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의 석담일기
지은이; 이율곡
책; 대동야승 4 권에 있음(대동야승; 1984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 반포처 민족문고간행회 842 0312, 3096), 또는 출판사 나랏말싸미에서 1998 년 출판된 책(p 556, B6, 18000 원)
석담일기는 율곡 선생님께서 벼슬에 있으신 동안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항, 왕께 진언한 내용, 그에 대한 답 등을 적어 놓으신 것이다. 그 당시의 중요 사항은 배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이해 가능하며, 축약시켜 뽑아놓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왕께 진언한 내용도 철저히 살피지 않으면 그 가치를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내가 뽑아 놓은 부분들은 주로 이율곡 선생님이 우리가 잘 아는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성종 20~명종 1; 송도 3 절(節), 황진이와의 관계를 생각할 것),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연산군 7∼선조 3),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연산군 7∼선조5; "구름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난, 서산에 해 지다하니 그를 설워하노라"), 토정 이지함 (1517∼1578, 중종 12∼선조 11; 토정 비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중종 22∼선조 5; 젊었을 때 퇴계와의 학문적 논쟁으로 유명함), 성혼(成渾 1535∼1598, 중종 30∼선조 31),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중종 31∼선조 26),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중종 34∼광해군 1),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중종 37∼선조 40), 이발(李潑 1544∼1589, 중종 39∼선조 22) 등 여러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모은 것이다.
과거에 9 번 장원하시고, 여러 학문적인 업적을 남기신 율곡 선생님께서 거의 같은 시대에 사신 여러 뛰어난 분에 대해 평가하신 내용, 평가하는 논리, 그리고 방법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었다.
본문에서 율곡 선생은 자신을 '이이'라고 3 인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으신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며, 또한 본인에게 칭찬이 되는 내용도 과감히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시저(Caedar)가 '갈리아 전기'에서 동일한 어법(語法)을 사용하였다.
시대적인 배경을 알기 위해 아래에 1450 년에서 1500 년대에 걸친 여러 인물의 살았던 시기를 적어놓는다.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
Nicolaus Copernicus 1473.2.19~1543.5.24
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1564.2.18
Martin Luther 1483∼1546 [코페르니쿠스나 루터는 세계사를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성종 20~명종 1
1500
이황(李滉) 1501∼1570(연산군 7∼선조 3)
조식(曺植) 1501∼1572(연산군 7∼선조5)
이지함 1517∼1578(중종 12∼선조 11)
기대승(奇大升) 1527∼1572(중종 22∼선조 5)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1592.9.13
Elizabeth I 1533.9.3~1603.3.23
성혼(成渾) 1535∼1598(중종 30∼선조 31)
이이(李珥) 1536∼1584
정철(鄭澈) 1536∼1593(중종 31∼선조 26)
이산해(李山海) 1539∼1609(중종 34∼광해군 1)
유성룡(柳成龍) 1542∼1607(중종 37∼선조 40)
이발(李潑) 1544∼1589(중종 39∼선조 22)
위의 짙은 글씨로 표시된 우리나라 분들은 석담일기에 언급된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이항복(李恒福) 1556∼1618(명종 11∼광해군 10)
선조(宣祖) 1552∼1608
Francis Bacon 1561.1.22~1626.4.9
이덕형(李德馨) 1561~1613
Galileo Galilei 1564.2.15~1642.1.8
William Shakespeare 1564.4.26~1616.4.23
Armand-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Richelieu 1585.9.9~1642.12.4
Rene Descartes 1596~1650
Oliver Cromwell 1599.4.25~1658.9.3
[李珥 1536∼1584(중종 31∼선조 17)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 뒤
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뒤 55년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
58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였으며, 전후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임성삼의 주; 장원급제하게 된 답안지 <천도책>은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장원한 답안지 중에 가장 깊은 내용이라고 한다. 읽어 보았으나 크게 감명받지는 못하였다.]
64년 호조좌랑이 된 뒤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쳐 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74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82년 이조판서가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임성삼의 주; 48 세]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1567 년[율곡이 31 세] 명종 22
7 월 경오일
이황으로 예조판서를 삼았다. 이황은 산중에서 도를 지켜 인망이 날로 무거워져 명종이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말년에 이황을 불러 중국 사신을 접대하게 하니, 이황이 올라와 미처 명령을 받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시니, 이황은 조정에 있으면서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때 이황은 66 세 이셨다.]
[이황 李滉 1501∼1570(연산군 7∼선조 3)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본관은 진보(眞寶).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1534년(중종 29; [퇴계가 33 세]) 문과에 급제, 부정자(副正字)·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충청도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43년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이어 단양군수(丹陽郡守)·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낸 뒤 낙향하였다. 52년(명종 7)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그 뒤 30여 차례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대사성·참의·경연참찬관 등을 잠시 지냈을 뿐 대부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본격적인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학(講學)에 힘썼다.]
10 월
심전이 죄를 지어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심전은 심통원의 조카로 탐하고 더럽기 짝이 없으며, 외척의 세력으로 영화롭고 중요한 직을 지내고 큰 고을에 수령으로 나가 이익을 긁어 모으기를 일삼았다. 그는 공공연히 말하기를, "내가 남, 녀 열여덟이나 되는데 탐하지 않고 어떻게 살겠나. 그러나 나는 끝까지 사림(士林)은 해치지 않겠다." 했다. 안자유는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심전은 정직한 선비다." 했는데, 그 사람이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자유가 말하기를, "탐욕을 숨기지 않으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이 때에 와서 양사가 논핵하여 관직을 삭탈하니, 팔을 걷고 욕하는 백성이 많았다.
[임성삼의 주(註); 더러운 사람을 더럽다고 기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1569 년 선조 2
2 월
임금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는 매우 영명(英明)하시어 온 나라가 성덕의 성취를 바랐더니 얼마 되지 않아 유속(流俗)의 언설이 날로 그 앞에서 떠들어져 임금님의 생각도 이미 유속에 젖었던 것이다.
이황이 서울에 오자, 총애하고 공경하기는 하였으나 허심탄회하게 학문에 종사하려는 뜻은 없으셨다. 이황은 경연에서 여쭙기도 하고 또는 상소를 하기도 하여 매양 성현의 학문으로 임금님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답만 좋게 하실 뿐, 실행하지 않으셨다. 이황은 본시 겸퇴(謙退)를 고집했는 데도 그의 말이 쓰이지 않음을 보고는 돌아 갈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조 宣祖 1552∼1608
조선 제14대 왕(1567∼1608; 재위 41 년, 서거시 나이 56 세). 초명은 균(鈞), 뒤에 공으로 개명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였다[임주; 위의 내용과 다르나 41 년을 재위하였으니 율곡의 초반의 평가로 전체 재위 기간을 모두 말할 수는 없다.]]
9 월
당시 아직 중궁(中宮)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헌납 오건이 아뢰기를,"후비(后妃;제왕의 배필)를 선택하는 데는 먼저 가법(家法)을 볼 것이며 또 외척의 우환도 미리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임금이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척이 우환이 되는 것이지, 임금이 현명하다면 외척이 어찌 위복(威福)을 이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보신 바가 참으로 탁월하십니다. 다만 임금이 아무리 현명하다 하나 그 현명한 것만 믿고 예방(豫防)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후비(后妃)를 간택하는 데는 모름지기 가법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성녀(聖女)를 꼭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후일 외척이 날뛰는 걱정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임금에게 간(諫)하는 방법을 율곡 선생님께서 알려주신다. 이 때 선조는 17 세, 이황은 68 세였다. 이율곡은 33 세]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왕망의 딸 효평황후도 현명하였으니, 어찌 꼭 부모에게 달린 문제이겠는가." 하니,
[임성삼의 주(註); 왕의 반격이다. 왕망은 서기 0 년 근처의 사람으로 전한을 없애고 자기의 왕국을 세웠다. 즉 반역을 한 사람의 딸도 현명한 경우가 있는 예를 선조가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이이가 아뢰기를,
"범범(泛泛)하게[꼼꼼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사리를 논하여 상(常)과 변(變)을 통틀어 말한다면, 임금의 말씀도 역시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성비를 간택하는 데 부모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고 만일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어보아 널리 뭇 의론을 받아드려, 가법(家法)이 순정(純正)하고 부모가 어진 분을 얻으신 뒤에라야 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율곡 선생님은 물러나지 않는다.]
