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백 교수 추모의 글
1. 머리말
금년은 이기백 교수의 탄신 100주년이다. 선생님의 탄생은 역사학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어서 커다란 축복이다. 선생은 역사학자로서 비단 20세기 우리나라만의 불세출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추앙받을 만한 역사학자라고 믿는다. 선생은 민족을 사랑했고, 진리를 탐구함에 온 정열을 다 쏟으셨기 때문이다.
한복을 입은 선생의 모습은 마치 고고한 백학과도 같고, 잡념이 전혀 끼지 않은 청정한 인성을 느끼게 하고 카랑 카랑한 목소리는 변함없어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선생의 글은 물 흐르는듯하며, 논리 정연하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깊은 산정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적인 정열을 느끼게 한다.
이런 위대한 선생님 문하의 말석에서 대학원 강의를 받게 된 인연은 나에게는 엄청난 축복이고 행운이었으며, 또한 서강대학의 성실한 동료 학자들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갖게 하였다. 그 제자들은 선생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에서도 학적 태도를 배워 자신이 견지함으로 소위 ‘서강학파’라 할 수 있는 학문적 전통을 키우고 있다.
필자는 1975년에 서강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77년까지 3년간 수강하였다. 전북대학교에 재직 중이어서 금요일 하루만을 상경하여 수업을 받았다. 그런 관계로 선생님의 수업은 겨우 한 강좌를 들었다. 그런데 감히 문하생(문생)이라 칭하기에 스스로 민망함을 느낀다. 그러나 선생님으로부터 12책의 선생님의 논집("이기백한국사학논집")을 증정받았고, 선생님의 부름으로 도곡동 아파트에 들린 적도 있다. 특히 한국사학사연구를 주제로 삼은 본인에게는 선생님은 넘을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스승이시다.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 기념 추모문집에 변변찮은 글을 올리자니 79세에 돌아가심에 더욱 안타깝고 아쉬움을 느낀다.
선생은 한국사학사학회를 무척 소중하게 여기셨고, 학회창립총회에서 ‘한국사학사연구의 방향’이란 제목으로 창립기념 특강을 해주셨고, 본 학회 제9회 발표회에서는 한우근 교수를 모시도록 했는데 발표 직전 갑자기 돌아가심으로 이를 선생이 대신 채워주셨다. 이 내용은 <<한국사학사학보>> 제1집 ‘나의 역사 연구’ 란에 게재되었고, 또한 <<우리시대의 역사가>> 1에도 다시 실려 간행되었다.(한국사학사학회 편, <<우리시대의 역사가>> 1, 경인문화사간,2011) 또한 자신이 남기신 글인 「학문적 고투의 연속」(<<한국사시민강좌 >>제4집, 1989)은 선생이 학문외적으로 불편함을 당한 일이 실감나게 실려 있다.
선생님에 대한 연구는 제자 노용필 박사에 의해 이루어져 <<이기백한국사학기초연구>>라는 책으로 이미 출간되었고(2016. 일조각), 또한 노용필 박사의 주관 하에 선생님의 10주기 추모사업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는 <<이기백한국사학의 영향>>(한국사학 출간,2015)로 출간되었다.
선생님을 생전에 모셨던 한림대학의 김용선 교수가 중심이 되어 10주기 추모 자료집으로 <<민족과 진리를 찾아서-10주기 추모이기백사학 자료선집>>(김태욱외 편찬,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4)이 출간되었다. 또한 한림대학 제자들은 선생님의 수십년 전 이화여대에서 강의하신 강의안을 복원하여 <<이기백한국사학논집>> 제15로 (<<한국사학사론>>) 일조각에서 출간하였다.
위 추모자료선집에는 선생님이 항상 고민하신 <<한국사시민강좌>>에 책임편집자인 선생이 직접 쓴 ‘독자에게 드리는 글’ 30호까지를 실었고, 35집에는 2004년 3월에 써진 ‘한국사시민강좌를 떠나며‘라는 글을 남기고 2004년 10월 세상을 떠나셨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선생님의 임종을 알리는 마지막 유언 같다. 선생님은 자신의 사망을 미리 알고 유언을 남기신 선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선생님의 일대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자료이고 파란만장한 선생의 일대기는 가히 영화화해도 좋을 자료라고 할 수 있다.
