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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청진기
1월 11일에는 다카기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는 두 아이를 신혼 여행에 데리고 가기 위해 겨울방학 중인 연초에 일찌감치 식을 올렸다.
중매인으로 게이조와 함께 다카기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나쓰에는 삿포로에서 돌아오자마자 감기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 그녀가 감기에 걸려 자리에 누운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오늘은 좀 어떻소?”
그 날도 게이조는 평소보다 일찍 돌아와 나쓰에의 머리맡에 앉아 말했다.
“왠지 몸이 나른하고 가슴이 좀 답답해요.”
아직도 나쓰에는 신열로 눈이 불그스름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게이조는 이마를 약간 찌푸리고는 나쓰에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나쓰에는 자신의 맥을 짚고 있는 게이조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맥박은 괜찮은데. 그런데 가슴이 답답하다니 진찰을 좀 해봐야겠소.”
게이조는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어머, 진찰하시게요?”
나쓰에는 수줍어했다. 얼굴이 갸름한 나쓰에는 언뜻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몸은 튼튼한 편이었다. 따라서 남편인 게이조가 그녀에게 청진기를 대본 적은 거의 없었다.
“폐렴이 되면 큰일이니까.”
나쓰에의 새하얀 가슴에다 게이조는 신중하게 청진기를 갖다댔다. 그는 조용히 청진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나쓰에도 그런 그를 매달릴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게이조에게는 애처롭게 보였다.
“걱정할 것 없소. 폐렴은 아니니까.”
게이조는 청진기를 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혈압계를 꺼냈다. 혈압이 낮았다. 그러나 게이조는 나쓰에의 혈압이 평소에 얼마였는지 모르고 있엇다.
“가슴이 답답한 건 혈압 때문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다카기의 결혼식 때문에 피곤했던 모양이오. 얼마 동안 푹 쉬는 게 좋겠소.”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요코의 시험이에요. 제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공부를 제대로 못할 텐데, 어쩌죠?”
“그래도 당신 몸하고 바꿀 수야 없잖소?”
게이조는 이불을 어깨 근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별일 아닌 줄 알면서도 병으로 드러누운 적이 없는 나쓰에가 사흘씩이나 자리에 누워 있자, 게이조는 왠지 걱정스러웠다. 집안이 이상하게 썰렁하게 느껴졌다. 요코가 혼자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카기 씨한테서 엽서가 왔어요.”
나쓰에는 이불 밑에서 그림 엽서를 꺼냈다.
쓰지구치, 난 마치 횡재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네. 아내말고도 이렇게 낳지도 기르지도 않은 귀여운 두 아들을 얻었으니 말이야. 아이들을 데리고 화려한 신혼 여행을 보낸다는 것도 멋진 일이야. 그런데 나쓰에 씨가 피곤해 보인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네.
오늘 밤은 벳부에서 쉬고 나가사키, 후쿠오카로 돌아 오사카에서 맛있는 것 좀 먹고 돌아갈 작정이야.
다카기에게서 엽서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카기의 이름 옆에 작게 쓴 이쿠코(郁子)라는 이름을 보고 게이조는 미소를 지었다. 엽서는 아마도 이쿠코가 억지로 시켜서 보낸 것 같았다.
게이조는 다카기가 보낸 엽서를 보면서 문득 무라이의 말을 떠올렸다. 무라이는 피로연이 끝날 즈음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 신부가 사모님을 좀 닮았군요. 어쩐지 다카기 씨의 마음이 좀 애처롭게 여겨지지 않으세요?”
무라이는 짓궂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게이조는 다카기의 심정을 헤아려 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무라이의 그 말투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저의가 깔려 있음을 느꼈다.
게이조와 요코는 나쓰에의 머리맡에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상을 치우려고 하는데 다쓰코가 유카코를 데리고 찾아왔다.
“정초라서 오늘은 현관으로 들어왔어요.”
이치코시 치리멘(바탕이 쪼글쪼글한 비단)에 솔잎 무늬가 있는 고몬(여성용 정장) 차림의 다스코는 기품이 있어 보였다. 유카코도 짙은 적갈색 하부타에(부드럽고 윤이 나는 얇은 순백색 비단)에 서운(瑞雲)을 그려넣은 에하오리(큼직한 무늬가 있는 여성용 외출복)를 입고 있었다. 유카코는 작년 가을 여행 때 신세를 진 것에 대한 답례로 특별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공손히 말했다.