겨울 10 월
이이가 경연에서 맹자를 진강(進講)하다가 그 가운데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말을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아뢰기를, "지금 민생이 곤폐(困弊)하고 기강이 문란하여 사경(四境)안이 다스려지지 못함(맹자에 있는 말)이 심합니다. 가령 맹자가 임금께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임금께서는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이가 임금께서 선치(善治)의 방도를 구할 뜻이 없음을 알고 드디어 조정을 떠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차에 마침 외조모의 병이 중한 것을 듣고 해관(解官)하고 귀성(歸省)하기를 청하였더니 임금께서 휴가로 내려가게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맹자의 위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孟子謂齊宣王曰, "王之臣有託其妻子於其友而之楚遊者, 比其反也, 則凍 其妻子, 則如之何?" 王曰, "棄之."
맹자가 제선왕에게 말했다. "왕의 신하가 자기 처자를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로 떠난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돌아와 보니 친구는 자기의 처자를 배고프고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 친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버리겠습니다."
"士師不能治士, 則如之何?" 王曰, "已之."
맹자가 말했다. "높은 선비가 그 부하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曰, "四境之內不治, 則如之何?" 王顧左右而言他. (참고; 여기의 고(顧)는 '돌아볼 고'자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자이다.)
맹자가 말했다. "나라 안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왕에게 강의하고 물어본 율곡 선생님이 그 당시 통상적인 관리였다면, 그 때가 지금의 민주 사회보다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1570 년 선조 3 년
12 월
신축일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자는 경호,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여 수연(粹然)하기 옥과 같았다. 젊을 적에 과거로 발신(發身)하였으나 나중에는 성리학에 뜻을 두어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을사사화때 '이기'가 그 명성을 꺼려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니,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기가 다시 아뢰어 복작시켰다.
이황은 권간(權奸)들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조정에 설 마음이 없어 벼슬을 시킬 때마다 사직하고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명종은 그가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벼슬을 사양함을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여러 급 올려 정 이품까지 되게 하였다.
이황은 예안의 퇴계촌에 살면서 퇴계라 호(號)하고 의식(衣食)을 겨우 이어갔으며 담박한 것을 즐겼고, 세리와 화려한 것은 뜬구름 같이 보았다.
말년에 도산에 집을 지으니 자못 임천(林泉; 수풀 속에 있는 샘)의 정취가 있었다.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으로 시의 제목을 내어 근신(近臣)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畵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큽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이황의 학문은 문(文)으로 인하여 도(道)로 들어갔고,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의 훈(訓)을 준수하고 여러 가지 학설의 이동(異同)을 이라 저리 통하였으나 모두 주자의 학설에 절충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가한 곳에 홀로 거처하면서 경전밖에는 다른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끔 수석(水石)사이에 산책하며, 성정(性情)대로 시(詩)를 읊으며 한가한 흥을 풀었다. 배우는 이들이 물으면 아는 대로 다 말해 주었으나 제자를 모아 선생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평소에 긍지를 가지려 애쓰지 않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았으나 세상에 나섬과 들어감, 나아옴과 물러남과 사양함과 받음, 가지는 것과 주는 것의 지조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남들이 선물하는 것도 의(義)가 아니면 받지 않았다.
한성에 우거(寓居)해 있을 때 이웃집에 밤나무가 있어 두어 가지가 담을 넘어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니, [자기 집] 아이들이 주어 먹을까 하여 손수 주어서 담 밖으로 던졌다. 그 청렴하고 깨끗한 점에는 더할 것이 없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조야(朝野)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大臣)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라가곤 했다.
도산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 세였다. 조야(朝野)가 애통해 하고 부고가 대궐에 이르자 임금도 매우 슬퍼하고서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1 등의 예로 장사하라 명하였다. 이황의 아들 준이 유언에 따라 예장(禮葬)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성균관의 여러 학생들이 제전(祭奠)과 제문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이황은 특별한 저서는 없으나, 그 논의에 있어서 성현의 교훈을 발휘, 선양한 것이 세상에 많이 행한다. 중종 말년에 화담 처사(處士) 서경덕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 이론에 기(氣)를 이(理)라고 인정한 것이 많았다. 이황이 이것을 병통이라 생각하여 글을 지어 변박(辨駁)하니, 그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복종하였다. 이황은 당세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 뒤에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局量)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또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다른 책에서 본 퇴계 선생님의 생활을 몇 가지 정리한다.
아래는 <역사 속에서 찾아낸 청백리 이야기; 이추원 지음, 고려원, 1993>라는 우리나라의 청백리(淸白吏)만 다룬 책에 있는 이황에 대한 내용이다.
이황 李滉(물깊고 넓을 황) (1501~1570)
40 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임금을 네 분 모심, 모두 일곱 번 사임
1501 년 연산군 7 년에 출생, 7 남 1 녀의 막내, 생후 7 개월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람
늘 자신을 우매한 사람으로 생각함
주역, 심경부주, 주자전서 등 열심히 공부
늘 말했다. "번거러움을 면하려면 고요해야 하고, 졸렬함을 면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24 세까지 과거에 세 번 낙방.[앞의 기록처럼 33 세에 문과(대과) 급제]
단양군수를 하시다가 병으로 고향에 낙향함.
서재에 비바람이 칠 때면 비가 새어 사방 벽에 쌓아 놓았던 책을 헌 상자 속에 거두어 넣는 것이 일이었다.
그 지방 군수가 찾아와 이야기하는 중 비가오자 방에서 마른 곳으로 골라 앉을 자리를 여러 번 옮기었다.
군수가 "도대체 이런 데서 어떻게 참고 지내십니까?"라고 하니, 퇴계 선생님께서는
"습관이 된 걸 어찌 쉽게 고칠 수 있겠나?"라고 대답하셨다.
하루는 권철 대감(권율 장군의 아버지)이 찾아 왔다.
그는 퇴계 집에서 내 놓은 식사를 한 숟가락도 못 먹고 돌아가며 말했다.
"평소 버릇이 잘 못 들어 입이 짧아졌다. 이제 와서 한없이 부끄럽구나!"
퇴계가 전해 듣고 웃었다.
"늘 고기반찬만 먹으면 배에 기름이 져 다른 걸 못 먹지. 나물밖에 못 먹어본 사람이야 고기 반찬이면 더 부드럽기 마련이고."
[임성삼의 주(註); 권철 대감도 존경할 만한 분이다.]
1570 년 선조 4 년 70 세 되던 12 월 돌아가심.
그날 아침에 늘 가까이 뒀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몸을 일으키게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돌아가셨다.
"내 앞에 비를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 있었다.
거친 베옷에 실로 땋은 띠를 하였다. 칡으로 엮어 삼은 신발에 대나무 지팡이는 그저 한없이 말쑥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이규태의 <선비의 의식구조>라는 책에서
이황의 자작 묘비명
"나면서부터 치(痴)였고, 커서는 다병(多病)하였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으며 늦게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도리어 얽혀 왔다.
출세에는 서툴었고 퇴장할 뜻 굳힌 지 오래였다. ...
근심 속에도 낙이 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는 법이었다. 조화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아들 이준에게 말씀을 남기셨다.
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 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 眞城李公之墓>(질그릇 도, 저물 만)라고 표시하라.]
1572 년 선조 5 년
정월
처사 조식(曹植)이 세상을 떠났다는데 조식의 자는 건중(健仲)이다.
