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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
말씀; 창1:28
제목: 창조와 문화운동
창조문화운동에 대해 우리가 지속적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창조, 타락, 회복 의 관점에서 말씀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오늘은 회복의 부분에서 창조명령과 문화명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좀 더 창조문화운동을 구체화해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교사적 사명자로서 우리의 삶의 일터에서도 사명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계속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이원화시켜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교회와 세상은 따로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반드시 세상을 향해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운 목적도 교회가 생명이 풍성하며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게 되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번 주에 기본적인 일터의 사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문화명령은 무슨 뜻이며, 창조명령은 무슨 뜻인가를 세부적으로 알아보고 우리가 창조와 문화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첫째 문화 명령입니다.
문화(文化, culture)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이나 재배였는데, 넓은 의미로 인류의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를 말하며, 좁은 의미로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문화의 근원을 창조주 하나님께 둡니다(참조 창1:1-2:25).
문화명령은 하나님을 위해서 땅을 통치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개발시키라는 명령입니다. 창세기 1:28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시니라’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 땅에 우리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목적을 두고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목적의식을 가지고 목적된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목적과 교회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왜요? 창조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왜곡되고 찌그러지고 부패해져가고 있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삶의 목적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이 땅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세상의 기준에 두며 세상의 원리와 방법에 따라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목적은 말씀을 따라 가는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세기 1-3절에서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 진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이 말씀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목적의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1:28절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문화명령과 창조명령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알버트 월터스는 문화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사역이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더불어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된 문화의 방향을 원래의 창조된 구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통하여 목적하셨던 인간의 문명화를 통한 문화의 발전 계획을 계속 진행 하여야한다.’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타락된 이 세상, 세상이 주도하며 세상이 이 땅을 이끌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만큼 인간이 창조를 파괴시키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부패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창조구조를 회복시킬 길을 여셨고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원래 창조된 구조로 회복시켜 나가는 일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버트 월터스 는 문화명령을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감당하여야 할 중요한 사명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후대에 와서 문화명령과 창조명령을 보안, 수정해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인들은 기독교문화를 주도해 가는 운동을 일으켜야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거짓말 안한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을 하는 자로 세워져야합니다.
예를 들어 엡4:25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참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체는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야합니다. 즉, 내가 나를 향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는데 내가 나를 대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참된 말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기독교문화의 주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28절‘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 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도적질 안 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의 전부가 아니라 도적질을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누어 질 것이 있게 열심을 일하여 부요한 자리에 가는 것, 나누어 주는 자리까지 가는 것, 이것이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의 주도성이라는 말입니다.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 속에 나오는 것이 더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더러운 것이 있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내 안에 더러운 것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내고 그 안에 선한 것을 넣어라 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전으로서 삶을 살며 임재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선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운동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컴퓨트하지 말라 오락하지 말라 싸우지 말라, 속이지 말라 담배피우지 말라’ 하는 간섭을 왜 합니까? 안 하면 다가 아니라 공부시간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안하는 것으로 인하여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기독교문화의 주도성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소개되어서 ‘이런 것 하지 말라’지만 적극적인 의미로는 ‘이것 하지 말고 올바른 길로 가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뜻입니다. 엣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그리고‘감사하는 말을 하라’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의 십자가 정신이고 문화의 정신이고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사람들은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조롱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늘 칭찬과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낙태를 반대합니다. 왜 반대합니까? 낙태가 죄다 이렇게 정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윤리를 올바로 세워야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윤리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왜 동성애를 반대합니까?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창조섭리를 거슬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윤리를 주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세워나가는 창조적 문화운동에 열심을 내어야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문화의 주도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독교 인들은 이런 것 안한다.’하는 것이 없습니다. 엣날에는 술, 담배를 안 한다, 이런 인식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술자리에서 기독교인이라 술 안마시겠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처다 보면서 너무 광신도 아니냐는 듯이 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반응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집사라 술을 먹지 안 는다’그러면 ‘아니 내가 아는 분들 중에 장로님도 술 잘 마셔’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문화운동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미국의 퀘이커교도들은 약속을 한다든지, 계약을 하면 절대 파기하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퀘이커교도라고 하면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도 약속을 반드시 지키며 정직을 주도해 나가는데 기독교인들의 사회적인 정직성을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창조명령입니다. 창조명령은 문화명령을 통해 실행된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창조적문화운동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사람의 창조와 함께 완결되었으며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를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계속진행하고 계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서 인간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으로 위임령을 통해 창조명령을 순종함으로 인해 창조세계가 유지되고 보전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창조사역은 문화명령을 통해 창조사역을 유지하고 보전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셔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임령을 통해, 이 세상의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운 성품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질서와 성실과 정직으로 이 위임령에 순종하는 삶의 과정이 바로 문화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버트는, 하나님의 창조가 육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창 1:28의 문화명령을 근거로 하는 문명의 발전을 위한 인간들의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속하였기에 지속적으로 유지, 보전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문화 활동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라는 의미에서, 알버트는 창세기 1장 28절을 창조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적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땅을 관리하며, 다스리는 위임령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부여받아, 즉 모든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본래의 선한 구조로 회복시키는 사명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는 말입니다.
알버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다시 시작된 문화변혁운동은 사람이 경영하는 하나님의 창조 영역에 속하여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문화명령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에 이 땅을 다스리라고 위임 권을 주신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인류의 타락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회복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죄로 말미암아 중단되다 시피 한 이 창조명령을 이어받아 창조 사역의 차원에서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아감으로서, 아담에게 맡겨졌던 원래의 사명대로 이 땅을 회복시키는 일들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살아가야합니다.
그리니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시 시작함으로서, 길들여지지 않은 기독교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원래의 창조 구조로 회복되도록,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야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창조세계를 보존 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주도적 문화운동을 실행하고 종국에는 천국의 백성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완성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명령의 실행에 의한 창조세계의 회복은 하늘과 새 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차원에서 문화명령에 순종하며 나가야합니다.
그러기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명령을 주도적으로 완성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명령에 따른 문화운동은 적은 것부터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꽁초를 버리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까 창조세계의 유지를 위해 덕을 끼치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우리가 분리수거를 잘 하고 주위를 깨끗지 하고 쓰레기를 줍고 하는 것은 창조명령을 위한 문화운동의 관점에서 이 일을 하게 되면 훨씬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와 가치는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명령에 동참하고 있는 자로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땅을 관리자로 재임용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에덴에서의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충족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수고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쉼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대위임령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분명해 지는데요, 이것은 복음 전파에 대한 지상 명령, 즉 대위임령(마 28:19~20)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어두운 세상, 즉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악 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부재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어야하는데 성령으로 거듭한 심령을 통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명령을 통해 우리가 문화명령을 수행함으로서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보전하는 것입니다. 그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 나타나는 에덴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여신 문화명령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3중직의 역할을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구조는 사회적 구조가 아니라 영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문화명령을 사회적 구조로 보면 사회정화는 하나의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것이 됩니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인간 중심의 바벨탑을 쌓은 상황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역사적 과오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화명령을 영적 구조로 보면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이 직업이 우리의 삶의 터가 하나님이 보내셨고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기독교문화명령을 주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하는데 이 일을 위해 제사장, 선지자, 왕의 역할을 위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회복된 내적 구조는 오직 영적인 구조로 제한됩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또한 신자로서의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으로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통해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육과 번성은 지상 명령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 28:19-20)을 실행함으로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을 확장시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창조적 명령 회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말인데요, 이 창조적 명령의 수행을 위해 대위임을 받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교사적 사명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 말씀을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