“감기에 걸렸다고? 정초부터 안됐구나!”
다쓰코는 나쓰에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미안해, 모처럼 왔는데……”
유카코의 옷을 본 나쓰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무엇 때문에 다쓰코는 유카코에게 이렇게 돈을 쓰는 것일까. 나쓰에는 살며시 요 위에 일어나 앉았다.
“안 돼, 무리하면……”
“실례는 되겠지만 그냥 누워 있어요.”
다쓰코와 게이조가 번갈아 말하자, 나쓰에는 할 수 없이 자리에 도로 누웠다. 그러나 유카코의 옷을 보자, 나쓰에는 잠자코 누워 있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초조해졌다.
“좋은 옷 입었네, 두 사람 다…….”
“그래? 유카코의 옷은 내가 입던 걸 새로 염색한 거야.”
“어머, 색깔이 너무 좋아. 그렇죠, 여보?”
입던 옷을 염색한 것이라는 다쓰코의 말을 듣고 나쓰에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다.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왠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카코에게로 자주 눈길이 쏠렸다.
“유카코, 오늘만은 안경을 좀 벗도록 해요. 모처럼 차려입은 옷이 울겠어요.”
무심코 게이조와 나쓰에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카코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경을 벗었다.
“어머!”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밝은 유카코의 눈을 보고 나쓰에가 소리를 질렀다.
“봐요, 전혀 나쁜 것 같이 보이지 않지요? 유카코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다는 거예요. 안경을 쓰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선생님?”
게이조는 10년 전이나 거의 변함이 없는 유카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초점이 일정하지 않은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쓰에는 유카코를 바라보고 있는 게이조를 지켜보았다. 그런 나쓰에를 또 다쓰코가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다카기 씨의 결혼식은 잘 치렀나요?”
게이조는 순간 당황했다.
“네, 잘 치른 셈이지요. 신랑 신부 옆에 아들을 하나씩 앉히고 피로연을 했어요.”
“그럼 중매인으로 가신 두 분은 그 아이들 옆에 앉으셨나요?”
“그랬죠.”
요코가 다쓰코와 유카코를 위해 상을 차려 왓다.
“어머, 식사는 하고 왔는데…..”
“아줌마가 아까 그렇게 말씀하셔서 감주하고 청어조림만 가져왔어요.”
하고 말하며 요코는 유카코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쓰에가 때를 놓칠세라 말했다.
“요코, 유카코 씨 예쁘지?”
“네, 무척요.”
소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밝은 눈을 보고 요코는 약간 어리둥절하여 다쓰코를 바라보았다. 다쓰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감주하고 청어조림이라고? 요코는 정말 눈치가 빠르다니까. 요즘 이렇게 맛있는 청어조림을 만들 수 있는 주부도 드물어요.”
“어머, 과찬이야, 다쓰코.”
나쓰에는 기쁜 모양이었다.
“감주를 먼저 드시겠어요?”
요코가 유카코에게 물었다.
“찬바람을 쐬고 왔으니 감주를 먼저 먹는 게 좋겠지요, 유카코?”
다쓰코의 말에 유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가 유카코의 손에 감주 그릇을 들려주고 방을 나갔다.
유카코는 한 모금 마시고 가벼운 사래가 들려 하마터면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게이조가 ‘앗!’하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옆에 있던 다쓰코가 그릇을 잡았다. 순간 유카코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쓰에는 번뜩이는 눈으로 유카코를 보고 나서 다시 게이조를 보았다.
“다카기 씨가 신랑 노릇을 어떻게 하는지 모고 싶었는데.”
다쓰코가 말했다.
“하긴 다카기도 쑥스러운지 얼굴이 붉어지더군요.”
“그래요? 그거 잘됐군요. 이번이 마치 세 번째 정도라도 되는 듯이 넉살 좋은 얼굴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생각해보니 쉰도 아직 젊은 나이 같아요.”