그 성품이 청렴하고 꿋꿋하였으며 젊었을 적에 과거에 힘썼으나 그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그가 한성에서 성수침을 찾으니 수침은 백악봉 아래에 집을 짓고 세상일을 사절하고 살았다. 그는 이것을 보고 즐겨하며 시골로 돌아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지리산 아래에 살면서 스스로 남명(南溟; 어두울 명, 바다라는 뜻도 있음)이라 호를 지었다.
그는 주고 받는 것을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구차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대하여 허여(許與; 허락하여 줌, 마음속으로 허락함)함이 적었다.
늘 방에 앉아서 사색하였는데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졸음을 깨웠다. 칼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명(銘)을 써 두었다. "안으로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內明者敬, 밖으로 끊는 것은 의(義)이다 外節者義."
한가로이 거처함이 오래되니, 욕심이 모두 씻어지고 깎아세운 듯한 기상(氣像)이 있게 되었다. 남이 잘한 것을 들으면 좋아하고, 악한 것을 보면 미워하여 불선(不善)한 마을 사람들은 본체도 아니하니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뵙자고 들지 못하고 다만 학도(學徒)들 만이 그를 따랐는데 모두 심복하였다.
명종 때에 성수침과 함께 불리어 단성현감에 임명됐다. 이 때 윤원형이 권세를 잡고 문정왕후를 미혹시켜 사림들의 의기를 꺾었으므로 공론을 칭탁하여 유일(遺逸)을 천거해 쓴다고 하였으나 허명무실할 뿐이었다.
그래서 조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폐단을 말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전(慈殿)께서 사려깊고 착실하시나 단지 심궁(深宮)의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殿下)께서는 나이가 어리시매 선황의 한 아들에 불과하시다."라든가 하고, 또 "노래는 처량하고 의복은 희니 망할 징조가 드러났다." 하는 말이 있었다. 명종은 욕이 대비께 미쳤다 하여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산림처사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명종 말년에 경서에 밝고 몸이 수양된 선비를 천거하라 하여 조식은 이항, 성운, 한수 등과 같이 천거받아, 육품(六品)관에 임명되어 임금이 불러보며 정치할 방침을 물었으나 조식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갔다. 이항이 임천군수가 되어 부임하는 것을 보고 조식이 조롱하기를 "이 조대(措大; 조대는 청빈한 선비를 가리킴)가 하루아침에 군수가 되니, 장차 화(禍)의 발단이 아니된다고 할 수 있으랴." 하였다.
식이 시골로 돌아오니 청명한 명성이 더욱 퍼졌다. 선조때에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아니하고 다만 정치의 잘 잘못만 상소할 뿐이었다.
죽을 때에 그 문도(門徒)에게 말하기를,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 세파의 표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라 하면 옳지만 만일 유자(孺子)로 지목한다면 실상이 아니다." 하였다. 문하생이 유익한 말을 청하니, "식은 경(敬), 의(義) 두 자가 해와 달과 같아서 그 중 하나도 폐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
삼가 생각해보건대,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일민(逸民; 산림처사)이다.
[임성삼의 주(註); 일민은 사전에 의하면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흔히 일민(逸民)은 황제(皇帝)의 위에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의 논저(論著)를 보면 학문에 실제로 체득한 주견이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경세제민의 방책은 못되었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와 일을 했다 하더라도 능히 치도(治道)를 성취시켰으리라고는 기록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 그러나, 근대(近代)의 처사라고 하는 이들로서 시종 절개를 보전하여 천길 벼랑 같은 기상(氣象)을 가진 이는 조식에 비견할 만한 이가 얼마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위 문단의 내용을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면 흉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흉이다.) 그러나 율곡 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 ... ]
[조식 曺植 1501∼1572(연산군7∼선조5) [퇴계 이황 선생님과 동갑]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학자.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
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고 천문·지리·의약·병략(兵略) 등에 널리 통했으며, 또한 좌구명(左丘明)·유종원(柳宗元)의 문장과 노장학(老莊學)에 심취, 초탈(超脫)의 경지에 이르렀다.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처음 읽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후로 유학에만 힘써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그의 학문목표는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중종 때부터 명종·선조 때까지 삼조(三朝)에 걸쳐 그에게 여러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에서 선비를 모아 강학(講學)에 힘쓰는 등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 오건(吳健)·김우옹·정구(鄭逑)·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며, 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은일적(隱逸的)인 학풍을 지녔고 특히 절의(節義)를 중시하였다. 그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사람이 6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정인홍·곽재우(郭再祐)·김면 등은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1615년(광해군7)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진주(晉州)의 덕천서원(德川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명집》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10 월
전 사간원 대사간 기대승이 사망하였다.
대승의 자는 명언(明彦)인데 어렸을 때에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널리 읽고 잘 기억하였으며, 기개(氣槪)가 장하여 담론하면 일좌(一座)를 굴복시켰다.
과거(科擧)한 후에 청명(淸名)이 드러났는데 이양이 세력을 쓸 때 그를 꺼리어 벼슬을 뺏었다. 양이 패한 후 그가 더욱 높은 직에 있었고, 선비의 무리가 존중히 여기어 영수(領袖)로 삼았다.
대승도 일세를 경륜(經綸)할 것을 자부하였으나 그의 학문이 많이 늘어놓기만 했을 뿐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는 없었다. 또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남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지조(志操)있는 선비와는 화합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많이 그를 따랐다. 그의 지론(持論)도 상례(常例)를 따르기를 힘쓰고 개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식자(識者)가 더욱 취하지 아니하였다.
젊을 적에 조식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시사(時事)를 그르치리라." 하였고, 대승도 역시 조식을 유자(儒者)가 아니라 하여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기대승이 조식의 허물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미워하였다.
그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에 유생(儒生)들에 대한 공급(供給)을 박하게 하고, 또 식무구포(食無求飽; 논어에 나오는 말로써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말라는 뜻)라는 글귀를 내어 유생들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여 유생을 풍유(諷諭; 슬며시 나무라며 가르쳐 타이름)하게 하니, 유생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많이 성균관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
[임성삼의 주(註); <식무구포>의 논어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子曰 君子食無求飽하며 居無求安하며 敏於事而愼於言이오 就有道而正焉이면 可謂好學也已니라 (논어 학이편 論.學而十四)
군자가 배부른 것을 구하지 않으며, 편안한 집을 원하지 않되, 일에 민첩하고 말에 신중하여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으면 참말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승이 유속(流俗)들과 이미 화합하지 않았고, 또 식자들이 취하지 않는 바가 되었고 임금 역시 심상하게 대우하였으므로 울울(鬱鬱; 마음이 상쾌하지 않고 가슴이 아주 답답함, 나무가 무성한 모양)히 뜻을 얻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가다가 중도에서 볼기에 종기가 나서 고부 땅 촌사(村舍)에 이르러 영영 일어나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 재주를 아까와하는 이가 많았다.
대승이 비록 실질(實質)이 있는 재주는 아니었으나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가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동이(同異)를 변론함이 수천 언(言)이었는데 논의가 뛰어나 학자가 옳게 여기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를 초월한 학문의 논쟁은 잘 알려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
대승은 영재(英材)와 박학(博學)으로 기(氣)가 일세를 덮을 만하였으되, 자신이 너무 지나치고 바른 말하는 벗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그가 뜻을 얻어 그 배운 바를 행했다면 그의 때를 만남이 행이 되었을지 불행이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일찍이 들으니, 누가 최영경의 처소에서 대승과 친한 사람에게 대승의 상(喪)을 조위하는 말로 "사문(斯文; 유교의 도의, 또는 그 문화)이 불행하여 이 사람(기대승)이 갑자기 죽었다."하니, 최영경은 불끈 낯빛을 변하고 말하기를, "기대승은 재학(才學)이 조금 있으나 큰 병통이 있었으니, 을사년의 뭇 간인(姦人)을 공이 있다 하였고, 조남명(조식)은 조정을 요란하게 하였다 했으니,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만일 일을 했다면 반드시 정치에 해(害)를 끼쳤을 터이니, 이 사람의 죽음이 사문에 불행될 것이 무엇인가?"하였다. 최영경의 말이 비록 과하나 식자(識者)가 혹 전연 그르다고는 아니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기대승은 그 당시 천재로 알려진 분이다. 그러나 율곡의 기대승에 대한 위 단락의 평은 매우 날카롭다.
