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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고종 > 고종 19년 임오 > 11월 28일 > 최종정보 고종 19년 임오(1882) 11월 28일(경술) 맑음...“왕래하는 데에 모두 며칠이나 소요되었는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모두 9일이 소요되었습니다. 배를 탄 시간은 실제로 만 4일 19시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천 화도(花島)에서 동경까지는 몇 리나 되는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9700리쯤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선(輪船)이 과연 빠르도다. 만 4일 19시간 만에 왔다면 하루에 2천 리를 달린 셈이다.” 하였다...“일본 국왕의 자품은 과연 어떠하던가?” 하니, 박영효가 아뢰기를, “신이 본 바로는 성품이 너그러운 것 같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검었습니다.”
고전번역서 > 소호당집 > 소호당문집 제9권 > 전 > 최종정보소호당문집 제9권 / 전(傳)
안중근전 병진년(1916) ○ 처음 경술년(1910)에 호보에 의거하여 이 전을 지었는데, 근래 안 열사의 친구 박은식(朴殷植)이 기록한 한 편의 글을 얻어 살펴보니 실상을 잃은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에 개작한다. 〔安重根傳 丙辰○始庚戌據滬報作是傳近得安烈士友朴殷植所記一編考之則失實甚多矣故玆改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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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여기에 이르자 목소리가 더욱 우렁차고 눈빛은 번개처럼 번득였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꾸짖기를 “이토 히로부미의 죄는 위로 하늘까지 이르니,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대한의 황제를 폐위시킨 것이 이와 같고, 우리 대한국의 독립을 무너뜨린 것이 이와 같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것이 이와 같다. 또 옛날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모의도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주관하였고, 귀국의 선황제(先皇帝, 孝明帝)를…….”라고 하였다. 마나베가 듣고 크게 놀라 안색을 잃고 급히 손을 휘저으며 중지시키고, 또 방청객을 퇴장시켰기 때문에 그 말의 끝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선황제라고 말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시해를 실행했다는 말이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0년(경신년) > 3월 >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아이누(Ainu)註 053족은 유럽의 백인종이 나중에 동쪽으로 이주해온 종이다. (7) 아이누 족은 일본 중부와 조선에 살았던 황인종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23rd. Tuesday. Gloomy-chilly.
Lunch at Y.M.C.A. Dr. Hardlicker's remarks continued. (6) The Ainu race is a later emigration to the East from the common white race in Europe. (7) The Ainu race was conquered by the yellow brown people who peopled central Japan from Korea.
『震光』 제4 · 5호 합간(중국어본)(1935년 11월호)
일본의 東京 · 武藏은 고대 백제 · 신라 · 가락인들이 처음 개척한 곳이다. 오늘날까지도 이곳에는 高麗村 · 聖天院 · 高麗王碑 · 狹山勝樂寺 · 山口觀音鐘 · 白鬚神社 등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적지 않다. 백수신사는 고대 이 지역을 개척했던 우리 선인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向島 · 西介原 등 고려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백 수십 곳에 산재해 있다. 志木 · 白子와 같은 지명 역시 우리의 선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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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병영계록(忠淸兵營啓錄)○순조(純祖) / 순조(純祖) 19년(1819)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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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개탁
구함(具銜) 신 조운구(趙雲衢)
비인현(庇仁縣) 마량진(馬梁鎭)에 표도(漂到)한 이양선(異樣船)을 문정(問情)한 연유는 전에 이미 연속하여 치계하였습니다. 이달 17일 유시(酉時)에 도부(到付)한 수군우후(水軍虞候) 최화남(崔華男), 비인 현감(庇仁縣監) 윤영규(尹永圭), 마량진 첨사(馬梁鎭僉使) 이동형(李東馨)의 연보(聯報)에, “경역관이 내려온 연유는 어제 이미 첩보(牒報)하였습니다. 경역관(京譯官)의 수본(手本) 한 통을 아래에 개록하여 첩보하고 표인(漂人)의 물건은 성책(成冊)하여 올려 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표선(漂船)을 전후로 문정한 것에 비록 논할 만한 의단(疑端)이 없기는 하지만 이미 변정(邊情)에 관계된 중대한 일이니 문정에 대한 보고를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데, 13일 술시(戌時)에 성첩(成貼)한 보고가 17일에 신의 영(營)에 도부한 것은 일의 체모를 생각해보건대 매우 놀라우므로 이것은 엄하게 과치(科治)할 계획입니다. 경역관이 보고한 집물 성책은 남김없이 모조리 상세히 갖추고 있으므로, 다시 성책하여 비변사(備邊司)와 병조에 올려 보내고 연유를 치계하오니 잘 아뢰어 주소서.