2. 민족에 대한 사랑
선생은 일찍이 <<한국사시민강좌>> 제20집의 ‘독자에 드리는 글’(1997.2)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믿음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은 민족에 대한 사랑은 헛된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민족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고 역사학에서 ‘진리’란 무엇을 뜻하는 가를 우선 살필 필요가 있다. 선생이 태어난 일제시대에는 민족이란 개념에 비록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그 개념에 대해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이는 일제의 지배를 당하는 전 민족이 지칭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민족사의 발전과정을 연구함이 목표였고, 식민지배를 받은 상황에서 민족의 각성을 촉구함에 진력하였다.
선생의 역사학은 19세기의 민족주의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민족주의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선생의 역사관은 ‘열린 민족주의 역사관’이라 하였듯이 한국사 서술과 이해에서 배타적 관점을 벗어나려 하였고, 과거의 위대한 역사상을 고집하지 않았다. 역사해석에서 어느 한 가지 법칙이나 이론을 고집하지 않았다.
‘민족’에 대한 사랑은 선친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신채호의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과 함석헌의 <<성서의 입장에서 본 한국사>>’에서 가슴깊이 새겨진 용어가 되었다.(이기백, <학문적 고투의 연속>, <<한국사시민강좌>> 제4집, 1989).
따라서 선생은 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함을 자신의 임무로 굳게 생각했다. 이는 <<국사신론>>, <<한국사신론>>으로 나타났다. 이 책의 서장은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일제 식민주의 사관을 논리적으로 타파함에 노력했다, 그리고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근대 역사관의 비판을 거쳐 역사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살펴야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 내지 배타적 민족주의 사학도 비판하였다. 선생이 생전에 자신의 논저를 사학논집으로 재정리하였는데 제1집부터 제4집까지가 근대의 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사론이었다. 이는 한국근대사학사논집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의 민족에 대한 사랑은 민족이 형성되어가는 과정보다는 현재의 민족의 상황, 그리고 민족문화, 민족의 전통을 앞으로 발전시킴에 관심이 더욱 집중되었다.
3. 진리에 대한 믿음
선생이 즐겨 쓴 ‘진리’라 함은 무엇일가?
역사학이란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 점에서 그 개념이 들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학문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은 ’사실‘이라고도 하였다. 역사학에서 과거의 사실은 실증에 의해 밝히는 것이고 실증은 자료의 연결고리를 맞추는 해석 작업이라고도 했다. 이런 역사학의 해석을 위해서는 적용하는 여러 가지 법칙이 있다고 했다. 역사학에서 법칙이란 용어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느낌을 준다.
역사에서 법칙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음을 유물사관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론을 신봉하는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과학이라고 주장하고 합법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생은 유물사관론자들이 형식적인 틀로 역사를 일반화하려 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사학에서도 ‘법칙’이란 말을 자주 언급한 것은 유물사관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에서 반사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의 법칙 적용에는 다원적이라고도 했다. 역사학이론으로 선생은 서양사와 동양사를 연구하는 교수들의 이론 설명을 존중했고, 비교역사학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선생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현재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다고 하였다. 선생이 추구한 이상적 국가는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다. 선생의 역사학에 대한 최초의 총평은 차하순 교수의 ‘여석과 그의 역사세계’이다.(<<한국사시민강좌>> 50. 2012. 일조각. 참조)
4. 역사 연구에 기여한 점
선생은 역사 중에서도 사상사 분야를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전문적 연구서는 논집 제5책에서 제9책까지이고 제 10책이 한국사신론이다. 선생의 연구대상은 고대와 고려사회에 관한 연구이다. 이런 전문적 연구는 논외로 하고 선생의 역사학 연구의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논집 제12책은 ‘한국의 고전’이란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대한 논설과 고려사 병지 역주가 실려 있다. 삼국유사에 대한 논문은 한국사학사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 병지 역주의 서문은 강진철 교수가 썼는데 이는 고려사 연구자 강진철, 김성준, 이우성, 이기백 4인이 ‘고려사읽기’ 모임을 매주 6년간 했다는 말이 우리에게 큰 충격적인 감격을 준다. 이에는 젊은 후배들도 참여하게 했다. 공동연구의 실상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민현구, ‘이기백 선생의 학술 봉사활동’ <<한국사시민강좌>> 50, 역사학 산책, 2012. 일조각. 참조)
4.1. 20세기 한국사학사 연구의 제1인자.