이 당시에는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도 마음대로 평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절보다도 정확한 판단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승 奇大升 1527∼1572(중종 22∼선조 5) [백과사전에서, 율곡보다 9 살 위, 45 세에 사망]
조선시대의 문인·서예가.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나주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대사간(大司諫)까지 이르렀다.
사승(師承;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음)한 바 없이 스스로 학문에 힘써 널리 고금(古今)에 통했으며 특히 이퇴계(李退溪)와 12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했던 당대의 유림(儒林)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그와 이행(李荇)·신광한(申光漢)·심수경(沈守慶)·심희수(沈喜壽) 등 5명이 쓴 것들에서 사격(詩格) 및 필법이 다 잘된 것을 추려 모아놓은 《좌해쌍절(左海雙絶)》이라는 것이 있다. 《근묵(槿墨)》에 실린 해행(楷行)으로 쓴 시고(詩稿)를 보면 조맹부체로 썼는데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운, 그러면서도 담담한 서풍(書風)이다. 저서로는 시문집(詩文集)인 《고봉집(高峰集)》 15책과 《논사록(論思錄)》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
12 월
북경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의 나이가 11 살인데 모후(母后)가 조정에 임(臨)하지 않고, 정치(政治)를 친히 하여 영명(英名)하게 뛰어났습니다." 하니, 김계휘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어찌 11 살의 성(聖) 천자(天子)가 있으리요. 이것은 이치에 당치 않으니 반드시 잘못 전해졌습니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중국의 천자에 대한 평을 마음대로 한 우리 선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1573 년 선조 6 년
5 월
왕이 명하여 높은 행실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니, 이조에서 이지함, 최영경[바로 앞에 나온 사람], 정인홍, 조목, 김천일을 천거하니 모두 육품(六品)관을 시키었다.
이지함은 기개와 도량이 범인과 다르고 효도와 우애가 남보다 뛰어났다.
젊을 때에 해변 후미진 곳에다 부모를 장사지냈더니 조수(潮水)가 차차 다가들었다. 오랜 세월 뒤에는 바닷물이 반드시 분묘(墳墓)를 쓸어갈 것이라 염려하여 제방(堤防)을 쌓아 물을 막으려고 곡식을 식리(殖利)하고 자재(資財)를 모으는데 매우 근면하였다.
사람들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일을 계획함을 조롱했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인력(人力)이 미치고 못 미치는 것은 내가 힘쓸 것이요,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에 있다. 남의 자식이 되어 어찌 힘이 부족하다고 후환(後患)을 막으려 하지 아니하랴." 하였다. 바다의 어귀가 넓어서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지함의 정성은 그치지 아니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토정 이지함에 대한 첫 서술이다.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이 부모의 묘소를 잘 못 정하여 물에 잠길 것을 걱정한 것은 상당히 반어적(反語的; irony)이다.]
본래 욕심이 없어 명리(名利)나 성색(聲色)에는 담담하였으나 이따금 점잖지 못하게 농담도 하니, 남들이 그가 공부한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이지함 1517∼1578(중종 12∼선조 11) [율곡보다 19 년 위][백과사전에서]
조선중기 학자·이인(異人).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 본관은 한산(韓山).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고 수학에도 정통했으며, 항상 주경궁리(主敬窮理)를 학문의 방법으로 삼았다. 1573년(선조 6) 탁행(卓行)으로 포천현감이 되었고, 78년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거지의 수용과 노약자와 기민(飢民)을 구호하는 데 힘쓰다가 죽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麻浦)강변의 흙담 움막집[임주(任註); 그러므로 토정(土亭)으로 호를 살았다]에서 청빈하게 살았으며, 복서(卜筮)·의약·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에 모두 능통했다. 괴상한 거동과 기지·예언·술수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한다. 역서(易書)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아산(牙山)인산서원, 보령(保寧) 화암서원에 제향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7 월
이이를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삼으니, 이이가 파주에서 병이 있다고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임금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기에 이이가 곧 대궐에 나아가 은명(恩命)을 사례하고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물러감을 윤허하였다. 삼사(三司)에서 모두 상소하여 직에 나아가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몽학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물러가기를 원하다가 물러가게 되었으니 상쾌할 것이나, 사람마다 물러가려고만 하면 국가의 일은 누가 하는가." 하니, 이이가 웃으면서, "만일 위로 삼공(三公)부터 아래로 참봉(參奉)까지 모두 물러가려고만 하는 사람이라면 국가는 절로 융성해질 것이니, 국가가 부지(扶持) 못 될 염려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위와 같이 "모든 사람이 물러가면 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이 대통령을 할 때 그 아래 국무총리직을 수락한 유명 대학 총장의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대학총장 출신의 국무총리는 아무 치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나는 율곡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한다.]
1575 년 선조 8 년
5 월
고(故) 처사 서경덕에게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서경덕은 개성 사람이며 천품(天稟)과 자질이 총명하고 빼어나게 특출하였다. 젊어서 과거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곧 과거할 뜻을 버리고 화담(花潭)에 집을 짓고 오로지 격물(格物)의 이치를 궁구(窮究)함을 일삼아 어떤 때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화담 서경덕은 율곡 선생님이 10 살 때 돌아가셨다.
여기서의 격물은 이미 소개한 <대학>에서 나온 내용이다.]
그가 궁리(窮理)할 때 하늘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려면 천(天) 자를 벽에다 써 놓고 궁리한 뒤에는 다른 자(字)를 다시 써 두고 궁리하였다. 그 정밀한 사고(思考)와 힘찬 연구는 남이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해가 지나니 도리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학문은 독서를 일삼지 않고 전혀 사유(思惟)에 의한 탐색(探索)만을 일삼다가 이치를 얻은 뒤에 다시 독서하여 이것을 증명하였다.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뒷 사람들이 내 말에 의한다면 공력을 나 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공부 방법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 권한다.]
그의 이론은 횡거(송나라의 장재)의 학설을 주로 하여 정주(程朱)와는 약간 달랐으나 자득(自得)의 낙(樂)은 남이 측량할 수 없었다. 언제나 마음 가득히 희열을 느끼며 세상의 득실, 시비, 영욕이 모두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전혀 치산(治産)을 일삼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졌으나 굶주림을 참는데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다. 그 문하생 강문우가 쌀을 지고 가서 경덕을 화담에서 뵈니 해는 오시(午時)나 되었는데 서경덕의 학문에 대한 논의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피곤한 빛은 조금도 없었다. 강문우가 부엌으로 가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없어 불을 못 피웠다는 것이었다.
이이가 [명종에게 아뢰기를] "세상의 이른바 학자들은 단지 주자의 설에 의거하여 말하지만, 중심(中心)에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이 없으나 서경덕은 깊이 생각하고 조예(造詣)가 심원하여 자득한 묘기가 많습니다." 하였다.
[서경덕 徐敬德 1489~1546(성종 20~명종 1) [율곡이 나기 57 년 전에 태어남. 퇴계보다 22 년 위] 백과사전에서
조선 초기 학자.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 본관은 당성(唐城). 아버지는 부위(副尉) 호번(好蕃)이다.