“그럼요. 인간의 감정이란 그다지 변하지 않아요. 나도 이십대에는 쉰 살이라면 노인으로 여겨졌는데 제 자신이 막상 그 나이가 되고 보니 기분은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여든을 노인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도 잘못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요. 인간은 그렇게 간단히 시들어 버리는 존재가 아닌가 봐요. 하지만 여든 나이가 되어 열아홉 살 처녀를 사랑한다는 것 좀 비극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나쓰에의 눈이 또다시 빛났다.
나쓰에의 감기가 더 도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쓰코와 유카코는 30분쯤 있다가 돌아갔다. 게이조는 현관까지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고단하지?”
“오늘밤에는 일찍 자는 게 좋겠어요.”
“……….”
“왜 그래?”
게이조는 얼굴을 돌리고 누워 있는 나쓰에를 보고 신경이 쓰여 말했다.
“당신 유카코에게 무척 친절하시더군요.”
싸늘한 목소리였다.
“친절? 내가 무슨………”
“아니라구요? 유카코가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을 때, 어쩌면 그렇게 재빨리 손을 내밀 수가 있었을까요?”
“그건 당연하잖소?”
“그럴까요? 다쓰코가 옆에 붙어 있었는데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지만 유카코는 앞을 보지 못하오. 그러니 누구나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는 것은 당연하잖소?”
“……….”
“굳이 상대가 유카코가 아니었더라도 그런 경우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당신은 줄곧 유카코만 바라보고 계셨어요. 전 다쓰코 보기가 민망해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게이조는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아녜요, 눈을 못 떼고 계셨어요. 유카코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얼른 손이 나갔던 거예요.”
“그렇게 억측하면 곤란해요.”
“어머, 억측이라뇨? 당신 그런 기분 나쁜 말씀 마세요. 다쓰코도 그래요. 일부러 유카코를 우리 집까지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여보, 도쿄에 갔을 때 당신은 유카코에게 무척 친절을 베풀지 않았소? 그러니 새해 인사쯤 와도 괜찮지 않소?”
“몰라요, 그런 건. 다쓰코는 좀 지나쳐요. 유카코에게 그런 좋은 옷도 만들어 주고.”
“……….”
“그리고 당신 앞에서 안경을 벗게 하다니 정말 기분 나빠 죽는 줄 알았어요.”
나쓰에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당신도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군.”
게이조는 몸을 굽혀 나쓰에의 이마에 키스하려고 했다. 그러자 나쓰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피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쉰이 되었는데도 이십대와 같은 감정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에게는 정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불끈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못 미덥고 덜된 남자란 말이오?”
“어머, 화나셨어요? 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녜요.”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이오? 난 나 자신만큼 믿을 수 잇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소. 당신 이외의 여자와는 손목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단 말이오. 난 모자라는 남자니까.”
“그거야……”
나쓰에가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게이조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흥분해 계속 쏘아붙였다.
“난 말이오,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거나 수상쩍은 짓거리를 하는 그런 남자와는 달라요. 키스 자국을 찍어 놓거나 받은 인간들과는 다르단 말이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쪽은 오히려 당신 쪽이 아닐까?”
게이조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지금 이부자리를 깔아드릴께요, 아버지.”
청소기를 든 요코가 복도를 걸어왔다.
“그래.”
애써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려고 애썼지만 요코가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이조는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요코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피곤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
“아니, 괜찮아.”
게이조는 그대로 서재로 올라갔다.
책상에 기대듯이 하여 의자에 앉자마자 게이조는 금방 후회했다. 감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파서 누워 있는 아내에게 화를 낸 자신이 무정한 인간으로 여겨졌다. 그는 남편인 자신이 친찰을 하는데도 수줍어하면서 가슴을 내보이던 천진한 나쓰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화를 낼 것까지는 없었는데…….’
자신이 화를 낸 것은 유카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동요를 들킨 데 대한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쓰에가 유카코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도 애정의 표시일 것이다. 굳이 무라이의 일까지 끄집어낼 필요는 없었다. 어째서 부드럽게 말할 수 없었을가.
‘그렇기는 해도…..’
어째서 자신은 유카코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일까. 누군가는 말했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보다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는 여자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정말 그렇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갑자기 이명이 들렸다. 귓속에서 벌레가 울고 있는 듯한 뚜렷한 귀울림이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게이조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명에 이어 후두부에 쑤시는 듯한 통증이 왔다. 이런 증상 역시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게이조는 문득 뇌일혈로 죽었다는 친구가 생각나 두려움이 몰려왔다.