선생이 지금까지의 역사학을 사학사적으로 비판한 업적은 <<이기백사학논집>> 1,2,3.4 즉 제1책의 <<민족과 역사>>, 제2책의 <<한국사학의 방향>>, 제3책의 <<한국사상의 재구성>>, 제4책의 <<한국고대사론>>을 들 수 있다. 선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관과 최남선의 역사학을 비판함에서 출발하여 20세기에 있었던 역사학을 비판하는 사론을 썼다. 이는 선생의 역사관을 살피기 위한 제1의 자료이다. 선생의 사학사적 발전은 초기의 사학사 강의안을 옮긴 선생의 논집 15 <<한국사학사론>>은 이 문제까지 이르지 못했다.
4.2. 독특한 한국사 시대구분론
선생은 한국사신론에서 지배세력을 중심으로 시대구분을 시도했다. 이는 한국사의 4시대 구분론에 대한 반기를 들은 것이다. 이는 이미 한국사 개설서의 시대구분론을 검토한 논문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역사학회편 <<한국사시대구분론>> 1970. 논집 1에 재수록)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는 <<한국사신론>>에 적용되었다. 시대마다 지배세력이 교체 또는 확장되어 왔다고 했다. 이 개설서에는 한국사 각 분야의 연구 성과를 수렴하려고 무던히 애쓴 노력은 가위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선생의 분신이었다.
현대사의 지배세력으로 민중을 주목했으며, 민중을 계도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 <<한국사시민강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독자에게 드리는 글’을 직접 써서 각 호의 편집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했다. 그리고 선생의 주도 하에 편집했지만 후배 및 제자로 구성된 편집진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편집진은 유영익, 이기동, 민현구, 이태진, 홍승기 교수로서 학계의 대들보와 같은 연구자들이었다. 이는 선생이 35집에 책임편집의 임무를 손에서 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언급했다. 이는 전적으로 선생의 건강의 악화에 기인한 것이다. 편집진들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잇기 위해 계속하다가 50호로 종간되어 학계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선생이 <<한국사시민강좌>>를 편집하여 출간함에는 한국사 연구에서의 문제점을 다루어 이에 대한 역사이해를 대중에게 확산하도록 함과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시민에게 알리는 일, 그리고 역사학 방법으로 ‘역사학 강의’를 꾸려 이에 서양사 동양사의 대가의 글을 실음에 진력하여 민중에게 한국사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5. 맺음말
선생은 한국사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실천적 지성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선생은 단군신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국사편찬위원으로서 국회에 참석하여 인격적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고, 한국사의 국정교과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학회에 대한 약속도 철저히 지킨 점에서 주위의 학자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선생의 일생은 몸과 정신 양면으로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온통 바쳤다. 선생은 20세기 한국이 낳은 가장 대표적인 역사학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학의 수준을 한 단계 크게 높였다. 선생의 학문은 앞으로 더 깊이 연구되어야할 태산과 같다
첫댓글 이기백 교수는 1924년에 태어나셔 2004년에 돌아가셨다. 선생님에 대한 소개는 거의 필요없을 정도로 국내외에 잘 알려진 분이다. 천안공원의 묘소의 묘비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기백 교수 탄신 100주년 추모의 글'이지만, 이기백 교수의 학문과 한국사 발전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이라 생각된다. 잘 읽었습니다.
일여 선생! 감사합니다.
이기백교수님의 학문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실은 그의 <<한국사신론>>을 중심으로 어느 사학자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다가 낙암선생님의 글을 맞이하게 되어 반갑기도 합니다.
한국사학계에는 일찍이 식민사관이라는 말이 들려왔으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민족사관(주체사관)과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좀더 관심을 가지고 이기백교수의 사관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널리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와 건전한 사관이 요청된다고 믿으며 새롭게 일깨워주신 데 대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여담>> 박창화선생의 <<강역고>>와 민족사관은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궁금합니다. (청계산)