14세에 《서경》을 읽고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해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리를 깨달았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추천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력하였다. 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開城) 화담가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우주 본질로서의 이(理)와 기(氣)를 논하고, 이와 기의 상관관계에서 천지만물이 형태화하며, 음양(陰陽)으로 분화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체계화했다.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노자(老子) 철학의 생사분리론(生死分離論)과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寂滅)한다는 주장을 배격했다.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고, 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을 형성케 하였다.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 85년 신도비가 세워졌고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화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
1576 년 선조 9 년[율곡이 40 세]
2 월
어떤 사람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경우는 없는 것인데, 공의 근일 처사에는 시비를 분별치 아니 하고 둘 다 온전하게 하려 하니 인심이 불만히 여긴다."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경우가 있다. 백이와 숙제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사양하는 것과, 무왕과 백이 숙제가 서로 합하지 아니한 것은 둘 다 옳은 경우이고, 춘추 전국 시절에 의로운 전쟁이 없었던 것은 둘 다 그른 경우이다. 근일에 심과 김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일도 아닌 것으로 서로 견제하고 틀어서 조정(朝廷)을 안정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둘 다 그른 경우이다. 비록 둘 다 그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편이 다 사류(士類)니 융화시키는 것이 옳고, 반드시 이쪽은 옳고 저 쪽은 그르다 하면 생겨나는 말썽과 서로 다투는 형세가 어느 때나 끝날 것이냐?"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이율곡 선생님의 뛰어난 논리를 알 수 있다.]
[남효온의 육신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의 기록]
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 하였더니, 성종이 놀래어 낯빛이 변하므로, 김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한 변고(變故)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었다. 애석하다! 신하들이 이러한 말로 선조에 아뢰는 이가 없었구나.
[임성삼의 주(註);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1578 년 선조 11 년
정월
그 사람들이 활자를 만들어 조정의 관보를 인쇄하여 각 관청과 외방 관청의 서울 주재 사무소와 사대부들에게 파니 받아 보는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행한지 두어 달 뒤에 임금이 우연히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관보를 간행하는 것은 사사로 사국(史局)을 설치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만일 다른 나라에 유전(流轉)하게 되면 나라의 악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
모두 귀양을 보냈다.
[임성삼의 주(註); 브리태니커에는 "17세기에 이르러 영국 최초의 진정한 신문으로 일컬어지는 〈옥스퍼드 가제트 Oxford Gazette〉(1665 창간)"라는 말이 있다. 이것과 동일하지는 않으나 우리가 87 년 빠르다.]
3 월
이지함이 이이에게 와 보는데 명사들이 많이 모였다. 이지함이 좌우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성현이 하신 일도 자못 후폐(後弊)를 만들었다." 하였다. 이이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슨 기담(奇談)을 이렇게까지 하시오. 내가 늘 원하는 것은 존장(尊丈)께서 한 글을 지으셔서 장자와 짝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지함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자께서 병을 핑계하고 유비[임주; 삼국지의 유비가 아니고 논어에 나오는 유비이다.]를 보지 않았고, 맹자가 병을 핑계하여 제왕이 부르는 데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선비들이 없는 병도 있다 하니, 병을 핑계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남의 집의 게으른 종과 머슴들이 하는 짓인데 선비로서 차마 이런 것을 하면서 공자, 맹자가 하던 일이라 하니, 어찌 성현이 하신 일이 후폐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어찌 장자의 말을 하리요." 하였다. 온 좌석이 모두 웃었다. 이 때에 이이가 병을 핑계하여 장차 대사간을 사면하려 하는 까닭으로 이지함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문장과 관계된 논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孺悲欲見孔子어늘 孔子辭以疾하시고 將命者出戶어늘 取瑟而歌하사 使之聞之하시다 (논어 양화편 論.陽貨二十)
유비라는 사람이 공자님을 뵈려고 면회를 청했다. 공자님은 병이라고 거절하셨다.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문을 나가려하자 큰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하여 [유비가] 듣도록 하였다.]
이지함이 또 말하기를, "작년의 요성(妖星)을 나는 서성(瑞星)이라 한다." 하였다. 이이가, "어떻게 하는 말씀입니까?" 물으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인심과 세상의 도가 극히 퇴패하여 장차 큰 변이 생길 듯 하더니, 그 별이 나온 뒤로 상하가 모두 송구하여 인심이 약간 변하여 겨우 큰 변은 생기지 않았으니 어찌 서성이 아닌가." 하였다.
이지함이 또 뭇 명사(名士)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시사(時事)는 사람의 원기가 이미 패한 것 같아서 손을 대어 구제할 길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기이한 계책이 있으니 위망(危亡)한 이 형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좌객(座客)이 그 기이한 방책을 물으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이니 어찌 말하리오." 하였다. 그리고는 굳이 아끼며 말하지 않았다. 좌객이 간절히 물으니, 얼마 있다가 이지함이 말하기를, "지금 숙헌(이이의 자)을 조정에 머물게 해 두면 크게 일을 하지는 못할 지언정 반드시 위망의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기책(奇策)이다. 이것 이외에 다시 무슨 계책이 있겠는가. 초한이 서로 싸울 때 한신을 얻은 것이 기책이요, 관중을 처음 평정하고는 소하에게 맡겨 둔 것이 기책이다. 소하, 한신을 얻은 뒤에는 다른 계책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좌석이 모두 웃었다.
[임성삼의 주(註); 율곡 선생님도 자신의 자랑을 하셨다.]
임금을 만나고 시정(時政)을 극진히 논하고 이어서 완전한 사직(辭職)을 청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못본체 하고 접견할 뜻이 없는고로 병을 핑계하고 대사간직을 사퇴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이를 만류하였다. ... 이지함이, "군이 어찌 차마 퇴거(退去)할 것인가?" 말하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비유하면 부모의 병이 극히 위중하여 죽음이 조석에 달렸는데 자식된 사람이 약을 드리면 병든 어버이가 극히 노하여 그 약을 먹지 않고 혹 사발을 땅에 던지거나 자식의 얼굴에 던져서 코와 눈이 상한다면 자식된 사람이 물러갈 것인가, 울면서 간절히 권하여 노할수록 더욱 더 권할 것인가? 이것으로 군의 시비를 알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비유는 간절하오. 그러나 군신과 부자는 서로 다르지 않을까요? 만일 존장(尊丈)의 말씀 같으면 인신(人臣)이 어찌 물러갈 의리가 있겠소." 했다.
이이가 떠나면서 정철에게 말하기를, "지금 시사(時事)에는 손을 댈만한 곳이 없고, 오직 사림(士林)이 화합하여 논의가 중(中)을 얻어 맑은 의론이 조정에 현저하게 행해지면 한쪽의 반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연소한 선비들에게 의심받고 있고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그대의 말을 빙자하고 그대와 나 두 사람 사이를 교란하여 시비에 현혹되게 하니, 그대가 만일 조정에 있어서 의론을 평화롭게 가지면 선비들이 의심을 풀 것이요. 말을 만들고 일을 꾸미려는 무리들이 뜻을 잃어 함부로 굴지 못할 것이니 그 유익함이 어찌 적으랴. 또 그대는 진퇴를 정하지 않아 나와 같이 이미 물러갈 것을 정하고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니, 그대는 머물러 있어라. 내가 사림을 조화시킬 책임을 그대에게 부탁하고 간다." 하였다. 정철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정철 鄭澈 1536∼1593(중종 31∼선조 26) [율곡 선생님과 동갑]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문신·학자·시인.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
인종의 귀인(貴人)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궁중 출입이 잦아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明宗)과 친숙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어 그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51년(명종 6) 유배에서 풀려나자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하여 김윤제(金允悌)·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하였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같은 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한 뒤 직강·헌납·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78년(선조 11) 승지에 올랐으나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
80년 이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 등의 가사를 지었고 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벼슬길에 나서 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사직, 강화 송정촌에서 만년을 보냈다.
정치인이면서도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詩歌史上) 쌍벽(雙璧)으로 일컬어진다. 후학인 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을 중국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한 바 있다. 작품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
7 월
아산 현감 이지함(李之 )이 죽었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적어 외물(外物)에 인색하지 않았다. 기질을 이상하게 타고나 추위 더위 주림 갈증을 능히 참았다. 어떤 때는 알몸으로 거센 바람에 앉았고 혹은 열흘을 음식하나 먹지 않아도 병들지 않았다.
