페에서 그녀를 그리워 하며, 평생을 그녀의 무덤과 이곳 언덕을 오르내리며 오직 작품을 쓰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하니 어찌 그들의 사랑을 잘못된 사랑이라 하겠는가. 죽어서도 아름다운 그녀이며, 살아서도 아름다운 그 남자다. 피에르 롯티와 아지야데, 저 세상에서는 헤어지지 말고 두 손 맞잡고 붉은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 피에르 롯티 노천 카페에서 골든혼 조망
피에르 롯티 노천 카페에서도 잠시 머물며 골돈혼을 조망했다. 이곳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행복한 시간이다.
* 피에르 롯티 언덕 전망대에서 본 골든혼과 이스탄불 시가지
피에르 롯티 언덕의 전망대는 이스탄불 시가지와 골든혼, 금각만의 비경을 조망하는 곳이다. 우리 부부도 전망대에 가서 저 아래로 전개되는 한 폭의 명화로 떠오르는 풍경을 감상했다. 바다와 붉은 지붕의 주택들, 울창한 나무들이 눈부신 비경이다.
*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케이블카로 하산
피에르 롯테 언덕에 올라갈 때처럼 다시 케이블카로 하산하여 내려왔다. 긴 줄에 매달려 내려오며 일행들끼리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잠시나마 그토록 사랑받던 여인처럼 황홀한 행복에 젖어보기도 했다. 불가능한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흔적을 닮아보고 싶은 것이다. 참 많이도 웃고, 참 많이도 사랑에 일렁이는 시간이다.
*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하산하여 본 공동묘지
케이블카로 하산하여 피에르 롯티 언덕을 떠나려 하는데, 아름다운 사랑이 고인 공동묘지가 걸음을 잡는다. 어쩌란 말인가. 이방은 이제 돌아가야 하는 것을. 그래 많도 담아가마. 그리 슬픈 사랑이 후일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고이 담아가리라.
*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이동하며 본 골든혼과 이스탄불 시가지
피에르 롯티 언덕에서 하산하여 탁심광장으로 이동한다. 수없이 해변도로를 달렸는데도, 보고 또 보는 이스탄불 시가지인데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은 볼 때마다 스친다. 지금 보이는 골든혼과 주변의 이스탄불 시가지는 아담하게 파고든 바다와 해변의 붉은 기와지붕 물결이 더욱 아름답다. 왜 사람들이 터키 여행을 선호하는지, 이스탄불을 왜 사랑하는지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나 역시 이스탄불에 두번째 왔는데도 기회가 되면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천혜의 자연으로 축복받은 도시다.
* 터키 이스탄불 탁심광장
우리 나라의 명동 같은 곳이다. 이곳을 탐방하고 오후 5시경 떠날 것이다. 탁심(Taksim)은 ‘분할, 분배’를 의미한다. 이것은 15세기 이후 이곳이 이스탄불 북쪽에서 온 수로가 도시의 각 지역으로 나뉘어지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 체계는 술탄 메메드 1세(1413-1421 재위)가 세웠다. 탁심은 이스탄불 주요 교통의 허브이자 관광객과 이스탄불 시민 모두에게 인기있는 곳이다.이스티클랄 거리라는 독립 거리의 긴 보행자 거리는 이 광장에서 끝이 난다. 노스타르기지 트램도 길을 따라 이 광장에서 출발하고, 런던 지하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인 튀넬이 이곳이 종점이다. 탁심 광장의 골목으로 접어들려할 때 지상 전철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혼잡한 지상에 도로에 위험한 전철이 진입하는 것은 신비로운 도심 풍경이었다. 탁심 광장 주변에는 수많은 여행사, 호텔, 레스토랑, 술집, 음식점, 기념품 상가 등이 많다. 또한, 이곳에는 이스탄불의 대형 호텔인 인터컨티넨탈, 리츠칼튼, 마르마라 호텔 등이 있다.높고 낮은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다. 또한, 탁심은 신년 축하 퍼레이드, 사교 모임 퍼레이드 등 공공 사교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곳이다. 또, 다목적 문화 센터이자 오페라 하우스인 아타튀르크 문화센터도 탁심 광장에 있다. 전에는 이스탄불에 왔어도 이곳에 오지 않아서 처음 탁삼광장에 왔다. 넓은 광장을 지나가니 여러 명이 모여 있는 동상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꽃가게들이 많다. 명동골목길 같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화사한 상가와 사람들이 많다. 석양이 길목을 타고 흘러들어 더욱 고운 풍경을 자아낸다. 탐심 광장, 이스탄불에 가면 꼭 들러보아야할 명소다.
* 이스탄불 탁심광장 근처 터널
탁심 광장을 끝으로 터키 이스탄불의 여정은 마무리 되었다. 광장에서 계단을 따라 터널로 내려왔다. 이곳으로 우리를 태우려고 버스가 올 것이다.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버스와 다른 차량들이 지나가기도, 멈추기도 한다. 탁심 광장의 손님이 많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터널의 조명이 아름답다.
* 터키 이스탄불 공항 출발
도로교통 체증이 심하여 저녁식사도 못 하고 공항에 왔다. 오후 9시 5분 비행기인데 1시간 정도 지연 출발이다. KE 956 대한항공으로 밤 10시 출발이다. 우리 부부는 45B, 45C 좌석이다. 올 때와 동일한 좌석이다. 이렇게 지연 출발할 줄 알았으면 저녁식사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보다. 한식으로 푸짐하게 예약된 음식이 그리웠다. 탑승 게이트 근처에서 남은 간식거리를 먹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밤 10시경 인천행 비행기가 이스탄불 공항을 힘차게 출발했다. 이제 나의 조국으로 긴 밤을 날아간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인천공항 도착
* 인천공항 도착
어젯밤 10시에 터키 이스탄불 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비행기가 한국시간으로 낮 1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10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이 소요되었다. 포근한 내 조국의 공항이다. 동지중해 크루즈 여행을 잘 하고 무시히 돌아온 것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다. 그로, 시로 써서 지면에, 인터넷에 발표하여 보람된 세계여행이 되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