게이조는 숨을 죽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명도 두통도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일 이대로 죽는다면…….’
아내와 말다툼을 한 끝에 죽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지나자 이명도 두통도 누그러졌다. 다소 마음이 놓였으나, 게이조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인간이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존재로군.’
죽는 시기는 의논해서 정할 수 없다. 죽음은 완전히 일방적인 것이다. 게이조는 죽어간 환자들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었다.
아내와 자식 셋을 남겨두고 죽어가던 위암 환자, 지난 달 과장으로 승진한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사나이, 신장병으로 어머니를 혼자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딸, 결혼하지 열흘 만에 급성 자반병으로 죽은 여성. 그들은 저마다 해야 할 많은 일을 남겨둔 채 죽어갔다. 죽음은 인간의 사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냉혹하게 어느 날 갑자기 덥쳐온다.
게이조는 목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았다. 이명도 두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죽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때가 닥쳐올 것이다.’
죽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게이조는 자신의 손톱 색을 살펴보았다. 혈색 좋은 건강한 빛깔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톱도 창백하게 죽어 버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누구든 날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흰머리가 늘고 피부에 탄력이 없어지며, 노안이 된다. 그것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정말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언제 어디서 죽게 될까?’
오래 전, 도야마루의 승객들은 어두운 바다 속에서 죽어갔다. 산에서 죽은 자도 있을 것이다. 기차 안에서 죽은 자도 있다. 화장실에서 죽은 자도 있다.
‘어디서 죽든 어쨌든 누구나 죽는다.’
게이조는 나쓰에와 도오루, 요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죽어가고 싶었다.
“고마웠다.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이 정도의 인사는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보기 흉하지 않은 모습으로 죽고 싶기도 했다.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줘!”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괴롭게 죽어간 환자들, 눈물이 글썽하여 죽어간 환자들을 생각하니 자신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죽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화를 내고 있는 동안이나 나쓰에와 냉전 중인 동안에는 죽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 역시 어머니 말씀대로 난로도 피우지 않으셨군요.”
안으로 들어온 요코가 가스 난로의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응, 그만 잊어버리고 있어구나. 오늘밤은 별로 춥지 않아서….”
말은 이렇게 했으나 몸이 싸늘해져 있었다. 그는 갑자기 추운 곳에 들어와 혈압이 올라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쓰에에게 화를 낸 것도 몸에 해로웠을 것이다. 아니, 화를 자주 내는 것 자체가 노화 현상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지 게이조는 왠지 쓸쓸했다.
“그런데 아버지,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응,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좀 아파.”
“어머!”
요코는 미간을 찌푸리고 게이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뭐 걱정할 건 없어.”
게이조는 뇌일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을 느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 주무시는 편이 좋지 않으시겠어요? 이부자리는 다 펴놓았어요.”
“응, 괜찮아.”
게이조는 난로를 피웠는지 알아보러 보낸 나쓰에에게 따스한 마음을 느꼈다.
“요코는 치가사키에서 보낸 편지에 우리가 일생을 마쳤을 때 남은 것은 모은 것이 아니라 남에게 준 것이라고 썼었지?”
“네.”
“아버지는 말이야, 남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말할 수 없이 쓸쓸해져.”
“어머, 아버지는 친절하시고 진찰도 잘하시는 의사로 알려져 있던데요.”
방금 죽음의 그림자에 놀라 겁을 먹은 게이조의 심정을 요코가 알 리 없었다.
“그래?”
자신이 죽으면 환자들은 좋은 의사였다며 애석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나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중대한 자신의 죽음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이 게이조 자신에게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게이조는 외딴섬에 홀로 있는 듯한 쓸쓸함을 느꼈다.
“아버지, 방금 어머니께서도 산다는 건 쓸쓸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요코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무심히 말했다.
“산다는 게 쓸쓸하다고?”
게이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쩐지 나쓰에가 눈물짓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나도 나쓰에도 쓸쓸할 것이다. 그런 쓸쓸한 사람끼리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다툼을 되풀이하는가. 쓸쓸하면 어깨를 맞대고 사이좋게 잘 살 일이지. 무라이나 유카코의 일로 다투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고 게이조는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