천성으로 효성이 있고 우의가 있어 형제간에 유무(有無)를 함께 하여 사유(私有)가 없었으며, 재물을 가벼히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잘 도왔으며 세상의 분화(芬華)와 성색(聲色)에는 담담하여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성질이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하여 바다에 떠서 위험을 당하여도 놀라지 않았다. 하루는 표연(飄然)히 제주에 샀었는데 제주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객관(客館)으로 환영하고 미기(美妓)를 선택하여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이군에게 사랑을 받으면 이 광 하나를 상으로 주겠다." 하였다. 기생이 이지함의 위인을 이상하게 여기고 꼭 그를 유혹하려 하였으나 이지함이 끝끝내 끌리지 않으니 목사가 더욱 경중(敬重)하였다.
젊었을 때는 공부를 하지 않더니, 장성한 뒤에 그의 형 이지번이 독서하라 권하니, 그 때야 발분(發憤) 근학(勤學)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여 얼마되지 않아 문의(文意)를 통하였다. 과거를 일삼지 않고 구속없이 스스로 방종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이와 매우 친숙하게 알았다. 이이가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할 것을 권하였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 성리학을 못한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명리(名利)와 성색(聲色)은 존장(尊丈)이 좋아하지 않으니, 무슨 욕심으로 학문에 방해가 되오?"하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어찌 명리 성색만 욕심인가. 마음이 가는 곳이 천리(天理)가 아니면 모두 욕심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방종하는 것을 좋아하여 규칙으로 단속하지 못하니 이것은 물욕(物慾)이 아닌가." 하였다.
그 형 이지번이 세상을 떠나자 이지함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 하고 기년복(朞年服)을 입은 뒤에도 또 심상(心喪)을 지냈다. 혹 예가 과하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자 이지함이 말하기를, "형은 나의 스승이니, 내가 스승을 위하여 심상 3 년을 한 것이다." 하였다.
이 해에 아산 현감을 시키니 친한 사람들이 부임할 것을 권하였다. 이지함이 홀연히 부임하여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으니, 아산에 어지(魚池)가 있어 괴로운 것이 된다 하였다. 대개 읍에는 양어장이 있으며, 인민을 시켜 돌려가며 고기를 잡아들이게 함으로 영세민들이 심히 괴로워 하였다. 이래서 이지함이 그 못을 없애버리니 후환이 영영 끊어졌다.
[임성삼의 주(註); 몽고의 징기스칸 아래서 승상을 하던 <야율초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은 백성에게 도움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잘못된 법을 없애는 것은 확실하게 도움이 된다." 위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니 백성들이 바야흐로 그를 애모하였으나, 문득 이질(痢疾)을 얻어 오래지 않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 세였다. 읍민이 애도하기를 친척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전에 김계희가 이이에게 "이지함이 어떤 사람인가? 누가 제갈량에게 비하니 과연 어떠한가?" 묻기에, 이이가 대답하기를, "토정은 적용(適用)될 인재가 아니다. 어찌 제갈량에 비하리요. 물건에 비유하면 기화(奇花) 이초(異草)와 진금(珍禽) 괴석(怪石) 같고 옷감이나 나물 혹은 곡식과 같은 사람은 아니다." 하였다. 이지함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나물이나 곡식 같은 사람은 아니나, 도토리나 밤 등속은 못되랴. 어찌 전혀 쓸 곳이 없단 말인가." 하였다.
대개 이지함이 내구성(耐久性)이 없어 일을 하는 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일이 많아 오래 일할 수 있는 재목이 못되었으며 또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상도(常度)로 일을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이의 말이 이러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율곡은 이지함의 토정 비결이나 그 외의 허황되거나 이상한 이야기를 전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여러 허황된 일은 없었던 것인가 혹은 율곡이 일부러 뺀 것인가? 그러나 허황된 이야기를 적은 글보다 이지함이 더 가까이 느껴진다.]
1579 년 선조 12 년
8 월
성혼이 상소하여, "병이 있어 벼슬할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군덕(君德)의 요(要)는 허심으로 착한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지극한 논리라고 칭찬하였으나 다만 다시 부르는 명령은 없었다. 선비들이 미미 이이를 잃고는 성혼을 그들의 당으로 끌어 들이려고 임금에게 특별히 부르라고 권하였으나, 성혼이 종시 명령에 응할 의사가 없었다.
한 선비가 성혼에게 이이의 단점을 들어 말하니 성혼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와 숙헌은 살아서는 죄를 같이 할 것이요, 죽어서는 전(傳)을 같이 할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그만 실색하였다.
[성혼 成渾 1535∼1598(중종 30∼선조 31) [율곡보다 1 살 위다]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성리학자.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 서울 출생.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해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54년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68년(선조1)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있다. 그해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69년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나 사양하였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72년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선조의 속된 관직 제수에 사임의사를 나타내다가 81년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의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받았다. 83년 이조참판에 특배되었고, 뒤에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올렸고, 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었다. 이이가 죽은 뒤에는 서인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91년 《율곡집(粟谷集)》을 평정하였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복관사제(復官賜祭)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지만 89년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94년 다시 승무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11 월
함경남도 절도사[조선시대 지방의 군사지휘관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약칭] 소흠이 사사로운 분노로 함경북도 관노 둘을 죽였기에 그를 잡아다 의금부에서 국문하여 복죄한 뒤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남형(濫刑)률을 적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간(臺諫)이 간청하기를, "공사(公事)로 인하여 관하(管下) 군민(軍民)을 죽였으면 남형률에 의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지금은 사사로운 분노로 타도의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살인죄로 논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조정의 의론을 수합(收合)하도록 명한즉, 2 품 이상이 모두, "살인으로 논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양사가 다시 간청하여 여러 달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허가하지 않았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살인한 자가 죽어야 하는 것은, 법에 있어서 용서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수가 살인한 것을 고요가 잡아 법으로 다스리는데 순임금의 힘으로도 그 아버지를 어찌 할 수 없었다. 소흡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마음대로 살인하고도 사형을 면하는고? 만일 8 의(義)의 법으로 논하면 유사(有司)는 당현히 사형을 적용할 것이요, 어쩌다 특사로 죽음을 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형률로 처리한다면 국법을 크게 문란시키는 것이다. 2 품 이상이 한 사람도 옳게 의논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정에 사람이 없은 지가 오래다. 어찌 일을 바로 잡겠는가?
[임성삼의 주(註); 두 가지 점에서 위의 일을 적었다.
첫째는 조선시대에도 고위 관리가 변경의 노예 두 명을 죽인 것이 왕까지 관여하는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소설에서 보던 것보다는 사람의 생명이 존중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죄는 당연히 사형이라는 율곡의 개념은 완전하다.
두 번째는 율곡 선생님께서도 "조정에 사람이 없은 지가 오래다"라고 탄식하셨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동일한 내용을 탄식하고 싶어진다.]
1580 년 선조 13 년
2 월
정철을 강원도 관찰사를 삼았다. 정철이 대사간에서 갈린 뒤로 관직을 쉬고 나오지 않고 여러 번 소명(召命)을 사양하더니, 이 벼슬을 시키자, 그 부모에게 추증되는 것을 중히 여겨[종 2 품 이상은 그 부모에게 자기 지위와 같은 지위를 추증하였다. 관찰사는 정 3 품으로 가더라도 2 품으로 간주하고 그 부모에 추증한다] 배명(拜命)하고 부임하였다.
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굳세고 개결(介潔; 성질이 굳고 홀로 깨끗함)했으나,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취하면 반드시 실수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3 월
유성룡으로 상주 목사를 삼았다. 유성룡의 모친이 늙어서 가까운 읍을 얻어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가면 내가 한 신하를 잃는다. 다만 모자의 정이 간절하니 듣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목사를 시키니 선비들은 모두 그가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유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경연에서 계사(啓辭)하면 잘 설명하여 아룄으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 다만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유성룡 柳成龍 1542∼1607(중종 37∼선조 40) [율곡보다 4 살 아래]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69년(선조 2) 성절사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뒤 이조좌랑·검상·응교를 거쳐 78년 사간이 되고 다음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조참의를 거쳐 80년 부제학에 올랐다. 82년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으로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찬진하고 83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제학을 겸하였으며 85년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다. 89년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그 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90년 우의정[48 세]에 오르고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9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으며,
왜란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에,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상당한 안목을 가진 분이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직전이어서 어떤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느꼈다고 한다.]