가경 24년 7월 17일
비직(卑職)이 7월 초8일에 하직한 뒤 그대로 출발하여 12일 신시(申時)쯤 공청도(公淸道) 비인현(庇仁縣) 마량진 앞바다 표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수군우후(水軍虞候) 최화남(崔華男), 비인 현감(庇仁縣監) 윤영규(尹永圭), 마량진 첨사(馬梁鎭僉使) 이동형(李東馨)과 함께 문정하니 과연 일본국 살마주(薩摩州)에 사는 일고여일우위문의병(日高與一尤衛門義柄)ㆍ천상언십랑친결(川上彦十郞親訣)ㆍ안전희등태의방(安田喜藤太義方) 등 3인이 중(中) 3인과 하(下) 19인을 거느리고 문화(文化) 14년 정축년 살마주에 속하는 영량부도(永良部島)에 순찰(順察)하고 문정(文政) 2년 기묘년(1819) 후직(後職)과 교대하고 살마주로 돌아가기 위해 6월 14일 영량부도를 나와 선상(船上)에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같은 달 21일 낮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갑자기 동풍(東風)을 만나 서방으로 표류하고, 23일에 또 폭풍을 만나 오미시(午未時)에 돛대가 부러지고 노 역시 손상되어 부러지고, 24일에 바람이 조금 멎을 듯하고 파도가 잠시 그쳐 25일에 돛대와 노를 임시로 만들고 오미방(午未方)으로 항해하다가 초3일 새벽 귀국에 표도(漂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선형(船形)을 상세히 살펴보니 앞은 뾰족하고 뒤는 넓어 모양이 마치 귀선(龜船) 같고, 본판(本板)의 길이는 9파(把), 본판의 너비는 1파 3장(掌), 좌우 삼판(杉板)은 각 11도리(道里)이고, 선상(船上) 양쪽 가장자리를 장식한 것은 격자창 같은 것이었고, 안칸은 청판(廳板 마룻바닥에 깔아 놓은 널빤지)을 촘촘히 깔았으며, 앞칸은 초둔(草芚)으로 덮고, 뒤칸은 판목(板木)으로 덮었습니다. 범석(帆席)은 갑백목(甲白木)으로 만들었는데 가는 노끈〔細繩〕을 사용하여 촘촘히 꿰맸으며 철정(鐵釘) 4개를 배의 양쪽 옆으로 내려 배를 고정시켜 두었습니다.
표왜(漂倭) 등 25인의 생김새와 차림새, 나이와 거주지와 선중(船中)에 실려 있는 미속(米粟)의 수효, 각 항의 물건은 수군우후(水軍虞候) 최화남(崔華男), 지방관 윤영규(尹永圭), 본진 첨사 이동형(李東馨)이 한 첫 번째의 문정과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문정하며 의사를 교환하는 사이에 조가(朝家)의 덕의(德意)를 선포하니 저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저희들이 만리 풍파(風波)에 사생(死生)을 넘나들다가 귀국에 도착하여 이 잔명(殘命)이 모두 살 수 있었으니, 그 은혜 하늘처럼 높습니다.’라고 하고, 이어 손을 들어 찬축(攢祝)하였습니다. 돛대가 부러져 나간 것과 치목(鴟木)이 손상되어 꺾인 것은 적실(的實)하고 의심스러운 점이 없습니다. 공문(公文)에 대해서 물어보니 본래 관선(官船)으로서 공문은 지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정할 때 저들이 고한 표류인의 거주지와 나이 등에 관한 일은 소상히 아래에 개록하겠습니다.