92년 4월 일본이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였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義州)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어 93년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되찾고, 이어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坡州)까지 진격하였다. 이 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는데 이때 군대양성·화기제조 및 성곽수축을 건의,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고 관작(官爵)을 삭탈당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위의 내용으로 보면 서애가 임진왜란을 총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울 때 적임자가 적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00년 복관(復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문장·글씨·덕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신종록》 《징비록》 《운암잡기》 《상례고증》 《무오당보》 《침경요의》 등이 있고, 편저에 《대학연의초》 《황화집》 《구경연의》 《정충록》 《효경대의》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임성삼의 주(註); 위의 징비록은 서애가 임진왜란의 전말에 대해 적은 것이다. 관심있는 사람은 읽기 바란다.]
7 월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상소하여 도의 병폐를 아뢰니, 임금이 칭찬하여 답하고, 해당 관청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정철이 백성들의 고통을 성의껏 빠짐없이 찾아 내었고, 또 교화를 숭상하여 착한 것을 포상하고 악한 것을 징계하니, 동쪽 백성들이 용동(聳動; 몹시 놀라거나 기뻐서 크게 동요됨)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앞에서 정철이 술먹는다고 비판한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칭찬하셨다.]
10 월
이산해로 형조판서를 삼으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은(謝恩)한 뒤에 3 번이나 사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산해는 젊었을 때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벼슬 길에 나온 후로 청관(淸官) 요직(要職)을 지냈으며 육경(六卿)의 지위까지 올랐다. 위인이 맑고 신중하였으나, 기절(氣節)이 적고, 부드러워, 남의 말썽을 피하였기 때문에 위 아래로 미움을 받지 않아 물망(物望;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망)을 잊지 않았다. 동, 서로 당이 갈린 뒤에 의론이 한결 같이 동인을 따라 능히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이이 정철이 모두 그의 친구였으나, 서로 저버리는 것을 돌아보지 않으니, 식자가 웃었다. 이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친구 이산해는 오래지 않아 정승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까닭을 물었다. 이이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의 정승은 순직하고 삼가 재기(才氣)도 없고 하는 것은 없으나 청명(淸名)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산해가 바로 그렇다."하였다.
[임성삼의 이야기; 성혼(한살 위), 정철(동갑), 이산해(세 살 아래)와 율곡은 서로 친구였다. 성혼은 곧은 친구였고, 정철은 술을 좋아하는 풍류가 있는 친구였고, 이산해는 여러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정치가 친구였으며, 율곡은 학자인 친구였다.]
[이산해 李山海 1539∼1609(중종 34∼광해군 1) [율곡보다 3 살 아래, 이지함의 조카?][백과사전]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본관은 한산(韓山).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급제[22세; 여기 나오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이른 나이에 문과 급제],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부수찬·병조좌랑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동부승지·대사성 등을 지냈다. 78년(선조 11) 대사간으로 서인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대사헌·우찬성·병조판서 등을 거쳐 88년 우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잡았다. 90년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개성(開城)에 이르렀을 때 양사(兩司)로부터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게 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그 뒤 풀려나와 95년 영돈녕부사가 되었는데 북인이 다시 분당되자 이이첨(李爾贍)·정인홍(鄭仁弘) 등과 대북파가 되었다. 99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601년 다시 부원군에 봉해졌고, 선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맡았다. 서화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선조조 문장팔가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아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임성삼의 주(註); 이산해의 이름은 중국의 산해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묘한 연유가 있으니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아볼 것]
1581 년 선조 14 년
정월
성혼이 여러 번 소명(召命)을 받고 어쩔 수 없이 입경(入京)하였으나, 병으로 배명(拜命)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시켜 병을 돌보게 하고는 약을 주었다. 성혼은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어떤 사람이건대 이토록 과분한 은혜를 받는가?" 하니, 이이는 웃으며, "그대가 어찌 사마두(死馬頭)보다야 못하겠는가"하였다.
[임성삼의 註; 춘추 전국시대에 어떤 왕이 천리마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였다. 그 사람은 죽은 천리마의 뼈를 500 금에 사왔다. 왕이 노하자 그가 말했다. "조금 기다리시면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모여들 것입니다." 과연 반 년이 안되어 천리마를 가진 사람이 여럿 찾아왔다. 죽은 천리마의 뼈를 500 금에 샀다는 소문이 퍼지자, 천리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돈을 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온 것이다.
과거부터 인재를 발굴하는 방법으로 이야기 되었다. 율곡은 친구 성혼의 능력이 있어서 선조가 은혜를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우수한 사람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은혜를 내린 것이라고 농담을 한 것이다.]
2 월
이이가 시골에서 들어오니, 사류(士類)들이 모두 이이에게 해야 할 마땅한 계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걱정으로는 군신이 서로 알지 못한다는 것과 위 아래가 서로 정(情)을 통하지 못한다는 것과 사류들이 서로 협화(協和)하지 못한다는 데 있으므로 사류들을 융화시켜 한 덩어리로 만들 것이고 서로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서로 정성을 쌓아서 임금의 뜻을 돌리는 것이 제일이다." 하였다.
이발과 김우웅이, "우경선 같은 자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가?" 물으니, 이이는 대답하기를, "만일 군자가 정사(政事)를 잡고 기강(紀綱)만 바로 선다면 이런 자가 어찌 함부로 덤비겠는가? 만일 조정에 군자가 없고 기강이 없다면 아무리 이런 부류를 배척한들 가능하겠는가. 이런 자를 반드시 공격할 것도 아니다. 만일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도 못하고 원수 짓는 일이 먼저 생긴다면 사류들은 발 붙일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발 등은 그렇다고 하였다.
안민학이 이 말을 듣고는, "이이는 구차하고 우활(迂闊)하여 좋은 향기와 고약한 냄새를 가진 물건을 같은 그릇에 두고 조정(調停; 調整과의 차이는?)을 꾀하려 한다."고 조롱하며,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4 월
성혼의 소가 채용되지 못한 일을 가지고 소를 올려 논하려는 태학생이 있었는데, 이이가 듣고 놀라 말하기를, "어떤 일 좋아하는 자가 감히 이 의론을 만들었는가? 태학생은 나라의 위망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소를 올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간관(諫官)의 직분이다." 하고는, 즉시 사람을 시켜 타일러 그만두게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대학생의 현실 참여 정도에 대한 율곡의 견해이다.]
이산해가 병이라 하여 사면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이가 가서 묻기를, "공은 나라의 두터운 은의(恩義)를 입었는데, 나라가 위급한 이 때를 당하여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군은(君恩)에 보답해야 할 것이어늘, 어찌 물러나 선비들의 소망을 저버리오?" 하니,
산해는 말하기를, "이조판서는 한 나라의 중임(重任)인데 내가 어찌 감당하겠오?" 하였다.
이이는 말하기를, "그러면 누가 감당하겠오? 2 품 이상에는 용렬하고 못난 무리들이 가득 차있어 다행히도 공 같은 이가 그 직책에 있으므로 선비들의 바라는 바에 심히 만족스럽소. 공은 어째서 굳이 사퇴하려 하오. 또 공은 이미 육경의 반열에 있으므로 관직을 쉬지는 못할 것이니, 공의 재주로서는 오직 이조판서가 합당하고 다른 직분에서는 아마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 것이요. 호조와 형조 같은 데는 공의 재주로써는 처리될 곳이 아니요, 이조라면 공은 틀림없이 사사로운 정에 따르지 않고 공도(公道)를 크게 베풀 것이니 이 어찌 도움이 적은 것이겠오. 근래 정사가 매우 흐려졌으니, 공은 억지로라도 나와서 묵은 인습을 씻어주기 바라오." 하니,
산해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 나의 재주의 세세한 것까지를 다 아시오. 공의 말이 매우 간절하므로, 나는 마땅히 다시 생각하겠오." 하더니, 오래지 않아 산해는 나와서 일을 보았는데, 정사를 하는 데 청탁을 듣지 않았으므로 문정(門庭)이 쓸쓸하기가 빈한한 선비의 집 같았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이조판서는 흔하지 않았다. 아마 세조때의 구치관이 이조판서를 맡았을 때가 비슷하였을 것이다.(서거정의 필원 잡기 참조)]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이산해의 정사하는 것이 조금 사람의 뜻에 맞으니 가히 세도(世道;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길)를 구할 것이다." 하였다.