문정할 때 저들이 고하기를, ‘저희 배는 거친 파도와 폭풍에 손상을 입고 쇠못이 끊어지고 판자는 못쓰게 되었습니다. 관목(貫木)도 2촌쯤 벗어나 조수(潮水)가 스며드니 차마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모두 하륙(下陸)하기를 원하며 이런 손상된 배로는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고향〔故土〕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여부는 다만 귀국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비직이 답하기를, ‘손상된 부분을 보수(補修)해 주는 경우는 전에 간혹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여기지 않고 하륙하겠다고 하는 것은 약조(約條)를 어기는 일이다.’라는 내용으로 두왜(頭倭) 등에게 효유(曉諭)하였습니다.
비인 현감(庇仁縣監) 윤영규(尹永圭)와 마량진 첨사(馬梁鎭僉使) 이동형(李東馨)에게 수호(守護) 등의 일을 착실하게 신칙하였습니다. 배를 고치는 한 가지 문제가 실로 매우 걱정스럽지만 조가(朝家)에서 처분하기 전에 감히 마음대로 조치해서는 안 되기에 우선 여기에서 기다리며 거행하는 뜻을 아울러 수본(手本)합니다.
문:너희들이 대양(大洋)에서 표탕(漂盪)한 뒤에 병이 나지는 않았는가?
답:한 사람이 옴〔疥瘡〕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나았습니다.
문:돛대의 길이와 너비는 얼마나 되는가?
답:하단(下端) 4면(面)으로, 1면의 너비는 2척(尺) 5촌(寸)이고 길이는 13파(把) 3척입니다.
문:노〔楫〕의 길이와 너비는 얼마나 되는가?
답:길이는 5파이고 너비는 8척입니다.
문:닻줄〔纜索〕은 얼마나 되는가?
답:14장(張)으로 총 길이는 6백 파입니다.
문:쇠못은 얼마나 되는가?
답:본래 5개인데 그 중에 1개는 난풍(難風 항해하는 배의 진행을 방해하는 폭풍) 때 잃고 지금 4개가 있습니다.
문:교선(橋船)의 길이와 너비는 얼마나 되는가?
답:본판의 길이는 3파, 너비는 3장(掌) 반입니다.
문:교선이 무엇인가?
답:급수선(汲水船)입니다.
문:선중(船中)에 양미(粮米)는 얼마나 되는가?
답:65포(包)인데 그 안에 32포는 완미(完米 온전한 쌀)이고 33포는 수침미(水沈米)입니다. 십수두(十手斗)가 1포가 됩니다.
문:순찰직(順察職)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답:시비(是非)를 집결(執決)하고 농상(農商)을 권장하며 공물(貢物)에 힘쓰게 하는 것이 순찰직입니다.
문:문정(文政)이라는 연호(年號)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답:문화(文化)란 연호를 고쳐 문정이라 하였습니다.
문:교대(交代)란 무슨 말인가?
답:교체(交遞)한다는 말입니다.
문:살마주(薩摩州) 일도(一島)의 둘레는 얼마나 되는가?
답:3천 리 정도 됩니다.
문:인호(人戶)는 얼마나 되는가?
답:인호의 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노〔楫〕란 어떤 물건인가?
답:치목(鴟木)입니다.
문:너희들이 업(業)삼아 하는 일은 어떤 일인가?
답:농상(農商)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문:살마주(薩摩州)에 관원(官員)이 있는가?
답:있습니다.
문:속(粟)은 몇 포(包)인가?
답:7봉(封)입니다.
문:너희들은 호패(號牌)를 가지고 있는가?
답:호패를 차고 있지 않습니다.
문:왜 상(上) 3인은 환도(環刀)를 차고 있는데 그 나머지 22인은 차지 않았는가?
답:관직이 있는 자는 칼을 차지만 관직이 없는 자는 차지 않습니다.
문:생산물은 무엇인가?
답:미곡(米穀)과 어린(魚鱗)입니다.
문:선중(船中)의 현판(懸板)에 귀수환(龜壽丸)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무엇인가?
답:선호(船號)입니다
문:선중에 작은 불상 두 개가 있는데 무엇인가?
답:선중에서 신(神)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문:선중의 쌀이 썩고 상한 것이 많은데 어째서인가?
답:난풍(難風)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이와 같이 썩고 상하였습니다.
문:선중에 비록 양미(粮米)와 찬물(饌物)이 있다 하더라도 구차하여 곤란하지 않겠는가?
답:그런 점이 있습니다.
문:배를 고친 뒤 즉시 되돌아가겠는가?
답:한 시각 머물러 있는 것이 삼 년같이 길게 느껴집니다.
문:너희들의 성명과 나이, 거주지를 일일이 써서 보여라.
답:상(上) 3인, 중(中) 3인, 하(下) 19인입니다.
문:위문(衛門)이나 태랑(太郞)은 어찌하여 같은 이름이 많은가?
답:아이 때의 이름입니다.
저들의 모양(貌樣)과 생김새는 이마 위의 두발은 깎아버리고 다만 머리 뒤로 짧은 두발이 있는데 왜밀(倭蜜)을 발라 작은 상투를 지었습니다. 의복은, 바지와 버선은 착용하지 않고 다만 척포(尺包)를 사용하여 양 다리 사이를 가려서 감싸고 작은 띠로 묶었으며, 착용한 두루마기〔周衣〕는 푸른색ㆍ검정색ㆍ얼룩무늬〔靑黑斑〕 등 각가지 색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모양은 유의(襦衣)처럼 생겼는데 소매가 조금 둥글며, 길고 넓은 띠로 거듭 돌려 묶었는데 묶은 매듭은 뒤쪽에 있었습니다. 신발은 마치 묶지 않은 미투리처럼 생겼는데 발가락 사이에 거꾸로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비변사와 병조에 올려 보낸 성책
선상 집물….............................
표인(漂人)의 나이ㆍ거주지ㆍ용파(容疤)
일고여일우위문의병(日高與一尤衛門義柄) 25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천상언십랑친결(川上彦十郞親訣) 28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안전희등태의방(安田喜藤太義方) 3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즙공(楫公) 송원감우위문(松元勘右衛門) 4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유야중조(猶野仲助) 20세. 얼굴 얽었고 수염 나기 시작하고 정수리 위에 검은 사마귀〔黑痣〕가 있고 몸은 작음.
길촌선지극(吉村善之亟) 19세. 얼굴 얽었고 수염과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이상은 살마주(薩摩州) 서아도(庶兒島)에 거주.
곁꾼(格軍 배에서 노를 젓는 사람. 격인(格人)ㆍ선격(船格)) 정우위문(政右衛門) 5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선조(仙助) 30세. 얼굴 얽었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장차랑(庄次郞) 18세. 얼굴 검고 수염 없고 흉터는 눈썹 사이에 검은 사마귀가 있고 몸은 작음.
낭장차랑(郞長次郞) 18세. 얼굴 검고 수염 없고 흉터는 가슴 위에 창흔(瘡痕)이 있고 몸은 중간.
이상은 살마주 하변군(河邊郡) 추목(秋目)에 거주.
각병위(覺兵衛) 35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장일(長一) 34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이상은 살마주 영성군(穎姓郡)에 거주.
삼사랑(三四郞) 4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이조(利助) 30세. 얼굴 얽었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이상은 살마주 지각군(知覺郡)에 거주.
여병위(與兵衛) 51세. 얼굴 검고 수염 없고 흉터는 입술 위에 흰 사마귀가 있고, 몸은
이상은 살마주 지숙군(指宿郡)에 거주.
안태랑(安太郞) 31세. 얼굴 얽었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후차우위문(後次右衛門) 6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권우위문(權右衛門) 25세. 얼굴 검고 수염 나기 시작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평조(平助) 28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는 눈썹 위에 작고 검은 사마귀가 있고 몸은 작음.
삼조(三助) 40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중우위문(中右衛門) 28세. 얼굴 검고 수염 깎았고 흉터 없고 몸은 중간.
전우위문(田右衛門) 18세. 얼굴 검고 수염 났고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차랑(次郞) 13세. 얼굴 검고 수염과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산조(山助) 15세. 얼굴 검고 수염 없고 흉터는 이마 위에 창흔이 있고 몸은 작음.
정우위문(政右衛門) 18세. 얼굴 검고 수염 없고 흉터 없고 몸은 작음.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