8 월
대사헌 이이, 집의 남언경, 지평 유몽정이 언사(言辭)로 시배(時輩; 때를 만나 뜻을 이룬 사람들]들과 틀려서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첨지중추부사 정철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철은 시배들이 장세량의 옥사를 일으키자 마음으로 항상 불평하여 여러번 사색(辭色)을 나타내었고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취한 뒤에는 시배들의 단점을 많이 말하자, 시배들은 더욱 의심하였다. 하루는 이발과 취중에 서로 꾸짖어 교분이 끊어졌다가 이에 이르러 시배들이 정철을 배척하니 귀향하게 된 것이다.
이이가 강가에 나가 전별하면서 조심하여 수양하고 술을 끊도록 권하니 철은 이발의 심사는 믿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편벽하다. 이발이 식견은 밝지 못하나 그 마음은 선량하다." 하니, 정철은 머리를 흔들면서, "아니다. 아니다. ... 시배들이 전연 나를 모른다. 만일 시배들이 다 패하게 된다면 내가 어찌 힘을 다하여 서로 구하지 않겠는가? 시배들이 전연 나를 모른다." 하였다. 정철이 아주 돌아가는 데 친구로서 따라가 작별하는 이가 없었고, 달관(達官; 높은 벼슬,고관(高官))으로는 오직 이이와 이해수만이 전별하는 자리에 있었다.
[이발 李潑 1544∼1589(중종 39∼선조 22) [율곡보다 8 살 아래]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북산(北山). 본관은 광주(光州).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어 73년 알성문과에 장원했다.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고 이조정랑, 79년 응교, 81년 전한, 83년 부제학을 거쳐 84년 대사간이 되었다.
동인의 거두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이끌어 북인의 수령이 되었고,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사론(士論)을 지도했으며, 경연관으로 왕도정치를 제창, 기강확립에 노력했다. 89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전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대죄(待罪)하던 중 체포되어 장살(杖殺)되었고, 노모와 어린아들도 엄한 형벌로 죽었다.]
10 월
호조판서 박대립이 병으로 해직되었다. ... 대신이 이이를 가장 높게 천거하여 호조판서로 삼았다. 이헌국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이가 승진되었으니 축하할 일이로되, 다만 위에서 윤현 같은 인물을 얻고자 하셨는데 대신이 이이를 추천하였으니, 후세에 반드시 이이의 인물이 낮은 것으로 의심할 것이다."하니, 듣는 이가 웃었다. 윤현이 두초 소기이므로 이헌국의 말이 이러했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말이다.
今之從政者는 何如하니잇고
子曰 噫(탄식할 희)라 斗 肖(위에 풀초가 있음)之人을 何足算也리오 (論.子路二十)
요즈음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 되나 말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셈에 넣을 수 있겠는가?]
대동야승 71 권, 김시양의 자해필담
p 368
이율곡이 졸한지 한 해가 넘었는데도 [율곡을 비난하다가 귀양간] 박근원, 송응개, 허봉은 오히려 적소(謫所)에 있었다. 을유년 6 월 조강(朝講)이 끝나자, 영의정 노수신이 말하기를,
"세 신하가 귀양갔을 때에 그를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다 지나친 처사라고 하였습니다. 뇌성벽력도 밤새도록 계속하지 않사오니, 세 신하를 관대하게 용서하시기 원하옵니다. 만양 세 신하가 혹시라도 상로병(감기 기운으로 일어나는 병)에라도 걸린다면 후회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사헌 구봉령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귀양간] 세 신하가 이이를 거간(巨奸)이라고 하는데, 이이가 과연 거간이오? 바른대로 말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사오나 본래 경솔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니, 본심(本心)은 비록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로 하여금 나라 맡아 하게 한다면 결국은 그르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장(文章)은 있었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자 노수신이 말하기를,
"이이는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문장에는 또한 힘을 다하지 않았는데, 다만 대책(對策)에 있어서는 이어를 섞어가면서 넓고 커서 다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세 귀양간 사람은 다 사면되었다.
율곡이 선조와의 군신(君臣)제회(際會)는 천년에 한 번 있을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583 년(선조 16 년)에 이호(이탕개)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병조 판서로서 자신의 말이면 상이 다 들으며 자신의 계책이면 상이 다 시행한다고 여겨, 일이 창졸간에 있었으므로 일을 이룩하여 밝힌 것이 많았으니, 말을 바치고 부방(赴防; 조선 시대에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방면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 근무를 하던 일)을 면제하는 등의 일까지 다 먼저 시행하고 사후에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의 논의가 일어나 그가 국정을 마음대로 한다고 삼사(三司)가 함께 공격하였는데, 전한 허봉, 대사간 송응개, 도승지 박근원 등의 공격이 더욱 심했다. 상은 매우 성내어 명하여 박근원은 강계로, 허봉은 갑산으로, 송응개는 희령으로 귀양보냈다.
[임성삼의 주(註); 율곡을 비난하였다고 대사간과 도승지를 한꺼번에 귀양보낼 정도이면 왕의 율곡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에 조정의 논의는 둘로 나뉘어지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 이르기까지 다 패를 나누어 소를 올려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였는데, 박사 한언도 또한 그르다고 하는 논의를 하였기 때문에 경흥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율곡같은 분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앞에서 말한 청백리의 행적을 모은 책
"역사 속에서 찾아낸 청백리 이야기
이주원 1944 년 생, 고려원, 1993"에 있는 내용을 적는다.
율곡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집안이 가난하여 겨우 월급으로 살아가[기 위해 벼슬하]는 정도라면
높은 벼슬로 출세할 생각을 버려라.
외직으로 낮은 자리를 구해 나가 겨우 굶어 얼어 죽는 것만 면하면 되잖겠는가.
그리고, 놀고 얻어먹지만 말고."
율곡이 해주 석담에 초당을 짓고 물러나 있을 때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배고픈 제자들이 물었다.
"어찌 오늘 아침밥이 아직 없습니까?"
율곡이 말씀하셨다. "곧 한나절이 되니 그때 한 번만 먹고 때우려고 그러지"
때마침 친구인 재령 군수가 쌀과 콩을 보내왔다.
그러나 율곡은 땀흘리며 쌀과 콩을 지고 온 종에게 찬물 한 그릇을 먹이고 도로 지고 나가게 하였다.
"한 고을의 수령은 나라의 곡식이 아니면 다른 곡식이 있을 리 없다.
도둑질한 물건은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죄와 벌이 같은 것이다."
율곡은 형제들까지도 가난하였다.
한번은 장인이 좋은 말을 한 필 주며 타고 다니라고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자 장인이 집을 한 채 장만하여 주었다.
율곡은 그 집을 당장 팔아서 집안에 나눠 주고, 친적들도 도와 주고는 털털 털어 버렸다.
오갈 데 없는 친척들까지 한 집안에 모여 죽을 끓여 먹고 살았다.
[임성삼의 주; 율곡은 벼슬에서 떠나 있은 적이 거의 없다. 또한 병조판서까지 진급하면서 중요한 직책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했던 것은 친척이나 주위를 도왔기 때문이다. 다른 청백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죽은 후 집안에는 남은 재산은커녕 애당초 뭘 담아둘 그릇조차 변변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